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험난한 시대에.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역사의 바퀴가 거꾸로 가고 있는지.

 

요즘은 기억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기억과 용서가 다른 개념임을, 용서는 해도 기억은 해야 함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까?

 

그 사람이 막 살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기억의 힘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을 해야 좋지 않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부처가 생각났다. 그의 전생담을 담은 책, "본생경"

 

부처처럼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현생을 막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러한 기억에 대해서 명심한다면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에 신중할 수밖에 없을텐데...

 

부처의 삶을, 그의 사상을 생각하면서, 그처럼 이렇게 기억을 한다면 정말 시공을 초월해 세상을 위해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요즘, 기억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들이 기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힘있는 사람들, 이 "본생담"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JATAKA

                 -出家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옛날 자신의 삶을 모두 기억하는 사나이.

 

오늘의 나는 옛날의 나,

옛날의 나,

,

앞날의 나.

 

시공간을 초월해

나를 세상에 보내고

보내, 마침내

영원에 이른 사나이.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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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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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이 책을 부른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읽기 교육을 하는 "함께 읽기는 힘이 세다"를 읽다가 보게 된 책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예전에 알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때 한겨레21에 연재된 내용을 대충은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그냥 뭐 기자들이 한 달 동안 일터에 가서 노동자 체험을 한 책이네 하고 만 기억이 있다.

 

7-80년대에는 '농활'이라고 하여 대학생들이 여름방학이 되면 농촌에 가서 농사 체험을 하고, 또 나름대로 농민들과 함께 공부하기도 하는 활동이 있었고, 농활과 상대적으로 '공활'이라고 하여 공장에 들어가 노동체험을 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하는 활동도 있었다.

 

이런 '공활'체험만이 아니라 아예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공장으로 들어간 대학생들도 많았다. 이들을 일러 학출이라고 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위장취업으로 공장에 들어가 노조를 만드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87민주화 투쟁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고, 그 때 들불처럼 노동조합이 생겨났고, 노동자들의 의식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이라는 한국노총에 상대가 되는 노동자 단체도 생겨났고...

 

그런데, 이와 반대로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던 많은 대학생들이 노동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제는 할 일을 다했다는 뜻이던가, 공장으로 들어갔던 많은 노동활동가들이 공장에서 나와 정치판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제는 학출이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학출이라고 할 필요도 없이 청년들의 실업이 심각해 지고 있는데도 노동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는 나라에서 모두들 노동현장으로 떠나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노동현장을 자의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으로 떠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노동현장은 열악하기 때문이고,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을 신성시 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배치되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사회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은 노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그들에게 노동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는데... 사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땅콩 회항' 사건만 하더라도, 아버지 잘 만나서 고생을 모르고, 노동현장의 힘듦에 대해서 한 번도 경험하지도,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니...

 

노동이 힘들다, 노동현장이 열악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한 번 경험한 것만 못하다고, 기자들이 그런 현장을 자신들이 직접 체험해서 그 결과를 기사로 내보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생생한 노동현장의 어려움이, 그 현장에서 죽도록 일을 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도대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하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은 노동이 생활이 아니라 생계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이 책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결국 기자들이 경험한 노동은 절대로 신성한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신성성은 책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고, 이들이 경험한 노동은, 이들이 만난 노동자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는, 아니 때우는,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는 그러한 일이었고, 사람들이었다.

 

이게 특정한 직업 이야기라고? 아니다. 이들이 어디에서 일했는지 책을 읽어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간다. 이들이 일한 곳은 우리가 주변에서 너무도 흔히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주변에서 늘 만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 추상적인 인식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기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이 구체적인 노동현장, 살아있는 노동자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음식점에서 일하기가 첫번째로 나온다. 음식점에서 일해봄으로써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 특히 여성들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으니, 고용한 사람에게 당하는 무시, 손님들에게 당하는 무시, 그리고 일을 마치고도 집에 들어가 다시 집안일을 해야 하는 고통이 잘 나타나 있다.

 

자영업자들도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더 많은 식당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겠지만, 크나큰 홀 서빙을 단 한 명이서 하게 하는 그런 식당일, 게다가 주인의 사적인 일까지 시키는 식당의 모습이 단지 특이한 모습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습이라니...

 

식당에 가서 재촉하지 말것, 느긋하게 기다려 줄 수 있을 것, 작지만 이것이 대안이라고 하니 그래, 거창한 사회구조 운운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엔 마트에서 일해보기, 마석 가구공단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해 보기, 난로 공장에서 일하기 등이 나오는데, 그 힘듦은 대동소이하다. 구구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데...

 

너무도 열악한 환경, 제대로 된 대우가 없는 점, 그들에게 주어지는 최저임금,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 책이 나온 지 4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최저임금은 어느 정도나 올랐을까? 이 때에 비해 채 2000원도 오르지 않았다.

 

선진국에 들어선다고 광고하면서도 생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최저임금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 책에도 나오는데, 전태일이 분신할 즈음에는 근로기준법이 최대의 조건이었다면, 지금은 근로기준법이 최소의 기본적 조건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에 맞추려는 노동현장도 꽤 있다고 하니.. 이래저래 없는 사람들 살기 힘든 세상이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대안은 없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하면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노동현장의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를 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노동현장이 보여주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자, 문제가 이것이다. 문제를 정확히 보라.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해결책은 우리 몫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

 

덧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 속에서는 '기본소득'이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기본소득이 있다면 이들의 노동은 생계를 떠나 생활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물론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예전에 근로기준법이 했던 역할을, 기본소득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더 많은 고민이, 실천이 필요하겠지. 지금 기본소득 문제를 정책으로 밀고나갈 정당이 있을까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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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이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동양사상이 꽃 피웠던 시절은 춘추전국시대다.

 

그만큼 세상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상도 많이 나왔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말로 하면 다양한 사상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는 말이 된다.

 

적어도 자신의 사상때문에 죽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이런 사상이 유교 사상이 집권층의 사상이 되면서, 다른 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 되면서 더이상 다양한 사상은 나오지 않게 된다.

 

다른 말을 하면 죽음에 이르는 세상에서 어떻게 다양한 사상이 발전하겠는가. 하다못해 유교에서도 주자학(성리학)만이 절대유일의 사상이 되고, 같은 유교임에도 양명학은 이단으로 취급받고 사문난적이라고 하여 목숨까지도 잃어야 하는 세상이 있었는데...

 

이런 일이 민주화 되었다는 현재에 일어날 줄이야. 물론 옛날 독재시대처럼 사상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사상을 펼칠 단체를 만들 자유를 박탈당하고 말았으니.

 

이를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국가의 존립에 위험을 주는 정당이라 해산을 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9명의 헌법재판관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우리 국민들이 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기껏 얻어낸 민주주의가 헌법재판소에 판결권을 넘겨주는 일이었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데...

 

정당은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 정당은 폭력으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집단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호소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집권하려는 목적을 지닌 단체다. 그렇게 배웠다. 그런 정당의 강령을 보고, 실천을 보고 국민들은 투표로써 그들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표명한다고 배웠다.

 

이런 정당이 해산되는 때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할 때다. 그 때 정당은 자연스레 해산되고 소멸된다.

 

그런데 달랑 9명의 헌법재판관이 정당 해산을 결정해 버렸다. 8대1로.

 

그들은 절대 권력이다. 그들이 판결하면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뭐 이의고 뭐고 없다. 그냥 최종심이다. 국민들이 행사해야 할 권력을 그들이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누가 뽑지? 국민이? 아니다.

 

이런 그들이 과연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그들의 판결이 국민의 뜻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말이 막힌 사회, 그 사회는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사회다. 같은 말을 하기 위해 모인 정당을 해산하는 나라에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기계인간이 될 뿐이다.

 

그러니 술만 마실밖에. 정말 술 권하는 사회다. 오래도 한참 오래된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가 떠오르는 시대가 되다니... 슬프다. 더불어 이청준의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가 생각난다.

 

또 얼마 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소문의 벽"도 생각나고.

 

이 편이냐 저 편이냐를 강요하는, 그래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사회.

 

아니지. 지금은 그래서는 안되지. 적어도 다양한 사상들이 함께 해야 하고, 그들의 사상을 국민들이 가감없이 받아들여 판단하게 해야지.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이들은 가만히 놔두어도 알아서 판단을 할텐데, 왜 이들의 판단을 다른 사람들, 그것도 달랑 9명에게 위임을 하냐고.

 

그 9명이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들이냐고. 공화국을 다스리는 철인, 그런 철인 정치는 플라톤 때나 하는 말 아니냐고. 우리 국민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즉, 중우)이냐고. 그래서 지금이 중우 정치 시대냐고... 아니지.

 

우리 국민들은 현명하다. 공화국은 국민들이 주인이다. 판단을 국민들이 해야 한다. 누구에게 국민들의 권한을 위임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우리는 플라톤이 말한 "국가"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이제 아무리 사회가 술을 권해도 술 속에 빠지지는 말아야겠다. 말을 막아버린 사회에서 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양한 말들이 춤추는 사회, 그런 사회... 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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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2-2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런 시대를 살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루브르와 오르세의 명화 산책 - 보티첼리에서 마티스까지 두 미술관의 소장 명화로 보는 서양미술 이야기
김영숙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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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여행을 떠난다.

 

직접 공간을 방문해 그림을 눈 앞에 두고 보는 여행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그림을 만나고,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여행이다.

 

최근에 많은 미술 관련 책들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내가 읽은 책들은 '새 발의 피'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프랑스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그림에 대한 이 책을 보면서 아직도 멀었구나, 정말 그림의 세계는 무궁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그림들도 두 박물관에 있는 모든 그림을 소개한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처음 보는 그림들이 나오니... 계속 그림 여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치솟는다.

 

루브르 박물관.

 

사실 좀 씁쓸한 마음이 드는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이 책에서도 말해지고 있는데, 그림 분야만 하더라도 다 보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드니...

 

쉴리관, 리슐리외관, 드농관 이렇게 셋이 있는데, 이 관들에 각 방들이 엄청 많다고 하니, 그림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만 해도 기가 죽는다. 그렇다고 씁쓸한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이 루브르에 있는 그림들 중에서 프랑스 작품도 있지만, 외국의 작품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고, 그림들 말고 다른 작품들은 프랑스가 제국주의였던 시절 약탈한 작품들이 많이 있으니, 과거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박물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서도 안되겠지만, 과거에 얽매여서도 안되니, 씁쓸한 마음은 이쯤에서 접고, 이 책은 유럽의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근대 그림까지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따라서 길을 잃기 쉬운 루브르에서 이 책의 흐름을 좇아 그림을 감상하면 유럽 근대 미술의 흐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 유파가 되었는지, 그 유파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인접해 있는 유파를 통해 비교하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안내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그림은 안다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들어오는 그림 앞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림과 마주보며 대화하는 시간, 그림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겠는가.

 

엄청나게 커다란 (루브르를 다 돌려면 장장 60여 킬로미터나 된다고 하니...) 루브르에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작품을 발견하는 즐거움, 그것 또한 그림 여행의 즐거움일 수 있지 않겠는가.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은 건축에서도 유명하다.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는. 과거와 현재, 산업문명과 예술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여기에는 프랑스의 현대 작품들이(인상파 전후)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 인상파 전후기 작품을 집중적으로 보려면 오르세 미술관을 가면 된다고 한다.

 

역시 우리에게 알려진 작품들도 꽤 있는 이 미술관은 굳이 순서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미술관의 안내 책자가 잘되어 있어 가서 직접 안내서를 참조해서 관람해도 된다고 하니 말이다.

 

책을 통해서 프랑스에 있는 두 미술관을 여행했는데, 그 여행은 지금까지 봐왔던 미술 관련 책들을 조금 더 구체화하는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직접 가서 보는 것만이야 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책을 통해서라도 본 그림들... 눈이 즐겁다.

 

또 조리있게 설명을 해주고 있어서 이해하기도 편하고, 나중에 프랑스에 가서 이 두 박물관에 들른다면 이 책을 읽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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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처럼 서러워서 작은숲 에세이 4
김성동 지음 / 작은숲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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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다. 서럽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서러워서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패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승자의 기록을 보면서 패자의 삶을 유추해내는 일, 그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현재를 알려면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역사는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록이란 살아남은 자들이 기록한 것들이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기 마련이니,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김성동은 소설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작품은 "만다라"다. 그 작품 하나라도 그는 우리나라 소설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그가 역사 쪽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현대사 아리랑"

 

근대 우리나라에서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사람을 다룬 책. 그 책을 읽으면서 참 서러웠다.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이번에 또 역사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그가 역사에 대해 쓴 책이 나왔다. 이건 무조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혹 기존에 아는 얘기들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현대사 아리랑"에서 그가 보여준 관점에 믿음이 가기에 구입해 읽기 시작.

 

읽으면서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다. 마음이 점점 서러워지는데, 정말 염불처럼 서러워지는데, 그런데도 책을 계속 읽게 된다.

 

여태까지 내가 알던 사실을 뒤집어주는 그의 역사에세이가 계속 글을 읽게 한다.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 패자로 전락한 사람들을 다시 역사에 불러오고 있는 작업을 한 것이다.

 

역사에서 단 몇 줄, 또는 그나마도 없거나, 있어서 곡해되고 있는 사람들을 현대에 불러온다. 불러와서 봐라, 이것이 이 사람들의 진면목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하여 그들이 당시 역사에서는 패자에 불과하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당당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그는 말한다.

 

이른바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승자들이 꾸려 가는 역사가 바로 오늘 이 현실인 것이라면, 역사의 패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패자의 남겨진 자식들은 말이다. 잘못된 역사를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인가? 마침내는 그리하여 '비단할아버지에 거적자손'이 되고 말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적어도 역사에서 밀려난 우리 할아버지들이 이루고자 하였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던지는 알아야 한다.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자 어떻게 움직이다가 어떻게 그리고 왜 쓰러지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의 진실만큼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자손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머리말'에서)

 

쓰라린 말이다. 역사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는 일. 그들이 비록 스러져갔을지언정,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고, 역사의 패자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는 승자들이 만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재는 승자와 패자의 만남과 다툼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온전히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승자만이 아닌 패자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를 온전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발판이 되는 책이다. 적어도 승자의 기록에 의해서 왜곡된 사람들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의 패자들을 보자.

 

백제 사람들, 특히 우리는 잊고 있지만 중국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궁예, 묘청, 신돈, 이징옥, 김개남, 김백선, 서장옥, 최서해, 남로당

 

이밖에도 이름 없는 농투산이들, 풀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거나 또는 역사에서 왜곡되거나 사라진 사람들이다. 이들을 현재로 다시 불러내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에 대해 이 책은 다시 알려주고 있다.

 

작가의 생각이겠지만 이벤트로 구입한 이 책의 속지에는 작가의 친필 사인(친필이겠지...)이 있다.

 

맹자가 한 말이라고 하는데...

 

군자유삼락이왕천하불여존언(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

(군자에겐 세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왕이 다스리는 천하는 이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 왕이 다스리는 사회가 아니다. 이름없는 풀과 같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들이 함박 웃으며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그런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비록 당시의 역사에서는 패자가 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꿈꾸었던 세상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야 할 우리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패자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니, 그만큼 이 책은 우리에게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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