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시집. 오래 된 시집. 지금은 상상도 못할 억압의 시기. 그러나 시는 억압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시를 썼다는 이유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시대가 그 시대다. 불온함을 갖게 한다고. 시에는 불온함이 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시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춘다. 신영복 선생이 온달과 평강공주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어리석은 우직함. 그것이 시일지도 모른다. 그런 시를 어떻게 대했나, 구광본 시집에서 '경고'란 시를 만났다.


민중의 나라가 과연 이런 나라일까? 상상을 억압하면서 과연 민중의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시는 이런 경고를 통해서 민중의 나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구호만 있는, 그야말로 삶에서 떠난 말들만 난무하는 나라가 아니라, 진정 삶을 풍요롭게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는 앞에서 열거한 일들도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중의 나라다. 따라서 시에서 말하는 민중의 나라는 구호만 민중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경고


  이곳에서 시를 찾는 자나 하늘을 노래하는 자 혹은 날개 달린 동물들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동한 자 그리고 꿈의 세계를 기웃거린 자는 다가오는 민중의 나라에 대한 반역자로 판단하여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임


- 구호만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시장 백


구광본, 강, 민음사. 1989년 11판. 24쪽.


표현의 자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를 찾고, 하늘을 노래하고, 날개 달린 동물들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휘하고, 꿈의 세계를 기웃거려야 한다.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


말로만 자유, 평등, 공정, 정의를 외치는 나라가 아니라, 삶에서 실현되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구호만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시장은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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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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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행위. 알고 있는 것을 언어를 통해 다른 드러내는 일. 언어학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쓰인 것이 쓰려고 하는 존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까? 존재와 글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지 않을까?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 진실인가?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기 힘들듯이,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번 김연수 소설집은 이렇게 빗나감을 보여주고 있다. 쓴다는 말이 직접 나온 소설도 있지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은 소설도 빗나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빗나감, 어긋남, 아니 알 수 없음. 한낮 속에 서 있을지라도 진실은 알 수 없다는 것.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소설이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보이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지만, 과연 그 판단이 진실일까? 보여짐이 진실과 일치할까. 어쩌면 쓴다는 행위와 보여짐이라는 것이 비슷하지 않을까. 쓰는 순간 그 대상에게서 멀어지듯이 보여지는 순간 가려지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일제시대 친일과 북한군에 점령당한 서울에서 한 부역 행위.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친일이나 부역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소설 속에서 그런 행위를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긋남, 빗나감을 이렇게 잘 보여주는 문장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친일을 하면서 했다는 말이 참... '일본이 승리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일본이 승리한다고 믿는다는 그 사실만을 믿는 것'('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중에서. 236쪽)


이 말 속에는 거리가 있다. 도대체 진실은 없다. 교묘하게 거리를 둔다. 쓴다는 행위가 이렇지 않을까 하는데... 쓰기는 자신을 돌아보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렇게 이번 김연수 소설집에서는 쓰기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밝히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쓰는 행위가 많이 나오는데, 그 쓰기가 진실을 향해 가지 않고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쪽으로 간다.


설산을 넘으면 진실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설산에서 길을 잃고 마는 일. 이 소설은 그런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또 애인을 알기 위해서 글을 쓰지만, 글을 쓰면서 진실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쓰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등정을 하면서도 계속 써 나가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구절마저도 잊게 된다.


설산 속에서 실종이 되는 그와 마찬가지로 글은 진실로 가지 않고 진실로 가는 사람을 헤매게 한다. 그런 모습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더라도 서로 빗나가는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들이 이 소설집을 차지한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모두가 그렇다고 봐도 된다. 필연이 아닌, 진실이 아닌, 그냥 그렇게 보여진 것, 쓰인 것들만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래서 서로 이해 불가능에 빠질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런 관계들을 김연수 소설이 보여주는데... 이 소설들을 읽으면 '이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보여지는 것에 가려진 진실이 있고, 쓰여진 것이 아니라 쓰이지 않은 진실이 있는데,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보여진 것, 쓰인 것을 기반으로 판단을 내린다면, 그 관계는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특히 사람의 관계는 더욱 그러함을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소설집 제목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글을 통해서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작가라는 말에는 쓰기라는 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그냥 작가가 아니라 유령 작가다. 유령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 또는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존재다. 그렇게 유령은 언어 뒤편에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쓰는 글. 유령작가가 쓰는 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유령작가란 말에서 이 소설집에 실린 쓰기 행위가 지닌 거리, 빗나감이 느껴지고, 서로가 서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생각하게 된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그렇다. 현실과 같은 듯하면서도 현실이 아닌. 그래서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쓰기의 모습. 하지만 소설은 그런 빗나감을 통해서 우리가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든다. 


김연수 이번 소설집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쓰이지 않은 것, 보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생각도 해보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특히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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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는 당시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그 유령은 시대를 대변하는 유령이라고 할 수 있다면, 지금 유령은 나타나지 말아야 할 망령에 불과하다.


  망령의 출현. 그것은 바로 현실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


  도처에서 예전에 사라졌던 망령이 부활해서 실제 존재들을 억압하고 있는데...


  그런 망령이 나타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망령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망령의 출몰, 아니, 망령이 우리를 옥죄고 있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헌책방에서 구입한 이 시집에서 우연히 망령을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망령을 철저하게 눌러놔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89년 시집이니 꽤 오래 된 시집이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고인돌'은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지 않나 싶다.


                      고인돌


               죽는 일이 제법 무섭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보다

               세상 더 무서운 일은 없다


               죽음이나 두려움에 관한 한

               우리보다 몇 곱절 훤했던 옛 사람들

               한 번 죽은 사람은 아주 보내버리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고인돌을 세웠다


               누운 사람 양편에 받침돌을 세우고

               일어설 생각일랑 꿈에도 못하도록

               어마어마한 뚜껑돌을 덮어놓은 것이다


정진명, 머나먼 DMZ. 문학과비평사. 1989년. 97쪽.


그렇게 눌러놓았어야 하는데...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망령이 출몰하고 있다.


아니 망령을 불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불러낸 망령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한다.


망령은 망령이 있을 자리로 가야 한다. 망령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망령을 제자리로 보내고, 다시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옛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뚜껑돌을 덮어놓'았듯이. 그렇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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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2003년 제3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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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소설을 읽기로 하다. 이름을 많이 들어서 언젠가는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작가. 이름만으로 흘려보낸 시일이 꽤 된다. 이제는 김연수 소설을 읽자. 그가 자꾸 언급되는 이유가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당연히 책을 골랐을 때는 제목이 된 소설이 실려 있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집들은 대부분 그랬기 때문에... 최근에 시집들은 시집 제목을 수록된 시에서 따오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그 생각을 소설로 확장하지는 못했다.


이 소설집은 2002년에 나왔는데, 소설집도 굳이 수록된 소설에서 제목을 따오지 않아도 되는데... 단편 소설 9편이 실려 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이거나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의 나이이고, 공간적 배경은 경상도 김천이라고 할 수 있다. 꼭 김천이 아니어도 경상도 어느 마을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공간에서 아이부터 대학생이 되기까지 겪은 일들이 이 소설집에 나오는 내용이라면, 이 소설들은 한편 한편이 독립적이지만 또한 과거 마을 삶에 관한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또 시대적 배경이 70년대에서 80년대를 거치고 있으니, 이 소설집이 나온 때로부터 20-30년 전 이야기라는 공통점, 지금으로 따지면 소설집이 나온 때가 20년 전이니, 과거의 과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작가 김연수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래,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소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아픔도, 개인이 겪는 아픔도 소설 속에 드러나고 있는데, 설핏 작가의 개인적인 성장사도 소설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이 소설집에 있는 '뉴욕제과점'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뉴욕제과점'은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직접적으로 작가가 된 자신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 다음은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내용이 주욱 연결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70-80년대 우리나라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은 과거에는 그랬지라고 넘길 수가 없다.


이 소설 속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니까. 우리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특정 지역을 배제하는, 그런 행태들. 그런 관념들. 여전하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주사파 운운하면서 그들과는 협치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상처에는 칼날의 생김새가 남아 있다.


상처를 보면 어떻게 상처를 입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처를 낸 존재들의 모습이 상처 속에 오롯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상처는 기억이고, 과거를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존재가 된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어린 시절의 기억.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라도 기억에 남아 현재를 살아가게 한다. 어쩌면 현재의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에 실린 마지막 소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는 80년대 학원 폭력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지만, 과연 우리는 폭력을 극복한 사회에 살고 있나 되짚어 보게 한다.


당시에는 물리적인 폭력이 난무했지만, 지금은 물리적인 폭력은 많이 사그라지고 있다. 물론 학교폭력은 여전하기는 하지만, 교사들에 의해서 또 교사를 대리하는 반장이라는 권력에 의해서 자행되는 물리적 폭력은 사라졌다. 암암리에 일어나는 폭력은 있지만, 이처럼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폭력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게 폭력에 길들여졌던 과거가 오나전히 극복되기 위해서는 이 소설에처럼 다른 계기가 있어야 한다. 결코 그 폭력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마음 가짐.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노력. 


공공연한 폭력만이 아니라 은연중에 가해지는 폭력도 없애야 한다. 또 제도로 가해지는 폭력도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 속에서 가해지는 폭력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 지지 말고 자신만의 꽃을 피울 수 있으려면 폭력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폭력에 맞설 마음을 지니고,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김연수가 자신의 과거를 소설을 통해 불러낸 이유는 바로 과거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과거를 통해 현재를 개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 과거와는 다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렇게 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김연수가 불러낸 우리나라 70-80년대의 삶. 이제는 과거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지만, 이 중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 김연수 소설을 통해서 또다른 삶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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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2 - 외국 영화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 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2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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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시인들을 다룬 1권에 이어 이번에는 외국 시인들을 다뤘다. 우리나라 시인도 잘 모르는데 외국 시인? 할 수도 있지만, 시를 즐기는데, 영화를 즐기는데 굳이 국적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또 외국 시인에 대해서 알면 훨씬 더 좋지 않은가.


영화도 보고 시도 읽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인데, 그런 기회를 책이 제공해 주고 있으니, 일석삼조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 시가 흐른다? 시가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시를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영화에 나온 시를 찾아보고 다시 읽으면 더 좋겠고.


많은 영화, 많은 시들이 나오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와 시가 이 책에도 나온다.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 


소설과 영화는 알아도 시는 잘 생각 안하는 영화인데, 제목에 시인이라는 말이 들어갔으니 시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영화에는 시도 나오고, 또 시 수업에 관해서 나오니 말이다. 그래서 외국 영화와 시를 연결지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한 영화가 '위험한 아이들'이다. 시를 통해서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 이 영화에서는 딜런이 나온다고 한다. 밥 딜런. 가수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 아니던가.


그렇게 영화는 딜런으로 시작해서 시를 만나고 변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물론 교사도 변하고.


다음에 시와 관계 있는 영화는 '일 포스티노'다. 네루다에 관한 영화. 아니 네루다를 만난 우편배달부에 관한 영화.


시로 인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 그렇게 시는 사람에게 다가와 그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시를 영화를 통해서 만나게 된다. 우리 역시 영화 속 인물들처럼 시를 통해서 우리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새로운 느낌. 지브란이 쓴 '예언자'... 잠언집이라고만 생각했다. 시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시였다니...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읽힌 글이... 


영화와 시에 관한 책을 읽으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또 시를 새롭게 보게도 된다. 그렇게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시를 새롭게 만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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