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릭스와 크레이크 미친 아담 3부작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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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판단은 다 다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또는 만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면 좋겠지만, 이 다름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그냥 다르다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인류의 생존에 관한 문제라면.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후퇴라는 말은 과학기술에는 없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그 난관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백신을 개발하고, 식량위기가 닥치면 화학농법이라든지 또는 대체육과 같은 과학기술을 이용한 식량 개발을 하고, 기후 위기에 봉착하면 또다른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 한다. 


계속 발전되는 과학기술.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종'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유전자변형, 또는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는 기술이 지금도 많이 발전하고 있고, 대체육이라는 개념까지도 나오고, 스마트팜(스마트농장이라고 흙과 관계없이 농사를 짓는 기술)도 운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를 유토피아로 이끌까? 역사를 보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넣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유토피아란 명목으로 디스토피아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경우를 보면서도 '다름'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그 다름을 용인해야 할까? 아직 오지 않은 세계니, 판단을 유보하고 한번 지켜보자고 해야 할까? 결과나 나타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을텐데도.


이 소설은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현생 인류가 너무 많다고, 현생 인류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류가 나타나 (완벽하게 조작된 유전자를 타고난, 그래서 그들에게는 갈등도 없는, 오로지 채식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죽음이라는 말을 모르는 그런 존재들) 지구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실행에 옮긴 사람이 등장한다.


뛰어난 과학기술 능력으로 그는 인간을 창조하고 (그의 별칭이 크레이크이고, 그가 만든 새로운 인류를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현생 인류를 멸망시킬 바이러스를 유포한다. 급속도로 퍼지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류는 속절없이 죽어간다.


세상은 폐허가 된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크레이크의 친구. 그가 크레이커들과 살아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진행이 된다.


온갖 유전자 조작들이 성행하고, 다양한 변종 동물들이 만들어졌지만, (소설에서는 이 동물들 이름을 늑개, 너구컹크, 돼지구리 등으로 부른다) 그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집단과, 그 집단에 끼치 못한 일명 평민층이 존재하는 세상. 


이는 분명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없애려고 하는 크레이크의 시도.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류인 크레이커들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물론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한다. 그 자신이 죽었으므로.


과학기술로 차별이 이루어진 사회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아마도 과학기술은 그것을 점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을 가르고 차별할 것이다. 또다른 차별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사회를 없애겠다고 현 인류를 모두 죽게 만드는 방식 또한 또다른 차별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다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류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가르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역시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즉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찬동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또는 이런 과학기술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위 평민층들은 이유도 모른채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다름'이 인정받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최근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세계를 팬데믹이 빠뜨린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새로운 질병이 발생해서 인류를 위험으로 몰아갈지 모른다. 그것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부작용일 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체육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제는 종을 파괴한 인류의 기호에 맞는 동물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인간은 다양한 종들을 멸종시키고 있지만, 반대로 다른 종들을 창조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속 크레이크는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다. 현생 인류를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 물론 자신이 창조한 인류에는 지도자도 신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음을, 그들 역시 우리 인류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하게 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은 과하기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다름'이라고 다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과학기술은 과정과 예측 결과까지도 공유되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이끌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미친 아담' 3부작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1부다. 1부부터 애트우드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권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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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는 '갓생'이라는 말이 나온다. 무슨 뜻인지 몰라 찾아봤더니, 신의 뜻하는 '갓'과 인생을 뜻하는 '생'이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신의 인생?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삶이 갓생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좋은 삶, 또는 최선을 다하는 삶 정도 되지 않나 싶다.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 우리는 두 번 살 수가 없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기에 지금 인생을 잘 살아야 한다. 충실하게. 그렇다면 갓생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충만하게 산다는 뜻이리라.


어떤 삶이 충만한 삶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자신이 만족하는 삶. 또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삶을 살면 된다. 물론 여기에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이 갓생이 되기 위해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남도 나처럼 살려고 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 갓생일 수 있다.


이번 호에 갓생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 글이 실려 있는데, 꼭 그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삶을 충만하게 살라는 뜻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어떨 때는 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희망도 있다.


그런 희망이 바로 지금 삶을 더 충실하게 살도록 한다.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나를 부추기는 것.


험한 산을 오를 때 멀리 보기보다는 바로 발 앞을 보면서 한발 한발 내디디면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현재를 사는 삶이 바로 '갓생'이 아닐까 한다. 


이제 봄이다. 그렇게 나도 갓생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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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3-09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갓생!
입력!
 
빨강 머리 앤 (양장)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 원화 그림, 박혜원 옮김 / 더모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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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로 봤다. 정말 재미있게. 


앤의 천방지축인 모습이, 실수투성이인 그 행동들이, 상상에 빠져 다른 것들을 잊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고나 할까?


어쩌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행동을 앤이 대신 해준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앤의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많은 말들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들을 찾곤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소설로 읽었다. 번역을 다시 했을테지만, 이 책의 특징은 만화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화의 그림들이 실려 있다.


과거를 되살려주기도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을 상상하는데 제약을 주기도 한다. 가령 마릴라 같은 경우는 마른 사람으로 나온다. 소설에는 '마릴라는 큰 키에 몸에 굴곡이라고는 없이 꽤 마른 편이었다'(20쪽)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마릴라를 마른 몸에 큰 키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뚱뚱한 편이라고나 할까?


아마 만화를 보지 않았다면 마릴라를 성마른 사람으로 상상하면서 읽었을테다. 하지만 만화가 먼저 뇌리에 박혀 있으니, 이 번역된 소설도 마찬가지다. 만화를 떠올리면서 읽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과거를 불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 만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번역본이라고나 할까.


소설은 만화와 같은 감동을 준다. 앤의 성장을 따라가면서 웃고 울고 하게 된다. 그만큼 앤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다.


앤과 같이 지낸 매슈와 마릴라는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의 단조로운 삶, 흑백의 삶에 앤이 들어옴으로써 화려한 칼라로 바뀐다. 한꺼번에 바뀔 일은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사랑으로 변해간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된다. 앤으로 인해서 자기 의사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게 된 매슈, 그리고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앤에게 유행을 따르는 옷을 만들어주는 마릴라.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마릴라는 자신의 감정을 앤에게 표현한다. 무뚝뚝한 마릴라가 변한 것이다. 린드 부인이 마릴라가 부드러워졌다고 할 만큼. 그리고 앤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에 감싸이게 된다.


앤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다. 그런 감수성과 상상력을 억누르지 않아야 한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린 시절의 감수성, 상상력은 권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쩌면 우리 교육은 앤보다는 다이애나를 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순종적이고 현실적인, 그래서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는 아이. 하지만 다이애나처럼만 살면 변화와 성장은 없다.


순응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지 않는다. 어른들에게서 주어진 길만을 갈 뿐이다. 다른 길을 볼 생각도 없이. 과연 미래 세대에게 그런 길로만 가라고 해야 하나?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끝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앤처럼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주어진 길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길.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앤과 같이 감수성과 상상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감수성은 자신의 주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하고, 그것들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볼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한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앤은 성장해 가고, 그런 성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즐겁게, 재미있게, 감동받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 그러다 문득, 앤의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나이로 16세하고도 몇 달이 지났다고 하니, 우리 나이로 치면 겨우 17세다. 고등학교 1학년이다. 1800년대 후반 또는 190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는 하나, 11살에서 16살까지 앤이라는 고아가 겪은 일이다. 너무도 많은 일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할 수가 있나 싶은 그런 나이.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도 어린 시절에 붙박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하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어른들이 여기는 길이 만들어질 때까지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고 학교에 잡아두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앤처럼 실수하고, 그 실수에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앤처럼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


청소년들이 읽기보다는 어른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앤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테니. 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앤과 같이 감수성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시절을 거쳤을 테니.


그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 어른이 되어 앤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을 속박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마릴라가 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지지해주면서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옷들을 앤에게 만들어주듯이 그렇게 어른들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 물론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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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채봉.


  동화작가로 알고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화를 쓴 작가.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니... 세월은 그렇게 갔구나.


  정채봉 작가가 원하던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몇 해 전에 순천 여행을 할 때 김승옥과 정채봉 문학을 기념하는 곳이 있었다.


두 작가가 한 곳에 있는 모습. 서로 다른 문학 작품을 썼다고 하지만, 그렇게 문학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이 시집은 정채봉 동화와 마찬가지로 따스하다. 그리고 순수와 사랑이 넘친다. 세상에 이런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일찍 세상을 뜨다니.


이런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더 많아지면 질수록 세상은 더욱 따뜻해질텐데.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다투는 일이 줄어들텐데.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이 우주에 평화와 사랑이 넘칠텐데.


시집에 있는 시들이 모두 따스하고 좋지만, 특히 이 시. 이런 마음, 이런 행동. 허투루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


                들녘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샘터. 2020년 개정증보판. 13쪽.


풀잎 하나도 생각하는 마음. 세상에 그냥 있는 존재,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는 생각. 모두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들.


세상에 내려온 천사다. 이 세상에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려고 내려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시로 나타났다. 이 시집이다.


이제 곧 봄이다.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은 아직도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차마'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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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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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소설이다.


'거리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거리의 이야기. 집을 잃고 버려진 땅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고 생활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소설은 단 하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하루라는 시간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 처절히 파괴되어 가는 그들의 삶이.


킹은 개 이름이다. 개를 서술자로 삼아 소설을 전개한다. 킹은 떠돌이 개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를 말해주지 않지만, 부두에서 비코를 만난 이후 이들과 함께 지낸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개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지내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즉 가장 낮은 시선에서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없는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지만, 버려진 땅이 언제까지나 버려진 땅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자본은 그런 땅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개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개발이라는 이름에는 쫓겨남이라는 이름이 늘 함께 한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개발을 통해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그곳에 남을 만한 여력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우선 되는 능력은 바로 지불할 능력이 있느냐다.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나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버틸 수밖에 없다. 결국 개발은 강제 철거와 연결이 된다. 돈이 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하는 현실. 그런 현실을 존 버거는 소설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다.


킹은 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또 돈이 개입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킹 역시 마찬가지다. 떠돌이 개를 서술자로 등장시켰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역시 정착되지 못하고 또다시 떠돌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남기 위해서 저항하려 해도 결국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최루탄에 쫓겨 모여 있던 곳에서 외치는 말은 '우리 여기 있어!'(204쪽)다. 그렇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는데,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라져야 한다.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거되어야 한다. 그것도 그들에게 다른 삶터를 마련해주는 오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냥 집행할 뿐이다.


오래 전에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어 세계에서 많은 손님들이 오는데, 그 손님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고 했다. 판자촌, 노숙인, 노점상 등등. 선진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붙였다.


어떻게 했는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저항해도 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쫓겨난 그들이 다시 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 영화는 그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처를 잃는 사람들이 있으니...


존 버거의 이 소설은 그때 일,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 떠오르게 했다. 여전히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보지 않는다. 자본은 사람을 가린다.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외친다.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있다고. 우리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외침은 자본에게까지 가 닿지 않는다. 자본에 가 닿기 전에 공권력이라는 이름 앞에서 산산히 흩어진다. 소멸해버리고 만다. 이 소설에서처럼.


너무도 슬픈 모습.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온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우리나라 현실이 겹쳐져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게 하려는 사람들을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가 생각난다. 그의 작품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도 생각이 나고. 고인의 명목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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