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의 삶 (리커버 에디션) - 우주인에게 묻다
팀 피크 지음, 이광식 옮김 / 들메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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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관한 이야기에는 사람보다는 천체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광활한 우주, 그 끝없는 공간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은 우주.


그래서 우주에 관한 책은 별들에 관한 책이기도 하고, 과학기술에 관한 책이기도 했다. 여기에 직접 우주에 나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우주개발의 역사에서 우주인들이 어떻게 생존하는지, 그들이 착용하는 우주복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이다.


우주에 직접 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영화나 소설 속에서 만나는 우주 공간에 있는 사람이야기를 이 책은 다루고 있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약 6개월을 생활하고 돌아온 우주인. 그가 겪은 이야기를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 책은 전개되고 있다.


먼저 우주로 나가기 전, 즉 발사되기 전까지의 준비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떻게 우주인을 선발하고 교육하고 준비하는지... 또한 우주로 나아갈 때 어떤 상태로 우주선에 타는지 등등에 대해서.


그 다음은 국제우주정거장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해준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어떻게 다른지.. 세상에 시속 26,000킬로미터 정도로 돌고 있는 우주정거장에서의 생활이라니...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의 생활과 별로 다르지 않다.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고 쉬고, 먹고 자고... 음식이 지구의 것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그렇게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고, 샤워를 하지 못할 뿐이지, 다른 생활들은 큰 차이가 없다고...


물론 차이는 있다. 거의 무중력이라고 할 정도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주 밖으로 유영했을 때 일어나는 위험에 대해서도, 또 우주충돌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우주쓰레기들이 있는데, 이들이 어쩌면 우리가 우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예전에 읽고 아직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오줌의 식수화. 국제우주정거장에서는 이미 실현되었다고. 그렇게 오줌을 정화해서 다시 순환시킨 물도 사용했다는 말이 이 책에 직접 나온다.


우주로 가면 피가 끓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도 하고, 다만 끓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고 하고, 우주에서 생활하다보면 소위 잠수병과 비슷한 병에 걸리기도 한다고 한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반 년을 산다고 생각해 보라. 지구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우주인들은 더욱 세심하게 자신들을 관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좋은 점은 지구를 볼 수 있다는 점. 지구에서 4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지구.


저자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있으면서 사진 찍기를 취미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다음에는 지구로 귀환하는 모습을 이야기해준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착륙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행처럼 돌아오기는 힘들다고. 앞으로는 나아지겠지만, 적어도 저자가 돌아온 2016년 러시아 소유즈 우주선은 쾌적한 착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위험이 있다는 사실. 우주인들의 삶이 환상이 아니라 실제임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제우주정거장에서 10일 넘게 생활한 우주인을 배출했다. 물론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를 기반으로 우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우주인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런 사람들에게 우주인들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있는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달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가지고 달에 기지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하고, 누구는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호언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우주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우주인을 꿈꾼다면 우주에서의 삶이 어떤지를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는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평소 우주에서의 삶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었다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형식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는 이 책.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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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그러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죽음과 삶은 양면이다. 한 면이 보이면 다른 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늘 함께 존재한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죽음은 삶과 함께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삶은 죽음과 함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은 끝이라고 하지만, 그 끝은 개인에게 끝일뿐, 다른 존재에게는 지속일 수 있다. 결코 끝이 아니다. 기억 속에서 죽음은 삶으로 지속된다.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하면 막 살아서는 안 된다. 죽음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세상 어떤 죽음이 가볍겠는가? 죽음은 한 사람에게는 전부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은 전부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다들 겸허해진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해야 한다. 요즘은 죽음 앞에서도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하지만, 그런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 역시 언젠간 죽음에 이른다. 죽음에 맞닥뜨린다. 자신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관계 있는 죽음을 만나게 된다. 죽음 앞에서 겸허해져야 할 이유다.


김혜순 시집을 읽었다. 죽음에 관한 시 49편이다. 49재를 연상하게 하고, 티벳사자의 서에서 죽은 후 49일동안 겪는 일들을 생각하게도 한다.


웹툰과 영화로 나온 '신과 함께'도 연상하게 하고... 그렇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죽음들이 연속되지 않는다. 한 죽음이 49일동안 겪는 일이 아니라, 여러 죽음들이 나온다. 어쩌면 죽음의 양상들을 살피고, 죽은 뒤에 겪는 일들을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음이란 결과는 같지만, 그 과정은 다들 다를테니까. 49일동안의 죽음 여정 또한 같을 수가 없겠지.


이 시집에서 34일째에 해당하는 시가 와닿았다. 요즘 일어난 사건들과 연관지어서. 이렇게 비슷한 사건들이, 막을 수 있었던,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제대로 된 사과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우글우글 죽음

  서른나흘


네위에

네아래

네곁에

네밑에

네옆에

네너머

네뒤에

네안에


누가 밤을 면도날로 긁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면도날 긁힌 자리마다 밤이 잠깐씩 환해진다고 말해야 하나


네가 울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네가 칭얼거리는 어린 죽음들에게 젖을 물린다고 말해야 하나


통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해야 하나

우리는 지금 마악 만난 사이라고 말해야 하나


벽에 머리를 쿵쿵 박고 있다고

비명이 수정처럼 차오른다고

벌써 목구멍까지 투명하고 딱딱한 수정이 올라왔다고 말해야 하나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9년 초판 4쇄. 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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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자들 - 폭력은 빈곤을 먹고 자란다
게리 하우겐 외 지음, 최요한 옮김 / 옐로브릭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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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CUST EFFECT'라고 한다. 우리말로 간단하게 번역하면 '메뚜기 효과'다. 메뚜기? 곤충, 그리고 그가 일으키는 효과?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메뚜기를 메뚜기떼이라고 번역하면 이해가 될 수 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백, 천 마리가 아니고 수 억마리의 메뚜기떼가 날아온다면, 그 마을은 폐허가 된다. 식량을 비롯해서 메뚜기떼는 우리가 쓸 수 있는 것들을 남겨놓지 않는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다.


이 책 제목이 그렇다. 어떤 것이 메뚜기떼와 같은 역할을 할까? 바로 폭력이다. 사람을 강압으로 다루는 일. 성폭력부터 시작해서 현대판 노예제라고 할 수 있는 강제노동까지.


많은 구호단체에서 가난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많이 한다. 지원도 많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가난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고 한다. 굶주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들은 여전히 강간과 살인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도 많다.


왜 그럴까? 그많은 구호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는 지원의 우선 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즉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법체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한다.


빈곤한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지원한 구호물품들 역시 그들 생활을 개선하는데 쓰일 수 없다고 한다.


구호물품을 받으면 무엇하나? 금방 빼앗기거나 또는 목숨을 잃게 되는데... 빼앗아간 사람들이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 또는 성폭행을 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는 나라라고 하면, 빈민들에게 제공되는 구호물품은 그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목숨을 얼마간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점을 이 책 앞부분에서 사례와 더불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물품보다는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을.


그래서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사법체계를 개선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폭력을 휘두른 자들을 제대로 처벌한다면 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아도 자신의 생명이나 재산을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면, 그리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면 어떤 마음으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을텐데, 바로 그 희망을 찾아주는 일, 그것은 사법체계를 제대로 세우는 일이라고 한다. 즉, 빈곤을 먹고 자라는 폭력을 없애는 방법은 폭력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 지원을 하고, 성공 사례를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데... 타당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찰, 검찰,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힘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원조는 그들에게 갈 수가 없다. 


부패와 비리와 폭력이 판치는 사회에서 빈곤은 더욱 빈곤을 부를 뿐이다. 권력은 권력과 부를 낳고, 집중시키는 반면에 빈곤은 계속 빈곤을 낳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은 비리와 부패, 폭력이 쌍을 이루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폭력은 반드시 처벌된다는 것을 각인시킨다면? 또 폭력은 용인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폭력은 더이상 증식할 수 없다. 줄어드는 일밖에 없다. 그러므로 빈곤을 해소하는 일에 폭력을 처벌하는 것이 꼭 필요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후반부에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의 성공 사례를 과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옳은 이야기다.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해야지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테니. 그렇다고 사법체계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도 안 된다. 저자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듯이.


'법집행은 폭력의 복잡한 사회적 원인, 곧 문화 규범, 젠더 편견, 경제적 좌절과 불평등, 교육 부족, 약자의 소외 따위를 중재하는 활동과 반드시 연계해야 효과가 크다.' (170-171쪽) 


우리는 이제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한다.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사법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아직도 약자들의 시위를 불법으로만 몰아가는,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되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그런 행위를 한다고만 보고, 법으로 그들을 처벌하려고만 한다면, 과연 법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저자들의 말, 약자들을 위해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법은 강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이 책에서 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는 반대로 법이 작동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가난, 불평등 등이 해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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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어딘가에는 @ 있다 시리즈
한인정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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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는'이라는 말로 여러 책이 나왔다고 한다. 이 어딘가에는 이란 말에는 우리 삶 주변 어디에서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아직도 자신들 권리를 위해서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최근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만해도 싸우는 사람들 많다.


다만, 그 싸우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권리가 인정받기는커녕 권력을 쥔 집단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데 문제가 있다.


파업이 합법이라고 인정받는 경우가 드문 우리나라,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몇 달째 이동권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지만, 그들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은 아직도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시위하는 역은 무정차로 지나가겠다는 소리만 흘리고 있는 현실.


지하철 한 역에서 서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면, 그 이유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시위라고 몰아붙인다면, 비난의 화살이 누구에게 갈까? 무정차를 결정한 자들에게 갈까? 아니면 시위를 한 장애인들에게 갈까?


한 역이 서지 않는다면 그 역에서 내릴 사람, 또 탈 사람들은 상당한 불편을 겪게 된다. 그것도 출근시간이라면 짜증과 분노에 차게 된다. 가뜩이나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지하철을 타는 일도 고역인데, 서지도 않고 지나가 탈 수 없게 된다면...


그러나 장애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려야 할까? 오히려 가장 약한 사람, 가장 불편한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대중교통 아닌가. 그런 시설, 편리함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장애인만이 아니라 시민 누구나 요구해야 할 일 아닌가.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비장애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니.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해보지 않은 정치인들, 고위관료들이 출근길 그 고통을 알까? 장애때문에 그런 지하철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알까? 그래서 이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이 생각났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겪어보지 않았기에 너희들도 겪어봐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경험하지 않더라도 공감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런 망상을 해본다. 대통령을 비롯한 장,차관 및 국회의원, 지자체장 및 시의원 등과 같은 정치인, 5급이상 고위 관료, 대기업의 임원급들, 또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최소 일주일에 2번 이상은 출퇴근 시간에(7시부터 8시 30분까지) 대중교통을 반드시 이용할 것. 이용했다는 증명을 할 것이라는 규정이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는. 그러면 대중교통이 획기적으로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인권감수성이다. 그런 감수성이 있다면, 요구하기 전에 마련하려는 시도를 했겠지. 하지만 인권감수성이 먼 정치인들, 고위 관료들이 많은 사회에는 요구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이주여성들, 힘들게 살아왔는데, 자기들 힘듦을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던 그들이 단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소리를 내야 한다.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이렇게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려는 옥천 이주여성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았다. 그들이 겪어온 일들,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이 누리려는 권리 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이주여성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이주민들이 모두 함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나고 있는 책이다.


그들은 이주여성이라는 틀에 갇히기보다는 사람이라는 개별성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가족이라는, 그것도 한국 전통적인 가족 관념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자신들도 동등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단지 희망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싸워나가겠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생김새,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건 기본이다. 그런데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대뜸 반말부터 하는 태도들, 돈만 보고 왔다고 생각하는 태도들, 당연히 우리말을 익혀야 하고, 우리말만 써야 한다는 관점들이 왜 문제인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싸우기 위해서 뭉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책에 나온 이 말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남편의 폭력에 관한 말 중에서... 그냥 지나쳐서는 절대로 안 될 말. 


'애기도 있고 먹고사는 것도 어렵고 그러니까 그냥 참다 참다 죽거나 도망치는 거죠'(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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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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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결코 편한 소설이 아니다. 읽으면서 무언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든다. 소설 내용도 그렇다. 명확하게 무어라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 저것 사이에 있는 무엇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악인인가 하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고, 착한 사람인가 하면 그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만큼 인간이 단면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여러 면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삶이 옳다고 또는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런 삶, 즉 겉으로 보이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잃는 삶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남들의 눈에 보이는 삶, 남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첫소설부터 그렇다. '남쪽 절'

미술전시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시관에 들어가는 주인공. 세속적인 성공을 향해 비난받을만한 작가에게 출판을 의뢰하는 주인공. 그 과정에서 용산참사가 분명한 그 장소를 지나면서도 그들의 삶을 외면하려고만 하는 주인공.


출판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늘진 삶을 외면하고 자신의 밥벌이에 충실하려는 출판이 바람직한가? 그것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길잃음이 '파견 근무'에서 더 잘 나타난다. 판사라는 자리. 지방 판사. 유지 중의 유지.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자리. 누구보다 올곧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카지노에도 하고, 피의자가 흘린 정보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그에게 정의보다는 현실이, 자신의 감정이 더 앞선다. 자, 이런 세상에 정의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법조인들이 마냥 정의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판결은 또 공정할 거라 생각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판결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결국 삶은 이것과 저것으로 명확히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쪽 절'과 '파견 근무'를 연결지어 보면 바람직한 삶은 무엇이라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삶은 미술의 '스푸마토' 기법처럼 뭉개져서 경계가 흐릿하다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긴 우리들 삶이 어떻게 무엇이다고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인물들이 지닌 복합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집의 제목이 된 '프랑스식 세탁소'를 보면 그렇게 이것이다라고 편가르기 힘든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두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현실의 인물과 잡지 속의 인물. 잡지 속의 인물을 통해 현실의 인물이 자신의 삶에서 감춰져 있던 면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깨닫게 된다.


남들이 보면 성공적인 삶,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좋지 않은 모습드을 소설은 드러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해서 요리를 했던 요리사는 미슐랭에서 별 두 개를 받자 자살을 한다(이런 결말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게 짐작이 된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졌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다른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식 세탁소'에서는 두 죽음이 나온다. 소설 속 이야기에 나오는 죽음과 소설에서의 죽음. 소설 속 이야기에서는 당사자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 죽음을 선택한다.


하나는 자신의 자부심을 위해,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렇다면 이 죽음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죽음은 드러내기 위한 죽음이다. 최선을 다한 삶. 그런 삶을 드러내는 죽음이 소설 속 이야기의 죽음이라면, 소설 속 죽음은 감추기 위한 죽음이다.


주인공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죽음. 죽음으로써 주인공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그런 죽음. 결국 이 죽음은 최선의 삶이 아니라 보이는 삶, 보여주는 삶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다른 죽음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그 죽음이 주인공에게서 떠나지 않는 한 주인공은 감추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삶만을 살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정미경 소설은 삶은 이거다 저거다로 나눌 수 없고, 무엇이 정의고, 정의가 아닌지 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다른 삶들이 있음을,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서 나아가야 함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서서히 올라온다. 이게 편하게 읽히지 않는 정미경 소설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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