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머리는 지끈거리고, 날씨는 더욱 몸을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박성준 시집을 읽었다.


  '잘 모르는 사이' 


  현대인을 이렇게 표현하면 딱 맞겠단 생각을 하던 찰나에 수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반지하 사람들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그래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올라왔는데... 그 주인공들의 삶이 얼마나 신산한지, 고지대 넓은 잔디를 지니고 집에 윗층, 아래층, 지하까지 갖추고 사는 사람들과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삶의 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비가 쏟어지는 날, 하염없이 반지하 방으로 가던 내리막길... 인생이 그렇게 내리막길로 향하는구나 하면서 안타까워하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래도 그들은 살았는데... 이번 비로 인해 반지하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대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인데... 책임이 그들에게 있지 않고 우리 사회에 있는데... 누구는 비로 인해 침수가 되어도 '아, 이거 심각하구나'하는 말뿐일 때,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달린 침수가 되고 있는데, 그 거리를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멀다. 정말 멀다. 단순히 높고 낮은 곳에 산다는 차이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난하다는 문제를 넘어선다. 부유와 가난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공동체 아닌가. 그렇다면 가난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하지 않나.


옛날 최부잣집 가훈에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이 있었다는데, 한 개인도 그렇게 행동하는데, 나라를 책임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 재난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피해를, 가장 심한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하지 않나.


절대적 평등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되나? 하긴 법에는 그런 말들이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법 적용은 문구대로 된다. 그것이 평등일까? 요즘 평등과 공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자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공정한 제도일지, 무엇이 진정한 공정이고 평등일지, 과연 공정과 평등은 자유와 배척이 되는지...


비로 인해 박성준 시집에서 눈에 들어온 시가 있다. 제목이 살벌하다. '대학살'이다.   


대학살


  공정한 제도 속에서 공정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 공정하지 않던 날씨는 어김없이 비를 뿌렸다 장마였다 뻔뻔스럽게도 불변하는 것들은 요점 정리가 쉬웠고 그럴 만하겠다고 생각한 건강은 조합원들을 몸을 몹시 공격했다


  병은 본래 숨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근대적인 교육이 처음 이런 작업장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잊어버린 것들이 순해 보였다


  불이 꺼진다


  최후의 목적은 농성이 되었다


박성준, 잘 모르는 사이. 문학과지성사. 2016년. 79쪽


'대학살'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이 시집 제목이 된 '잘 모르는 사이'라는 말을 적용하고 싶어졌다.


잘 모르면 이것이 왜 대학살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죽어갔는지... 폭우가 쏟아지는 현장에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을 잘 모른다. 인식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를 낳고, 마음의 거리는 행동의 거리를 낳는다. 거리는 결국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다. 그렇게 모르는 사이로, 무심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사회는 공동체에서 멀어진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기계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관심을... 타인에 대한 공감을... 그래서 잘 모르는 사이라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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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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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읽을 때마다 실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페미니즘이 한 범주로만 정의될 수 없듯이 솔닛의 책도 그렇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말은, 사람이 지녀야 할 권리를 주장한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솔닛이 무지권(privelobliviousness)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보았듯이 (특권을 뜻하는 'privilege'와 무지 혹은 무심함을 뜻하는 'obliviousness'를 합한 말이라고 한다.특권 있는 사람, 재현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 실제로 자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241-242쪽) 이미 권리가 있는 쪽은 권리에 대해서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고, 이 침묵을 깨는 말하기가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에 실린 글이 '침묵의 짧은 역사'인데, 얼마나 많은 침묵들이 강요되어 왔는지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눈치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은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반대하는, 또는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난무하는 모습은 말할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고난을 겪고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꾸 같은(비슷한) 질문을 한다. 이것은 아직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단 태도다. 발언을 인정하지 않고 발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하는 질문들이다.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같은 질문이 계속될 때 피해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왜냐,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니까. 결국 같은 질문은 침묵의 강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이 '침묵의 짧은 역사'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짧은' 역사가 아니라 '긴' 역사일텐데, 솔닛이 짧은 역사라고 한 이유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할 역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했고, 침묵에서 발언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 '자이언트'로 끝맺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볼 때마다 영화에서 느끼는 점이 달라졌음을 이야기하면서, 솔닛은 영화 '자이언트'를 '거대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이 한 번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사람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규정해서도 안 됨을. 어느 범주에 사람을 가둬놓고, 그 범주 안에서만 판단해서는 안 됨을. 영화를 보면서 솔닛은 같은 영화임에도 볼 때마다 관심을 두는 주안점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만큼 영화에는 많은 요소가 담겨 있는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다양함이 사람들에게는 있다. 남성이라고 여성이라고 또는 백인이라고 흑인이라고 딱 규정지을 수 없다. 범주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해야 한다.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아왔던 존재들은 기존에 권력을 지고 있었던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있던 존재였다. 그리고 약자들은 범주 속에서 녹아들어버렸지, 개별성을 인정받지는 못했었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존재들이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솔닛은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범주 속에서 개별성을 인정한다면 같은 질문을 자꾸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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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9 0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권리가 있는 쪽에서는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없죠. 약자가 불편함과 권리를 주장해서 스스로 쟁취해야할 것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죠. 솔닛을 페미니스트의 범주에 넣기에는 그가 문제삼는 범주가 그보다 넓고 확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kinye91 2022-08-19 10:35   좋아요 2 | URL
맞아요, 어느 한 분야로 규정짓기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권리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들이 같은 질문을 많이 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둠 속의 희망 - 절망의 시대에 변화를 꿈꾸는 법, 개정판
리베카 솔닛 지음, 설준규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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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로 부시(아들)가 당선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에서 9.11테러 사건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고... 그럴 때 절망에 빠진다. 사람들은 부시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힘들어졌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공습하겠다고 했을 때 어둠은 더 짙어졌다. 그렇게 솔닛은 그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은 어둠이라고 했다. 어둠, 앞이 캄캄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즉,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에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 또 희망은 어둠 속에 있는 문이라고 했다. 어둠이라는 벽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물론 문을 열었다고 해서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는다. 또다른 어둠이 있을 수 있고, 또다시 벽을 짚으며 나아가야 한다. 희망이라는 문을 향해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어둠이다. 어둠은 포기가 아니다. 나아가게 한다. 어둠 속에 주저앉는 일. 그것이 바로 절망이다. 때문에 솔닛은 희망은 어둠이라고 한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동기를 주는.


그러므로 한번에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세상에 '헤라클레스'처럼 강물을 끌어와 마굿간을 한번에 청소할 수는 없다. 희망은 그런 마굿간을 치우는 일과 같다. 지난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치워야 한다. 혼자서만이 아니라 함께 치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깨끗해진 부분이 나온다.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더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 하는 역할이다.


솔닛은 이런 점에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해결책은 없다고 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그들의 연대를 통해서 해야 한다고 한다.


연대가 잘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벽을 짚으며 나아가지만, 문을 찾지 못할 때도 있지 않은가. 또 서로 부딪칠 때도 있고. 


이때 포기하면 안 된다. 자신의 방식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일. 그렇다.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 차이를 행동을 통해서 메워나가는 일. 그것이 바로 '어둠 속의 희망'이다.


이 책은 2001년 9.11사건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을, 아니 희망을 보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개정판을 내면서 그 뒤의 이야기들을 몇 편 실어서 아주 오래 전 이야기만은 아니다. 또 미국이 과연 2001년보다 많이 좋아졌는지, 그들이 희망의 문을 찾았는지 의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는 희망을 찾았는가. 어쩌면 우리도 솔닛의 이 책이 쓰여질 때와 비슷하게 어둠 속에 있지 않을까.


어둠 속에 있다면 이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희망으로 함께 행동해야 한다. 저건 아니야에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하자고 해야 한다. 자신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 행동하는 일, 어둠 속의 희망은 바로 이런 행동에서 나온다.


좀 지난 책 같지만, 아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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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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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앞에 '해방자'라는 말이 붙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방자를 썼다고 본다.


수많은 신데렐라 이야기가 있는데 또 하나의 이야기를 보태는 이유가 뭘까? 이야기는 시대와 상황에 맞게 변형이 된다. 변형된 이야기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신데렐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왕자에게 의존해서 잘 먹고 잘살았더라로 끝나는 이야기도 있지만, 굳이 신데렐라가 잘사는데 왕자와의 결혼이 필요할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결혼이 남녀의 동등한 결합이 아니라 한쪽에게 의존하는 결합이었던 시대와는 이야기가 달라져야 하니, 솔닛이 자신의 후대들에게 들려줄 신데렐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신데렐라 이야기는 나이가 든 아이들보다는 좀더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보다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아니면 그보다 좀더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경우가 많다. 한글을 익히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이야기로, 한글을 익힌 아이들에게는 책을 읽게...


솔닛이 쓴 이 해방자 신데렐라는 읽을 수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다. 물론 들려줘도 좋다. 그렇지만 읽게 하면 그림을 볼 수 있다.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그 이야기책을 찾아 읽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림책을 좋아한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글로 읽기도 하지만, 그림을 보면서 들은 내용을 떠올리기 때문에 아이들이 읽는 책에는 삽화가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실린 그림이나 사진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젠더 관점에서... 교과서 삽화에 대해서 다양한 비판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눈으로 본 그림, 사진들이 학생들에게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림도 중요하다.


솔닛이 다시 쓰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삽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런 점에서 당연하다. 솔닛은 고민을 하다가 아서 래컴의 그림을 보고 아, 이거다 했단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이 점까지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고 본다.


'실루엣을 이용했기 때문에 다른 이미지처럼 인종이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느껴지지 않습니다'(46쪽)

'래컴이 실루엣으로 그린 소녀의 기백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신데렐라는 누더기 옷을 입었지만 활기가 넘치고 씩씩하게 노동을 하고 진심을 다해 뛰어놉니다. 곤경에 처했지만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맞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하려면, 혹사와 모멸적 노동의 해결책이 왕자비가 되어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일을 안 하고 사는 것일 수는 없고, 대신 존엄을 지킬 수 있으며 스스로 하고 싶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47쪽) 


이 점이다. 솔닛이 쓴 내용에 걸맞는 그림이다. 당당하다. 그리고 활기차다. 또한 특정한 인종을 연상할 수가 없다. 실루엣만 나오기 때문에... 이 점이 좋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솔닛이 다시 쓴 신데렐라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신데렐라는 의붓언니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다. 의붓언니들 역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왕자 역시 궁궐에만 갇혀 지내지 않는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농부처럼 일을 하기도 하고, 신데렐라와 친구가 된다.


말로 변한 쥐들(도마뱀들)도 마찬가지다. 쥐(도마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 쥐들(도마뱀들)도 있지만, 자신은 계속 쥐(도마뱀)로 살겠다는 쥐(도마뱀)도 있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자신의 처지보다는 좋아 보이는 하나로 모두 달려가지 않는다. 신데렐라도 자신이 활동하기엔 화려한 옷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유리구두를 들고 찾아온 왕자. 시종을 시키지 않는다. 혼자 나와 직접 사람들에게 묻는다. 묻고 묻고, 신데렐라 집에 와 언니들이 신발을 신을 때 장면이 사라지지 않는다. 


보통은 구두가 작고, 언니들 발이 커서 간신히 발을 끼워넣으려고 애쓰는 장면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반대다. 구두는 크고, 언니들 발은 작다. 왜? 


'언니들의 발은 구두에 비해 너무 작았어. 종일 집에 앉아 있기만 하고 강가로 달려가거나 시장에서 장을 잔뜩 봐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오거나 하지 않으니 발이 튼튼하게 자라지를 못한 거야'(30쪽)


솔닛이 하고 싶은 말이 여기에 있다. 해방자 신데렐라라는 말을 이 표현에서 찾을 수가 있다. 활기차게 삶을 사는 일... 그런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일. 그것이 먼저 세상에 나와 살아가는 사람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해줘야 할 일.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이, 놀이가 사라진 생활이 아니라, 노동을, 놀이를 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그래야 유리구두의 당당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바로 세상의 평화다.


'신데렐라는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 전쟁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도 있게 되었어. 신데델라는 대모 요정은 아니지만 마법 능력이 없어도 해방자가 될 수 있었어. 해방자란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도록 돕는 사람이야.' (39-42쪽)


이렇게 신데렐라는 자신의 해방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해방을 돕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솔닛이 다시 쓴 신데렐라 이야기다.


역시 솔닛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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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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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자로서 우리나라가 지닌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는데, 가끔 이런 책을 읽으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런 말을 한다. 문제는 명확히 지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을 이야기해 달라는 사람이 많다고. 방법? 있다. 그런데 구체적이지 않다. 사회의 문제다.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이 정도? 


이러면 안 된다.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내용은 우리 사회는 집단을 중시하면서도 책임은 개인에게 묻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혼동하며 집단주의를 공동체의식과 혼동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다는 점. 그래서 집단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집단의 안녕을 해치는 행위를 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또 이 상황에서는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괜찮아 하면서 집단의 힘 속에 옳고 그름을 묻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남들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공연히 튈 필요없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집단의 움직임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바꿔 내 행동을 합리화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세상은 원래 그래 하면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니,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해결책은 찾지 않은 상태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으니, 저자는 그 점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다시 인식하게 해줬으니 말이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런 문제 행동을 하는 집단, 사람들과는 반대로,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고... 


자본주의 사회니까, 그들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하면 된다고...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행위 자체로도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그냥 손 놓고 있기보다는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고.


물론 집단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함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으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고 한다. 그것이 바로 후원이다. 지출의 방향을 바꾸면 되니.


'웃자고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회를 튼튼하게 하는 데 지출하지 않고 사회가 좋아지길 희망하는 건 모순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정치인들을 감시할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주면 결국 사회는 한 단계 성장한다. 내가 발 뻗고 잘 지름길이다' (272-273쪽).


이런 일부터 시작한다면 저자가 말한 '고통의 평준화 정신'(252쪽)으로부터 벋어날 수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야라고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나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도 힘들테니, 그 힘듦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지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삶을 꾸준히 성찰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고. 고통이 평준화 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고통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다들 힘드니까 견뎌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그러니 '고통의 평준화 정신'은 사라져야 한다. 고통은 평준화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일상으로 만든다. 고통의 일상화는 사람들을 집단 속에 가두게 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니 라는 말로.


하야 이 책은 이러한 '고통의 평준화 정신'을 버리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이 말부터 해야겠다. 그건 아닙니다라는 말부터.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라는 말도 할 수 있는 그런. 집단주의와 공동체주의를 혼동하지 않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뭉뚱그리지 않고 그렇게... 하나도 괜찮지 않은 세상에서 괜찮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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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5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 자주 하는데...^^;;
읽고 보니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할 순간이 많았네요.

kinye91 2022-08-15 10:43   좋아요 0 | URL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