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생물 콘서트 - 바다 깊은 곳에서 펄떡이는 생명의 노래를 듣다
프라우케 바구쉐 지음, 배진아 옮김, 김종성 감수 / 흐름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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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라는 말과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바다는 생명의 시원이라고 한다. 물이 없다면 생명체가 없다고 하고, 바다는 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바다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다.


넓고 깊고 풍부한 바다. 그런 바다 속에 어떤 생명들이 살고 있을까? 이 책에서는 플랑크톤부터 시작해서 가장 크다는 대왕고래까지 많은 생명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심해에 사는 생명들까지 소개하고 있어서 바다 생명들의 다양함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마냥 평화로울 것 같은 바다 생명들의 세계, 하지만 이 세계에서도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관계들이 있고,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들도 있다. 모든 생명은 이렇게 연결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중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 관한 이야기. 이 영화가 바다 생물학자들에게 제대로 고증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 새로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니모는 흰동가리 종류의 물고기라고 하는데, 이 물고기는 가장 큰 물고기는 암컷이고, 그 다음으로 큰 물고기가 수컷이라고한다. 생식을 담당하는 수컷. (85쪽) 암컷이 죽으면 생식을 담당하는 수컷이 암컷이 되고, 그 다음 큰 물고기가 생식을 담당하는 수컷이 된다고 한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서 엄마가 죽었으니, 그 다음 전개는? 86-87쪽을 보면 18세 이상 관람가가 되었으리라 하는데... 엄마대신 아빠가 엄마가 되고, 니모는 아빠 역할을 하게 될 테니...


이렇게 바다 속 생명들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 못한 사실들이 많다. 상어 역시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하는데... 영화 '죠스'로 악명을 얻은 백상아리... 하지만 다른 면도 있다고 하는데, 이 책에 실린 이 구절, 참고할 만하다.


1916년 뉴저지 해변에서 발생한 공격 사건...다른 사람들은 백상아리 암컷이 공격의 주범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일련의 공격 사건은 1974년 소설가 피터 벤츨리가 소설 [죠스]를 집필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훗날 이 베스트셀러가 남긴 결과에 깊이 후회하게 된 작가는 그때부터 상어와 바다를 보호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소설이 출판된 지 불과 1년 후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 소설을 동명의 영화로 제작했다. 이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백상아리와 그 친족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연구자들은 인간에 대한 상어의 공격 중 다수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추측한다. 상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저 살짝 '시식'을 해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188-189쪽)


그럼에도 사람들은 상어, 특히 백상아리를 지금도 두려워한다. 영화로 인해서 머리 속에 들어온 공포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만큼 처음에 제기된 인상이 중요한데...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말소리가 안 들리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붕어냐?'고 하는데, 물고기들도 소리를 낸다고 한다. 바닷속이 아주 조용할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니... 여기에 바다 생물들에게도 병원 역할을 하는 곳이 있고, 치료 물고기도 있다고 하니...


생명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육지나 바다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바다 생명의 풍부함, 신비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읽으면서 바다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다 책 끝부분에 가면 인간의 문제로 돌아온다. 바다는 우리에게 공유지다. 그런 공유지를 함부로 대해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바다를 지키려는 노력도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상황.


자칫하면 이 공유지의 비극이 인류의 생존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의 보고를 인간이 깨뜨리고 있다는 현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바다를 지켜야 우리 생명을 지킬 수 있음을...


외계를 탐사하면서 외계 행성에 물이 있나 없나를 제일 먼저 파악하려고 하는데, 이는 물과 생명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이 가장 많은 바다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 공유지의 비극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여 이 책은 바다 생명의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것을 지키는 일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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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편집장의 글을 읽으면서 분류라는 말을 생각했다. 편집장의 말과 더불어 이번호에 실린 글들도 이런 '분류'를 생각하게 했고.


  분류. 나누고 모은다. 간단한 말이다. 그런데 '분=나누다'는 말이 앞에 있다. 모으기 위해서는 먼저 나누어야 한다. 나누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까?


  그렇다. 기준,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어떤 기준을 작동시킨다. 그 기준에 부합하면 모으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으지 않는다. 그래서 끼리끼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기준에 부합하는, 비슷한 존재들이 모이게 되니까.


이 분류에 끼지 못하면 배제된다. 분류는 모으다는 말도 있지만, 배제한다는 말도 포함하고 있다. 이에 속하지 않으면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분류가 참 무서울 때가 있다. 개인의 특성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분류, 집단의 속성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집단 속에 개인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리고 개인을 비난하는데, 이 집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집단을 이용해서 비난을 하면 개인이 반박하기 힘들어진다. 편집자의 말에서 어떤 비애를 느꼈는데,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비난하는 글이 실렸을 때, 그 비난은 집단을 향하고, 집단 속에 있는 개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반박하는 글을 실어도 이미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들기가 된다. 사람들은 비난에는 민감하지만, 비난을 반박하는 글에는 무심하다. 대체로 그렇다. 이렇게 분류 속에 이미 자신의 사고틀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류 기준을 바꾸는 일, 참 힘들지만 살면서 시도해야만 하는 일이다. '당신의 첫 번째 분류 기준은 무엇인가요?'라는 글을 보면 왜 그것이 첫 번째 기준이 되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체로 사람을 판단할 때 학벌, 지역, 성별. 신체조건 등을 첫 번째 기준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과연 그래야 할까? 다양한 기준을 함께 적용할 수는 없을까? 


이런 기준은 사람들 생각과 행동을 규정짓기도 한다. '당신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얼어붙는 거예요'라는 글에서 이 점을 알게 된다.


중년 남성 앞에서 말을 잘 못하던 사람. 왜? 자라오면서 겪은 일들이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 그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서서히 중년 남성 앞에서도 말을 잘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기준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활용, 재사용에 관한 일들도 마찬가지다. '당신 곁의 재사용'이라는 글을 보면 우리가 삶의 기준을 바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나를 이루는 것의 팔 할이 전기다'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생각없이 쓰는 전기에 대해서 기준을 한번 바꾸어 보는 삶. 그런 삶을 상상하고 실천한다면 어떨까?


[빅이슈]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노숙인들 이야기, 또는 집에 관한 아니면 젊은이들 취향의 글들이 실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이 역시 분류의 함정에 빠져 있는 셈이다. [빅이슈]는 이런 잡지야 하고 규정짓고, 그 규정 안에서 [빅이슈]를 만나려고만 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그런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기준을 통한 분류가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나누고 배제하는 역할도 하고 있음을. 그래서 때로는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준을 바꾸는 삶도 살아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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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07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님 덕분에 빅이슈 들어가봤는데 ˝당신곁의 재사용˝ 페이지 컬러감 넘 좋네요^^
일부러 구매해 읽거나 찾아보진 않겠지만 혹시 이 잡지 접하게 되면, kinye님 언급하신 꼭지는 꼼꼼하게 읽게 될 것 같습니다

kinye91 2022-08-07 19:24   좋아요 0 | URL
이 잡지 읽는 것 즐거워요. 직접 찾아서 읽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읽기 바랄게요.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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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양이다. 두꺼운 책. 손이 선뜻 가지 않는다. 하루에 300쪽씩을 읽어도 (사실 하루에 300쪽씩 읽기에는 벅차다) 이틀하고도 하루가 더 걸린다. 총 700쪽이다. 감사의 말까지 하면.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인용했고, 또 다루고 있는 책이라도 읽기에는 쉽지가 않다. 그것도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나같은 사람 말이다. 


경제쪽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경제쪽과 담을 쌓고 살았다는 말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말과도 통하는데, 특히 숫자가 많이 나오는 거의 수학 수준의 경제학 책은 멀리하고 살았다.) 그럼에도 경제는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하다. 내가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경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얼핏 책장을 넘기면 수많은 도표가 나오니 말이다. 그런데 그 도표들이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어라? 거의 백 년에 걸친 자료들을 분석한 이 책에서 비슷한 형태의 도표들이라니. 읽어보자는 마음이 인다.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도표들을 보며, 숫자보다는 좀 쉽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도표들은 세계 경제가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다는 뜻이니 우리나라에도 적용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고, 한때 왜 사람들이 피케티, 피케티 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읽기 시작. 여기에 피케티 자신도 '이 책은 경제학 못지 않게 역사에 관한 책이다'(47쪽. 서장)라고 말하고 있으니, 세계 경제의 역사를 한번 살펴본다는 마음으로 펼쳤다.


이 책을 보면 개별 국가들이 다 다들게 발전해 왔고,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이 다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책에 나온 표를 보면 액수에서는 차이가 날지라도 변해온 추이는 거의 비슷하다. 그렇다면 공통점이 있다는 뜻인데, 피케티 주장은 세계는 불평등한 쪽으로 발전해 왔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가? 많은 자료들을 도표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 도표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세계는 평등을 향해 왔다고 생각했고, 유례없는 평등의 시기가 요즘 아닌가 했는데,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피케티는 이를 몇 가지 등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불평등을 유발하는 등식은 자본 수익률(r)이 경제 성장률(g) 크다는 등식이다.(r>g) 이런 등식은 거의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즉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이 등식은 지속되어 왔으니, 양극화가 일어나고 점점 심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많은 경제학 용어들을 댈 필요가 없다. 자본이 수익을 얻는 비율이 경제가 성장하는 비율보다 높으면 자연스레 자본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즉 부익부 현상이 지속된다. 부익부가 되면 자연스레 상대적으로 빈익빈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 심화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불평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경제가 나아가야 한다. 피케티 주장도 이것이다.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피케티 방법은 두 방향에서 나온다. 하나는 정치, 즉 국가의 사회화다. 사회적 국가라고 하는데, 경제를 시장에 맡겨두는 방식으로는 불평등이 해소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앞선 등식에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 등식에서 평등을 지향하려면 자본소득자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선의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제도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국가가 되어야 한다. 즉 법과 정치가 함께 해야 한다. 경제학이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피케티 역시 이 말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는 결말 부분에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경제학을 위해'(692쪽)라고 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나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592쪽)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제를 법과 정치에서 분리하려는 강단 경제학자들이 많은데, 그런 식의 경제학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경제학자들도 사회학자들처럼 치열한 논쟁의 장에 참여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논쟁의 일환으로 그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사회적 국가론. 이는 민영화로 나아가는 현대의 흐름과는 배치된다. 민영화는 공공부분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이는 자본 소득을 더 늘리는 쪽으로 가게 될 뿐, 결코 공공의 부를 평등한 쪽으로 나누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교육, 의료 분야 등 사회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국가가 관장하는 사회적 국가. 사회적 불평들을 줄일 수 있는 기본적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적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 국가의 재정이 무엇으로 확보되는가? 세금이다. 그렇다면 세금을 어떻게 걷어야 하는가? 누진세율이 이야기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누진세는 국가의 재정 확보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금을 더 줄이겠다고 하는 지금 새겨보아야 할 주장이다.


다른 한 방법은 경제학적인 방법이다. 세금을 걷는 일. 누구에게? 자본소득을 얻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그는 자본소득세를 도입하자고 한다. 그것도 한 국가 내에서가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합하여.


그래야 명확한 소득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소득세를 걷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 소득세를 누진적 방법으로 걷는다면, 그것도 일회성이 아니라 해마다 걷는다면 소득 불평들이 더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만 그만큼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세 저항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세계가 통합해서 재산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재산을 은닉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경우에는 누진 자본소득세로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려는 노력이 효과가 없어진다.


하여 참 단순한 방법인데도 실현하기가 힘들다. 한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가 여기에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피케티는 경제학만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이 방대한 책을 통해 주장하는 일은 바로 사회학, 정치학 등과 결합한 경제학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이런 방법에 대해서 토론을 하자고 한다.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학자들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토론을 하고 방법을 강구하자고 주장한다.


피케티가 이 방대한 책을 쓴 이유는 그런 토론에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사실에 기반한 토론을 해야 하니 말이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그는 통계 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고, 이 통계자료에 의하면 세계는 불평등이 해소되는 방향이 아니라 심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니...


이렇듯 그의 책은 경제학 책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치경제학 책이라고 해야 한다. 사회를 좀더 평등한 쪽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자고 주장하는 책. 그가 제시한 방법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토론이 되고 있는지... 그의 제안이 진행 중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건, 너무 비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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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에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그냥 우리가 쓰는 말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다.


  이 시집 전체에 흐르는 마음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 상대에 대한 이해. 그렇게 시인은 사랑은 특별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감정임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에 대한 사랑, 그래서 이 시집에는 봄, 꽃에 대한 시가 많다. 봄은 새로운 시작이고, 따스함이고, 열려 있음이고, 희망이니, 청소년 시집에 봄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바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을 보면서 불안, 어둠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꽃은 희망이고, 즐거움이고, 아름다움이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을지라도, 언젠가는 꽃을 피우는, 저마다 자신의 꽃을 피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시집에 꽃이 많이 등장한다.


그렇게 시인은 자연과 사람, 또다른 동물들을 통해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시집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려움은 잠시 뒤로 미루고, 시집에서 전해오는 따스함, 편안함, 사랑을 느끼게 된다. 나태주 시인의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집 역시 '사랑'이 전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시집을 읽으면 마음이 봄에, 꽃에, 사랑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들 삶에 사랑이 넘쳐나게 된다.


시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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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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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를 아는가? 들어본 사람도 있겠지만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는? 아리아드네를 모르면 아리아드네의 실 또는 끈은 들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이들은 신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된다.


그만큼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적다. 있어도 금방 사라지거나 악역을 맡거나 한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꽤 있는데, 이 여성들은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부각시키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그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


오디세우스와 관련 있는 여성들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우선 그의 아내 페넬로페, 마녀로 나오는 키르케, 칼립소, 또 세이렌들, 그리고 나우시카.


이 중에 오디세우스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 있을까 이들은 모두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신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자리를 비켜주게 되는데...


아르고호를 타고 모험에 나선 사람들, 그 배의 선장인 이아손. 그리고 이아손을 도와 그가 황금양털을 가지고 가게 하는 메데이아. 그렇다. 메데이아는 이 장면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아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그와 함께 길을 떠난다.


마법이 힘을 지녔다고 나오고, 마법으로 이아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동생을 죽이고, 왕을 죽이고, 공주를 죽이고, 심지어 자식들까지 죽인 마녀로 낙인찍힌다.


이아손 신화에서 메데이아는 악녀로, 마녀로 나온다. 그보다 악독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모가 키르케라고 하고, 마법의 힘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과연 그럴까?


이아손은 메데이가가 없었다면 황금양털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내지 않는다. 메데이아는 쫓겨나고, 이아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왜 메데이아가 자의식이 강한,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한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이렇게 신화 속에서만 만나면, 그냥 그렇게 사악한 존재로 메데이아를 인식하고 만다. 다른 이야기는 없을까? 


이 소설이 바로 메데이아를 다른 관점에서 판단하고 썼다. 이아손과 메데이아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읽으면 그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어떻게 변형이 되었는지를 비교할 수 있다.


차이점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데... 작품은 철저하게 메데이아를 옹호하는 쪽으로, 당당한 삶의 주체로 서술하고 있다.


여성이 주체로 살아가는 모습을 참지 못하는 사회, 그 사회에 동조하는 세력들. 그런 세력들에 의해서 쫓겨나는 메데이아. 


그런 메데이아의 모습을 소설은 메데이아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이아손과 다른 인물들의 관점을 빌려서 이야기한다. 서술자로 '메데이아-이아손-아가메다-메데이아-아카마스-글라우케-로이콘-메데이아-이아손-로이콘-메데이아'가 나온다. 메데이아가 4번, 이아손이 2번, 로이콘이 2번 나온다. 이들이 서술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겠는데, 당연히 주인공인 메데이아가 제일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남성들에 의해서 메데이아가 악녀로 변해가는지를 서술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위해 다른 인물들, 즉 메데이아에게 호감을 지닌 인물 로이콘을 2번 등장시킨다. 자신이 메데이아를 구하지는 못하지만, 메데이아를 파멸시키는 역겨운 음모에 가담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


또 신화 속에서는 메데이아에게 살해당하는 쪽으로 나오는 글라우케 역시 메데이아에게 인정받는 처지로 나온다. 그리고 메데이아를 옹호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이런 인물들의 말을 통해서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가 있다. 신화와는 전혀 딴판인 메데이아를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악녀로 또는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 이야기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다 탄압을 받고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재탄생된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진 이야기의 이면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의 재구성을 통해서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은 메데이아 이야기의 재구성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 또는 전해내려온 이야기의 가려진 면, 보이지 않던 면을 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진실은 어쩌면 감춰진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강자의 언어가 살아남지만, 강자의 언어 속에 숨겨져 있는 약자의 언어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메데이아, 악녀로만 알고 있던 인물을 여러 목소리를 통해서 다른 면이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라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덧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가 미로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퇴치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끈을 이용해 나오는 방법을 알려준 크레타 섬의 공주다. 테세우스와 결혼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함께 가는 도중에 섬에 버려지게 된다. 디오니소스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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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07 1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변신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메데이야야 말로 잔혹하다는 생각 또 다시 했는데
이 소설을 먼저 읽었더라면 다른 관점에서 그녀를 볼 수도 있었겠어요...

kinye91 2022-08-07 19:25   좋아요 0 | URL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메데이아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메데이아는 너무 달라요. 먼저 변신이야기를 읽으셨다면 이 소설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