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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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 이우, 점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섬으로 돌아온 남자 정모, 듣고 말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말하지 못하게 되어 남들에게 듣지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 판도. 판도를 데려다 키운 이삐 할미.


섬에 사는 주요 인물 넷이다. 이 중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술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삐 할미를 빼고는 셋. 


섬과 연결된 뭍에 사는 사람으로는 정모의 친구이지만 사업가 아버지를 둔 태원이 있고, 이우를 정모에게 맡긴 이우의 엄마 연수가 있다. 


태원이 간혹 서술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대비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가 사는 삶은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반대의 삶, 즉 아버지 아래에서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모는 모든 일을 접고 섬에 들어온다. 그가 하려는 도서관 만드는 일은 서울에서 하는 활동과는 상관 없다. 그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위 문제아라는 소리를 듣는 이우도 마찬가지다. 


이우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누구에게도 이해를 얻지 못한 이우는 사고로 인해 섬으로 보내진다. 그간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판도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아예 어린 시절에 혼자가 되어 이삐 할미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가 말을 잃게 된 과정을 보면, 판도 역시 다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정모, 이우, 판도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이때 삶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쪽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태원 역시 다른 삶이긴 하지만 그 삶은 부정적인 쪽으로다. 정모의 말을 빌리면 학창 시절에 말썽피우던 태원에게서 느낄 수 없던 거리감을 돌아온 태원에게서 느껴진다고 했으니... 이는 돈만 아는 아버지 영도를 닮아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뭍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각자 섬이기도 하지만 또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상처를 알아도 그 상처를 더 덧내지 않고 감싸 안아주는 생활들.


특히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우의 변화가 바로 '섬'의 긍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우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모습 속에서 소설은 '섬'이라는 장소가 주는 긍정성을 보여준다.


제목은 '당신의 아주 먼 섬'이지만, 갈 수 없는 섬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 닿은 섬도 아니지만, 열려 있는 섬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섬'이라는 제목을 지닌 정현종과 함민복의 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 두 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현종 시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이고 함민복 시는 '물 울타리를 둘렀다 / 울타리가 가장 낮다 /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두 짧은 시다. 하긴 섬이 은 뭍에 비하면 작으니, 섬에 관한 시도 짧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시보다는 길어야 하겠지. 이 시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정미경의 이 소설에서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서정적 자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 그리고 그 섬을 어느 정도 엿본 사람들의 이야기, 모두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울타리가 길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관계.


우리는 모두 독립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연결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사실을 이 시들이 보여주고 있다면, 정미경은 세 인물을 통해서 닫힌 존재들이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섬'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닫혀 있는 듯하면서도 열려 있는, 그렇다고 쉽게는 갈 수 없는 그런 섬,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관계임을.


당신은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지만 아주 먼 섬이 갈 수 없는 섬은 아니니,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는, 당신이라는 섬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울타리는 길이기도 함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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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는 '자립'에 대해 생각한다. [빅이슈]가 자립을 위해 존재하는 잡지이기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립을 꿈꾸지 않나.


  그런데 자립이 무엇일까? 홀로 살아가는 것만을 자립이라고 할 수 없을텐데...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자립이라고 한다면, 글쎄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나. 사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자립이라는 말을 의존이라는 말과 대립되는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번 호에 실린 최서윤의 '자립의 기둥들'이란 글을 통해서다. 이 글에 나온 내용.


'자립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기댈 수 있는 곳을 여러 군데로 늘려 각각의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라는 해석을 최근 접했다.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에 의존 말고 여러 개의 기둥을 만들라는 뜻일 테다. 취미, 인간관계 등 각각의 기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61쪽)


이것이구나. 자립이란 이렇게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구나. 그러니 [빅이슈] 또한 이런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자립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이번 호에는 빅판 코디네이터와 한 대담이 실리기도 했다. 빅판들에게 코디네이터는 의존하게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빅판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기둥이 될 수 있음을. 또한 그렇게 기둥이 되어 왔음을.


사람들이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많은 기둥들을 만들고 또한 자신도 기둥이 되어주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함을 '자립'이라는 말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기둥들을 [빅이슈]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 호에서 언급하고 있는 '디지털 디톡스'에 관한 글들도 역시 우리 삶의 기둥, 즉 자립에 대한 말일 테다.


지나치게 디지털에 의존하는, 특히 손 안의 컴퓨터에 자신의 많은 시간을 쓰는 삶은 기둥을 줄이는 행동일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자신은 자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의존하는 삶이 됨을.


디지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가야 '자립'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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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새'를 생각한다.


  말과 당나귀가 교접하여 태어난 동물. 힘이 세어 일 부리는 데는 적격인 동물.


  죽어라 일을 하고는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동물.


  노새다. 일하는 동물이. 그런데 이런 노새 생각이 많이 난다. 요즘엔 특히 더.


  노동자를 노새 취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경제성장, 선진국. 누구 덕인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 노동자들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평생을 일했는데, 노후가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할 때는 열심히 열심히, 더 많이 더 많이 하라고 하더니, 막상 일을 놓으면 네 생계는 네가 책임지라는 식.


후손을 낳지 못하는 노새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양성우 시집을 읽다가 직접적으로 '노새'를 언급한 시 두 편을 발견하고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21세기가 되기까지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아온 노동자들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노새 일기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큰 짐에 눌리고 굵은 채찍에

속으로 울며불며

입술 깨물며

지는 잎 산비탈 억새밭 지나

물을 건너 흙먼지 아득한

길,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예전 표기 그대로 쓴다. 요즘엔 '걸었습니다'라고 쓰지만)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96쪽


   노새의 꿈


끝도 갓도 없이 쌓이는 궂은일 속에서도

골고루 나누는 기쁨으로 넘치도록 행복하고

그리고 드디어 내가 사는 이 땅 위에

나란히 엎드려 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등 따숩고 배부르며,

오직 사랑을 위한 옳고 곧은 일 하나로

누구나 공연히 사람 손에 함부로 따돌림받지 않는

맑고 밝은 세상에서 내 맘대로 날개 펴고 살고 싶습니다.

내 두껍고 질긴 굳은살 겹겹이 저미는

이 긴 고삐 가시굴레를 모조리 벗고

얼씨구나 네 굽으로 곳곳의 기름진 흙을 차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스로 즐기는 일 속에서

나 또한 남들과 어울려 밤낮으로 땀에 절며

늘 넘치도록 행복하고 싶습니다.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100쪽.


'노새 일기'에서 '노새의 꿈'으로... 과연 노새의 꿈은 실현되었는가? 긍정적인 답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노새는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새가 아니다. 노새여서는 안 된다. 노새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활을 누리는, '노새의 꿈'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한데...현실은... 


최일남이 쓴 소설 '노새 두 마리'가 생각난다.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 아버지를 노새에 빗댄 소설. 그 소설과 양성우 이 시들을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노새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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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식탁
박현수 지음 / 이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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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식민지의 식탁이라니... 식민지 음식이 따로 있단 말인가 하는 의구심.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식민지란 바로 일제강점기를 의미하고, 식탁이란 그 당시 사람들이 조선에서 먹었던 음식을 말한다. 그것도 집에서 먹는 가정식보다는 외식을 할 때 먹는 음식들.


즉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돈을 주고 먹어야 하는 음식들에 대한 소개라고 보면 된다. 근대가 되면서 우리나라에 어떤 음식들이 들어왔고, 그것들이 음식 문화로 자리잡았는지를 알려주는 책.


첫 시작을 이광수의 <무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광수의 <무정>. 여기서 샌드위치가 나온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무정>에 나오는 음식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차 안에서 병욱이 영채에게 음식을 준 장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음식이 샌드위치였다는 사실을 어찌 기억하겠는가.


이렇게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설이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문학이니, 소설 속에 나온 음식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식일 수밖에 없다. 또한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언급할 정도라면 이미 사회에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고.


<무정>이라는 소설부터 시작해서 거의 발표된 연대 순으로 음식들을 등장시킨다. <무정>에 이어서는 염상섭이 쓴 <만세전>이다. 물론 예전에 읽었을 때는 음식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책을 통해서나 이인화가 먹게 되는 음식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무정>이나 <만세전>에 나오는 음식은 여행하면서 먹는 음식이다. 기차라는 근대 문명의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끼니를 해결하는 음식들. 그만큼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서 제국주의는 철도를 부설하고, 기차를 운용했으며, 그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또 기차와 기차를 연결하는데 바다로 막혀 있으면 배를 이용해서 연결을 시키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개발하게 된다. (관부연락선이라는 말이 바로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의 철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배를 의미한다고)


낯선 음식이었을 것이다. 기차라는 문물도 낯설었을테니.. 그러다 이런 문물이 일상이 되면서 다른 음식들이 등장한다.


이제는 가게에서 파는 음식들 이야기로 가게 된다. 현진건이 쓴 <운수 좋은 날>이다. 바로 설렁탕이야기. 지금도 많이 먹는 설렁탕이니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 없을 듯하지만 아니다. 설렁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읽을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왜 하필 현진건이 김첨지 아내를 통해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 영양이 좋아 보양식으로 많이 먹었다는 사실.


이제 책은 선술집, 카페, 빠에 대한 이야기로 가다가 김유정으로 오면 시골 주막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감자'도 빼놓지 않고. 


30년대가 되면 서양식이 소설에 나오기 시작한다. 카페는 기본이다. 이상이 '제비'라는 카페를 차렸다는 사실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상과 친구인 박태원이 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로 '카페'를 선택했다는 사실. 이상도 선술집을 무척 좋아했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 언급된다.


여기에 <날개>에 나왔던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파는 음식들 이야기가 나오고, 조선호텔에서 파는 음식들까지 다양한 일제강점기 시대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서 당시 어떤 음식들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즐겨 찾았으며, 그것들의 가격은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당시 발표되었던 소설을 만나게 되고, 그 소설을 통해서 음식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사람들이 외식으로 먹었던 음식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소설과 음식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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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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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소설집을 읽다. 7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공통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소설이란 원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아니던가. 그러니 삶에서 겪음직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욕망?'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다양한 욕망이 있겠지만, 우선 '돈'에 대한 욕망을 꼽을 수 있겠다.


돈이라는 말, 자본이라는 말, 어느 정도는 생계에 꼭 필요한 돈. 이 돈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돈'은 어느 정도는 있어야겠지만, 더 많아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를 욕망으로 바꾸어보자. 욕망은 삶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이룰 것을 다 이루었노라 한다면? 그 다음 삶은 어떤 모습을 띨까?


'너를 사랑해, 들소, 내 아들의 연인'에서는 돈을 매개로 욕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해서, 돈 때문에 위기 상황에 처한 자산관리사와 여전히 시간 강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 그것이 너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또다른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로 '돈'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돈'.  그 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지만, 과연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들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쩌면 욕망의 크기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는 그런 관계. 이런 관계의 뒤틀림이 '들소'라는 소설에서 잘 나타난다.


조각가. 예술가다. 돈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인공이 남편과 갈등을 하는 이유는 돈에 있다. 자신의 일을 돈과 관련지어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상적인, 사회사업가라 할 수 있는 남편에게 반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는 그 점이 바로 싫어지는 이유가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돈을 위한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사회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회사업에는 '돈'이 필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소설 속 남편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면 다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들소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동물. 여기서는 이제 '돈'은 개입하지 않는다. '돈'이 개입하지 않을 때 예술은 자기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 아들의 연인'으로 넘어가면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된다.


가난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관계가 문제가 된다. 결국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관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차이, 그 사람을 욕망하지만, 그 사람이 지닌 관계는 용납할 수가 없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 적확한 것이 개인으로서 만났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의 테두리에 개인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또 내 욕망의 테두리가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관계의 테두리로 확장하면 그 개인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에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관계가 있음을, 그러한 집단이 서로 다르면 어울리기 힘들어짐을 '내 아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욕망의 끝을 보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니 욕망의 끝을 본 다음에는 더 이상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밤이여, 나뉘어라'다.


늘 내 앞에 있던 존재, 천재라고 불리던 친구가 몰락한 모습,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 역시 내 욕망의 끝을 보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의 몰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 친구 역시 아마도 자신의 욕망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결국 순간이여 멈추어라 하고 말하는 순간, 사람의 삶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욕망해야 한다. 인간이 용납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 그러니 돈을 위해서 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맹목적인 이상 추구 역시 파탄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을 갖지 않아서도 안 된다. 욕망이 없는 상태, 이를 갈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삶이 무의미해진다. '밤이여, 나뉘어라'에 나오는 천재처럼. 


결국 이 소설집을 읽으며 어떤 욕망을 지녀야 하는가? 욕망이라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어떤 갈망을 지녀야 하는가로 바꾸면 된다.


다양한 내용의 소설들이지만, 돈에 대한 욕망이 결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욕망(갈망)을 상실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삶이란 이렇게 다양한 욕망과 갈등들이 얽혀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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