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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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우리나라 고등법원에서 위안부 피해 배상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2차소송 항소심이라고 하는데, 일본이 피해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상하다. 아직까지도 이런 재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재판 결과가 나왔음에도 일본은 배상을 하지 않고 있고, 일본이 해야 할 배상을 우리나라 정부가 기금을 걷어 보상을 하겠다고 하기도 하니, 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나라 정부도 책임이 있다. 비록 이 정부 들어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조선을 잇는 나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배상을 하는 것과 달리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아내려는 노력을 정부가 해야 한다. 피해당사자들, 또는 시민사회단체에 맡길 일이 아니다. 정부가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은 책임 방기라고 할 수 있다. 미래 운운하면서 과거를 지우는 일을 하려는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재판부가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게 한다. 정부가 일본 정부에 배상을 하라고 할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 모르쇠로 나올 테고, 우리나라 정부 역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럴 때 김숨의 소설을 읽었다. [한 명]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들이 한명 한명 돌아가시고, 이제 한 명만 남은 상황. 그런 상황이라는 뉴스를 본 할머니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등록된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위안부의 피해 상황을 증언할, 피해배상을 청구할 분들이 없어져,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비록 정부에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을 수 있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할머니.


할머니는 한 명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게 된다.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온갖 험한 일을 겪었던 자신의 삶. 자신의 이름을 잃고 일본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그곳을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던 그 시절을.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지만, 자신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살아온 세월들. 지우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고, 잊으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 참혹한 과거들을 현재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할머니.


최후로 남은 한 명을 만나러 가면서 소설은 끝난다. 그렇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한 명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역사의 증언은 끝나지 않는다. 한 명은 또 다른 한 명이 나타남으로써 역사의 증언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명 속에는 우리 역사가, 수많은 위안부들의 삶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한 명은 한 명이 아니다. 위안부 모두가 되고, 우리 역사가 된다. 우리가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되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과거의 비극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풍길이라는, 소설의 끝부분에서 한 명을 만나러 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할머니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는 결코 한 명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책임을 묻게 된다. 아무리 책임을 회피하려 해도 회피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과거를 묻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소리는 말이 안 된다. 과거는 미래로 가기 위한 발판이다. 결코 과거를 지워서는 안 된다. 과거는 미래가 실현되었던 현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한 명]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과 더불어 영화 [귀향]을 보면 좋겠다. 이 소설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 영화 [귀향]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 여기에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에서 발간한 [6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기다림]도 읽으면 좋다.


60년, 이제 70년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기다리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다림의 의지조차도 일본 정부가 아니라 우리 정부가 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한 명의 사람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한 명은 한 명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 그 일을 겪었던 모두가 된다. 소설 역시 우리 역사의 일부가 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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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시집이다.


  1회부터 10회 수상자의 수장작과 대표시를 모아놓았다.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는 시인들... 상을 받아서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시세계를 갖추고 있던 시인들이다.


  그래도 불교문학상이니, 불교에서 말하는 무엇과 통하는 것이 있으리라.


  무량하다는 말을 찾아보면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라고 되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불교는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음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헤아리지 아니함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는데, 무량한 소리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리라니... 소리가 없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스님들은 간혹 묵언 수행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부처는 수많은 말을 했지만 그 말들은 진리로 향해 가는 수단일 뿐, 말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그래서 말보다는 행동, 또는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헤아리는 과정을 중시했다는 생각도 하는데, 시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시도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함축이니 비유니 할 것 없이 시는 다른 어떤 글보다도 짧다. 그 짧음 속에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무량한 소리라는 것은 많은 소리가 아니다. 한 소리에 담긴 수많은 소리라는 뜻이리라. 즉 하나에 담긴 여럿이라는 의미. 하나가 전체가 되는 모습. 그러한 시들이 아마도 현대불교문학상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물의를 일으킨 모 시인을 제외하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좋다. 이미 알고 있는 시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시집을 읽으면서 시들에 담긴 많은 뜻을 생각하게 된다.


불교가 속세를 벗어나서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부처 역시 속세를 벗어나 수행을 했지만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처음의 나가 아닌 깨우친 나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가 추구하는 모습이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에게만 속한 시가 아니라, 시인과 독자들이 함께 하는 시들이 사랑받는 시가 된다. 


그런 시들은 사회를 떠날 수도 없고, 또 사회를 떠난 시도 없다.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더라도, 그런 개인의 감정 역시 사회와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뭐, 도 닦는 소리는 그만하고, 지금 우리 사회를 떠올리는 시를 한 편 발견했다. 다른 시들도 좋지만, 이 시를 생각한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소위 지도층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있어서 문제지만...


제9회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한 이시영의 대표시라고 실린 시 중 하나다.


     비유의 시


횟집 주인은 일부러 수족관에 상어를 밀어 넣는다

다른 물고기들이 살해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성찰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동해 인근에도 제국의 전함은 유유히 떠 있을 것이다.

약소국들이 살해의 위협 속에서 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무량한 소리 -제 1-10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시집, 불교문예출판부. 2005년. 151쪽.


설마? 이런 깊은 뜻으로 정치를 하고 있지는 않겠지... 성찰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으로 몰고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시인의 시가 '비유의 시'가 되겠지. 


이 시 속에서 너무도 많은 소리들을 들을 수 있으니... 이런 식으로 이 시집에는 '무량한 소리들'이 실려 있다.


그냥 참고로 제1회부터 10회까지 수상한 시인의 이름을 적어본다. 


최동호, 나태주, 정현종, 고은, 최하림, 신경림, 이근배, 정희성, 이시영,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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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속의 영원 - 저항하고 꿈꾸고 연결하는 발명품, 책의 모험
이레네 바예호 지음, 이경민 옮김 / 반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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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생물이 아니다. 그러나 생물처럼 존재한다. 아니 책은 생물이다. 살아 있다. 책을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또한 책을 죽이려는 사회 역시 생명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책은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생명력을 유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 책은 책의 역사이자 책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 대한 책이라고 해야 할까? 알렉산더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력으로.


하지만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사람은 없다.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세계를 정복할 수가 있다. 책에게는 한계가 없다. 시간의 한계도 공간의 한계도 언어의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렉산더는 세계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세계화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헬레니즘이라는 이름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도 알렉산더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책에 관한 알렉산더의 기여다. 그는 전쟁 중에도 '일리아스'를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고 한다. 자신을 아킬레우스에 비유하면서.


단지 알렉산더가 책을 읽었다는 것에서 그의 공헌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책에 대한 그의 공헌은 그가 죽은 뒤에 나왔다. 바로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책들, 다양한 언어로 쓰였던 책들을 한 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지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사를 하고 번역을 한다.


책을 통해 세계가 교류하기 시작한다. 국제화, 세계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도 있다. 책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도서관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자신들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도서관을 파괴해도 모든 책을 파괴할 순 없다. 또 책을 읽지 말란다고, 책을 불태우라고 해도 몇몇은 책을 구출한다. 그리고 그 책들은 후대로 전해진다.


즉,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책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왔다. 저자는 '멸종위기 책'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역사를 통해서 책은 멸종위기에 처한 적이 많았다.


저자가 들고 있는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나라 [훈민정음]을 생각해 보면 된다. [훈민정음] 책이 발견되지 전에 한글 창제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억설들이 있었던가. 분명 창제한 사람과 창제한 시기 그리고 출판을 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연산군 때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글로 꾸준히 창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야말로 멸종위기 책이 바로 [훈민정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식적으로는 단 두 권만이 살아남았다. 그나마 한 권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단 한 권만이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책의 모험이다. [훈민정음] 책은 바닥을 까는 재료로, 화장실의 휴지로, 벽지로 쓰이면서 사라져 갔을 것이다. 눈 밝은 누군가가 발견하고 보관하기까지는.


왕조실록을 무려 4곳에 보관하던 조선 사람들이 [훈민정음]을 이렇게 도외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 이는 [훈민정음]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책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면서 살아남았다. 어떤 책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남았고, 어떤 책은 간신히 살아남아서 훨씬 뒤에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러한 책의 역사, 책의 모험을 만나게 된다. 과거와 현재의 많은 책들과 작가들이 종횡무진으로 나타난다. 책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이 날줄과 씨줄로 엮여 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책에 관한 이야기가 이 책을 이루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하는 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선례를 물려주었다. 인간의 평등, 지도자 선택의 가능성, 아이들에게 노동보다 교육이 낫다는 직감, 병자와 약자와 노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 등, 이 모든 발명은 고대의 발견, 즉 불확실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고전을 통해 가능했다. 책이 없었다면 우리 세계의 가장 좋은 것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507쪽)


그렇다. 지금은 e-북이라고 해서 디지털을 이용한 책들도 나오고 있지만, 책의 형태가 어떠했든 책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로 우리 곁에 책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 책을 읽으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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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1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지식은 날로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kinye91 2023-12-02 12:18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책으로인해 인류의 지식이 보존되고 계승되며 더욱 확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파랑 채집가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5
로이스 로리 지음, 김옥수 옮김 / 비룡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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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으로 태어난다.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있다.


장애인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죽게 내버려야 한다. 그것으로 끝이다.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그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지워진 시대. 권력자들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는 사회. 키라는 엄마를 잃는다. 엄마가 죽은 뒤, 키라의 집은 불태워졌으며, 키라는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런데 위원회에서 키라를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키라의 재주가 수놓고 염색하는 재주가 그들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해에 한 번 노래를 통해서 그들의 과거를 들려주는 행사를 하는데,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지팡이와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서, 파멸과 재건에 대해서.


그런 의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가 셋이 있다. 지팡이를 만드는 사람, 옷을 수선하는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


이들은 어릴 적에 가족을 잃고 불려와 살게 된다. 집에서 쫓겨나 죽음에 이르게 된 지경에 처한 키라는 위원회를 자신의 은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내면서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노래를 부르는 조는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오직 그들이 필요로 하는 노래만 연습하게 된다. 


목수 재질을 지닌 토마는 자기가 만들고 싶은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원회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 수리를 하게 된다. 어릴 적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영감이 떠나가는 것을 느끼는 토마.


키라 역시 마찬가지다. 수를 자신이 놓고 싶은, 손이 가는 대로 하지 못하고, 가수의 의상을 수선하는 일에 온 시간을 보내게 된다.


먹고 자고 지내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이들은 시키는 일을 하는 존재로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과 반대로 어린 아이인 맷은 자유롭게 생활한다. 얼핏 부랑아로 느껴질 정도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맷은 키라를 위해 파랑을 채집하기 위해 떠난다.


누구도 가지 말라고 했던 마을의 경계 너머로. 그 너머에서 맷은 키라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파랑을 가지고 온다. 키라가 살던 마을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파랑을.


그리고 키라는 어느 정도 진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을 깨달은 키라가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다.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아 진실을 알리고, 미래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키라. 그렇다. 회피하지 않는다. 비록 절름발이로 태어났지만 키라는 누구보다도 세상을 똑바로 걸어가려고 한다.


파랑 채집가라는 소설은 획일화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면서 주어진 대로만 하라고 하면 암울하다. 


적어도 노래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 키라와 토마는 이를 예술가라고 지칭했는데, 이런 예술가들에게 자유는 절대적이다.


자유를 빼앗긴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할 수 없다. 이는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키라가 목격한 가수의 쇠사슬은 자유를 잃은,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밖에 할 수 없는 예술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키라는 이를 거부한다.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 세상이 온전해 보이지만 겉으로 장애가 있는 자신보다도 더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옷을 통해서 미래를 바꿔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또 다른 존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있다. 존재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기준에 닿지 못하면 없애야 한다고 하는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잘 돌아가는 유토피아 같지만, 실상은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다.


권력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자신들의 치부를 꽁꽁 감추어둔다. 겉으로는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사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하지만 그렇다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무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부족함을 때우기 위해 아직 어린 아이들을 자신들의 수하로 거둬 이용하려 하지만,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들은 아직 왜곡된 시선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키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족함이 도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으로 인해서 다른 면에서는 넘쳐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어린 키라를 통해서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 또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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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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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그래, 이거였어.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친환경이라는 말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반환경적인 일들이 있는데, 디지털이 바로 그렇지 않나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직접 내뿜지도 않는다. 이산화탄소뿐만 아니라 디지털을 눈 앞에 두고서는 어떤 오염 물질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오염 물질이 나오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가? 우선 간단하게 살펴보자. 다른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디지털 기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만 보자.


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물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가? 옛날 구식 전화기보다, 또 벽돌폰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큰 핸드폰보다, 아주 작은 정말 스마트한 스마트폰이 다른 무엇보다 많은 원재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구식 전화기는 10가지 원재로면 된단다. 소위 벽돌폰은 29가지 원재료가, 스마트폰은 54가지의 원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307쪽. 부록2)


54가지의 원재료는 땅 속에 있는데, 이들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스마트하게 쓰는 스마트폰은 이미 그 자체로 환경에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에 빨리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케이블을 깔아야 한다. 인공위성을 통해서 통신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지금 세계는 바닷속에 광케이블을 깔아놓고 있다고 한다.


한두 나라가 아니고, 한두 곳이 아니고 대양 이곳저곳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다고 한다. 광케이블을 만드는 재료로 인한 환경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바닷속에 있는 광케이블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된다.


또한 스마트폰이나 다른 디지털 기기들을 사용한다면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데이터 창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부지만이 아니라 적절한 온도도 필요하다. 즉 뜨거움을 냉각시킬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 사용량이 어마어마하다. 세상에 우리가 쉽게 계산할 수 있는 1기가바이트를 예로 들자. 1기가 바이트면 영화 2시간짜리(아주 높은 고해상도의 영화는 2-3기가바이트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정도의 영화해상도라면 1기가바이트면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충분히 들어간다) 양이라고 하는데, 이에 필요한 물의 양이 10만 리터란다. 10만 리터? 감이 잘 안 온다.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대형 빗물 저장 탱크 1개에 맞먹는 양이란다.(310쪽. 부록5)


인터넷을 통해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대형 빗물 저장 탱크 1개에 채워진 물을 쓰는 것인데, 이보다 용량이 큰 행위들을 한다면? 데이터 센터에 필요한 물의 양은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이 점들만 생각해도 디지털은 자체로 환경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대로 디지털 문명을 계속 추구해야 할까? 한다... 해저에 광케이블을 설치하는 이유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막대한 투자비용이 들지만, 투자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을 이익을 남길 수 있다. 게다가 소비자들의 심리가 조금이라도 느린 인터넷은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5G로 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을 주로 어떻게 사용하는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고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파괴되는 환경재해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저자는 이렇게 디지털의 보이지 않는 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마트함 속에 감춰진 문제들을 들춰내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지금은 산업혁명 초기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할 수가 없다. 러다이트 운동도 실패하지 않았는가.


저자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디지털을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온 메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세속적임을, 디지털이 실제로는 우리를 본떠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합의에 의해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우리가 하는 만큼만 친환경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식량 자원과 에너지 자원을 낭비하기 좋아한다면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이러한 경향을 한층 심화시킬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한계를 넘어 지속 가능한 지구를 생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원자 군단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도구는 우리의 일상적 솔선수범(그것이 고귀한 것이든 명예옵지 못한 것이든)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그것은 우리가 미래 세대에 물려줄 유산을 증대시킬 것이다." (301쪽)


이 말은 결국 디지털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의 모습을 찾고, 그것을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과 공생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 과연 디지털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할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그것도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윤의 수단으로 디지털을 이용하고, 결국은 디지털로 인해서 우리들 삶이 종속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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