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보이는창] 132호를 읽다.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다. 그런 일상의 삶이 위협받을 때가 있다. 그냥 살고자 할뿐인데 제약이 있을 때가 있다.


특히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거나 하면 더더욱.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나라, 법질서가 잘 지켜지는 나라, 공정이 실현되는 나라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신이 살 집을 얻지 못할 자유, 아님 지상이 아닌 반지하에 살 자유, 몸이 불편하니 자유롭게 이동하지 않을 자유, 직업을 얻지 못할 자유, 권력이 없으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할 자유.


이런 자유 앞에서 평등은 능력에 따른 평등으로 전락하고 만다. 네가 노력하지 않았잖아?라는 능력주의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공정은 능력이고, 능력에 따른 차별이 평등이자 자유다. 그러니 우리는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을 자유를 지니고 있다.


자, 네 능력을 키워라!


하지만 능력이 자신만의 힘으로 키워지나?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의 능력으로 벌게 된 걸까?


보이지 않지만 나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 과거-현재-미래, 이곳-저곳 등등에서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서 내 능력이 발휘된 것 아닐까? 


그러니 오로지 나만의 능력으로 이루었다는 성과, 그런 능력주의는 문제가 있다.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 평등, 공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창은 그런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삶창에는 바로 이렇게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까.


삶창에는 능력주의를 우선하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남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으므로,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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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분노에 답하다 - 분노라는 가면을 쓴 진짜 감정 6가지
충페이충 지음, 권소현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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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이 쓴 책. 참 좋게 읽었다. 분노를 할 때 해야 한다고. 분노는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를 더 안 좋은 쪽으로 이끌어간다고 하던 책.


  분노할 때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도 그렇다. 분노가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한다.


  우리 몸이 안 좋을 때 열이 나듯이 무언가 나에게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분노가 인다고 한다.


  즉, 분노는 신호라고 한다. 이 신호를 읽지 못하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잘못되어가는 사회에 분노하지 않으면 더욱 안 좋은 사회가 되어 모두가 고통받듯이, 자신이 분노하고 있는 지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도 힘들어진다고 한다.


왜 분노하는가? 무엇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았기에 분노라는 감정으로 표출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이 책은 분노에 대해서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이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무작정 억누르려고만 하지 말고, 표현할 수 있을 땐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적정한 수준을 지켜야 하고.


'분노는 사랑에 대한 호소이며 관계에 대한 갈망이다'라고 이 책의 표지에서 말하고 있다. 즉, 분노는 갈망에서 나온다. 그리고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자기가 한 만큼 대우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왜 나처럼 안 해줘? 하는 마음이 분노로 나타날 때도 많다. 하지만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여러 감정이 교차될 수밖에 없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좀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이렇게 분노를 잘 파악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쪽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이 책은 여러 장에 걸쳐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차분히 들여다보고,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익히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나약함의 표출이 분노가 아니라 분노도 자신을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좀더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파악하는 일. 이것이 남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앞서야 한다고 한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분노는 정당하게 자리잡고,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다.


이렇게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삶. 그런 삶을 산다면 사회를 바꾸는데도 긍정적인 분노가 작동하지 않을까 한다. 스테판 에셀이 말한 '분노하라'는 바로 이런 긍정 위에서 행해지는 분노다.


이 책과 더불어 틱낫한 스님의 [화]를 읽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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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학교 교육을 무려 12년 이상이나 받았는데, 과연 내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나는 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이, 현대 기술이 만들어낸 도구들 없이 무인도에 있다면, 어떻게 살아남을까?


  불도 못 피울텐데. 무엇을 잡을지도, 또 어떤 식물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인지도 모르고, 잠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주변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일도 못할텐데.


아니 현대 도구를 가져갔다고 해도 과연 그 도구들을 잘 쓸 수 있을까? 도구들을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한데, 기름이 떨어지면, 전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막연히 학교에서 배운 기술들이 그야말로 내 삶을 유지하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은 그렇게 책에서만 배울 수 없을텐데... 자신이 혼자 살겠다고 하는 일도 힘든 일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일도 어려울텐데. 


살아가기 위한 기능, 또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세를 과연 배웠던가. 그냥 제멋에 겨워 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 


지금부터라도 나만이 아니라 함께를 생각하는, 그리고 내 삶을 내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


제목만으로도 마음을 끄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시. 물론 이 시가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해석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을 꿈꾸지 않나. 


그런데 그 새로운 인생이 위로 위로, 일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밑으로 밑으로, 일과 관련있는 곳으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 아니겠는가.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인생. 그래 일본의 어느 학자가 벌레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지 않은가. (김해자가 쓴 '벌레의 눈, 시인의 눈'이란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낮은 곳에서 함께 사는 삶. 그런 새로운 인생. 그렇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


  새로운 인생


바람이 긴꼬리도마뱀처럼

비닐문을 들치고 들어오나 보다

어둠이 미끈거리며 목덜미를 감쌀 무렵

방안에 웅크렸던 나라는 짐승을 본다


사람 하나였다고 믿었던 나의

껍질을 빈방에 결박해 두고


신원미상의 얼굴을 하고선

행자승처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먹고

신발끈을 매고

쫓기는 사람처럼 집을 나선다


나는 당분간 일용노동자로 살기로 했다


내 등을 떠밀어 다오

서투른 몸동작으로

삽과 괭이와 해머와 철사와 커터 들을 다루는 나를

이제야 그들의 눈빛에서

체념과 순응의 본능을 읽을 줄 알게 된 나를

내 어머니에게 이런 나를 보여주고 싶다


새로운 인생을 향해

꿀꺽 침을 삼키는 나를


송태웅, 새로운 인생, 산지니. 2018년.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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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16
존 버거 지음, 박범수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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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의미]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 보인다는 말, 수동적인 말이다. 의지가 개입하기 전에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인식하는 일. 그런데 보이는 것을 본다고 할 때는 의지가 개입한다. 


똑같은 존재라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보인다.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아는 만큼 보인다를 수동적으로 해석해서,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앎에 한계가 있다고 인식한다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내가 보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과 같다. 즉 자신이 놓치고 있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말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도 똑같이 또는 비슷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 엄청나게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특히 예술에서는.


그래서 예술 감상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지 않나. 자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의 다양성은 이런 다양한 관점에서 나오지만, 다양한 관점은 곧 보기의 차이에서 온다.


그런데 어떻게 보아야 잘 봤다고 할 수 있나?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나? 단지 예술에 대한 지식뿐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지식이 총 망라되어 작동되어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꽤나 많은 지식이 필요한데, 특히 사회와 동떨어져서 볼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존 버거 책을 읽으면 관점의 다양함과 관점의 독특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존 버거 역시 노력을 많이 했으리라. 


그는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을 따로 떼어서 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따로 떼어서 볼 때도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살고 있는 세상과 관련짓는다.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춰진 진실을 찾아낼 수가 있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또는 동물이든 그는 보이는 존재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더 보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본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 역시 잘 보라고.


이런 점을 잘 나타내는 문장이 있다. 사진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한 말이다.


'사진이 동시에 개인적, 정치적, 경제적, 극적, 일상적, 그리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사진을 둘러싼 방사 체계가 구성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93쪽)


즉, 사진을 볼 때에도 다양한 관점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주어진 대로만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방통행은 없다. 일방통행은 보기가 아니다. 그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다. 이런 보기에 대해서 동물, 사진, 미술을 통해서 그 실례를 들어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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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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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설은 상상을 통해서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면, 그래픽 노블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었다면 자신의 상상과 비교하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내용의 전개를 그림에 따라서 따라가기 때문에 다른 맥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길리어드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세상.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행위들.


한 순간에 경제적 무능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고, 그 다음에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오로지 수단으로서만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제도.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상상 속에만 있지 않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들.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벗어날 꿈을 꾼다. 노력을 한다.


메이데이. 그렇다. 구해달라고, 아님 약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암호로 통용이 된다. 그런 상황을 마냥 감내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소설로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그래픽 노블로 보는 것도 좋았다. 오히려 더 섬뜩했다고 할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시녀이야기]의 후속편인 [증언들]에 대한 그래픽 노블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암흑인 세계를 벗어나는 모습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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