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으로 구입했다. 

  김소월하면 우리나라 근대시를 개척한 시인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 아니던가. 

  그런 김소월 시문학상 수상작품집인데, 그것도 1회 작품집이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구입.


  목차를 보니, 이름 있는 시인들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심사평을 읽어보니 40대를 전후한 중견시인들로 대상을 제한했다고 한다.

  물론 문학상이 그해 발표된 모든 작품과 모든 시인들을 대상으로 하기는 힘들지라도 이렇게 중견으로 제한한 것은 문제가 있단 생각이 든다.


시를 꼭 20여년 정도 쓴 시인들이라야 잘 쓴다고 할 수 있나? 단 한 편의 시로도 기억에 남는 시인이 있고, 평생동안 꽤 많은 시집을 냈어도 그 시인의 시 단 한 편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인도 있는데...


시가 나이와 또 시를 쓴 경력과 같이 가지 않음을 심사위원들이 더 잘알텐데, 왜 이런 결정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수상작을 선정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소월이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는데, 그의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하여간 그런 심사경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수록된 시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상을 받은 오세영의 그릇 연작 중에서 그릇1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좋았는데... 중간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릇이 깨지면 칼날이 된다고, 사랑은 온전한 그릇으로 다 받아들여야 하는데, 깨졌을 때는 사금파리가 되어 사랑을 깨게 된다고 할 수도 있는 시.


그렇지만 '깨진 그릇은 / 칼날이 된다. / 무엇이나 깨진 것은 / 칼이 된다.'(오세영, 그릇1.4연. 이 책 17쪽)고 하는 시 구절은 우리들 삶을 생각하게 한다.


그릇,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데, 깨지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오히려 다른 존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지금 이 시대 깨진 그릇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상하게도 기를 쓰고 자신들의 그릇을 깨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


아니, 자신들의 그릇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그릇도 빼앗아 깨버리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이 시를 읽으며 씁쓸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내 그릇이 깨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겠지만, 다른 존재의 그릇도 깨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태도, 그러한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 중에서 송수권의 '하느님의 아이들'도 마음을 울린다. 87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데, 이미 그때 아이들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한탄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져서다.


지금은 자연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코로나19로 인해서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더 멀어졌으니, 이 시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느님의 아이들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일까

  캔 음료도 색깔로만 마시고 사는 요즈음의 아이들

  어찌 하느님을 닮았다 할까


  식목일에 무궁화 삽목을 하고 싶어

  몇 아이에게 가지를 쳐오라 했더니

  꽃이 지고 없는 개나리 가지를 쳐 왔다

  그림 속의 꽃은 잘도 구별하던 애들이

  하느님의 영토 안에서 자라는 싱싱한

  나무들의 이름과는 이렇게 멀어져 간다.


  어느날은 창 밖에서 

  메뚜기 한 마리가 흘러 들어 발을 절며

  아이들의 심장에다 불을 놓았다

  모두가 책상 위로 올라가 까치발을 서고

  나의 수업 시간은 엉망진창이었다

  E.T하고는 잘 놀던 애들이

  하느님과는 가장 눈이 닮았다는 메뚜기와는

  왜들 이렇게 원수 보듯 하는 걸까


  나는 메뚜기 한 마리를 들고 서서

  혼자서 길 잃은 아이처럼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

  논둑길을 가로질러 벼가 익어 가던 벌판은

  온통 나의 성(性)이었다

  한 되들이 됫병에 갇힌 메뚜기들은

  그때 얼마나 할 말이 많았는가

  ......얘 꼬마 녀석, 그러다간 하늘에 못 간다.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일까

  요즘은 자구만 아이들이 싫어진다

  냉장고 속에서 다람쥐처럼 크는 아이들

  밤 하늘 은하수를 잊고 산 지도 오래다

  어느 길목에서 하느님의 옷자락을 놓아 버린 것일까


  지난 일요일에는 낚싯대를 메고

  나 혼자 들로 나갔다

  진달래 산천을 지나 민들레가 핀

  보리밭둑을 넘어

  살구꽃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옛날의 밝은 마을을 지나

  종달새 앞장 세우고 하늘 끝까지 걸어갔다


  깜부기로 하느님의 턱밑 수염을 그리며

  나는 탈판 속의 말뚝이처럼 한 바자기 우물물을 퍼 마시고

  한 시대의 풍경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987년도 제1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95년 2판 1쇄. 

송수권, 하느님의 아이들.154-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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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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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월드 워 Z]의 원작 소설이다.

소설이 번역될 때는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소설을 먼저 읽었으면 영화를 다르게 봤을까 하는 생각.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인 이 소설을 읽었으니... 순서야 바뀌었지만,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공통점은 먼저 중국에서 시작했다? - 소설에서도 좀비들이 중국에서 먼저 활동하는 것처럼 나온다. 그런데도 서양 사람에게 이름은 '아프리카 광견병'이라고 불린다. 특정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일, 그 지역을 낙인찍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 소설이 나올 때는 중국과 미국이 지금과 같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중국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긍정적인 쪽으로 소설에서 서술이 되어 있다. 


두번째는 원인을 알 수 없다. 왜 좀비들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좀비들이 전세계에 거의 동시에 발생해서 재난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없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법을 알 수 없다. 소설에서는 치료법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와 마찬가지로 좀비들이 불식되지 않았다. 좀비는 계속 살아남아 있다. 코로나19 역시 3년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세번째는 격리다. 격리? 사람들을 격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좀비고 아닌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장벽을 쌓거나 아니면 만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코로나와 같은 비대면 활동이 많이 나오지 않으나, 만약 코로나19 이후에 이 소설이 쓰였다면 아마도 비대면 활동이 중심이 된 인류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네번째는 죽어가는 사람들은 약자들이다. 강자들은 안전한 곳에서 살아남는다. 다는 아니지만, 약자보다는 생존할 확률이 높다. 모든 질병이 그렇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통점이 있지만, 코로나19는 바이러스고 좀비는 죽은 사람이 움직이는 상태니, 대처방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이 좀비에 대처하는 방법, 우선 피하고 봐야 한다. 그러나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결국 좀비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 맞설 방법은 없다. 좀비 퇴치법은 나왔다. 뇌를 없애면 된다. 


소설과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영화에서는 무언가 대비책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좀비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방법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질병이 대안으로 나온다.


즉 기생하는 존재는 자신도 살아가야 하니 건강한 숙주를 필요로 한다. 바이러스 역시 마찬가지다. 숙주가 사라지면 바이러스도 사라진다. 그래서 치명률이 높은 바이러스는 널리 퍼지지 못한다. 퍼뜨릴 숙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 좀비를 설정한 이유는 이러한 기생(바이러스)의 특성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좀비는 아무 생각이 없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좀비에 물리거나 좀비의 물질이 몸에 들어간 사람이 좀비가 되니, 의학 문제로 가지 않는다.


구체적인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좀비를 퇴치하는 부분에 강조점을 둔다. 퇴치라고 했지만, 전쟁이다. 좀비와 벌이는 전쟁. 그래서 제목이 세계대전 Z다.


전쟁! 이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누굴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쓰는 효과적인 전략, 전술은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면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좀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부분의 나라들이 선택한 전술은 일반인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좀비를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일반인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미끼가 된다. 그 다음에야 군대가 좀비들을 소탕한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얼마나 죽어가는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대상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이렇게 전쟁의 살벌함을, 또한 그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 역시 정신적 고통으로 삶을 유지하기 힘듦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이런 좀비들이 왜 발생했는지 원인을 밝혀야 한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좀비가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다. 그것도 인류의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밝혀내야지만 좀비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세상에 어떤 바이러스는 완전히 지구상에서 없애기는 힘드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코로나19로 고통을 받은 3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코로나를 생각하면서, 우리들 생활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월드 워 Z]를 본 사람들, 아마 이 소설을 읽으면서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특히 군대 문제, 그리고 희생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좋을 것이고...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도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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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전집 : 시.희곡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맹문재 엮음 / 현대문학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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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내게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는 남아 있는 이름이다.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이 이름이 부정 쪽으로 남게 된 이유는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이 큰 몫을 했다. 그 소설에서 신여성으로 나오는 김연실이 김명순과 다른 여성 예술인들의 모델이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 작가에 의해서 표현된 김연실로 대표되는 신여성은 부도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나혜석이 최근에 와서 집중 조명된 반면 김명순에 대해서는 그리 조명이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김명순 전집(시,희곡)이 다시 희미하게 남아 있던 김명순을 생각하게 했는데...


시는 그리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다. 1925년 즈음에 쓰인 시들이 대부분인데, 이때는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시의 초창기 아니던가. 김소월이라는 뛰어난 시인, 이상화라는 시인들이 등장하고, 서양 근대문학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근대문학이 시작되던 시기.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김동인이 자랑스러워 하던 [창조] 동인에 김명순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하게 작품활동을 했다는 사실. 또한 시 경향 역시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전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여성을 문학사에서 가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가 우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김명순이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활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점은 [김연실전]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니, 꼭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김연실전]은 초창기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지니게 하는 작품 아니던가. 그러니 [김연실전]이 아닌 여성 작가들이 (작가들을 성으로 구분하는 일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 요즘은 여류 소설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성이라는 성 구분이 앞에 꼭 들어갔으니, 그때 구분법을 따라서 잠시 쓴다) 쓴 작품을 읽으면 좋다.


그 중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1막 4장 짜리 '두 애인'이란 작품이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여인이 어떤 핍박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그냥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여인이 여러 폭력으로 죽어가게 되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남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다리를 다치고, 머리를 다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다해도 남들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그들은 하지만, 여성들은 그리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란하다는, 또는 속된 말로 꼬리를 친다는 오해를 받고 폭행을 당하게 된다.


아마도 김명순도 이러한 일을 많이 겪었으리라. 그런 경험이 '두 애인'이라는 각본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고단함이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시 '유언' 마지막 구절. 95쪽)라고 당시 조선을 표현하고, '옛날의 왕자와 같이 / 유리관 속에서 춤추면 살 줄 알고 /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 / 재미나게 살 수 있다기에 / 미덥지 않은 세상에 살아왔었다. / 지금 이 뵈는 듯 마는 듯한 설움 속에 /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 / 미련한 나! 미련한 나!'(시 유리관 속에'에서 끝부분. 96쪽)라고 하고 있다.


지금은 김명순이 살던 시대에서 얼마나 나아졌을까? 여전히 '사나운 곳'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미련한 나'라고 자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김명순 전집을 읽으면서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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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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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지? 하늘을 올려다 볼 틈도 없었나? 밤이 되어도 별보다도 더 빛나는 땅의 빛들로 인해서 밤하늘의 별들이 빛을 잃지 않았나?


내가 보지 않아도 별은 별일텐데... 천문학자들에게는 별이라는 말과 행성과 위성, 혜성이 다른 말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냥 별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별들은 이제 별 볼일 없어지고 만 상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 


천문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낸 책이다. 천문학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겪게된 자신의 일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천문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도 읽을 만하다고 느끼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요즘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사실까지도.


우주로 날아간 우주선들이 보내오는 사진들로도 행성을, 별을 충분히 연구할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시대라고 해도, 우리는 별에 대해서는 아련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달에 대한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달 하면 무언가 그리움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듯이.


여전히 사람들이 우주로 나아가 살지 못하고 있는 상태, 달에 발을 디딘 지 오래 되었지만, 최근에야 다시 달에 사람을 보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니, 그만큼 우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우리에게 어떤 아련함, 그리움, 동경 등을 주는 존재. 그런 존재를 연구하는 학문. 천문학. 그리고 천문학자.


이 책에는 그런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겪게 된 일들이 많이 나오는데, 드물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이 있음도 드러내고 있고, 또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잘 기록된 자료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 천문학의 성과도 알려주고 있으며, 단지 별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땅으 이야기, 즉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연결이 되어서 좋다.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천문학자들의 그들의 책이나 논문에 쓰는 주체를 나타낸다는 말.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한다는 말. 이때 '우리'는 함께 연구한 과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인류'를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과학은 특정한 한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온 결과물이라는 사실. 그 점을이 책이 알려주고 있으며, 우주로 나아가는 일들이 결국은 '인류'의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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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는 것들, 그러나 기억되어야 하는 것들.


  새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겠지만, 또 많은 것들이 생겨날 것이다.


  사라진다고 해서 모두 잊혀지지는 않는다. 이번 빅이슈에서 다루는 내용이 그렇다.


  정년이. 웹툰으로 완결이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나 창극으로도 만들어질 거라고 한다.


  이렇게 한 장르에서는 끝났지만, 다른 장르로 옮겨져 계속 기억되고 있다. 삶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우리는 너무도 쉽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잊는다. 기억 속에서 지운다. 많은 사고로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때 분노했던 마음들이 어느새 사그러들고,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만다.


다시 반복된다. 반복... 잊혀짐은 반복을 부른다. 그래서 잊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노력을 한다.


이번 호에 실린 홈리스 추모제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또 그들처럼 그렇게 떠나가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추모제를 연다. 기억하기 위해서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고쳐나가려는 적극적인 행위다.


그래서 우리는 추모공간이나 기억공간을 만들어낸다.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재개발도 마찬가지다. 재개발로 인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재개발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 되도록 재개발로 인한 문제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지금도 많은 장소들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고, 그것을 기억하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으니...


빅이슈의 좋은 점이 바로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라도 기억하려고 하는 점이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겠지만, 다시 많은 것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것들 속에 들어 있는 예전의 것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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