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환상문학전집 10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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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이다. 세계 SF소설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이란다. 하인라인이라는 사람. 지금까지 읽은 작품은 없다. 아시모프나 클라크는 읽어봤는데. 그러니, 이번 참에 한번 읽어보자 하고 고른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간적 배경은 달이다. 시간적 배경은 SF소설들이 택하고 있듯이 미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쓰인 때로부터 100년 정도 뒤로 설정을 했다. 가까운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미래를 앞두고 있음에도 소설 속에서 실현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이제야 다시 달 개척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으니.


하지만 소설의 배경을 지구로 갖고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SF소설들이 택하고 있는 시간, 공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혁명에 관한 소설이다. 혁명을 조직하고, 이끌고, 혁명이 완수된 다음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달은 지구 식민지와 비슷하다. 식민지라기보다는 지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형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달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SF소설답게(? 그런 말이 통용될지 모르지만) 인간과 대화를 하는 컴퓨터가 등장한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컴퓨터. 이 컴퓨터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 진행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슈퍼컴퓨터의 등장 -> 컴퓨터와 인간의 교류 ->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의 만남 -> 그들과 컴퓨터의 연대 -> 혁명의 조직 및 시작 -> 전쟁 -> 승리


이것이다. 달이 지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의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결국 승리한다. 승리한 다음에는 혁명의 주역들은 빠져야 한다.


혁명의 주역이 남아 있으면, 그들에게 권력이 집중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소설은 컴퓨터는 인간과 교류를 하지 않으며, 가장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던 혁명세력인 교수는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 서술자로 등장하는 사람 역시 정치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혁명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과 혁명 이후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달라져야 한다. 게다가 컴퓨터는 과정에만 존재해야지, 혁명 이후에도 존재한다면, 인간의 삶이 기계에 종속되기 쉽다.


인간적인 컴퓨터의 등장,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가족 형태의 다양성, 그리고 독립.


독립해서 사는 삶.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를 이루면서 사는 삶. 이것은 지구 여러 나라들이 지켜야 할 모습이기도 하고, 그것이 정치에서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일방적인 힘의 논리로(그것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관계여선 안 된다. 하인라인은 냉전 시대에 이 소설을 썼다. 미국의 독립을 빗대어 달이 독립을 선언하는 날을 7월 4일로 잡았지만, 러시아 혁명을 빗대어 혁명가들의 조직과 그들의 비밀 결사, 또 실행을 보여주고 있다.


혁명과정에서는 비도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온갖 음모가 발생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어야 함을, 그리고 한 나라가 한 나라를 지배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달세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에도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이뤄내는 달세계 사람들의 모습에서 세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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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이 뻔한 질문이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니. 당연한 말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이 질문 앞에 한 문장이 더 있으면 쉬운 대답이 나올 수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라는 문장.


  누군가에게 닥친 비극 앞에서 그냥 일상을 유지해도 될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양, 당신은 사랑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관심도 없는 사람, 그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죽음과 자신의 삶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은 남일뿐.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고 질문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그 사람은 사랑을 지니고 사는 사람.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손미 시집을 읽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너무도 많은 죽음과 또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있음을, 우리는 죽음 속에서도 삶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슬픔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슬픔 속에만 매몰되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다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 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뻣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손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민음사. 2020년. 1판 5쇄. 35쪽.


이렇게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도 된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남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죽음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 죽음과 더불어 삶이 지속된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 한다. 피지도 못하고 사그라지는 죽음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 죽음이 많으면 우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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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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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색깔을 합치면 검정이 된다. 여러 빛을 합치면 하양이 된다. 검정을, 하양을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


검정 속에는 수많은 색들이 들어 있다. 하양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단순히 검정을 보면서 참 단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색을 인생으로 바꾸면 마찬가지 말이 성립된다. 삶을 거친 많은 일들을 합치면 하나의 인생이 된다. 참으로 평범한 인생이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한다. 한 사람이 죽는다. 죽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글을 남긴다. 그 글을 읽는다. 글 속에서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가 죽 펼쳐진다. 별것 없다. 그것이 다다. 그런데, 소설이 중간을 넘어서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문득 이야기가 다양하게 분화된다.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보이는 삶 속에 보이지 않는 삶들이, 기록된 삶 속에 기록되지 않은 삶들이, 실현된 삶 속에 실현되지 않는 삶들이 무수히 많다. 그 많은 삶들이 이게 바로 나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신은 평범한 삶이라고, 남들에게 무난하게 보이는 삶을 삶이라고 여겼던 것과 더불어 너무도 다양한 삶을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별다른 감흥 없이 흘러가던 소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글의 필체가 단정함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변해가면서, 하나의 논조로 흘러가던 인생 이야기가 여러 이야기가 겹쳐서 나오면서 흥미로워진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사람에게는 "맞아, 이게 인생이었어. 나도 이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평범한 삶을 산 내가 있고,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가 있고, 또 우울한 내가 있다. 단지 세 인생? 


아니다. 더 많은 인생이 있다. 소설에서는 여덟가지 인생이 있다고 하는데, 더 많다. 이런 인생 말고도 내 안에는 다른 존재들이 함께 있다. 그러니 이 평범한 인생에는 수많은 인생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213쪽)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서 쓴 말이다. 무난한 삶과 격동적인 삶,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삶, 여기에 순간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삶, 또 마음 속에 꼭꼭 감추어야 두어야만 했던 일탈에의 추구 등등.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 마음들이 소설 후반에 드러나면서, 평범함 속에 감추어져 있던 많은 인생들이 드러나면서 그렇게 우리 인생은 단순하지 않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그럼에도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 평범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인생들이 합쳐져 하나의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 앞의 삶은 영웅이라고, 천재라도, 기인이라도 모두 평범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마치 많은 색들이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색이 되듯이.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누구도 삶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남의 삶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는 삶말고도 더 많은 삶들이 그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 결코 평범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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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함을 칭송하는 경우는 많아도, 두려움을 칭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두려움은 나약함이고, 남에게 드러내면 안 되는 결점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삶창 131호를 읽다가 '두렵다고 말하라(박총)'는 글을 읽고 '맞아, 그래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행동하지 않게 한다. 신중함, 두려움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물론 두려움에 먹히면 안 된다. 용감함에 먹혀서도 안 되지만, 두려움에 먹히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다만,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두려워 해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는 말, 좋은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번 더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는 말을 자기 합리화 하는데 쓰면 안 된다. 그것은 두려움에 먹힌 모습이다.


두려움을 지니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쪽으로 밀고나간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약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들이 나약한 사람일까? 신념으로 총을 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나약한가? 그들이 총을 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겪는 일들은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그들은 총을 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두려움이 다시 용기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두렵다고 말하라. 두렵다는 말을 들으라. 그리고 함께 걸어가라'(40쪽)이 마음 속에 박힌다.


삶창 이번 호를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을 만나면서, 또 시를 통해서 삶을 만나게 되어서 좋았는데... 이인휘의 산문 마지막 부분이 마음을 울린다.


과연 그때 그 장면이 과거에만 머물고 있을까? 이런 말들이 지금도 통할까 봐, 두렵다.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몇 십 년을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인휘 산문을 읽으면서 들었으니... 


"난 공장 다니는 아이들 싫어. 그리고 그 모자 너무 창피해.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길 바랄 테니 다시 찾아오지는 말아줘." (102쪽)


지금 말로 하면 초등학교, 그때 말로 하면 국민학교 때 사귀었던 아이가 돈이 없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 교복을 입고 찾아왔을 때 부유한 집안 딸이었던 아이가 한 말.


경제적 차이로, 학벌 차이로 이렇게 단절이 되는 사회, 이젠 그런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기어나오는 느낌이지.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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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 우리가 영화를 애정하는 방법들
김도훈 외 지음 / 푸른숲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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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다섯 명의 글쓴이가 있다. 모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나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 비하면 많은 편이다. 적어도 20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들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라떼는'이 되기 쉽다. 하긴 요즘은 20대도 '라떼는'이라고 욕먹을 때도 있다.


그만큼 세상은 확확 변하고 있다. 세대 간 차이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런 차이들이 우리 사회를 더 다양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차이를 다양함으로 인정만 한다면.


'라떼는'이 군림하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해 준다면, 꼰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야기는 재미 있기 때문이다.


나하고 관계 없는 사람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인생.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다만, '그러니까 너도 이래야 해.' 하면 안 된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라떼는'은 '꼰대'가 된다.


자, 그렇다면 이 책은 '라떼는'에 머물러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인가? 아님, 영화는 이렇게 봐야 해라는 '꼰대'로 나아가는 책인가?


처음에는 글쓴 사람들이 영화를 만나는 이야기가 실렸다. 그래, 그들이 어떻게 영화를 만났고, 영화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냥 읽으면 재미 있다. 


우리도 한번쯤은 겪어봤을 그런 일들.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도 한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아주 오래 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어쨋든 어떤 나이 대가 읽든 앞부분은 재미 있다. 옛날 이야기 싫어하는 사람은 드무니까. 거기다 자신과 비슷한 세대 사람이 지내 온 삶을 엿보는 일 역시 재미 있으니까.


뒤로 가면 이제는 영화와 관계맺는 일 이야기가 펼쳐진다. 참 다양한 일이 있겠지만, 이들을 엮어주는 공통점은 영화다. 그래, 영화, 그 자체가 재미 있는데,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 재미 없을 수가 없다.


이들은 영화에 대해서 비평을 하지 않는다. 영화 비평, 화려한 말들과 전문 용어가 뒤섞여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따분하다. 그냥 자기 자랑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지 않다. 남에게 보이는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기 영화 이야기를 한다. 남들이 뭐라건 그냥 자기 맘 속에 있는 영화, 영화 감독, 영화 음악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이들이 이야기하는 '라떼는'은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를 당하지 않으니, 한발 더 나아가고 싶어진다. 책은 그 점을 파고든다. 그래, 영화에 관련된 글이 있지. 그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나.


답, 없다. 이 역시 자기들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몇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임을 밝힌다.


따라하든, 따라하지 않든, 그건 읽는 사람 몫이다. 그냥 '나는 이래.'라고 말뿐이다. 이런 태도가 좋다. 읽기에도 편하다. 게다가 한 장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앙케이드1-7'이 재미 있다.


솔직하다. 마지막 앙케이트는 압권이다. "이 책의 예상 판매 부수는?" 다섯 명이 모였으니,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요즘 종이책이 잘 팔리는 시대는 아니다.


게다가 온갖 매체를 통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지금, 예전 영화 얘기를 하는 책이 잘 팔릴 턱이 없다. 영화는 보는 것이지 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들이 최대로 예상하는 부수는 1만부다. 그 정도가 팔렸는지 궁금하다. 5쇄 정도는 찍어야 한다는데.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러려면 이 책에 나온 말처럼 첫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책으로 따지면 제목이다. 제목이 그 역할을 하고 있나? 자신들의 글쓰기 기법을 말해 준 사람들이 쓴 책인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영화평도 리콜이 되나요?' 리콜이라는 말 때문에 읽을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리콜은 이미 나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시 불러온다는 말이니까, 분명 예전 이야기가 나올 거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런 기대가 책을 살 수도 있게 한다. 과거는 추억으로, 다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이 책은 '라떼는'이 추억이 될 수 있음을, 꼰대가 아니라 추억에 잠기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 나온 영화들이 다 '라떼는'은 아니다. 최근 영화들도 많다. 그냥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읽으면 재미 있는 그런 책이다. 5인 5색이기도 하지만, 그 5인이 모여서 내는 공통된 색도 있기에 재미 있게 읽었다. 


덧글


잘 이해 안 되는 문장이 있다. 김도훈이 쓴 'CG지옥에 빠진 영화들'이란 글에서.

책에 실린 문장은 이렇다.


'조지 루카스의 말은 맞다. 유화의 시대가 오면서 프레스코화의 시대는 저물었다. 그러나 특수효과의 시대는 아직 유화에서 프레스코화로 완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언젠가 CG기술이 지금보다 진화하는 날이 온다면 크리스토퍼 놀런 역시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포기하고 CG의 세계로 완벽하게 귀의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영화는 이제야 아날로그의 시대에서 CG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을 뿐이다.' (175-176쪽)


이 문장에서 '아직 유화에서 프레스코화로 완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는 '아직 프레스코화에서 유화로 완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가 아닐까. 


앞에 '프레스코화의 시대가 한순간에 사라졌듯이 고전적인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시대는 거의 한순간에 사라졌다'(170쪽)는 문장이 있으니, 프레스코화는 아날로그 특수효과, 유화는 CG 특수효과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문장, 다시 검토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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