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곳.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소에는 수많은 삶들이 거쳐간 역사가 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삶들이 겹쳐져 있는 곳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런 삶의 축적으로서의 장소를 서효인이 시로 썼다.


  장소가 시가 된다. 장소에는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지명이 아니다.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또 삶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장소다.


그런 장소에 대한 시들... 많은 지명이 나온다. 우리가 잘 아는 지명들만 꼽아도 여수, 이태원, 강화, 남해, 부평, 강릉, 목포, 인천, 진도, 평택, 서울, 구로, 안양, 나주, 안성,, 파주, 마산 영광, 철원 등등 많은 장소들이 나온다.


우리가 살아온 장소들. 또 조상들이 살아온, 미래 세대가 살아갈 장소들. 이 장소들에 얽힌 삶들. 그것을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 중 '진주'란 도시를 생각해 보자. 진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논개? 남강? 기생? 냉면?


이 모든 것이 진주란 도시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은 진주에서 백정을 떠올린다. 형평사 운동을 되살려낸다. 형평사를 불러오기 위해 돼지고기를 소환한다. 그렇게 시인은 '진주'란 장소에서 많은 것들을 불러낸다.


진주


  지난 주말에는 동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두 근을 떼서 먹었다. 수육용이요, 비계는 싫어요, 했을 뿐인데 돌인지 고기인지 알 수 없는 돼지가 몸을 털었다. 이번 주말에는 기차를 타고 진주에 갔다. 옆자리에는 지난번 그 정육점 주인이 탄 것 같은데 그때 감히 따지지 못했던 고객으로서의 품위와 권리 같은 것이 떠올라 백정처럼 분해지는 것이다. 진주에 도착할 때까지 분한 마음으로 졸다가, 창밖을 보다가 했다. 왜 질긴 돼지고기를 성토하지 못한단 말인가. 졸리지도 않으면서 눈꺼풀을 닫은 채 진주에 닿았다. 작년 여름에 누구는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다 보기 좋게 실패했다. 돼지고기에 술추렴하며 몸을 털었다. 진주에 도착하니 남강이 보이고 강에서 부드러운 비계 같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정육점 주인이 날아가고 없다. 어디 갔지? 어디 갔노? 흩어지고 없다. 질긴 고기처럼 입을 다물고 동덩이처럼 자리에 앉아서 전화고 받고 서류도 쓰고 했다. 문득 관광객의  품위와 권리가 떠올라 남강에 몸을 비추어보았다. 때는 1923년이었다. 진주 남강에는 백정들이 모여 운동 단체를 만들었고 그것을 형평사라 했다. 비닐봉지에 든 고기 두 근이 바스락 소리를 내었고,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 몸을 털었다.


서효인, 여수.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2쇄. 100-101쪽.


형평사 운동은 성공했을까? 백정 자식과는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는 그 완고한 사람들이 있던 시대에... 그들은 평등을 외쳤는데, 21세기에 와서 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단결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노조 결성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또는 노조를 만들어도 무력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돼지고기에서 시작하여, 진주, 노동조합, 백정들의 단체인 형평사까지... '진주'에 얽힌 이런 삶들을 시인은 우리에게 풀어내 주고 있다.


그렇담 내가 살고 있는 장소는 어떤 삶들이 얽혀있을까? 문득 살펴보고 싶어진다. 지금 내 삶이 그 장소에 얽힌 삶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런 생각을 들게 한 것만으로도 이 시집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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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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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읽는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없다. 그냥 소설을 따라가면 된다. 한편 한편이 모두 그렇다. 하지만 읽고 나면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한다. 그런 힘이 있는 소설들이다.


SF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라는 노래 가사가 제목이 된 소설도 있으니, 사랑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사랑이야기. 그렇다. 소설은 모두 사랑이야기다. 어떤 사랑을 다루느냐에 따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과 사건이 다 달라질 뿐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인공물 등등,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다룬다. 소설의 인물이 꼭 인간이 아니어도 되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고전소설인 [토끼전]을 읽으면서 '우화소설'이라는 말을 쓰지만, 아마도 'SF소설'이라는 말이 이미 있었다면 우화소설이라는 말과 함께 SF소설이라는 말도 함께 썼을 테다.


그만큼 요즘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읽어가면서 아, 이 소설집은 SF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물과 배경, 사건들에서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SF소설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소설집의 끝부분에서.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이런 정의를 SF소설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다고 본다. 모든 소설이 이렇지 아니한가.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 슬립이나 루프를 다루는 소설, 인간과 비슷한 로봇이 등장하는 소설,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 복제를 다루는 소설,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루는 소설, 우주를 탐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소설,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사건을 경험하는 소설(SF를 사변 소설이라고 봤을 때) 대체 역사를 전개해보는 소설 등 종류는 다양하다. 장르 작가는 이러한 세부 장르를 선택하여 장르의 규칙을 지키되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반복-장르에 충실한 독자가 읽었을 때 대번에 어떤 세부 장르인지 알 수 있다-과 변주-러나 뻔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를 통해 장르의 규칙은 재확인되고 동시에 장르의 경계는 확장된다.' (281-282쪽)


그렇다면 이 소설집에는 어떤 소설들이 실렸을까? 최근에 SF소설가로 김초엽과 천선란 작품들을 읽었는데,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이번 기회에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유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김서해, 폴터가이스트

김초엽,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설재인, 미림 한 스푼

천선란, 뼈의 기록


첫번째 소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감정 전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에 몸을 고치는 성형이야 일반화되어,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 수술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이를 감정에까지 확대하면 어떨까?


내게 쓸모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감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이해준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효과를 거두는 일 아닐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감정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는가? 고통 받는 감정을 수술로 없앨 수 있다면 누구나 할까? 그렇다면 그렇게 빼나간 감정의 빈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소설은 이 점을 추구한가?


성형부작용이 있듯이, 감정 전이 부작용도 분명 있을터. 부작용? 과연 그것만을 걱정해야 하는가? 감정을 남에게 전이한다. 자신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 보고, 그 감정의 문제들을 받아들이며,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술로 없애버린다. 그리고 필요한 감정을 돈으로 사면 된다.


좋은 세상일까? 이런 세상에서 과연 제대로 된 관계가 유지될까? 관계를 맺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수많은 과정들이 수술을 통해서 단번에 해결된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과 다른 존재의 관계가 더 지속적이고 좋아질 수 있는가? 


어느날 상대가 싫어지면 그냥 수술로 지워버리면 되지 않나? 고통을 겪으면서, 지속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감정 또는 관계란 오히려 귀찮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인물이 감정 전이를 한 주인공에게 나타난다. 자,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 이는 디스토피아다. 감정마저도 돈으로 해결되는 사회라니... 인간들의 감정이 거세된, 그저 프로그래밍된 관계, 그런 삶일 뿐이다.


꼭 이렇게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자신이 힘들다고 그 감정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냥 자신의 마음만 편하면 된다고. 그러면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감정만이 아니라 몸을 고치는 성형에 대해서도 생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이 소설과 대변되게 감정을 존중하는 로봇이 나온다. 빠로 '뼈의 기록'이다. 장의사로 일하는 로봇. 그 로봇은 사람의 마지막을 보내주는 일을 한다. 최선을 다해서. 그렇지만 입력된 대로 하지는 않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미가 죽었을 때, 로봇은 모미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한다. 그간 맺어온 관계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화장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 로봇은 모미를 우주선에 태워 우주로 보내준다. 멀리 멀리 우주로 나아가게.


바로 이것이다. 감정 전이 수술과 다른 점이. 상대의 뼈에 새겨진(이를 마음에 새겨진 바람이라고 해도 좋겠다)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런 관계는자기가 싫다고 거부하지 않는다. 나를 중심에 놓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를 중심에 놓는 관계다. 이렇게 두 소설은 관계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나머지 세 소설도 결국은 관계의 문제다.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이 인정받았을 때 남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폴터가이스트', 다른 존재라서 완전히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가 자신의 로봇 정체성, 그리고 금속으로서 서서히 녹슬어가는 것을 추구하는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외계 생명체와 지구 생명체 사이의 폭력, 지구 생명체 사이의 폭력을 다루고 있는 '미림 한 스푼'


관계다. 상대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렇다면 다른 소리에 의해서 파멸에 이르지 않게 되고(폴터가이스트), 다른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을 이상하게 보지도 않게 되며(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비록 낮고 어두운 공간에 있지만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미림 한 스푼) 된다.


이런 관계는 무엇인가? 사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어떤지 보여주고 있다. 평탄한 삶만을 추구해서는 관계를 맺기 힘들다. 관계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다. 이런 소설을 읽는 일은. 가상의 공간, 시간, 인물들이 펼치는 사건들을 통해서 내 삶을 생각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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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오브 차이니즈 SF : 중국 여성 SF 걸작선
시우신위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아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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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여성이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성적 지향이 세칭 주류가 아닌 사람들이 쓴 소설이라고 하면 된다. 중국 작가들이 쓴 소설.


SF라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친숙하다. 서양 사람들이 쓴 SF가 주로 우주 공간과 외계 생명체들을 등장시키고 있다면, 이번 소설집은 그러한 외계생명체와 우주 공간도 나오기는 하지만, 고전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 배경들이 등장한다.


마치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알려진 [금오신화]를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그것을 괴력난신 이야기라고 했지만, 괴력난신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이성이 인식할 수 없는 수준의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니까, 이것이 SF와 통하지 않을까 한다.


많은 소설이 실려 있는데, 중국의 신화, 전설이나 문화를 알면 더 잘 이해되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작품들을 읽으면 SF소설이 아니라 고전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니...


그림이 지닌 주술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도 있으며, 주술을 통해서 현대의 환난을 피하는 내용도 있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두 편 있는데, 결말이 상반된다. 하나는 음식의 맛을 간직하는 쪽이라면, 하나는 음식으로 인해서 사람이 죽어가는 쪽이니, 음식점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작품들 중에 [아가야, 아가야, 난 널 사랑해]라는 작품.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아기를 낳는 일이 힘들고, 키우는 일이 더 힘드니, 점점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홀로그램으로 아이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


자신이 창조한 아이와 실제 아이의 차이. 과연 무엇일까? 편리함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라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그것이 인간의 삶일까?


이 소설은 홀로그램 아이와 실제 아이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를 살펴보면서 살수록 인공물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집은 광활한 우주 이야기,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런 내용보다는, 우리 고전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을 만나볼 수 있는 소설집이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SF소설의 다양한 면을 만날 수 있는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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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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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들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 말에는 공동체는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개인은 있지만 사회는 없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아니다. 각자도생의 사회는 어쩌면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일 것이다.


내 삶을 공동체가 보살펴주지 않는데, 어떻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 아닌 남들은 모두 내 삶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하여 우리는 복지제도를 통해서 각자도생의 사회를 극복하려고 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내가 모든 것을 만들고 쓰고 할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므로,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나아가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 복지제도가 만들어졌고, 한 사람의 삶을 그 사람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최소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런 제도.


각자도생의 문제는 이렇게 풀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은 각자도생이 아니다. 각자도사다. 세상에 죽음만큼 개인적인 어디 있을까 싶은데,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각자도사의 사회라니...


죽음에 이르러서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죽음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더라도 죽을 때는 홀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죽음이 홀로 겪어야 하는 일일까? 이 책은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누가 돌봄을 책임졌는가? 아니 누구에게 돌봄을 전가했는가? 그런 돌봄을 하는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돌봄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은 또 어떤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해지는 온갖 치료들이 과연 사람답게 죽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또 노인들을 사회 부담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이 바람직한가?


수치로,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늙은 세대는 늘어나, 젊은 세대의 부양 부담이 가중된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부양해야 할 덤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1부는 이런 노인들의 죽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의학적 치료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환자와 보호자, 의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또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섬뜩하기도 하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1부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부 각자 알아서 살고, 각자 알아서 죽는 사회

집, 노인 돌봄, 커뮤니티 케어, 호스피스, 콧줄, 말기 의료결정, 안락사


'집'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집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누가 돌보겠는가? 노인 돌봄과 커뮤니티 케어가 대두가 되는데, 이 책에서 노인 돌봄이 생명 유지와 연결이 되어 '콧줄'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존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묻고 있다. 그러니 '말기 의료결정과 안락사'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사회가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쪽으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과 비슷한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커뮤니타 케어'를 들고 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한다.


그냥 노인이 집에 있으면서 방문하는 의료진이나 돌봄 노동자들에게 돌봄을 받는 것으로는 '커뮤니티 케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스피스'와 같이 치료가 아닌 돌봄이 이루어지는 곳이 더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데, 이도 쉽지 않는 일이다. 호스피스와 관련해서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작정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하는 호스피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 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74쪽)


이런 1부에 이어 


2부 보편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상상하다

제사, 무연고자, 현충원, 코로나19, 웰다잉, 냉동 인간, 영화관


을 통해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제사 풍경이 바뀌어야 하고, 다양한 죽음들을 이야기하면서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되는데...


죽음에도 차별이 있었음을 명심하고, 그런 차별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각자도사 사회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우리가 함께 하는, 그런 실질적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고 이야기 하는 듯하다.


다만 이 책의 1부가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면 2부는 좀 약한 감이 있다. 1부에서 의사들이 지닌 문제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요즘 의사 정원 확충과 관련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는 글들도 꽤 있다.


죽음과 의료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므로... 하여간 각자도생의 사회도 각자도사의 사회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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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평범하다는 것, 두드러지지 않다는 얘기인데, 두드러지지 않다는 말은 곧 사회에서 어떤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통한다.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제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질문을 하면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물 흐르듯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물이 흐르는 것을 막는 댐, 보를 설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물 흐르듯 산다는 말이 행복한 삶과 연결이 되겠는가.


지리산 주변에 골프장, 케이블카가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겨들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멍청이들'(75쪽)


이번 호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예술가 케테 콜비츠 이야기가 있다. 아들과 손자를 전쟁에 잃은 케테 콜비츠. 약자들과 연대하고, 약자들이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예술로 보여줬던 작가, 케테 콜비츠.


그에 관한 글(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을 읽으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는 모 정치인이 생각났다. 힘에 의한 평화, 그래서 나치가 평화를 유지했던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힘으로 인해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정치인들로 인해서 평화가 오는가? 오히려 긴장과 불안... 케테 콜비츠는 이런 상황을 이미 자신의 예술로 보여줬는데, 과거에서, 예술에서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다 나도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정부 예산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맞다. 정부 예산이 우리 세금이지. 그렇다면 정부 예산은 우리 돈인데... 왜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여할 수가 없지 하는 문제의식.


<2024년 정부 예산, 656.9조 원 속 노동자>라는 글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금은 내가 낸 돈이다. 내게도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어디에 쓸지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정부나 국회가 전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많은 돈에 내가 돈은 일부라고? 허어, 돈의 액수로 따지면 안 된다. 돈의 출처,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그러면 국민 개개인은 세금의 주인이다. 주인이니 주인답게 세금을 쓰는 용처, 즉 정부 예산에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게 지나친 발상일까 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힘든 현대에,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단체를 통해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디인가. 세금을 쓰는 일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단 얘기잖은가. 


'남아공 헌법은 정부예산안을 이중적으로 한다. 하나는 행정부가 마련하는 예산안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예산위원회가 만드는 예산안이다. 민중예산위원회는 남아공의 NGO, NPO,노동조합총연맹,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다. 공공재정이 담아야만 할 국민의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남아공에서는 이 두 가지 예산안이 마련되면, 서로 조정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에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20쪽)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 최근에 정부는 노조들에게 회계공시를 고용노동부의 노동조합회계공시시스템을 통해서 하라고 했다. 민간(그들이 말하는) 단체를 정부 시스템을 통해서 돈의 사용처를 공개하라고 한 것. 하지 않을 때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특히 하지 않는 단체는 기부금 공제를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민간 단체의 회계를 정부가 관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정부의 회계를 국민들이 관리해도 된다는 말이잖은가. 그러니 이 정책을 뒤집으면 바로 남아공에서 하는 예산안 조정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정부 스스로 국민들을 대변하는 민간단체들이 정부예산안을 짜는데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과 그것은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하니...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회계를 정부시스템을 통해서 공개한다. 그렇다면 정부예산, 즉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들의 권리인 정부예산안을 조정하는데,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라고.


그래야만 정부가 노동조합에 회계공시를 하라고 한 일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그런 정부가 되길 바란다고...


[삶이보이는창]13호(2023년 가을호)를 읽으면서, 내년 예산안을 그냥 넘길 게 아니라, 국회심의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계획하는 데서부터 국민들이 참여해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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