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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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감탄을 하게 된다. 차페크야말로 '혜안(慧眼)'을 지닌 사람이구나 하는.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해체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루는 내용이 공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 인간 세계에 딱 적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롱뇽. 말을 할 줄 아는, 도구를 다룰 줄 아는 동물. 이런 동물을 이용한다면 인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까?


괴물로 불리는 이 도롱뇽을 상업으로 이용하는 인간이 등장하고, 도롱뇽들의 우수한 일처리 덕분에 사람들은 도롱뇽을 더욱 이용하게 된다. 인간이 하던 일을 도롱뇽에게 맡기고 (마치 로봇에게 맡기듯이, 이런 내용은 차페크가 쓴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들에게 상어를 퇴치할 수 있는 무기까지 제공한다.


이제 적수가 없는 도롱뇽들은 무한 번식을 한다. 기하급수적으로 자신들의 수를 늘린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도롱뇽에 대해서 위기의식을 갖지 않는다. 당장 편안한 삶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롱뇽들이 무한 번식할 때까지 소설은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된다. 신문 기사를 인용하기도 하고, 논문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소설이 기존 글쓰기의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고 하듯 내용이 전개된다.


그러다 이제 자신들이 살 곳이 작아진 도롱뇽들이 인간에게 땅을 요구한다. 인간의 땅을 메워 자신들의 서식지를 넓히겠다는 것. 이때부터 도롱뇽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 이것은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서도 나오는 소재다. 그만큼 차페크는 전쟁의 위협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느낀 점을, 소설, 희곡을 통해서 그 과정으로 나아가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는 세계전쟁에 휩쓸리게 된다.


다행히(?) 차페크는 전쟁의 심화과정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전쟁은 어김없이 벌어진다. 그리고 인간들은 참패한다.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서 로봇들에게 인간들이 참패하듯이.


소설의 마지막에는 이제 도롱뇽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선장을 자본가에게 소개해준 문지기가 후회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사업 구상을 하는 사람에게 자금을 댈 사람을 소개해줬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인간의 멸망이라는 결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작은 일이 얼마나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처음 시작은 개인의 작은 욕심에서 (선장의 진주를 얻겠다는, 진주를 얻는 대가로 도롱뇽들에게 상어를 물리칠 무기 또는 수중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는, 그는 그 약속을 철저히 잘 지켰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시작된 도롱뇽의 이용이 결국은 인간들의 무한 욕망을 자극하게 되고, 인류의 무한 욕망이 결국 인류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소설의 끝에 도롱뇽에게 당하는 인간, 하지만 작가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 직접 작가를 등장시켜 작품을 어떻게 쓰라고 하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는데... 도롱뇽과 도롱뇽이 전쟁을 하게 한다.


결국 지구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설 창작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서 차페크는 어쩌면 전쟁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1차세계대전을 겪고도 인간들은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런 다음 국제 평화를 위해서 국제연합을 창설했지만, 과연 전쟁이 없어졌는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인간과 인간의 전쟁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전쟁도 지금 벌어지고 있지 않나? 인간의 탐욕이 일으킨 전쟁들 아니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기술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차페크가 등장시킨 도롱뇽은 인간이 자연에 가한 행위의 결과가 아닐까? 그 결과를 보여주는 소설이 이미 나와 있는데, 우리는 이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차페크의 혜안에 놀라기만 한다. 이런 소설이 1930년대에 나왔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상력에 감탄하기만 한다. 카프카, 쿤데라에 이어 더 많은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였다.


덧글


로봇이라는 말이 '로섬의 유니버셜 로봇(R.U.R)'에 나온다. 그래서 나도 로봇이라는 말은 이 카렐 차페크가 만들어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희곡은 형 요세프(요제프라고도 한다)와 함께 썼다고 하고, 로봇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은 형 요세프라고 한다. 이 소설 역자 해설에 이렇게 나온다. 명심해야겠다.


'<로봇>이라는 단어의 창시자는 카렐 차페크가 아니라 카렐과 수많은 작품에서 공동 작업을 했던 형 요세프 차페크였다. 카렐 차페크 자신이 옥스퍼드 사전 편집진에게 자필 메모를 보내 정정을  요청한 사안이니 우리로서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419쪽)


이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구절. 주한 체코 대사를 역임했다는 야로슬라프 을샤 주니어가 쓴 작품 해설에도 '차페크와 함께 작품을 집필한 형 요세프 차페크가 만든 단어 <로봇Robot>이 세계적인 고유명사로자리잡았기' (406쪽)이라고 나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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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10-24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두기만 하고 계속 미루고 있는 책이에요.
살짝 들여다봤는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일까요?

kinye91 2023-10-24 12:58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엔 그리 어렵지 않은 소설이에요... 처음 전개가 낯설어서 그런데 읽으면서 상황이 그려지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R. U. R. - 로줌 유니버설 로봇 이음스코프
카렐 차페크 지음, 유선비 옮김 / 이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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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이다.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쓰고 있는 로봇이라는 말이 이 희곡에서 나왔다고 하니...


희곡은 로봇을 생산한 사람들과 로봇이 등장한다. 그런데 사람의 관점에서 시작한 로봇 생산이 로봇의 반란으로 이어진다.


기계를 통해 인류의 편리함을 추구했던 결과가 결국 인류의 멸종으로 나타난다. 이런 결말을 암시하는 것이 '귀머거리 꽃'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인 헬레나가 사람들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은 뒤에 듣게 되는 꽃의 이름. 이는 귀가 안 들린다는 뜻보다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는데, 오직 인간의 편리,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을 하는 존재들을 귀머거리 꽃에 비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헬레나는 이런 귀머거리 꽃을 인식하고 끔찍하게 여기지만,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로봇을 생산해서 사람들이 더욱 더 일을 하지 않는 세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들은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탐욕이 부른 결과, 차페크는 이 점에서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리만을 추구하다가는 결국 '귀머거리 꽃'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로봇을 생산해서 인류가 편해지겠지만, 그 부작용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로봇을 이용한다? 이는 전쟁이다. 더욱 참혹한 전쟁. 하지만 참혹한 전쟁을 벌이더라도 아직 로봇에 대한 통제권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들은 이 점에서 안심한다. 로봇은 언제든지 통제 가능하다.


그러나, 로봇이 인간에게 예속된 존재로만 있는단 보장이 없다. 희곡에서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킨다. 마치 지금 인식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있듯이, 로봇에게도 인식과 감정을 넣는 일이 발생하고, 그런 로봇들이 인간의 통제에 따를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디스토피아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로봇들은 자신들이 로봇을 생산할 수 없다. 로봇 생산의 비밀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인류와 로봇이 모두 멸망할까?


아니다. 인류와 로봇만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생명체들도 존재한다. 이를 로봇 프리무스와 헬레나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 점이 이 두 로봇의 대화에서 나오고, 앞으로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 즉 '사랑'임을 서로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는 로봇들을 통해 차페크는 보여준다.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로봇들만 있는 세상이라도 사랑이 사라지지 않음을, 사랑이 사라지지 않으면 다른 세계가 다시 펼쳐질 수 있음을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어쩌면 차페크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인공지능이든 메타버스든 지름 우리는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있다.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존재든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는 이 시대에 이 희곡은 과연 그런 세상이 된다면 그 다음은 어떨까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하는 일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로봇들이 일을 하는 세상을 보여주는 이 희곡을 통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의 미래를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도 과연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직접 자기 손으로 일을 하는 사람 '알퀴스트'를 희곡에서 살아남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삶을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다. 그것을 전적으로 다른 존재에 맡길 수는 없다. 노동을 모두 다른 존재에 맡긴다는 말은 자신의 목숨을 다른 존재에게 맡긴다는 말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편리만을,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를 잘 보여주는 희곡이고, 로봇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희곡이다. 지금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희곡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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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내용도 간명하다. 분명하다. 할 말을 에둘러 하지 않고 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시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1부에서 생각하게 한다면, 2부와 3부에서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현대사를 통해 일어났던 일들. 부끄러웠던 일들을, 권력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권력을 비판하는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용은 짧지만 서사가 있다. 쌍용자동차 파업에 대해서도,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에 대해서도, 세월호에 대해서도, 그리고 소위 폴리페서라고 하는 권력을 추구하는 지식인 집단들에 대해서도, 이 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서정이 어디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는 데서 그치겠는가. 서정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느끼는 마음을 밖으로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함께 느낌. 함께 생각해 봄. 이 시집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사회와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인간이라면 사회 속에서 삶을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시를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공명을 얻기 위해서 아니던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일. 


가령 이런 표현이 있다. '땅에 깃들지 못한 자 / 오욕의 삶을 등에 메고 하늘로 오른다 // 디딜 땅이 없는 자 / 비바람 피할 길 없는 굴뚝에 둥지를 튼다'('굴뚝' 1, 2연. 68쪽)


사람이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땅, 그러나 떠밀려 하늘로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의 소리를 알리기 위해서. 그들이 그곳에서 내려오는 일.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의 소리를 듣는 일. 저 위에 있는 권력자들은 하지 않는다.


소리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의 몸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권력자들은 그들을 가둔다. 그렇게 사람들의 소리를 가두려 한다. 


하지만 가둘 수 없다. 눈귀가 밝고 결코 입을 다물 수 없는 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채형복의 이 시집처럼 말이다.


지금, 말을 가두려는 집단이 있다. 말을 가두겠다는 오만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말을 가둘 수 없음을 알텐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니... 앞으로 시인들, 더 바빠지겠다.


갇히려는 말들을 구출해야 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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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ial 2023-10-20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반영하는 시인이군요.
68쪽 구절은 마치 80년대의 시구 같습니다.
역사계에서 지금을 분서갱유라 비판하는 글을 봤습니다. ( https://m.khan.co.kr/article/202310182010025 )
서늘한 때입니다.

kinye91 2023-10-20 14:4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역사가 반복이 되면 안 되는데... 서늘한 때 맞습니다.

그레이스 2023-10-2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제목이!!!

kinye91 2023-10-23 15:39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었어요. 시집 앞부분이 시와 시인에 대한 시들인데, 그 중 한 구절이더라고요. 제목도 서늘해요. 참.
 
판소리 에스에프 다섯 마당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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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던 판소리. 그 판소리 사설이 소설이 되어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판소리계 소설에 유명한 작품이 있다. 다 읽은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별로 없는 작품들... 흥부전, 춘향전, 심청전, 토끼전 등


이런 작품을 에스에프와 결합시켰다. 현대 과학이 발달했고, 사회문화도 바뀌었으니 현대에 맞게 재창작했다고 보면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은 총 5편이다. 그래서 다섯 마당이라고 한다. 춘향전, 변강쇠전, 심청전, 적벽전, 옹고집전.


춘향전은 '몰입 감상'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소설을 읽을 때 그 기억을 지우고 읽게 하는 방법.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는 뇌에 접근해야 한다. 춘향전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뇌를 조정할 때, 다른 많은 부위들도 조절이 된다는 것. 그래서 춘향전을 읽은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 변화가 된다는 내용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뇌가 인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내용은 춘향전과는 관계가 없고, 춘향전이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뇌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는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변강쇠전은 원전에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전에서 더 나아간다. 낭인을 늑대 랑 자를 써서 늑대인간으로 표현하고, 강쇠와 옹녀를 그런 낭인으로 만드는... 원작과는 달리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작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과 다르면 내치는 그런 사회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변강쇠전의 변형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현재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옹고집전'도 마찬가지다. 


옹고집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자들이 오히려 옹고집 아닌가 하는 그런 질문을 하게 하는 작품이었는데...


'심청전'은 원작을 많이 비틀었다.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사건을 남기고, 오염된 바다, 그러나 그 바다에서도 생명은 살아가고 있음을, 인간의 탐욕이 오히려 바다를 망치고 있음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적벽전은 선거라는 요소를 도입해서 내용을 전개한다. 너무도 유명한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소재로, 선거에서 이합집산이 벌어지고,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하는 내용으로 전개되는데...


판소리 다섯 마당을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했다고 할 수 있는 이 소설들. 그냥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판소리가 그 시대에 민중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듯이, 지금 이 작품들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발을 최우선하는, 성장으로 대변되는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 작품집에 실린 '심청전, 옹고집전'은 현대판 판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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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말에 '도움'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다못해 로빈슨 크루소도 프라이데이와 함께 살아간다.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도움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번 호에 실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여성 노숙인들처럼. 그들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그들은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존을 위해서 그들이 피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에게 도움이 된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도움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나.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자기가 성공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도움이 있었음을 생각하지 못하면, 남의 '도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면 자신도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영화에 대한 평에서 '오후'라는 작가가 요즘 영화에는 멋있게 표현된, 또는 설득력과 매력이 있는 악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악이 디폴트 값으로 매겨져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편 수긍이 가면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악인이 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영화에서는 그리고 있는데, 문화는 사회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그런 우려를 표시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것,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선을 추구하는 이유여야 하는 것.


하지만 선을 이야기하기는 쉽다. 선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선인은 그냥 선하다. 단순하다. 고민도 없다. 선하기 때문에 행동한다. 그 존재 자체가 남에게 도움이 된다.


이런 별것 없는 선함. 하지만 선함의 별것 없음이 바로 별것이 된다.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굳이 선해지는 과정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선은 그만큼 단순하고 명쾌하다. 다만 선을 실천하기가 힘들다.


선이 악에 비해 눈에 잘 안 띠는 이유다. 하지만 빅이슈를 읽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던 선들이 도처에서 보인다. 빅판들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 빅판들이 버티는 이유 중에 바로 잡지를 사가는 사람들, 빅판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 그렇게 티내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도움', 곳곳에 있는,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선들을 빅이슈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뉴스에 온통 '악한 일들'이 도배되어 우리의 눈과 귀, 마음을 어지럽힐 때, 빅이슈를 펼쳐보자. 


그럼 '선'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전히 우리는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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