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 루이스 세풀베다 산문집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루이스 세풀베다. 오래 전에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소설을 읽고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왠지 믿음이 간다고.


그런 세풀베다가 2020년에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사람이 죽음이라는 세계로 가는 일을 피할 수 없지만, 이런 작가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세풀베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는 세풀베다가 만났던 사람들, 그와 친분을 맺고 지냈던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모두들, 라틴아메리카의 민주화를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세풀베다 역시 망명 생활을 오래했고.


그런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 다른 세계로 간 일을 글을 통해서 추모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추모,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을 잊지 않겠다는, 그들과 함께 추구했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가 나타는 글들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과 관련된 글이 있다. '친구가 된 노인'이라는 글인데, 그 소설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소설에 관한 내용, 라틴아메리카 작가나 예술가들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은 라틴아메리카가 독재로부터 벗어나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세풀베다가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가 아옌데에 대해서, 네루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첫번째로 실린 글은 칠레에 온 세풀베다가 (그는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오래 전에 찍은 칠레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그 사진 속 아이들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칠레의 현실이 과연 나아졌는가를 생각하게 하는데...


사진 속에 있던 아이 중에 한 아이는 세상을 떴고, 다른 아이들도 역시 희망을 잃고 있다. 이런 현실을 알리는 글을 세풀베다는 쓰려고 한다. 그것이 비록 힘겨운 일은 아닐지라도.


글 (아이들의 사진에 남겨진 빈자리:르포) 끝에서 세풀베다는 이 글을 쓴 이유를 말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다 쓰고 나면 국제 시민 사회의 연대를 지향하는 어느 잡지에 실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따뜻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세계를 있는 힘껏 지키고자 하는 전 세계 남자들과 여자들이 읽게 되리라' (63쪽)


이렇게 세풀베다는 암울한 현실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현실을 기록하고자 한다. 단지 기록에서 머물지 않고 발표하고자 않다. 잊지 않기 위해서, 용서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자세를 지닌 작가가 있으면 세상은 결코 암흑세계에 머물 수가 없다. 그런 암흑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들로 인해, 암흑 세계를 만든 이들을 잊지 않게 된다. 또한 용서하지 않게 된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세풀베다의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 라틴아메리카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세풀베다의 좌우명을 인용한다. '잊지 말라, 용서하지도 말라.'(111쪽)


우리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일,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하고 되새기게 하는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우 2023-01-02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정말 사랑하는 소설입니다. 세풀베다가 먼 곳으로 떠났군요. 이 산문집은 꼭 읽고 싶네요

kinye91 2023-01-02 12:11   좋아요 1 | URL
저도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참 좋게 읽었어요. 이 책도 읽을 만해요.
 
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말은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말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떠돌고 있는 말들은 어떤가? 잇는 역할보다는 가르는 역할을 더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 사람을 살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그런 말들을 혐오표현이라고 하는데, 혐오표현인지도 모르고 쓰는 말들, 혐오표현인 줄 알면서 그렇기 때문에 쓰는 말들도 많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너무도 많은 말들이 사람을 가르고, 사람을 떨쳐내는 역할을 하고 있구나, 우리 사회에서 지금 그런 말들이 너무도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많은 말들,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누가 쓸 수 있는 말이냐도 꽤 중요한데, 언어의 다양성을 보장하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그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혐오표현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시작은 비유로 시작한다. 사람에게 여러 혀가 있다는 말로... 혀, 그렇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다른 혀들이 작동한다. 내가 쓰는 언어가 달라진다. 그런 언어들을 하나로만 묶으려 하면 안 된다.


언어에 권력관계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 언어는 동등하다. 물론 혐오표현 언어는 빼고. 그렇지만 사투리를 썼다는 이유로, 또는 가난한 나라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특정 상황에서 어느 지역의 사투리는 정겨운 느낌을 주는 반면, 어느 지역의 사투리는 그런 느낌을 주지 못하고 저속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한다. 언어에 위계가 생기면,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차별이 따라온다. 그런 차별을 공고하게 하는 언어들이 발달하게 되고, 사람들과 사람들을 가르게 된다.


그렇게 말들은 미끄러진다.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엮여 있는 책인데, 글들이 마음에 자리잡는다. 생각해 볼만한 글들이 많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쓰는 말들이 혐오표현이 되지 않는지 끊임없이 점검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더 말이 필요없다. 이 책은 직접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피아드 -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세계신화총서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현모양처 하면? 우리나라는 신사임당, 외국에서는 페넬로페를 든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20년이나 집을 떠나 있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구혼자들의 압박을 물리친 여자. 정숙함의 대명사.


그렇게만 알고 있다. 오디세우스에서 페넬로페는 그렇게 간단하게만 언급된다. 주요 역할을 맡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그가 만난 수많은 여성, 여신들처럼,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만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를 정숙함, 현모양처의 전범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바로 남자들의 욕망이다. 여성이란 자고로 남성을 기다리면서 정숙함을 지키는 절개를 지닌 여인이어야 한다고. 정숙함을 지키지 못하면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오디세우스에서 하녀들이 그렇다. 하녀들은 구혼자들과 놀아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아무 힘도 없는 하녀들. 귀족이나 왕족들이 하녀들을 건드리면 과연 하녀들이 거부할 수 있었을까? 거부는 곧 죽음이었을텐데...


애트우드가 쓴 이 소설은 오디세우스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에서 가려졌던 페넬로페와 하녀들을 중심에 세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넬로페가 주요 화자로 나오지만, 악극 형식으로 하녀들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억울한 죽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삶들. 그러나 그들 역시 사람이었음을.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예속된 삶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가 애트우드에 의해서 펼쳐진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다.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생긴다.


여성의 입장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이렇게 풀어갈 수 있겠구나, 어쩌면 하녀들의 모습은 애트우드가 예전에 쓴 소설인 [시녀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구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예속된 존재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목숨조차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사람됨을 입혀주고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주체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 시대에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오히려 남자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산 사람은 헬레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


페넬로페와 반대로 나오는 헬레네는 이 소설에서도 시종일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방종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헬레네는 당당하다. 그냥 남성들에게 빌붙은 삶이 아닌 그들이 자신을 추종하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페넬로페는 이와 반대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오디세우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려 한다. 아니 녹아들어간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아직은 주체로 나서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시대의 한계로.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시대를 넘나들면서 페넬로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여성이 살아온 삶, 또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신화 속 인물을 재해석한 이야기. 현모양처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려 한 사람으로 페넬로페를 불러낸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 페넬로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또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다른 관점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것이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12-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의 이런 책이 있었군요. 내용에 관심이 가네요.

kinye91 2022-12-29 18:59   좋아요 1 | URL
신화의 재해석. 어쩌면 페미니스트적인 글이라고 해야겠네요. 애트우드 다른 작품만큼 이 작품도 좋았어요.

yamoo 2022-12-29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있는데, 재미없을 거 같아서 처분할 목록에 넣어뒀는데....재밌으면 재고를 해 봐야 겠어요~

kinye91 2022-12-29 19:0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디세우스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서 좋고 재미 있었어요.
 

  몇 년 동안 만나왔다. 만날 때마다 실망하지 않는다. 친구는 자주 만나도 반갑고, 오랜만에 만나도 반갑다. 그냥 그렇게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빅이슈를 보면서, 이 빅이슈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빅이슈와 친구가 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이 많이 내리고, 추위는 강해지는 이번 겨울. 따스하게 품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지내기가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빅이슈가 바라는 점이 바로 이것이겠지. 이번 호를 읽으면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존재. 국가는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되는 첫출발은 복지다. 복지... 누구나 힘들 때 견뎌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정책. 따라서 선별 복지든, 보편 복지든 국가는 국민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갈수록 느는 복지가 아니라 갈수록 줄어드는 복지가 되고 있지 않은가.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연금(국민, 공무원, 군인 등등)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국민들이 더 불안해 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 확충이 중요하고, 또한 기후위기를 넘어서 기후재앙에 이르고 있는 지금 시대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기 위해선 세금을 빗겨갈 수가 없다. 국가가 집행하는 예산은 대부분 세금에서 나오니... 세금은 또한 국민이라면 누구나 내야 하는 의무 아니던가. 국민의 4대 의무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세금이 무엇인가? 바로 국민에게서 나와 국민에게로 가는 돈 아닌가?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와줄 친구같은 존재로 역할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금 아닌가. 따라서 복지, 복지 하면 당연히 세금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세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복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말놀음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이번 호 성현석이 쓴 '더 나은 사회는 공짜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글.


이 글 마지막,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대출이 아니라 복지를 통해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향이다. 그러자면 명백한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더 나은 사회는 거저 이뤄지지 않는다. 다수 시민이 더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만 한다. 낮은 세금과 열악한 복지의 조합은 이제 불가능하다.'(17쪽)


함께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어준다는 것. 그런 삶. 연말에 생각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부터 조심하자. 다른 사람을 부르는 말.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 그것은 곧 나에 대한 존중이다.


정문정이 쓴 '타인을 부르는 호칭은 상대가 아닌 나의 격을 보여준다'는 글은 지금 이 시대 우리들의 언어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말들이 나돌고 있는지... 올해 마지막 호, 빅이슈. 아이들이 그린 산타 그림이 표지 사진이 되었다. 세상에 따스함을, 사랑을 선물로 주는 산타. 모두에게 이 산타의 선물이 깃들기를 바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의 도시 - 우리 시대 노점상을 말하다
최인기 지음 / 나름북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노점상이라는 말에서 '노'자가 길 '로(路)'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길 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한데, 이 책은 시작에서 노점상에서 '노'자가 길 '로'자가 아니라 이슬 '로(露)'자라고한다. 이슬을 맞으면서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이슬을 맞는다는 말, 이는 길 가에서 생활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슬을 피할 집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노숙인이라는 말에서 '노'자 역시 길이 아니라 이슬을 뜻하는 이슬 '로'자를 쓴다고 한다.


그러니 노점상이나 노숙인이라는 말에는 이미 가난이 포함되어 있다. 이슬을 피하지 못하고 맞는 사람이니까.


그런 그들에게 이슬보다도 무서운 일은 단속이다. 그냥 단속이 아니다. 과태료를 물게 되는 일도 그들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단속은 과태료 부과뿐이 아니라 아예 장사하는 물건들을 압수하는 일이었다. 압수만이 아니라 파괴까지 했으니...


그것도 공무원들이 하지 않고 용역을 써서... 영화 [똥파리]를 보면 용역들이 어떻게 노점상들을 괴롭히는지, 그것이 경찰의 묵인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노점상들도 그런 일을 겪어 왔다. 살기 힘들어서 살 수 있는 도시로 왔지만, 도시에서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마지막으로 몰린 것이 바로 노점. 그러나 그 노점마저도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덮이고, 언제든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있으니...


노점상들은 그래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노점을 지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들의 죽음을 딛고 노점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하겠지만, 노점들은 여전히 이슬을 맞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노점상들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노점상들이 싸워온 역사를 보여주며, 세계의 노점상들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간략하게 살피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노점상들이 합법적으로 장사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존할 수 있는 도시... 가난과 부가 함께 지낼 수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가난의 도시라는 말을 떨쳐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서울에서 노점상들이 많은 곳은 주말 신설동과 동묘다. 그 거리에는 온갖 노점들이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신설동, 동묘에는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예전에 노점상들이 물건을 늘어놓던 곳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다.


최대의 벼룩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 주말이면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리는 그곳도, 개발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가 없다.


도시는 계속 화려해지고, 부유해지는 외관을 지니지만,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자신이 살던 곳에서마저 쫓겨나고 있다. 그래서 '가난의 도시'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는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안다. 다행히도 노점을 합법화하는 경우도 있어서, 어느 정도 그들이 살 길을 열어주고는 있지만, 그것 역시 노점상들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서 얻어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노점상들의 역사, 과거와 현재를 살필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한 말을 인용하면서 맺는다. 이런 사회가 잘사는 사회 아닐까 하면서.


'노점상은 사라질 수 없고 결코 사라져서도 안 된다. 노점상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살리면서 노점상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절실하다. 그러면 노점상은 이슬처럼 모든 이와 어울려 도시를 촉촉하게 하는 존재로 날마다 새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32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2-12-26 1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글.감사드립니다. 거리의 노/이슬 노..어느쪽이든.가난과 결부되는.거네요....^^;;;

kinye91 2022-12-27 11: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길거리나 이슬이나 다 가난하고 결부되죠. 가난으로 인해 절벽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