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읽다가 불현듯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가난은 가난을 치장한, 보여주기식 가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방송에 나오는 가난은 이상하게도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난의 냄새를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봉준호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로 인해서 극명하게 갈린 빈부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런 냄새.


  이들은 아무리 행복하게 지내도 가난의 냄새를 없애지 못한다. 몸에 배인 그 냄새는 향수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도 사실 가난의 냄새는 절실하지 않다.


반지하에 사는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행복이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서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집이 침수되고 물건들이 못 쓰게 되었을 뿐, 그들은 가난에도 행복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가족들이 풍기는 그런 행복의 냄새. 과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럴까? 그런 집도 있다. 물질이, 돈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가족을 불행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가난의 냄새는 행복의 냄새로 덮어지지 않는다. 행복의 냄새를 가난의 냄새가 압도한다. 그리고 처절하다. 처절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더 처절하기도 하다. 


박완서 소설에서는 부자들이 가난을 체험한다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빼앗아간다고 나와 있지만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틀린맞춤법으로 읽는 도둑맞은 가난, 알라딘 비매품, 75쪽.)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한 글이 바로 박현주 글 '가난이 드러날 때 감춰지는 것들'이다. 이 글 마지막 부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렇게 진짜 가난은 뒤로 더 물러나고 숨겨진다. 나는 드라마가 그려내는 건 대체 어떤 가난인가 생각하게 된다.(16쪽)'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난한 집이 가난하지 않다. 물론 가난을 상대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에 나오는 반지하 생활과 실제 반지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경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았을 을지로의 풍경들.32-37쪽)과도 다르다. 


그러니 이번 호에 실린 지수의 글 '반지하 SOS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에서 말하고 있는 '개발주의를 내세우며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존재할 자리를 없애버리는 지금, 불평등이 곧 재난임을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집은 인권이다. 주거권은 생명이다. (57쪽)'는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가난은 포장될 수 없다. 방송에 나오는 가난이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처절한 가난, 이는 화면으로 보여주기 힘들다. 그렇더라도 가난을 덮는 그런 가난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삶, 거기서 겪는 어려움,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모습... 


어쩌면 영화 '똥파리'에 나온 가족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 이 영화에서 가난은 정말 지지리도 가난한, 그런 가난의 냄새, 불행의 냄새가 스멀스멀 나오는데,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잘 나타나고 있으니... 그런 영화, 드라마를 방송에서 보고 싶단 생각.


이번 호를 읽으면서 그래서 반지하를 주거공간으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그들을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집, 홈리스, 빅이슈. 그리고 사회의 책임. 국가의 책임. 나라도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 이제는 사라져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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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인생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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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반전. 또는 진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내용 전개. 짧은 소설임에도 다양한 생각들을 이끌어 낸다. 기존 김동식 소설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다만, 삶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어떤 삶이 좋을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떤 사회면 좋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 실려 있다. 토론거리로 적당한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이 된 '성공한 인생'만 봐도 그렇다. 과연 남들이 좋다고 하는 그런 삶이 성공한 삶일까? 성공만을 위해 내달린 인생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공이란 목표를 하나 정해두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든 상관이 없단 말인가. 아니 목표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욕망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수능에서 고득점을 얻어 명문대 진학하는 일. 고시나 또는 잘나가는 기업에 취직해서 돈을 잘 버는 일. 예쁘고(잘생기고) 착한 사람과 결혼하는 일.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 혹시 자신을 잃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귀신에게 일주일에 하루 하루를 내어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주인공. 결국 그에게는 주말만 남는다. 주말,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해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주말만 의식할 수 있는 그의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목표만을 향해 달렸지만,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하루 하루를 잃어가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거상의 거래법'이라는 소설도 이득 앞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결국 이윤만을 추구하다간 자신을 잃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사회로 확장하면 '악한 사업'으로 연결이 된다. 이윤을 위해서 지구를 파괴하는 사업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업들을 어떻게 규제할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규제가 안 되는데, 소설 속에서는 상상을 빌려 규제를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동식 소설의 묘미다. '장난감 총'에서 보여주는 반전도 그렇다. 아이들을 위한다면서 아이들을 획일적으로 교육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것을 장난감 총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그 반전에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2인 1조'란 소설을 읽으면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이야기했던 과거에는 사람들이 둘씩 묶여 있었다는 말을 떠올리게 됐다. 여기에 더해서 페미니즘을 떠올리기도 했고.  이 소설은 미래에 외계인의 힘으로 사람들이 둘씩 묶인 상황을 만든다.


남-남, 여-여, 남-여. 가리지 않고 묶인다. 이들은 함께 살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불편하지만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회 시스템도 2인 1조를 기준으로 재편되었다. 이동수단, 생활용품, 편의용품…모든 것들이 2인용이 기본이 되었다.

  서로를 3미터 밖으로 튕겨냈기 때문에, 모든 건물과 거리, 도로들이 매우 넓어졌다. 도심 지역의 멀미 나는 밀집도 사라졌고, 의외로 인간들은 여유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모든 교육은 서로를 배려하는 법과 존중하는 법을 최우선으로 교육했다. 모든 방송에서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한 솔루션을 자주 내보냈다. 모든 사회 분위기가 배려, 존중, 사랑, 우정 같은 가치들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았다.' (127쪽)


그렇다. 서로 배려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외계인때문이라고 하겠지만, 다시 외계인이 사람들을 떼어놓은 상태에서도 이런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작가가 바라는 세상이기도 하겠다.


이런 소설을 비롯해서 다른 소설들도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그것을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서 우리를 바람직한 세계로 이끈다.


소설이 지닌 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전이 그런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함께 살악가야 하는 인간들. 어떻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남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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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아빠가 됐다 -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 이매진의 시선 6
조기현 지음 / 이매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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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답답한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됐다고 떠들어댄 게 얼마 전인데...이런 일은 정말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아주 특이한 일이라고. 우리나라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홍보한 적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진국이라는 말을 어떤 지표로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선진국이란 국민들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더위로 죽지 않는, 즉 생계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나라 아닌가. 병에 걸렸다고 방치되지 않는 나라, 장애가 있다고 배제되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가 선진국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과연 우리나라가 선진국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돌봄을 가족에게 맡기는 나라, 그것도 먹고 살기 힘든 젊은이가 부모 봉양을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그나마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제대로 지원도 받기 힘든 나라. 그런 나라가 과연 선진국인가?


지금 거리를 지나다 보면 무슨무슨 요양병원 간판이 많이 보인다. 병원만큼 요양이라는 이름을 단 병원이 많이 생겼다. 요양병원, 가정에서 돌보기 힘든 분들을 모신 곳. 그런데 가정에서 돌볼 수 이들이 얼마나 될까.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이런 말이 나오는 이 사회에서 가정에서 돌봄을 실현할 수 있는 집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돌봄에 가정을 제일 먼저 앞세우고 있다. 돌봄은 가족들이 먼저 하는 일. 사회는, 나라는 그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아버지 나이가 50이 되기 전에 치매에 걸렸다. 경제 능력이 없다. 일을 할 수는 없는데, 병원에서 치매 검사를 하면 초기라고, 충분히 치료 가능하다고, 치매라고 할 수 없다고, 그냥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은 노동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치매환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치매 진단이 이토록 형식적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들이 느끼는 치매와 의사가 진단하는 치매 수준이 이토록 다를 수가 있나?


거기에 노동능력이 있고 없고를 판별하는 공무원들, 또 기초생활수급자냐 아니냐를 판명하는 공무원들과 실제 생활하는 사람들의 괴리. 이 책에서 너무도 잘 느낄 수가 있다.


겨우 20대. 아직 자기 자리로 잡지 못한 나이. 그런데 졸지에 아빠의 보호자가 되어 버렸다. 나도 아직 직장을 못 잡았는데, 생활이 안 되었는데 아빠는 생활할 수가 없고, 내가 봉양해야 한다. 아니 나밖에 봉양할 사람이 없다. 졸지에 부양가족, 보호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의사 진단으로는 아니란다. 충분히 생활핧 수 있단다.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어가는데, 돈은 없는데... 기껏 전세보증금을 빼내어야 겨우 낼 수 있는 병원비. 나아지지 않는 아빠 상태. 그렇다고 돈이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직업을 갖지 못한 나.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큰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점도 문제다. 그런 절망에서 이 책은 쓰였다. 그리고 그 절망이, 절망 속에서 피어낸 희망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 결국 나는 아빠의 보호자로 살아야 한다. 아직 사회에서 자리잡지도 못했는데... 이것이 과연 개인의 책임일까? 가족의 책임일까? 사회가 나라가 해줄 일은 없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효자가 되기보다는 시민이 되겠다고. 효자, 이는 개인에게, 가족에게 돌봄을 맡기는 말이다. 사회는 뒤로 한 발 빠져 있고, 돌봄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 개인에 묻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저자가 효자임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말이다.


이제 돌봄은 개인, 가정을 떠나 사회가 나라가 떠맡아야 한다. 그게 선진국이다. 읽으면서 저자의 사연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과연 저자가 희망적으로 말한 것이 이루어졌을까 하는데는 의문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려운 상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사회ㅡ나라가 돌보지 못했던 사람들, 가족이나 개인이 돌보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소중하다. 정말로 돌봄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바로 사회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돌봄에 개인, 가족을 들먹여서는 안 된다. 그건 사회, 나라의 책임이다. 그 점을 너무도 잘 드러낸 이 책.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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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부고(訃告)


  세상에, 시집 제목이 '죽마고우'인데 시인은 첫장부터 죽음을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이 함께 간다고, 죽음을 잊지 말라고(메멘토 모리)하지만, 죽음이 삶의 친구라니. 그것도 오랜 친구.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죽음은 도처에 있다. 삶이 시작된 순간부터 죽음은 삶과 함께 한다. 어찌 죽마고우가 아니랴.


  이 친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더욱 풍성해진다. 제대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죽음을 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또 감추려고 하지도 말고, 함께 하는 친구로 생각하자.


시를 읽으면서 요즘 하나 둘 날아오는 부고를 생각했다. 어느 순간, 죽음은 이렇게 가까이 와 있구나. 부고 하나하나에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사람들 이야기.


죽마고우


젊었을 때는 곁에 말 걸 상대라도 없으면 / 세상 혼자 떨어져 사는 거 같아 싫었다.

그것보다는 늙으면 더 외롭다 하는데 / 딱히 그렇지는 않다.

늘 곁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 둘러보니 없긴 없는데 있는 것 같다.

가만히 보니 죽음이다. / 당연히 죽음이 날 데려 갈 테니'

외톨이로 살아 고독하여도 두렵지 않다. / 왜 그런가 생가해보니 미리미리

죽마고우처럼 /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다.

사람이니까 죽음도 죽마고우라 부른다.


강우식, 죽마고우. 리토피아. 2022년. 83쪽.






둘. 술


시인은 시도 죽마고우라고 했다. 시인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다. 평생을 시와 함께 했으니, 죽음과 시는 시인에게 죽마고우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술이다.


술술 넘어가서 술인지, 자신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존재. 죽음이 영원한 망각의 세계로 사람을 이끈다면, 술은 잠깐 동안 망각의 세계로 이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그러나 때로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듯이, 술 또한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절제가 되어야 하는데, 달리 알콜 중독이란 말이 나왔겠는가. 하지만 중독이 되면 잠시 망각의 세계에 들었던 정신이 지속적으로 이 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중독은 어찌 됐든 좋지 않다. 중독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저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된다.


'술 권하는 사회'라는 현진건 소설. 일제시대 때만 그랬을까. 아니다. 지금도 사회가 술을 권한다. 자꾸 이곳을 잊으라고 한다. 그냥 저곳으로 가라고 한다. 등을 떠미는 사회. 하지만 사회에 등을 떠밀려 술을 마시다보면, 사회도 잊는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몸만, 자신의 정신만 축날 뿐이다. 그러니 술을 즐겨도 좋지만, 중독으로 가지는 않게 하자.


사회가 술을 권하면 적당히 마셔주어도 좋지만,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이곳을 잊을 때까지는 마시지 말자.


숙취


어디서 잘못 배운 술인지 모르지만 / 나는 술버릇이 나쁘다.

혼자서는 술을 절대 안 먹지만 / 가까운 친구와 마시는 술에 흥이 오르면

내가 앞장서서 일 배 일 배 부일배가 아니라 / 한 병 한 병 또 한 병이 된다.

내일은 죽어도 좋다며 술을 마신다. / 그리고는 술을 이기지 못한 이튿날은

아이고, 아이고 내가 간다는 영어 같은 / 그 신음 속에 열물 쓴물 단물을 다 토한다.

거기에 어머니인지 어머나인지 / 분간 못하며 찾는 어머니도 반드시 계시다.

그저 지나가길 바랄 뿐 약이 없는 숙취 / 그리고는 좀 원상 복귀되면 

돌본 마누라에게는 미안했는지 / 일평생 못 버리는 거짓말 금주 맹세를 하며

당신 보며 사는 것이 내 유일한 소망인데 / 못보고 죽는 줄 알았다고 입을 뗀다.


강우식, 죽마고우. 리토피아. 2022년. 70쪽.






셋. 기후 위기 또는 기후 재앙


10월이다. 이제는 선선해져야 한다. 계절은 어김없이 제 역할을 하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계절이 제 역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냥 더위를 지속하기도 한다. 9월. 과연 선선해졌던가. 한여름과 같은 더위가 지속된 때도 있었다. 물론 일교차가 생겨, 아침-저녁으로는 살 만했지만, 낮에는 한여름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기후가 이상을 일으키고 있다. 기후가 이상을 일으켜? 


아니지, 사람이 기후를 이상하게 만들었지. 자신들이 만들고 기후 위기라고 한다. 기후 재앙이라고 한다. 고치려고 하지는 않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당연히 해야겠지만, 사회가, 나라가, 세계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특히 가장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미국.


미국은 기후 위기에 대해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세계 경찰을 자처하면서, 세계 평화를 자신들이 유지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를 다른 지구로 데려가려 하고 있다.


자신들의 생활습관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다른 나라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냥 지금 그대로 살려고 한다.


그들이 지금 그대로 살면 지구는 다른 지구가 된다. 죽음이 개인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고, 술이 잠시동안 다른 세계로 이끌어가지만, 이것은 개인의 문제에 더 가깝다면 기후 위기는, 기후 재앙은 개인이 아니라 가이아라 불리는 지구 전체의 문제가 된다. 지구를 통째로 다른 지구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지구가 살기 힘들다고 몸서리치니 기후 재앙이 일어난다. 이것을 모르쇠하면 안 된다. 하여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해야겠지만, 사회가, 나라가, 전세계가 해야만 할 일을 하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시에서 삼한사온이 사라진 것처럼, 우린 다른 지구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살 지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삼한사온


살면서 실감나게 믿었던 / 말들의 교과서

살면서 입에 달고 다니던 / 말들의 신조

어렸을 적에는 삼한사온이라 / 자주 입에 담았는데…

사라진 옛날이 됐다.


강우식, 죽마고우. 리토피아. 2022년. 61쪽.


덧글


이 시집에는 83편의 시가 실렸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세어 봐도 82편이다. 도대체 어디서 한 편 차이가 날까. 차례를 세어 봐도 82편인데, 작가의 말이 두 편이 있으니, 그것을 합치면 84편이고, 작가의 말을 빼고 여적을 넣으면 83편인데... 여적은 시가 아닌데.


아이들 같은 발상이지만 내 나이가 올해로 여든 셋이다. 시집에 실린 시도 83으로 여기에 맞췄다. (餘谪 112쪽.)

 

숫자를 잘못 세었나 쪽수로 계산해 보았다. 98쪽-15쪽=83쪽+1쪽이니 84쪽이고, 이 중 2부 제목이 2쪽이니 -2쪽을 하면 82쪽. 한 쪽당 시 한편이니, 82편이 맞다. 시인이 실수를 했는지, 출판사에서 한 편의 시를 뺐는지, 아니면 만 나이로 계산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님, 내가 무엇에 홀렸나. 걔속 82편이니... 참.


둘째, 이 시는 특이하게 가나다 순으로 시를 배열했다. 그래서 제목을 알면 시를 찾기 쉽다. 가나다 순이 시 내용이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런 시집을 봤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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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탄생
김민식 지음 / 브.레드(b.read)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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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상국 시집이 생각났다. 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시집 제목은 '집은 아직 따뜻하다'다. 그래, 집은 따뜻하다. 따뜻해야 한다. 그런데 시 내용이 이런 따뜻함이었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목 그대로 보자. 사람이 떠났어도 집은 따뜻하다. 사람들이 살았던 온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은 사람들의 온기로 채워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집을 지나치게 크게 지으면 온기를 느낄 수가 없다. 집이 아니라 사무실이나 다른 공간이라고 느끼게 된다. 집이 따뜻함을 유지하려면 적정한 크기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집도 역시 크지 않다. 작은 집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저자는 아주 작은 집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극한으로 몰아가는 작은 집. 그런 집은 수련을 위해서 또 잠시 머묾을 위해서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집이 따뜻한 이유는 사람 몸을 지켜주기 때문이기도 한데, 몸을 지켜준다는 이야기는 마음이 편해지는 분위기와 자연환경으로부터 건강을 지켜준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집, 그런 집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남들과 같은 집이 아니라, 나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주는 집. 


저자 역시 이런 생각을 여러 군데서 비치고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건축보다 자신이 우연히 만난 시골 건축이 더 좋다고 하는 말들. 화려한 디테일보다는 꾸밈없는 소박함이 좋다고 하는 말들. 디테일에는 비용이 들어간다고.. 비용은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과 시간까지도 의미하니... 그런 건축보다는 적은 비용이 들었지만 살기에 편안한, 사람을 보듬어 주는 건축이 더 좋다고 주장하고 있다.


건축 자재로는 나무만한 것이 없다고... 나무는 오래가지 않냐고 하는 질문에 부석사 무량수전보다도 오래간다고 말한다는 그. 작은 평수의 나무집을 지어 사람들에게 보급도 하고 있다는 저자는, 집에 관한 여러 생각을 이 책을 통해서 펼치고 있다.


길지 않는 글들이 모여 있고, 다양한 집들이, 또 저자 글에 이어서 작은 설명이 스케치와 더불어 함께 해서 좋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글은 바로 '한옥'에 관한 글이다. (한옥은 없다. 137쪽-149쪽을 참조하면 된다)


도대체 '한옥'이 무엇인가? 한옥하면 어떤 집이 떠오르는가? 먼저 한옥하면 기와집이 떠오른다. 북촌에 있는 한옥들, 또는 전주한옥마을, 남산한옥마을 등등을 떠올린다.대부분 기와집이다. 


한옥을 짓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초가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한옥은 특정한 형상으로 굳어져 있다. 그런데 과연 한옥이 무엇인가? 기와집만이 한옥인가?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한옥이라는 말을 이렇게 뭉뚱그려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집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굳이 한옥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시켜야 하겠냐고 반문한다.


(이상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한옥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통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인데도 그냥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함께 있기 때문인지... 이 이름을 보더라도 한옥으로 뭉뚱그려서는 안 되겠다.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냥 기와집, 초가집, 귀틀집, 너와집 등등으로 그 집의 특성을 알려주는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고 한다. 이를 통칭하는 말로 전통집이라고 하든지, 한옥이라고 하든지 하면 상관이 없지만, 지금은 한옥하면 특정한 집들만을 떠올리니, 저자의 지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은 다양한 재료로 지어진다. 예전에는 자신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집을 지었겠지만, 지금은 재료가 몇 가지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도 문제다. 환경에 맞는 집들이 지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도 동의한다.


특히 나무로 집을 지으면 탄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나무는 탄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또 나무로 집을 지으면 집을 짓는 재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줄일 수 있으니, 앞으로 환경을 생각한다면 나무집을 지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자기가 사는 곳에서 나는 나무면 더 좋겠지만... 이렇게 집을 짓는 재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상국 시집 제목이 사라지지 않았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그렇다. 집은 따뜻하다. 우리는 그 따뜻한 집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를 압도하는 집이 아니라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집. 그런 집에서 살아야 한다.


이상국 시 '집은 아직 따뜻하다'를 다시 읽으니 이 책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이 책에 실린 내용 중에 이 시와 비슷한 내용도 있었으니... 사람은 사라졌어도 집은 그 사람의 삶, 그 사람의 온기를 품고 있다는...


집은 아직 따뜻하다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8년. 초판. 64-65쪽.


이 시에 나오는 함석집이 이 책을 다시 불러왔다. 저자는 함석집에서는 '가난의 함의가 담겨 있다(102쪽)'고 했다. 가난의 함의. 그렇지만 그 집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 집에 담겨 있던 따뜻함. 그것이 사라졌다.


'한국전쟁 후 주로 실향민이 모여 살던 도심 주변, 산등성, 개천가의 함석집들. 이제는 영화 속 장면에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여기 나의 우직한 강원도 산골 마을에도 함석 지붕이 사라졌다. 함석집의 서정. 가난의 기억.(102쪽)'


책이 시를 부르고, 시가 다시 책을 불렀다. 집을 통해서 다양한 분야, 저자는 철학과 시를 집과 연결시키는데, 그 말이 맞다. 비록 이 글에서는 철학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삶이 바로 철학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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