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떨어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떨어짐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자, 죽음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을에 떨어진다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었을테라고 조금 위안을 하기도 합니다. 


  무릇 생명이란 나고-자라고-죽고를 반복하는, 그 개체는 유일한 존재로 이것을 반복하지 못하지만 생명이라고 하는 전체를 보면 이러한 반복이 계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요. 그런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어 세상을 뜨게 되면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죽음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죽음의 의식'이라는 시인데요... 앨런 긴즈버그와 부크월드라는 사람. 자신의 죽음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죽었다는 그 사람들. 시인은 그래서 이들은 가을을 만끽하고 드디어 떠났다고 할 수 있다고 여겼나 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둘 다 인생을 마감하는 큰 행사의 하나인 죽음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위엄스럽고 또 유쾌해 보여 좋았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하지만, 가을이 되기 전에 떨어지면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는 너무도 많은 이렇게 이른 죽음을 만났습니다. 최근에는 더욱 더 많은 죽음을 만나게 되었지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으로,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애도를 표하고, 또 그런 죽음을 일으킨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애도와 책임은 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는 진정한 애도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애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가을. 결실, 풍요로움을 만끽해야 할 때,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요즈음, '메멘토 모리'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죽음은 삶의 친구로서 늘 삶의 곁에 있지만, 죽음이 나타나는 때는 삶이 충분히 충족되었을 때여야 합니다.


그래야 슬퍼하지만, 마음을 상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 마음이 상처로 패인 상태입니다. 좀 다독여야 하겠지요.


우연히 이시영 시집을 만났습니다. 제목이 나를 끌었지요.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제목처럼 이 시집에는 죽은 존재들이 많이 나옵니다. 박홍주 대령, 조용수 사장,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당사자들, 외국 사람으로는 아옌데 칠레 대통령 등등. 이들의 죽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죽음에 빚지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들 중에 마음을 울리는 시가 있었습니다. 봄날에 활짝 핀 목련. 얼마나 화사한가요? 이제 막 봄을 맞아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할 때. 그런 봄날, 그래서 이 시는 더 슬픕니다. 


봄날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 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르(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자고짜 그와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목련이 활짝 핀 눈부신 봄날 아침이었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1쪽)


이렇게 좋은 날이 가장 좋지 않은 날, 축제의 날이 죽음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존재들을 가슴에 묻고 영원히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그 결의가 사람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이 말한 '평화'란 시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내가 만약 바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저 아기다람쥐의 졸리운 낮잠을 깨우지 않으리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더 말이 필요없는 시입니다. 더 말을 할 수 없는 때입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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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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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 성향이 다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도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찾지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이란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다 다른 인생이지만 다 비슷한 인생이기도 하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을 글로 표현한 예술이 소설이니, 소설들도 공통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공통점을 통한 다른점을 보여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일테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얼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잘 이해할 수 없다. 첫소설에서 그런 미끄러짐이 잘 나온다. 미끄러짐이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최고의 순간이었던 때, 그때는 비록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꾸만 마음에 남아 있던 장면.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다. 두번째 소설 '깊은 밤, 기린의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을 잘 못하는 아이, 그러나 기린이라는 소리에 웃음을 짓는 아이. 이 아이에게는 기린이라는 말이 최고의 순간일 수 있다. 남들은 몰라도 자신에게는 최고의 순간. 그 순간은 영원히 간직된다. 삶에서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순간이 되니.


소설집 제목이 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그렇다. 이모, 미국에 간 이모. 엄마와 이모의 말이 다르지만, 그래서 이모를 잘 모르지만, 이모에게도 한창 때가 있었음을. 그때가 이모 인생에서 가장 아름웠던 순간이었음을.


빗소리를 들으며 음계의 미에서 솔까지... 도에서 시도 아니고, 미에서 솔이다. 짧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인생에서 정점에 이른 때일 수 있다.


어쩌면 짧아서 더 아쉬운, 그런 한창 때. 그런 순간을 작가는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순간을 남들이 알 수 있을까?


그 순간을 겪은 사람이 이야기해줘도 사실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그렇지만 당사자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 마음 속에서 영원히 지우지 못할 그런 순간이 된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안다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제목도 특이한'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이라는 소설을 보면 엄마에게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최고의 순간. 그 한창 때. 그런 순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에게 최고였던 순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런 사실로 인해서 인생은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김연수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의 어려움보다는, 누구나 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창 때가 있었음을 느꼈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음을, 그 한창 때가 누구나에게 다 있음을 이 소설집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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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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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있다. 평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말을 기울어진 미술관이라고 바꿨다.


기울어진 미술관. 미술에 나타난 불평등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보면 된다. 미술 작품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술 작품에는 불평등한 관계가 잘 드러나는 그림들이 있다. 또 그림들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미술과 관련하여 불평등이 나타나곤 한다.


그 점을 찾아야 한다. 충분히 볼 수 있는데 보지 않으면 그것이 문제다. 보임에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다면 그 사회는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다.


그러니 보아야 한다. 찾아야 한다. 찾아서 고쳐야 한다. 고치기 위해선 보아야 하고, 보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림을 통해서 그런 불평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첫시작을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로 한다. 막달라 마리아. 성녀라고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성녀가 아닌 것처럼 그린 그림이 있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그림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여성에 대한 차별은 흑인 여성에 대해서는 더 심하게 나타난다. 백인 여성들이 주로 나체로 그림에 등장한다면, 흑인 여성은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로, 그것도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 차별들이 그림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난다. 


여성에 대한 그림은 더 나아가 성노동자 문제로 바라보게 한다. 그들에 대한 관점이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림을 통해서 그들 삶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는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 그림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실제 그들 삶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데, 성노동자 문제만이 아니라 여성에 관해서는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아예 '그림 속 소품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려고 하는 여성들. 그러면서 다양한 존재들을 그림을 통해서 다시 보게 하고 있다. 어린이, 인디언, 노인, 도시화로 쫓겨나는 사람들 등등.


여기에 사회 문제까지 그림을 통해서 바라보게 해주고 있는데, 사회 속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한 운동장인 줄 알고 살아가게 된다. 불평등을 평등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는 발전하지 않는다. 적어도 가장 어려운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장 약한 사람의 눈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그림을 보는 눈을 키우게 하면서 동시에 사회를 보는 눈을 뜨게 한다. 그림이 그림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삶으로 들어오게 하고 있다.


이 책이 지닌 의의는 지은이의 이 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예술의 참모습을 다각도로 살필 수 있는 또 하나의 채널이 된다면, 지은이로서 더없는 보람이겠다." (10쪽)


지은이의 말처럼 또 하나의 채널이 되었다. 그 채널을 통해 우리는 미술과 사회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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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보겠습니다 -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
임은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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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도저히 중간에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정도일 줄이야. 우리나라 검찰이. 문제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이제는 검찰 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많은 부분에서 검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이 책은 너무도 늦게 나온지도 모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도 있는데, 늦었다. 이 책은. 좀더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아니, 나올 수가 없었겠지.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늦게나마 이런 책이 나와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진실을 밝히고 진실되게 행동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압력이 들어오고, 심지어 군대에서나 들어봄직한 '기수 열외'라는 말이 검찰에서도 통용되다니... 제 식구 감싸기. 이를 인지상정이라고 해야 하나. 


권력을 지닌 자일수록, 권한이 많은 자일수록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는데, 많은 권한만큼이나 자신에게 관대한 경우가 많았으니... 권한의 수와 관대함이 비례관계로 가면, 권한이 없을수록 더 가혹해진다는 얘기가 되는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 이야기했지만, 그 돈을 권한 또는 권력으로 바꾸면 '유권무죄, 무권유죄'가 성립된다. 권력에도 차등이 있어서 같은 검찰이라고 해도 직위에 따라서 엄청난 권한 차이가 있다. 


검찰에서도 이런 권한 차이로 제약을 많이 받는데, 일반인들은 어떨까? 사실 검찰에게 불려가면 누구나 위축되고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가. 일반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검찰이, 그러한 권력으로 인해서 자신들에게 엄격하지 않으면 권력이 잘못 행사될 가능성이 많은데...


이 책은 검찰이 얼마나 많이 권력을 잘못 행사했는지, 자신들의 권력으로 인해서 유권무죄 현상을 유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법에 의해서 정의로운 판단을 기대했던, 그런 모습을 우리나라 검찰이 보여주기를 바랐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많이 실망할테다.


왜 검찰개혁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게 되고, 검찰이 왜 개혁이 그리도 반대했는지 알게 된다. 검찰 개혁의 길은 여전히 멀고.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런 검사도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자신의 소명을 다하게 하기 위해 내부 비판을 하는 검사가 있기 때문에... 이런 내부 비판자가 있다는 사실로도 아직 길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내부 비판자가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일은 권력을 위임한 국민들이 해야 할 몫이다. 바로 내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검찰의 실체를... 그들이 어떻게 해왔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검찰이 검찰다운 검찰이 되기 위해서 힘들지만 디딤돌을 놓는 임은정 검사같은 사람이 있기에.


이 책에 실린 '검사 선서' 참 좋은 말이다. 검사들이 문해력이 나쁘지 않다면, 이 검사 선서대로만 해도 된다.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따라 의사 생활을 하면 좋듯이. 이대로 하지 않는 검사들이 많다면 그들의 문해력을 의심해 봐야 한다. 설마 그 정도로 문해력이 떨어지지는 않겠지...


<검사 선서>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듯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대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임은정, 계속 가보겠습니다. 메디치, 2022년. 초판 5쇄. 318쪽.)


이 선서문에 덧붙일 말이 없다. 이 선서대로 검사 생활을 하면 된다. 그러면 욕먹을 이유가 없다. 견찰(犬察)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선서가 선서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내부 비판자가 있는 것이다. 내부 비판자 없는 조직은 고인 조직이고, 곧 부패한 조직이 된다. 


그러니 이 선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를 감시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최종 판단은 국민이 한다. 그러니, 국민 모두가 검사들이 임용이 될 때 이런 선서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의사들이 임용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듯이. 그래야 당신들 이렇게 선서했잖아 할 수가 있다.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임은정 검사의 이 책을 읽으며, 불경의 이 구절들이 생각났다. 종교와 상관없이, 임 검사는 이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있었다는 생각.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검사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아는 것이 풍부하고 진리를 분간하며 고매하고 영특한 친구과 사귀라. 이는 여러 가지로 이로우니, 의혹에서 떠나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수타니파타, 김운학 옮김.범우사. 2007년 2판 4쇄. 21쪽)


세상의 유희나 오락, 쾌락에 만족하지 말고, 이에 끌리는 일 없이 겉치레를 떠나 진실을 말하며,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수타니파타, 김운학 옮김.범우사. 2007년 2판 4쇄. 21쪽)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걸어가라. (수타니파타, 김운학 옮김.범우사. 2007년 2판 4쇄. 22쪽)

 

임 검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래서 책 제목도 '계속 가보겠습니다'이니, 앞으로 검찰이 검사 선서와 같이 행동하는 검찰이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말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검사들이 이 책을 읽을까? 특히 검사장급 이상 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권력을 쥔 자일수록 자신에게 반대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담 이 책이 지닌 효용은 무엇일까? 검사들에게 읽힐 목적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읽힐 목적이지 않았을까? 검찰은 권력을 위임받은 존재들이니까, 권력을 위임한 사람들이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위임한 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않는다는(또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제대로 행사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으니까.


그럼 검사들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하지? 자신들이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검사에게 주어진 업무량이 너무도 많아서, 사건 기록들만 보기에도 너무 바빠서, 자신들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도 없다고 하면... 그건 직무유기 아닐까? 


남들에게 '피드백, 피드백'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피드백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고인물이라는 증거 아닌가. 


짧은 소설 하나 추천한다. 검사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 소설 주인공은 검찰이 아니다. 경찰 출신이다. 그리고 사서들. 하지만 그 경찰을 검찰로 바꾸어도 된다.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책을 읽었지만, 읽을수록 자신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인물.


김연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내겐 휴가가 필요해'라는 소설이다. 소설 속 경찰은 깨닫기라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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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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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김연수 소설집을 읽으면 맨 처음에 실린 소설에서 이 소설집의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소설들을 그 틀에 끼워맞추려고 한다. 그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무언가 일관성을 찾으려고 한다.


이 소설집에서는 '암흑물질'에 꽂혔다. 암흑물질,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물질인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물질. 그것도 우주의 9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하니, 빙산이나 무의식을 생각하면 된다. 빙산도 우리에게 보이는 부분은 10%가 채 안 될 수도 있고, 우리 무의식 역시 의식에 비하면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으니...


암흑물질은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찾지 못함, 이는 아직 우리에게는 알지 못하는 세계라는 뜻이기도 한다. 불가지(不可知)의 세계. 알 수 없으니 말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알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지는 않고, 또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삶을 보여주는 소설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김연수 소설집을 읽으면서 다양한 삶이 나오지만, 이들 삶은 필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겪는 일들은 우연들이 겹치면서 이루어진다. 우연들은 예측을 빗나가고, 나중에야 한 줄로 꿰어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됐구나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소설집에 첫번째로 실린 소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이 구절이 나를 김연수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이 구절에 매이게 만들었다.


'암흑물질은 관측이 불가능하므로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는, 이 어둡고 비밀스럽고 거무스름한 물질이 우리 우주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11쪽)


이 구절이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달로 간 코미디언'과 연결이 된다. 시각장애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무엇. 그것을 생각하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관장은 자신이 보지 못하게 되면서 시각적 세계가 사라졌듯이 그 시각적 세계 안에서 자신의 몸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 투명인간의 존재, 유령의 존재가 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275쪽)

 

시각장애인이나 암흑물질뿐이 아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일부분에 불과할 뿐. 그러니 삶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가 힘들다. 알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정해져 있지 않으니, 시각장애인이 사막으로 걸어가듯이 우리는 삶이라는 사막을 매순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소설집 제목이 된 '세계의 끝 여자친구'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세계의 끝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삶은 다양하고, 모르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모르는 세계, 그렇지만 막연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계. 우리는 그런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구도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모르는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에 지금 눈 앞에 있는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내가 보고 듣고 겪고 있는 현실이 다가 아니라는 것. 그 점을 이 소설집을 통해서 명심하게 된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알지 못하는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 그런 불가지의 세계가 또는 암흑물질이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삶은 보이지도 말해지지도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여주인공의 이 말이 바로 우리 인생이 암흑물질로 가득차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한다. 이것이 인생임을.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외로워져.' (237쪽)


우리 인생은 이렇게 편집되지 않는다. 바로 편집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요소들이 우리 인생에 있다. 이번 김연수 소설집을 읽으며 인생이란 참으로 많은 암흑물질로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불가지의 세계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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