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캔버스, 결국 틀이다. 그것을 찢었다는 말은 틀을 거부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이 책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사회적 통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왜 여자들일까? 사회적 통념을 깬 남자들도 있을텐데... 역사에서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남자들이다. 어떤 책을 보아도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그리고 사회적 통념이 주로 남성에 의해서 만들어졌기에, 그들은 통념을 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이미 기득권을 쥐고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 틀에서 벗어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익숙한 사회 환경에서 그냥 살아가면 된다. 반면에 남성에게 익숙한 환경이 여성에게는 너무도 낯선, 그런 환경 속에서 지내려면 남성보다는 몇 배의 노력을 더해도 익숙해지기 힘들다.


실력이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여성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통념이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제약이 많은데, 말로도 제약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데 많은 고난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틀을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틀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꽃 피우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틀을 깨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이다. 사람들이라는 표현대신 여자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은 제약을 받았고, 그들에게는 유독 캔버스 안이라는 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여자들은 남자의 이름을 빌려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자의 이름으로 작품을 냈을 때는 찬사를 받던 그림이, 똑같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고 밝힌 순간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었던 일들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데...


틀을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긴 스웨덴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는 너무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여성이 그럴 수 없다는 판단에서 죽은 지 약 300년 뒤에 무덤에서 나와 성별을 감정받았다고 하니, 여왕도 그러할진대 다른 여자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례들을 굳이 페미니즘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아직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이 성별이나 또는 자신의 성적 지향에 따라서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페미니즘은 여전히 필요하다.


미술과 관련해서 여성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또 그런 사회적 틀을 어떻게 깨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지, 그들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어떠했는지를 서술하는 이 책은 자연스레 페미니즘과 연결이 된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예술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을 이 책을 읽으면 실감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알려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 책을 읽으면 왜 페미니즘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표현된 모습을 부정하기는 힘들테니까.


그리고 그 그림들에 나온 모습이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을테니까. 그런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특히 여자에게는 얼마나 불평등한 것인지를 그림과 설명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순간순간 놓치고 있었던 모습을 이 책에서는 잘 포착해서 보여주고 있다.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대해서도, 둘의 관계가 평등할 수 있음을, 그림을 완성하는데 화가만이 아니라 모델로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을,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모델을 객체로 만들지 않고 그림을 완성하는 주체로 만드는 화가들이 바로 여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남성 화가들이 여성 모델들을 객체로 또는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는 도구로만 여겼던 경우가 많았음을, 그것이 문제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또한 성폭력에 관한 그림들, 그런 그림을 통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피해자다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기도 하고... 그림을 통해서 삶과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니, 여자든 남자든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지나 노, 지나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이란주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 살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아이들. 미등록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도 안 되어 있고, 그렇다고 외국인 등록증도 없는 아이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 부모가 출생신고를 할 수가 없다. 부모도 미등록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한때 불법체류자라고 불렸던. 아이 출생신고를 하러 갔다가 자신이 추방당할 수 있으니, 아이가 태어나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 있어도 없는 아이가 된 아이들. 태어나지 않았어도 어린 시절에 부모를 따라 들어왔지만, 등록이 되지 않아 역시 미등록인 아이들.


이 소설은 르포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 처한 현실이 이 소설에 너무도 잘 나타나 있다.


주인공인 로지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아이. 이슬람을 믿는 아이. 부모 역시 방글라데시에서 왔고, 우리나라에서는 미등록 노동자로 남았고, 그들 역시 이슬람을 믿는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 소설에서 로지나가 겪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은 할랄 제품이 제법 나온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할랄이라는 말조차 몰랐다. 게다가 이슬람이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는 사실, 그들은 라마단이라는 금식기간이 있고, 또 하루에 다섯 번은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이러니,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겪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 음식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알 수 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이슬람 율법에 맞게 도살한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러니 그 기준에 맞는 음식을 찾기가 힘들다.


로지나 역시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들어가서 겪게 되는 어려움 중에 친구들과의 관계나 학습을 따라가는 어려움보다는 바로 이런 음식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가장 크다.


먹을 음식이 별로 없는 상황.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는 상황. 돼지기름을 쓰거나, 돼지고기가 섞인 음식이 얼마나 많은가. 꼭 돼지고기만으로 만든 음식이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로지나는 나름대로 절충을 한다. 아빠가 소주를 마시듯이.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 이슬람을 배척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그럼에도 그들에게 호감을 지니고 함께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아마도 미등록이든 등록이든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선진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들은 우리나라에서 산 것이 아니라 일만 한 것이라고 하는 말에 가슴이 저려왔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고, 자본은 어느 나라든 가리지 않고 환영받으며 들어가는데, 노동자들에게는 국경이 있고, 어떤 노동자들은 환영받지 못하고 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고 있기도 하는데, 그런 불안한 생활조차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일만 하게 되는 현실. 


그러니 그들은 살았다고 할 수 없다고, 자신들은 일만 했다고 하는 장면에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로지나가 어린 시절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성년이 되기까지를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데, 로지나는 거의15년 이상을 우리나라에서 살았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빠, 엄마는 일하다 병을 얻고, 로지나 역시 고등학교를 마치지도 못하고 일을 할 수밖에 없고, 그 동생도 마찬가지다. 동생의 처지는 더하다. 로지나는 결국 엄마, 아빠와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지만,(로지나는 그래도 방글라데시 말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 동생은 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말을 하지 못하는 동생. 그는 방글라데시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다. 자신도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라면서 자신이 한국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가는 과정. 그 과정이 소설에서 로지나의 시각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는 방글라데시 사람도 될 수 없다.


이렇게 어느 나라 사람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다. 


자본이 국경이 없듯이 노동자에게도 국경이 없어야 한다. 적어도 그 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등록이냐, 미등록이냐로 불법 운운하지 말고, 그들로 인해서 한 나라 경제가 운용되고 있으니, 그들을 한 사람으로서, 동등한 노동자로서 받아들이고,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지닐 수 있게 해야 한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아이, 로지나, 그가 한국에서 겪은 일들을 소설 형식으로 쓴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등록이주 아동들의 현실을 생각하게 해준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그들도 사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조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소설은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용서는 아름답지 않다. 어떤 용서는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용서를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모든'이라는 말을 용서에 붙이면 안 된다.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나치 SS대원이 죽을 때가 되어서 유대인에게 자신이 한 행동을 용서해 줄 수 있느냐고 한다.


그 말은 들은 비젠탈은 침묵을 지키고 그 방에서 나온다. 그리고는 그 일이 마음에 남아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세월이 흐른 뒤에도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한다.


이 책은 그러한 비젠탈이 경험한 내용과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보내준 사람의 글을 모아놓았다. 자, 과연 용서를 할 수 있을까? 


학살에 가담한 행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이미 사람들은 학살당해 죽었는데, 그들은 용서를 할 수가 없는데... 또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실을 같은 유대인이라고 대표로 용서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독일인은 진정으로 참회했는가? 


다양한 논점에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정답은 없다. 상황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용서에 대한 개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글쎄 개인의 차원과 집단의 차원이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용서하지 못할 문제가 있다.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입은 피해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표로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있다.


비젠탈이 침묵을 지키고 용서를 하지 않은 일은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용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자신의 죽음에 임박해서 용서를 구하는 일은,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청준이 쓴 '벌레이야기'와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밀양'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용서의 문제... 누가 용서를 해줄 것인가? 당사자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다른 존재에게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존재에게 용서를 받기 전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참회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을 해야 한다. 용서를 받느냐 마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진정한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냥 해야 한다.


용서는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가해자의 행동을 보고 피해자가 결정할 문제다. 그것이 용서의 의미다. 그런데 가해자가 당사자도 아닌 그 집단의 일원인 한 사람을 제멋대로 대표로 설정해서 용서를 해달라고 한다?


그러면 안 된다. 이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 자기만족일 뿐이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는 비젠탈이 용서를 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젠탈 역시 유대인으로 희생자에 속하지만, 학살을 당한 사람들을 대표할 수는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나치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용서 운운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치 대원은 진정 참회를 했다면 유대인을 불러서는 안 됐다. 그들에게는 앗 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아무 유대인이나 불러달라고 한 그의 행동은, 아무 유대인이라는 말에 진정한 참회가 담겨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무 유대인이라니, 유대인들이 개개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이 개인 행동을 했다가는 사살당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유대인을 아무나 불러달라고 하다니...


그가 만약 유대인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을 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정 참회하려면 수용소장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유대인 중에서도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말을 듣는 유대인도 위험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런 절차, 행동을 하지 않고 무작정 아무 유대인이나 불러달라고 한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진정으로 참회했다고 할 수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 제목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에 대해서 아니다. 모든 용서는 아름답지 않다고 답하겠다. 어떤 용서는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수용하게 하기도 하니까. 또 어떤 용서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라 자기만족에 불과하기도 하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이 절규하면서 하는 말, 내가 용서를 안 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가 있지라는 말. 그렇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일이다. 가해자가 받고 싶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가해자는 자신이 잘못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행동해야만 한다. 피해자가 용서해주든 해주지 않든. 그것이 참회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용서를 언급하지 않는가. 너무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편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는가.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용서로 인해 악이 근절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용서를 구하기 전에 진정으로 참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고쳐야 한다. 그때서야 용서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 이것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2-09-07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는 이 책 읽다가 조금 남기고 중지중인것 같은데 리뷰 덕분에 완독의지를 다져 봅니다!ㅎ 즐거운 저녁시간되십시요!

kinye91 2022-09-07 2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2부에 실린 비젠탈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들이 여러 생각을 하게 해요. 그 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하라 2022-09-08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kinye91 2022-09-08 13:49   좋아요 1 | URL
이하라 님께서도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thkang1001 2022-09-08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kinye91 2022-09-08 15:19   좋아요 0 | URL
thkang1001 님께서도 즐겁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渼沙_常水 2023-02-27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은자가 죽은이를 대신하여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살아남은 유가족 으로서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용서를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만 입니다. 가해자는 잘못했다는 사과와 반성만을 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는것 자체가 이기심입니다.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kinye91 2023-02-27 15:55   좋아요 0 | URL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가해자는 사과와 반성만을 해야 한다는 말씀 요즘 더 새겨야 할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의 인간, 인류의 하나 김동식 소설집 6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읽었던 김동식 소설은 기발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발상이 특이했고, 내용의 전환도 예상하지 못하게 일어났고, 결말 역시 새롭단 느낌을 주었다.


결코 길지 않은 소설들. 그리고 일상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겪음직한 일들이 소설에 나왔는데...


이번 소설집은 좀 결이 다르다고 해야겠다. 기발한 발상이라기보다는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내용들이 소설로 쓰였다고나 할까.


책 제목이 된 소설 '하나의 인간, 인류의 하나'는 영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고... 물론 소설에서도 매트릭스를 언급하고 있으니, 읽는 사람은 두 작품을 연결지으면서 읽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더 연결고리를 찾으면 '장자'에 나오는 '호접몽'을 들 수 있다. 


꿈 속에서 나비를 쫓는 것이 장자인 내가 꾼 꿈이냐, 아니면 나비가 꾼 꿈이냐 하는, 그런 현실과 꿈이 명확히 구분이 안 되는 상태. 이 소설 '하나의 인간, 인류의 하나'는 바로 그런 상태를 소설로 썼다고 할 수 있다.


영원히 잠들어야 하는 사람, 절대로 깨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한 명 있고, 그 사람의 잠 속에서 인류가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내용 전개.


이 소설과 '스위치 하나로 바뀌는 내 세상'이라는 소설은 기존 김동식 소설의 틀을 따라가는, 상상으로 현실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나머지 소설들은 공포물이나 추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살인 사건이 이 소설집에 많이 등장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반전이 일어나게 만든 소설들이 많은데... 인간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지닌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평생 안 가지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면?'이라는 소설, 우리가 흔히 한 번쯤 생각해 본 문제 아닌가. 이런 질문은 당신이 무인도에 간다면 꼭 가져가고 싶은 물건 세 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통하는데...


사람이 안 먹고 살 수는 없는데, 평생 단 한 가지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음식을 선택할까? 평소 자신이 먹고 싶어했던 음식을 선택할까? 아니면 건강을 생각해서 선택을 할까? 아님 자신이 평소에 자주 먹던 음식을 선택할까?


소설은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질문이 실행이 되려면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 환경을 도박에 빠진 사람, 또는 돈이 꼭 필요해서 자신과 교환한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그렇다. 돈 또한 우리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니, 돈과 음식을 교환한다는 발상은 결국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라는 말과 같다.


돈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은 단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며 살아가려는 사람과 같다는 발상이라고 해야 할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음식을 선택하는데, 소설에서는 사람을 선택한 사람이 나온다.


사람을 선택했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람을 먹어야 하니, 결국 돈만 추구하다가는 사람을 죽이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포물을 겸비한 비현실적인 발상이지만, 그런 발상과 전개를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돈과 같은 한 가지에만 매달려서는 결국 자신도 제대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관계다. 그리고 관계는 자신이 만들어간다. 그렇게 관계를 만들어가지 않고 주어지기를 바라면 삶은 파탄이 날 수밖에 없다. '목격자'라는 소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래서 '스위치 하나로 바뀌는 내 세상'에서는 스위치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결국은 자신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끝에 실린 이 소설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들을 맺고, 다양함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런 다양함 속에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은 결국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그런 관계 맺기를 만들어주는 스위치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음을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본다. 자, 나도 마음 속 스위치를 내 스스로 작동시켜야겠다.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을 건너는 집 특서 청소년문학 17
김하연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은 자신이 살고 싶은 시기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시기란, 현재 겪는 어려움을 해결한 시기 또는 과거로 돌아가 해결할 수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아니고 현재가 만족스럽다면 현재를 택하면 된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시기를 택하겠는가? 가끔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니면 지금을 건너뛰고 미래로 간다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드는 생각이다. 이 소설은 그런 기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총 4명의 학생이 기회를 얻는다. 그들은 선택되었다. 선택된 이유는? 현재에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학생들이 기회를 얻었지만, 학교 밖 청소년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겪는 일이 비슷하고,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 한 명도 학교 밖 청소년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겪는 폭력의 피해.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상황. 가해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데 피해자가 오히려 못 견디고 학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또 죽음을 앞둔 엄마. 가족의 생활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 여기에 아들에게 관심이 없고 자신의 삶만을 추구하는 듯이 보이는 엄마를 둔 아이 등등.


소설은 이렇게 청소년들이 학교나 가정에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상정하고, 그들이 모여 함께 네 달을 지내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바라보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시간의 문이다.


12월 31일이 되면 현재-과거-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기회를 얻기 위해선 그들은 일주일에 세 번은 자신들의 눈에만 보이는 집(시간의 집)에 가야 한다. 그렇게 하면 12월 31일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최종 선택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왜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집에 와야 한다고 했을까? 그것은 다양한 청소년들이 서로 만나가면서 마음을 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다른 사람이 함께 지내다보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고,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네 명이 모두 집에 모이면 시간은 정지한다. 그리고 이들만의 시간이 펼쳐진다. 무엇을 해도 된다. 어차피 밖의 시간은 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 늘 네 명이 모일 수는 없다.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네 명이 며칠만에 신난다 하면서 함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이 짊어진 각자의 짐은 너무도 무겁다. 이 짐들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일주일에 세 번... 조금씩 만나가면서 투덜대면서, 갈등하면서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간다.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도 눈에 들어온다. 공감을 할 수 있는 마음이 열린다.


밖으로는 닫힌 시간이 안으로는 열린 시간이 된다. 이 열린 시간에 집에 모인 아이들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관계. 그런 관계가 청소년기에 필요함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 돌발적인 사건으로 한 명이 떨어져 나간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행동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연장선에 있는 행동이 사회에서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된 것이다. 그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인물. 조금씩 바뀌어 왔던 마음이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더 돌아보게 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비록 시간을 선택할 기회는 잃었지만. 


그리고 선택의 시간... 


남들에 의해 휘둘림을 당했던 인물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다. 편한 길이 아닌,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길을. 가장 모범적인 아이 역시 자신이 가는 시간을 선택하고... 각자 자신이 선택한다. 남들의 판단이 아닌 자신의 결심으로.


선택을 하면 이들이 함께 지낸 시간이 기억에서 지워진다고 한다. 잊혀질 것을 알면서도 만나는 관계. 머리 속에서는 잊혀지겠지만 마음 속에는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바로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살아온 과정을 모두 기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음 한 켠에 무언가가 남아 있어, 그것이 청소년들의 삶을 이끌어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인데, 이 소설에서 기억을 지운다는 의미는 바로 그렇게 받아들여도 좋겠다.


잊었지만 남아 있는 어떤 무엇. 또 누군가에게는 잊히지 않는 기억. 그것이 바로 청소년기에 겪는 일들이다. 


많은 일들을 겪고,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일탈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모습.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하면서 남에게서 주어진 삶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모습. 그런 모습이 소설에서 시간의 문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목이 '시간을 건너는 집'이지만, 원하는 시간으로 무조건 시간을 건널 수는 없다. 소설은 네 명의 인물을 통해서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다만, 소설을 읽다보면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집. 또 그런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게 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10-0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2-10-08 09: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10-07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10-08 09:4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