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상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읽기 편하다.


  읽기 편한 만큼 짧은 시도 많다. 물론 산문시에 해당하는 시들도 있다. 그리고 삶에 관한 많은 일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다.


  시인이 겪었음직한 일들도 시로 나와 있는데, 그 중에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도 있으니...('사진 안에 내가 있다' 60-61쪽)


  하지만 이 시집을 읽으면 무엇보다도 시란 무엇인가, 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을 통해 인간은 인간답게 된다고 하면 오만일까? 아니, 책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존재들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움을 주는 존재. 무엇에게도 배울 수 있으니, 그런 존재는 바로 책이다. 이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가 그런 울림을 준다.


 마지막 말


신은 없다

그러니, 책을 의지하면서 살아라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106쪽.


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책은 보인다. 아니, 보이지 않는 존재조차도 책이 될 수 있다. 책은 무궁무진하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 가장 큰책(물질적으로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많은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자연이다. 자연은 늘 인간과 함께 해 온 책이었다.


시인은 말한다.


  땅이 책이다


책을 읽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안타깝다는 농부에게

내가 말했다


별말씀을요

괜찮아요

땅이 책이잖아요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27쪽.


땅은 책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런데 이런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 멀리할 뿐만 아니라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또 읽으려고 하지 않고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 책은 읽어야 하는데, 무슨 땔감으로 쓰듯이 한번 쓰면 그뿐이라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땅을 죽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책을 없애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사람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종이로 된 책만이 아니라 사람도 책이 될 수 있음을, 하긴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공자의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스승이 된다는 말, 시인의 말대로 하면 사람이 책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사람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한다.' 특히 사람책에서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야 하는데, 반면교사가 아니라 그냥 교사가 되는 사람책들이 있다. 참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고 고쳐야 하는데, 와, 저렇게 해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책.


그래서 시집에서 한 시인의 '마지막 말'이란 시에서 '책에 의지하면서 살아라'는 말을 의지할 수 있는 책을 읽으면서 살아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도 책 나름이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하면 안 된다. 사람책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반면'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요즘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반면'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를 바라면서... 시집을 읽는다.


사실 이 시집을 사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윤희상 시인이 쓴 '소를 웃긴 꽃'이라는 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례를 훑어보다 발견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 오면서'를 읽고서다.


내게도 최인훈이라는 작가는 그의 소설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람책이었기 때문. 물론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최인훈에 관한 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오면서


  어느 해 선생님 댁의 거실에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간난다


  생각해봐라 우리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우리가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38쪽.


그래, 적어도 사람책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사람책을 가까이 한다면 '반면'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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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된 시집이다.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너무도 인용이 많이 되어서 집에 구비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 시집을 손에 넣었는데, 찾아보니 집에 없다. 잘 됐다. 보관해 두고 틈 나는 대로 읽으면 좋을 시집이다.


  시란 시대에 갇히지 않고, 시대를 넘어 다가오기 때문에 오래 되었다고 내 곁을 떠나게 할 필요가 없다.


  언제든 필요한 때 다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니까.


  제목이 된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너무도 많이 인용이 되어 더 인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 시집에서는 소위 '민중가요'로 불렸던 노래도 있으니, 그 중에 한 편이 바로 '너를 부르마'라는 시다. (검색하면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런 시 말고도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시가 있다. 집중호우가 너무 심해 산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난 올해. 이 집중호우가 꼭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온몸으로 맞고 있는 집중호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비를 내리는 집단들이 있으니..


첨단과학기술로 무장하고, 이제는 아이티(IT) 강국이라고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우리나라지만, 기후 재앙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이 당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지금에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난이 있으니...


하긴 기후 재앙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이 더 울창했다면, 산사태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민주주의란 결국 사람들이 숲을 이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숲을 파괴해 버린 결과가 이렇게 산사태, 홍수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이제는 되었다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숲 이루기를 그만두고 있어서 이런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이것이 어찌 자연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국민들을, 시민들을,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게 오로지 나무로만, 식물로만 존재하게 만드는 갈라치기에 우리들 역시 숲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인이 광화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듯이, 숲을 이뤄야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함께 있어도 각자인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시가 더 귀하다. 1970년대 엄혹했던 시절, 국민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로만 존재하게 했던 시절에 숲을 그리워했던 시인의 마음이, 지금 2020년대에도 마찬가지가 되었다면...


촛불이라는 숲을 이루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숲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개별로만 남아 있다. 혼자서는 힘을 쓸 수도 없는데, 버티기도 힘든데...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1979. 동아일보>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93쪽.1997년 개정 6쇄.


숲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모여 숲을 이루자고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숲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이 시집에 실린, 민중가요로도 불린 '너를 부르마'에 나오는 말처럼, 다르게 쓰이고 있는 그 '너'를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 된 시집, 그러나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시집. 정희성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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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읽어봐야지만 하다가 미루고 또 미뤘던 소설. 반지의 제왕. 영화를 먼저 보아서 그런지,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러다 영화와 소설이 같지 않음을, 서로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옴을 알고 있으면서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톨킨의 이 작품을 르 귄이 엄청나게 칭찬하고 있으니, 안 읽을 수가 없다.


사서 소장하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예전 판본이다. 예전 판본답게(?) 글자도 작고 빽빽하다. 눈이 피곤하다. 게다가 6권이나 되지 않나.


1부, 2부, 3부 각 2권씩.


오랜 시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읽다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 물론 읽으면서 영화에서 받던 인물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영화와 다른 점을 찾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란 점은 호빗 족의 나이다. 프로도를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화에서 호빗들이 작은 키로 나오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소년의 모험이 아니다. 호빗의 나이로 프로도는 50이 되어서야 모험에 나서게 된다. 


함께 모험에 나서는 샘이나 메리, 피핀 역시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없고. 하지만 나이가 중요하랴? 자신의 공간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가 다른 공간을 여행한 다음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성장소설의 구조라고 해도 좋다.


환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만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지금처럼 문명을 이루지 않고 살던 시대,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을 떠나게 되었나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한다.


그래서 엔트 족들이나 요정들의 이야기를 그냥 환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제는 자연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1기, 2기, 3기라고 시대를 구분하고 3기가 반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 반지의 시대는 아직 인간이 자연과 분리가 되지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반지의 시대가 지나면 인간의 시대가 되고, 자연은(요정이나 엔트와 같은 다른 존재들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 동물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장면, 인간이 철(총)을 이용해 신을 죽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톨킨은 이 소설에서 인간이 죽이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중심인 시대로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


반지를 운반하는 사명을 띤 프로도, 그를 수행하는 샘, 그리고 같은 호빗족으로 프로도와 함께 하겠다는 메리와 피핀, 여기에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아라고른(영화에서는 아라곤으로 나온다)과 요정 레골라스, 난장이 김리 그리고 보로미르. 이들을 인솔하는 마법사 간달프.


이야기는 단순하다. 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조력자들과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갈등도 겪고, 어려움도 겪는다. 그러나 결국은 반지를 없앤다. 


단순히 이렇게만 판단할 수가 없음을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반지를 운반하는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빌보가 쓴 이야기를 프로도가 이어서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모험이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반지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로도는 책을 끝내지 않는다. 책을 끝낼 사람은 샘이다.


프로도가 끝까지 반지를 운반하는데 함께 했던 충실한 조력자 샘. 샘은 호빗 마을에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험의 끝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삶으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샘의 말로 끝난다.


"자, 내가 돌아왔어."(6권 228쪽)


소설은 위대한 여정을 끝난 인물들의 위대한 삶으로 끝나지 않는다. 혁명은 위대함을 넘어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때 완성된다.


파괴된 것들의 재건. 일상성의 회복. 여기에 영웅은 퇴장해야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프로도로 끝맺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샘에게 다음 이야기는 샘의 이야기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이 된 아라고른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마법사인 간달프도 또 반지 운반자였던 프로도도 모험의 시대가 끝났을 때 물러나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모험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일상의 회복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 그런 모습이 일상이 된 사회여야 한다고 톨킨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그들의 모험은 일상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니 샘이 자신이 돌아왔다고 하는 말로 소설을 끝맺을 수밖에 없다.


반지를 없애고 사우론을 퇴치하면서 소설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호빗으로의 귀환. 그리고 호빗에서의 또다른 일들. 그 일들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일상이 회복됨을 보여주고 있어서 더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어보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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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3-07-2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안녕하세요? <밤의 언어>에서 르 귄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톨킨을 알게 된 사람들을 부러워 한다고 고백했었지요. 르 귄의 <반지의 제왕> 해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늘 kinye91님이 읽으신 것을 몇 년 후에 읽고 있더라구요. 어쩌면 이 <반지의 제왕>도 몇 년 뒤에는 읽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kinye91 2023-07-29 13:22   좋아요 1 | URL
에로이카 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르 귄의 말을 조금 바꾸면 저는 조금 더 젊은 시절에 르 귄의 작품을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도 또 다른 글들도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기도 했고요. 저 역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삶이보이는창] 134호를 읽었다. 여러 삶들이 책에 실려 있다. 세 달에 한 번 만나는 많은 삶들.(계간지니까) 부유한, 권력있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삶들이 나와 있다.


이번 호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으면 '듣기'가 아닐까 싶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 점점 찾기 힘들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귀를 열라고 했는데, 이 말을 나이가 아니라 권력을 지닐수록 귀를 열고 입을 닫으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나이를 권력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니...그냥 나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말하다 논리로 밀린다 싶으면 꺼내는 말, "너, 몇 살이야? 민증 까.")


권력이 있으면 자기 말만 하게 된다. 그러면 남 말을 듣지 않게 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줄 사람이 없을테니. 이 상황을 거꾸로 뒤집으면 듣기는 바로 사랑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한다.(박총, 들음이라는 사랑)


세상 모든 성인들이 듣기를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 권력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별명(?)이 '59분'인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1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을 59분 가진다는 뜻이란다. 이런, 이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언제 말하지? 아니 다른 사람의 말을 언제 듣지? 앞에 언급한 이번 호 박총이 쓴 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김범준 선생의 말을 빌렸다고 한다.


"대화 전체의 일 퍼센트 정도를 말하기 위해 긴 시간 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에는 그야말로 사랑이 담겨 있다"고.(79-80쪽)


이런 듣기의 실종이 어디 한 사람만의 일인가? 정치권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 않은가. 자기들 말만 하고, 다른 정당 또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말은 '가짜 뉴스'로 몰아세우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니 말이다.


대표적인 예를 이번 호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바로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농촌유학'이다. 대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농촌을 경험하게 해주고자 실시하는 교육정책.


그런데 서울시의회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조례'를 폐지하겠다고 했다 한다. 당연히 서울시교육청은 반발하고 있다. 아래 링크 참조


<‘농촌유학 조례’ 폐지, 시의회 발목잡기에…조희연 “거부권 검토” : 교육 : 사회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삶창]에서 몇 호에 걸쳐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런 농촌유학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케어팜care farm'에 대한 소개글이다.


농업을 통해서 치유하는, 사회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을 농촌에서 함께 일하면서 치유도 하고 수익도 올리는 그런 활동.


수익을 앞에 두기보다는 함께 함에 중심을 두는 그런 활동. 네덜란드에서 케어팜을 운영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고객들에게 기대하는 첫 번째는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고,두 번째는 자신감을 갖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생산성까지 좋을 수 있다면야 더 좋겠지만 그게 우선은 아니죠. 그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27쪽)


이런 흐름이 있다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귀를 닫고 있는 행태가 바로 '생태전환교육 사업 관련 조례안' 폐지하겠다는 발상이지 싶다. 다른 정치적 관점을 지녔다고 아예 말을 듣지 않겠다는, 귀를 꽉 막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그런 모습.


더 강화해도 시원찮을텐데... 생태교육은 이 시대 화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귀를 막고 살아서야 어디.


수익성에 현혹되어 귀를 막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우리에게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 점을 삶창 이번 호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특히 김인호가 쓴 '지리산 10.19 생명평화 기행'을 읽다보면 가슴이 턱 막힌다. 지리산에 이런 일이?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라는 슬로건이 있는 곳에'지리산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한다.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내고 있다고 한다. 


자연에 대해 귀를 닫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지리산도 이런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 조병범이 쓴 '입문자들과 함께 새 보기'를 읽으면 우리가 어떤 귀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런 귀를 지니고 있으면, 그렇게 들을 수 있다면 지리산에 골프장을 건설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59분'이라는 말이 듣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자기 말은 1분, 다른 사람, 다른 존재의 말을 듣는 시간은 59분. 그렇게 된다면 자연(환경-생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사회도 갈등보다는 조화와 협력이 주를 이룰 것이다.


들을 귀, 갖춰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보다 나먼저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래야 모든 사람들의 삶이 좋아진다.


나를 돌아보게 한 삶창 이번 호였다. 과연 나는 '들을 귀'를 지니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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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담 미친 아담 3부작 3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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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다. 제목은 미친 아담이다. 1권에 나왔던 게임의 이름이기도 한데, 멸종된 동물의 이름을 불러주는 집단, 또는 게임이었다.


아담1이 신의 정원사 집단을 이끌고, 2권에 등장했던 토비가 거기에 참여했다가 나오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인류가 절멸하는 해까지 오게 된 과정을 거쳐 이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서술하고 있다.


인류가 멸절되면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데, 크레이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 새로운 인류를 통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류를 창조하려고 했는데, 그들을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크레이커들은 평화주의자다. 그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또한 폭력을 모든다. 성욕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들만 있느면 세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과도 마찬가지다. 크레이크가 원했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신의 홍수에서도 살아남았다. 멸절되지 않았다. 노아는 자기 가족들과 살아남았지만, 크레이크가 일으킨 질병은 모두를 멸절시킬 수가 없었다.


신의 정원사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나 미친 아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평화주의자니까, 그런 세상에 살아남아도 크레이커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범죄자들이 모두 없어지지 않았다면? 여기서 고통공 죄수들이 나온다. 토비를 괴롭혔던 인물도 들락날락했던 감옥. 이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겐 인간성이란 없다.


그렇다. 이들은 살아남아서 사람들을 사냥한다. 동물들뿐만이 아니라. 또한 여자들을 강간한다. 강간하고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여자들은 죽인다. 그런 욕망만 남아 있는 자들이다.


이제 살아남은 토비와 동료들, 또 크리이커들에게 그들은 커다란 위협이 된다.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특히 폭력을 모르고, 거짓을 모르는 크레이커들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쉽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 토비와 젭은 그렇게 그들을 물리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토비와 가까워진 블랙비어드라는 크레이커에게 글을 가르친다.


이제 이야기 전달자 토비가 사라지면 이야기는 블랙비어드가 이어받아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블랙비어드 역시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이제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전환이 된다. 사람들은 다시 시작한다. 3권은 1,2권을 거쳐 대단원을 장식한다. 크레이크가 질병을 전파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 이번에는 젭을 통해서 전개된다. 젭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젭의 이야기는 토비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크레이커들과 살아남은 사람들, 또 동물들이 협력하는 장면이 나온다.


새롭게 시작하는 지구다. 새롭게 탄생한 인류도 나온다. 기존 인류와 크레이커들의 혼종. 그렇게 세상은 다시 시작한다.


세 권을 합치면 1,7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지만, 읽기에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넘나들기에 여러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된다.


젭을 통해서 현대 컴퓨터 사회의 문제점을 알 수 있게 되고, 정보를 통제하는 자들이 어떤 권력을 누리는지, 그런 세상에 사는 것이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회가 소설처럼 한 순간 붕괴되지는 않겠지만, 작가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아야 하는지, 자연과 어떻게 관계맺어야 하는지, 또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 3권은 소중하다. 새로운 삶들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이.


그럼에도 작가는 완전한 유토피아는 없음을 젭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유토피아란 없다.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다만, 그 불완전한 세상에서 우리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함을,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주 흥미로운 미친 아담 시리즈.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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