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 단 한 명의 백성도 굶어 죽지 않게 하라
박영서 지음 / 들녘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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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다. 국사 시간에 배운, 삼정의 문란으로 조선이 혼란해질 때, 그 삼정의 문란 가운데 환곡이 잘못 운영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환곡이 어려운 사람을 구제해주는 역할을 하려는 취지에서 어긋나 백성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쓰였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이러한 환곡을 조선의 복지제도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제도라고 하고 있다.


즉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백성들의 삶을 생각함은 굶주리는 백성이 없게 해야 한다는 정책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한 정책이 바로 환곡이라는 점이다.


먹을거리가 없을 때 빌려가서 추수가 끝난 다음에 갚는, 그것도 아주 싼 이자를 지불하고 갚은, 지금 말로 하면 저이자 대출을 받아 생활할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냥 생각해도 좋은 제도다. 그런데 쌀을 어떻게 빌려주지? 빌려줄 쌀이 있어야지. 그러한 쌀을 확보하는 방법은 환곡과 세금의 연결이다.


환곡이 세금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환곡과 세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즉, 국가의 곳간이 차 있어야 베풀 수도 있는데, 그러한 곳간을 채우는 수단이 환곡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환곡은 늘 일정한 수준이 비축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풍년이 들어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도 환곡은 창고에서 썩고 있어서는 안 된다. 유통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상태라면 환곡은 흉년이든, 풍년이든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보태서 받아야 한다.


그런 제도, 즉 늘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야 하는 제도라면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모두가 될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지만.


조선초기에는 그럭저럭 싼 이자로 운영이 되던 환곡이 조선 중기부터 이자가 많아지더니, 후기에 가면 아예 환곡으로 인해서 사회가 휘청거릴 정도가 됨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바로 세금과 환곡을 연결시킨 데서 나온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환곡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리, 부패 등이 만연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증세를 했느냐 하면 하지 않았으니, 세금은 오르지 않았는데, 세금으로 충당해야 할 지출은 늘었으니, 그 사이에 온갖 비리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한다.


왕-지방관-백성의 처지에서 환곡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겠지만, 지방관들 역시 환곡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환곡이 바로 지방재정이니, 그것을 유지 관리하는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필요할 때 빌리지도 못하고, 또 쭉정이를 받아와 알곡으로 갚아야 하는 현실이 되기도 했다고 하니.


복지제도가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작용을 하기도 함을, 조선시대 환곡을 통해서 볼 수 있기도 하다.


저자는 조선시대 복지제도를 이야기하면서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복지제도가 필요할지 생각해 보자고 한다. 과거 복지제도를 이야기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고 한다.


선별복지냐, 보편복지냐 지금도 논쟁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환곡은 증세 없는 선별복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던 제도라고 하면서,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 환곡 제도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복지제도를 생각하자고 한다.


자신은 보편복지가 옳다고 생각한다지만, 독자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것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시대 복지제도를 이야기하는 것, 지금 우리 시대 복지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복지제도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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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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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예전 만화에서나 들을 법한 이름. 그런데 소설에 마법소녀가 등장했다. 환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물론 마법을 부린다. 미래를 보는,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거대하게 변하는 등등의 마법을 부리는 소녀.


그런데 왜 소녀일까? 한때 만화영화 중에 '세일러문'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가? 아니면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시공간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나?


물론 소설에서 마법소녀들은 자신만의 마법을 행사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마법을 각성한 소녀들. 그리고 그들은 자신만의 마법 기물을 가지고 다닌다.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앞에 마법소녀가 나타나, 당신이 시간의 마법소녀라고 말한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소녀. 얼마나 매력적인가. 게다가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지구가 겪고 있는 기후 재앙을 해결할 수가 있단다.


기후 재앙으로 지구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질 때 그를 시간의 마법소녀가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그렇다. 위기에서는 늘 영웅이 나타난다.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벤져스'가 나타나지 않던가. 어릴 적 보았던 마징가Z나 태권V, 또는 세일러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위기를 다른 존재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초한 위기를 특정한 영웅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마법 기물, 주인공은 자신이 마법소녀라는 사실도 잘 믿지 않지만, 또한 기물(소설에서는 '마구'라고 나온다)로 받은 것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는 데서 실망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은 변신도 잘 못하고.


마법소녀들의 일에 관객으로 참여하기도 하니, 참... 그러다 자신이 시간의 마법소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그 마법소녀에게 인류는 지구의 악이다. 척결해야 할 존재다. 어차피 망해가는 인류, 그 시간을 좀더 앞당기려 한다. 그러다 주인공을 비롯한 마법소녀들과 대결하게 되고... 주인공이 어찌어찌해서 시간의 마법소녀를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마법소녀에서 은퇴한다.


참, 환상적인데... 가만히 보면 현실을 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우선 '마구'로 나오는 마법 기물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의 끝부분에 가면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알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의 손해가 될 수 있다. 어떤 일에도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신용카드, 눈에 돈이 안 보이지만 쓰는 순간 어디에선가 돈이 빠져나간다. 결국 공짜는 없다. 지구에 기후 재앙이 몰아닥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한 행동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힘의 집중과 분배를 생각할 수도 있다. 제로섬 게임, 총량이 같다고 가정하면 누군가가 지닌 막강한 힘은 다른 사람들은 힘이 약화되었단 얘기다. 반대로 누군가가 지녔던 막강한 힘이 소멸된다면 그 힘이 소멸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이야기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다. 영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공짜는 없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세상을 바꿨다가는 그 대가를 다시 치러야 한다.


그러니 마법소녀는 은퇴해야 한다. 마법소녀가 마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 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 소설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그 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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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 지친 마음에 힘이 되어주는 그림 이야기 자기탐구 인문학 5
태지원 지음 / 가나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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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이 필요한 시대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호모 데우스가 되어 가고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보면 정말로 위안이 필요하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분노와 불안이 나를 감싸고 있다. 제자리 걸음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뒤로가는 상황이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게다가 사회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살기 편해진 세상이 아니라, 더 살기 힘들어진 세상이 되었다. 재화는 늘어났지만, 불평등은 심해졌고, 민주주의를 이루었다지만, 그것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토의나 토론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법에 의존하는, '법대로' 공정을 외치는 사회가 되었다.


안전?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인간 생활이 편리해졌다지만, 그만큼 과연 우리 삶이 안전해졌나? 산업현장에서는 여전히 안타까운 죽음들이 생겨나고, 축제 현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으니, 마음을 위로해줄 때가 지금이다.


이때 마음에 콕 들어오는 책을 만났다.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우선 밤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밤,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때. 많은 것들을 가려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때. 여기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동적인 자기에서 정적인 자기로 돌아오는 때.


밤과 캄캄함. 캄캄하다가 불안하다가 아니라 쉬다와 연결이 되는 단어가 '밤'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때.


밤에 더해서 그림이다. 그림은 정적이다. 움직임이 없다. 이 움직임이 없는 대상을 내가 끌어와 내 맘 속에 담는다.


그림에 내 마음을 담고, 내 생각을 담는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 밤과 같은 그림에 나만의 무엇을 불어넣는다. 그러면서 그림 앞에서 나는 고요해진 나를 만난다.


그러니 그림으로 나를 위로할 수밖에 없다. 밤과 그림이다. 어떤 그림? 정할 필요가 없다. 정해지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자신의 눈에,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가민히 보고 있으면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 또 그림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저자도 그랬다. 그런 과정을 글로 담아냈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꼭 따라갈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장소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두고 그림을 보면 된다. 


그림에 자신을 담으면 된다. 그러면 위안을 받는다. 가령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를 보자. 이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작은 제목을 '부적응의 세계를 건너는 법'이라고 붙였다.


부적응의 세계. 남들은 다들 적응을 잘하는데 난 왜? 이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과연 부적응이 남들에게 뒤떨어진 것일까?


마네는 당시 화단에 부적응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그림은 그를 온갖 비난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포기했던가. 남들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던가. 아니다. 그는 그냥 당시 사회에 적응하길 거부했을 뿐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 그렇다고 그가 세상 전체로부터 버림받았는가? 아니다. 마네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에 부적응의 대명사였던 그 그림들이 지금은 명화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니 저자가 한 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힘껏 노력해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시간이 부적응의 무게를 해결해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노력으로도 적응할 수 없는 일이 간혹 존재하는 법이다. 부적응이 반드시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당신 내면의 규칙과 기준이 완전히 잘못되거나 틀린 것도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나와 맥락과 문법이 맞지 않는 세상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부적응의 상태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기와 세상을 건너는 일. 그저 그런 일일 뿐이다.' (281-282쪽) 


난 열심히 노력했는데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저자처럼 이렇게 생각해도 좋겠다. 아니면 다른 그림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아도 좋겠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 자체는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세계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그림에 자신을 담는다는 것이니까. 움직임이 없는 그림에 마음의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그림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가 된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고민, 다양한 그림들이 나와서 읽으면서 그림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 위안을 받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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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대화를 시작합니다 - 편견과 차별에 저항하는 비폭력 투쟁기
외즐렘 제키지 지음, 김수진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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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의 공통점은? 종교인이라고 답하면 일반적이다. 종교인보다 더 구체적으로 가면 이들 모두 유일신을 믿는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들이 믿는 신은 같은(

?) 신이다. 같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이들의 뿌리는 같다.


그런데도 이들의 갈등은 심하다. 심하다고 하기보다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혐오한다.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서로 혐오하지 않고 잘 지낸다고? 아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유대인을 기독교인들도 혐오했다.


수많은 유대인들 학살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된다. 무슬림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이슬람 교도라고 불리는 무슬림들은 많은 혐오와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또 다른 국가 사람들을 편견과 혐오로 대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는 혐오와 편견이 넘쳐나고 있다.


단지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행동이 바로 폭력으로 나타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전쟁으로까지 치닫는다.


사람들 사이에 장벽이 처진다. 너무도 두꺼워서 넘을 수 없는 장벽. 외부의 장벽이 아니라 내부의 장벽이다. 이 장벽은 철벽이다. 깨뜨릴 수가 없다. 그래서 편견은 더 강화되고, 편견이 혐오로 더 나타난다. 혐오는 배제를 부르고, 배제하기 위해서 폭력을 부르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혐오는 일방이지 않다. 양방일 가능성이 많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라 양방이다. 서로가 자신은 편견이 없고, 특정 집단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편견으로 대하고 혐오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는 책을 읽고, 소식을 듣고, 그런 사람들만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계속된 편견의 강화.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된다.

 

이런 상황. 무슬림 여성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 편지를 받은 사람. 협박을 받은 사람. 그런 사람이 생각을 바꿔서,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한다. 그래, 그들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만나봐야겠어.


그러면서 자신에게도 혐오 감정이 있었음을, 편견이 있었음을 깨달아 간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사람들을 뭉뚱그려 판단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나게 된다.


세상에 혐오가 넘칠수록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포기하지 않고 대화하는 길만이 혐오를 없애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대화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려 한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담았다. 무슬림을 쫓아내려고 했던 극우민족주의자들부터, 종교인, 무슬림, 유대인, 평화운동가들까지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그들과 대화를 한다.


혐오는 결코 일방향이 아님을, 혐오는 쌍방향임을, 그래서 힘들더라도 계속 대화해야 함을. 아직은 평화의 길이 멀지만, 포기하지 말아햐 한다고. 이 책의 저자 외즐렘은 말한다.


혐오와 편견은 다른 집단(종교, 민족, 국가 등)간에만 있지 않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혐오와 편견이 작동한다. 그래서 더욱 더 대화가 필요하다. 


혐오와 대화를 시작한 외즐렘. 그 과정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임을 깨달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 역사 편견에 사로잡혀 혐오 표현을 너무 쉽게 하고 있지 않나. 혐오 표현이 말을 넘어 행동으로까지 가지 않나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에 나온 구절 중에서 계속 생각해야 할 구절을 적어본다.


'그들의(인종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분노는 그런 불공정을 만들어 낸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평등하게 법을 해석하지 않는 지방정부나, 인턴 자리를 만들지 않는 기업들을 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대신 그들은 분노의 화살을 서로에게 겨냥하며 상대를 비난한다.' (75쪽)


'이름, 종교,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지유권을 누리는 민주적 공동체 안에서 모두 환영받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임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폭력은 대화를 대신해서 변화를 창출하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01쪽)


'불평등은 좌절감과 적대감을 낳는다.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압력을 받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서로에게 달려들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인종 혐오의 대부분은 불평등이 그 씨앗이 되고 있다.' (128쪽)


'민주주의 문화를 이루는 필수 요소에는 서로 다른 견해를 존중하는 태도와 열린 토론 과정이 포함된다. 이런 태도와 과정이 보장되면 우리는 폭력이 아닌 말을 사용해서 안전하게 전쟁을 할 수 있다.' (205쪽)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 그 대신, 치열한 논쟁을 한다. 설혹 취약층 사람들이 불공정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찾더라도, 그들이 보기에도 내가 하는 반대 주장이 명백히 보이도록 말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독재의 차이다.' (216쪽)


'우리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꼭 매달릴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꼭 잡아야 한다.'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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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귀환'이라는 신 무협소설이란다. 표지 그림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웹을 통해 읽었고, 종이책으로도 발간이 된다고 한다.


 '화산파'하면 무협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안다. 검술의 명가로 알려진 무술 집단. 소호강호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화산파' 제자다. 


  이렇게 화산파는 무협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무협소설에서 의협을 중시하는 사람들. 바로 의협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정의를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무협인들이다. 그리고 화산파는 그런 무협을 실천하는 정파의 대표이기도 했다. 검이 아닌 권을 쓰는 무당파와 함께.


그런데 '귀환'이란다. 귀환이란 다시 돌아옴이니, 화산파가 무너졌음을 전제하고 있다. 제목에선. 왜 화산파가 무너졌을까?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호에 실린 내용만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악한과 싸우는데 너무 힘을 써서 싸움이 끝난 후 더이상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거악을 척결했는데, 작은 악들이 나와서 그들을 탄압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일어서야 한다. 일으켜야 한다. 그러니 제목이 '화산 귀환'이다. 소설에서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화산이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많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독재라는 거악과 싸워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하는데,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지? 혹시 독재를 대신한 다른 무엇들이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과연 독재를 물리쳤을 때 지녔던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을 한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화산 귀환'처럼 민주주의의 귀환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그동안 자신의 틀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을 하게 된다. 이번호에 실린 정지혜의 글 '아직 도착하지 못한 조사(弔詞)'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문상(問喪)과 조문(弔問)이라는 한자에는 하나같이 '問(물을문)'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상주를 위문한다는 저 말에 새겨진 '묻기'란 대체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기억하고 남겨진 자의 안부의 안위를 묻는 일일 겁니다. 안부와 안위의 확인은 물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뜻일 겁니다. 물어야 합니다. 묻습니다.' (15쪽)


물어야 한다고. 그런데 답이 없으면? 계속 물어야 한다. 답을 할 때까지. 물음은 곧 행동이다. 물음이 곧 민주주의다. 물음이 없는 사회는 닫힌 사회다. 물음과 대답이 있어야 한다. 대답에는 또 다른 물음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자신만의 틀을 지니고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물음도 답도 없어진다. 그것을 '쪼가 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칭찬만 할 말이 아니다. 쪼는 곧 자신만의 틀이라는 뜻인데, 자신의 쪼만 유지한다면 발전이 없다. 


즉, 물음이 없어진다. 대답을 하지 않게 된다. 이번호에 쓴 정문정의 글 '쪼, 나의 개성이자 한계점'은 이렇게 정지혜의 물음과 연결이 된다. 


'쪼가 자기만의 개성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세계로는 넘어가기 힘든 제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49쪽)


이 말은 물음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표지 그림을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화산 귀환'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귀환'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과연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빅이슈 이번호는 그런 물음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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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29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잡지의 표지도, 신무협소설이라고 하는 <화산 귀환>도 흥미롭네요~^^ 화산파 말씀하신대로 무협소설에서 단골손님이죠. 화산도 중국에서 명산이라서인지 장소로서 참 자주 등장하더군요^^
그나저나 거악을 퇴치했는데 작은 악이 다시 등장한다라... 지금은 작은 악이 아니라 더 큰 악이 찾아온듯 싶어서 난감합니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어도 계속 물어야겠죠.

kinye91 2022-11-29 14:42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작은 악이 아니라 더 큰 악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물음, 질문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꼬마요정 2022-11-29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산귀환은 천마라는 마교의 교주를 정파들이 합심해서 제거 했는데, 그 중에 화산파 제자 청명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마교의 머리를 벤 뒤 죽었다가 어린아이로 환생하는 이야기 입니다. 청명이 환생하고 봤더니 화산파가 망했더라는거죠. 그래서 자신이 화산파를 재건하려고 합니다. 저도 다 안 읽어서 어찌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ㅎ 힘을 합치면 아무리 큰 악이라도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

kinye91 2022-11-29 21:29   좋아요 1 | URL
저도 화산귀환은 읽지 않았지만 ...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