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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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이다. 그렇게 분류한다. 하지만 그런 분류가 무색하게, 이 소설은 정서를 다루고 있다. 그것도 로봇을 주인공으로 해서.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로봇은 입력된 값만을 출력한다고 하지만, 아니다. 로봇들도 입력된 값을 넘어서 출력을 할 때도 있지 않은가. 즉, 입력한 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구를 파괴해,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죽고 사막만 남은 상태. 함께 지내던 인간 랑이 죽자, 로봇 고고는 길을 떠난다.


과거로 가는 땅을 찾아 간다. 랑과 함게 지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미 자신과 함께 하던 존재가 죽었는데도, 자꾸만 고장난 영상처럼 함께 지냈던 때가 떠오른다고 로봇 고고는 말한다.


어떤 일일 있을 때마다 떠올리는 랑과의 일들. 그것은 바로 랑의 부재를 충만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랑은 곁에 없지만 영상을 통해서 고고와 함께 한다. 그리고 고고를 삭막한 사막을 넘어 과거로 가는 땅으로 향하게 한다.


랑의 죽음으로 랑과 알고 지내던 지카는 바다로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고고는 거부한다. 고고는 랑과 함께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인간 버진을 만나 고쳐준다. 인간들에 의해서 예언자로 대우받던 버진. 그러나 그런 종교인에게도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없다. 그 역시 고고와 함께 할 수 없다. 고고는 계속 길을 떠난다. 이미 떠난 랑과 함께 하기 위해.


사막을 여행하는 고고는 다른 로봇을 만난다. 알아이아이라고 하는 로봇, 트랙터로 사막에 길을 내는 로봇이다. 자신의 주인이 맡인 일을 하기 위해 망가지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는 로봇. 그러나 사막에 길을 내기는 힘들다. 힘들지만 알아이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일을 할 뿐이다. 자신의 주인이 올 때까지.


알아이아이가 일을 하는 방식은 곧 주인과 함께 하는 방식이다. 고고에게 영상으로 랑이 계속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알아이아이에게 고고는 자신의 팔을 하나 떼어준다. 길을 제대로 내게 하기 위해서. 알아이아이와 헤어진 고고는 다시 길을 떠나다 사막의 폭풍에 휩쓸린다. 그러다 외계 생명체인 살리를 만난다.


살리가 자신을 고칠 수 있다는 점을 알지만 고고는 살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고쳐짐이 목적이 아니라 랑과 함께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고고는 기억의 땅으로 간다. 그 곳에서 랑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결국 고고가 하는 여정에서 깨닫는 것은 자신에게도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것. 그것을 인간의 관점에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면 그것이 바로 감정이고 정서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고고가 만나는 네 인물, 지카-버진-알아이아이-살리.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고고는 함께 했던 랑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예전의 고고가 아니라 감정이 있는 로봇 고고로.


네 인물을 도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카는 새로운 문명을 찾아 떠나는 인류가 될 테고, 버진은 길 잃은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을 상징하고, 알아이아이는 과학기술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려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지구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데ㅡ 이때 외계가 등장한다.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답은 그곳에 있지 않다. 바로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고고는 사막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사막에 있는 과거로 가는 땅으로 간다. 과거로 가는 땅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땅이고, 그것은 부재를 충만으로 채우는 장소가 된다.


사막을 통과해가면서 다른 존재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고고는 성장해 간다. 그 성장이 인간이 통상 말하는 성장과 같지는 않지만,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니 이는 분명한 성장이다. 


무척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고고가 로봇이 아니라 바로 성장하고자 하는 우리들이라고 여기니 더더욱 재미있는 그런 소설. 부재, 비어 있음이 채움, 충만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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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쌓였던 폐단들을 없애는 일. 하지만 적폐청산이 쉽지는 않다. 한방에 해결할 수는 없다. 현대에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처럼 물줄기를 바꿔 오물덩어리를 한번에 쓸어버리면 좋겠지만, 적폐들을 누군가의 어퍼컷 몸짓처럼 한 방에 날려버리면 좋겠지만, 세상 적폐들은 어퍼컷 한 방으로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크게 휘두른 어퍼컷은 빗나갈 확률이 높다. 어퍼컷 한 방보다는 꾸준히 날리는 잽이 더 유효하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잽을 맞다보면 충격이 누적되어 결국 나중에는 쓰러지고 만다.


적폐 역시 마찬가지다. 꾸준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치우려고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큰 거 한방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다.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월급은 제 자리이다 보니, 실질소득은 감소한 상태다. 여기에 금리는 올라 빚을 얻은 사람들은 이자에 허덕이게 된다.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재해로 죽어가는데도 그들이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제도도 별로 없다. 파업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아니다. 파업을 하는 순간 노동자들은 사용자들이 제기한 온갖 손해보상 소송을 감당해야 한다.


학생들이 입시 부담으로 죽어나가도, 교사들이 각종 스트레스로 죽어나가도 교육현장은 바뀌지 않는다. 한방에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아예 바뀌기 않는다. 헛손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놈의 어퍼컷. 어째서 이렇게 큰 것 한방만을 노리는지.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은 어떠해야 할까? 역시 큰 것 한방을 노리고 있는 것 아닌가? 상태의 어퍼컷을 어퍼컷으로 응수하려고 하고 있지 않나 반성해 보아야 한다.


서로가 큰 것만을 노릴 때 정작 바뀌어야 할 것들은 바뀌지 않는다. 큰 몸짓들만 보일 뿐. 그 몸짓들에 가려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지속된다. 지금 상태가 그렇다. 


어떻게 해야 어퍼컷에서 벗어날까? 이번 [빅이슈] 310호를 읽다가 배우 장서희의 인터뷰에 나온 말이 이번 호 다른 사람들이 한 말과 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냥 본인이 생각했을 때 이 길이다 싶고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면 밀어붙여서 끌을 보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언젠가는 빛을 봐요." (27쪽. 배우 장서희의 말)


적폐를 청산하는 일도 그렇다. 적폐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그래서 끝까지 해내야 한다. 하지만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눈 앞에 "자, 이렇게 이루었어!"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성과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어라, 이렇게 되었네." 하고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김현 시인이 말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해야 한다. 내가 큰 것 한방을 날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저 혼자 뭔가를 다하려는 큰 덩어리의 마음이라기보단 여러 마음에 보탠다, 한 부분을 채운다는 조각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조각이 모여 이루는 큰마음을 생각하면 어딘가에 마음을 쓰는 일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51쪽, 김현 시인의 말 중에서)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은 남에게 빛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 또한 누군가의 빛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삶이다. 


"우리는 먼 곳일지라도, 심지어 모르는 누군가에게일지라도 조명을 비춰줄 수 있다. 혹 자신이 죽어 있는 상태와 같을지라도 빛을 비추는 게 가능하다. 뜻하지 않은 그 빛이 누군가에게 구명조끼가 될 수도 있다." (56쪽. 윤은성의 글에서)


[빅이슈]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서 다룬 청년들을 다루고 있다. 청년들, 앞이 안 보인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지금 어떤 일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들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작은 조각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갖지 않은 것을 '실업'이 아니라 '무업'이라고 한 것이 마음에 와닿는다.


무업, 이건 일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다. 일이 없는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이들에게 [빅이슈] 역시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퍼컷을 날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어퍼컷을 날리려고 하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어퍼컷은 적중할 확률이 많이 떨어지니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남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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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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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부동산 재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유민주주의를 선도한다는 미국에서.


이 때 필립 로스의 이 소설이 소개되었다. 대체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대서양 횡단 비행으로 인기를 얻은 린드버그가 1940년대에 미국 대통령이 된 상황을 가정해서 전개된다.


린드버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어린시절 위대한 비행사,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그가 전쟁을 반대했으며, 반유대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고, 반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은 몰랐다.


그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대통령이 된 적이 없었고, 따라서 그의 반유대주의나 반공산주의를 펼칠 권력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는 심각한 상황까지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반공산주의는 뒤에 매카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만약 자신의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었다면, 반공산주의 뿐만이 아니라 반유대주의가 미국에서 기승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바로 그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근대 초기 유럽에서 민주주의의 나라로 칭송한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


소설 속 인물은 린드버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서서히 다가오자 그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어떻게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맡게 되었을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내가 환각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거야."(274쪽)


과연 이것이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이 말을, 이 태도를 우리에게 그대로 돌려주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또다시 그는 대통령 후보로 나오겠다고 설치는 이 시대에, 또한 한때의 인기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로도 슬퍼진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 삼권분립이 이루어지고, 이 삼권이 독립적으로 권한 행사를 하면서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데... 소설 속 미국에서는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이고, 그런 추세 속에서 삼권분립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여전히 삼권분립을 믿는다. 아니,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민주주의를 포기한 순간, 그는 이민을 가든지 하는 방식으로 그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이 한 말...


"... 우리의 대법원은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요."(276'쪽)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의 대법원은? 소설보다도 못한 현실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인물처럼 이렇게 대법원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좋겠는데... 


2023년 11월 대법원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해경 수뇌부는 무죄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비난을 받을 수 있어도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세상에 높은 자리는 높은 만큼 권력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 판결. 다시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아니 기소라도 할 수 있는지, 이런 대법원을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 소설 속 인물은 아직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고 해야 할지.


이런 대체 역사 속에서 유대인 가정이 겪는 일들이 펼쳐지는데...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은 언제든지 있다. 유대인들이 역사 속에서 겪어온 일들을 보면.


그런데 소설은 유대인 가정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지금 현실은 이제 반유대주의는 유럽에서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오히려 반유대주의에서 반이슬람주의로 바뀌었지 않나 싶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반공산주의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나라로 자리를 잡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사람들, 또 기독교의 적이라고 일컫는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 소설을 반유대주의의 대체 역사소설로 읽어도 좋지만 반이슬람주의를 경계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교와 집단을 바꾸어서 읽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소설에서는 어떠한 종교나 집단에 대해서 경원시 하고 그들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과 함께 이루는 공동체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유대인 가정을 지켜주려는 이탈리아계 이민 가족의 모습,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는 기독교 가정,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을 보호해주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이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반유대주의가 설 자리는 없지만 반이슬람주의는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을, 인물을 이슬람 가정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어떨까? 그러면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가 옳지 않음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점. 절대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 정치에 대해서, 인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읽어야 한다.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었다면 이 책 뒤에 실린 등장인물에 대한 실제 역사적 사실을 꼭 읽어야 한다. 이것이 대체 역사소설을 읽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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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폐지하라 -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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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제목에 찬성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족을 폐지하라니... 마치 패륜을 저지르라는 말과도 같이 들린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속했던 가족인데, 이 가족을 폐지하면 도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태어남과 자라남, 그리고 죽음에 가족이 모두 관계를 하고 있는데, 이런 가족을 폐지하라고 하면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 가족을 해체한 다음, 가족 대신에 어떤 무엇을 넣는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힘을 우리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족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굴레로 사람을 뒤집어 씌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동체가 책임져야 하는 일도 가족이 해야 하고, 일례로 복지 혜택을 받으려고 해도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또는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때 가족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있어서 피해를 주는 가족인데... 또한 가족이 과연 행복하느냐에도 의문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오히려 경제라는 면에서 가족을 인정하고, 가족이 불변하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 또한 차별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계속 강고하게 유지되었고, 가족을 해체한다는 주장은 허황된 주장으로 매도되었다고 한다.


어쩜 타당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경제활동의 주체를 찾아보니, 가계, 기업, 정부라고 한다. 가계라는 말을 쉽게 말하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기본적인 조직이 가족인 것이다. 그러니 가족이 경제활동을 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경제는 가족이 우선 책임져야 한다는 이런 관념은, 자신들의 생활을 가족이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공동체의 의무, 책임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살기 힘든 가족을 돌보면 그것은 공동체가 제 할일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무슨 혜택을 베푼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은 경제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의 책임을 개인이 넘겨받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가족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예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가족 해체 주장과 새로운 공동체 실험 등을 소개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가족이 해체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인 키부츠만 해도 가족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가족은 해체되지 않았다. 인류가 존속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가족은 존재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지금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핵가족은 더욱 문제가 많다고 한다. 굳이 가정폭력을 예로 들지 않아도, 핵가족 제도로 인해서 개인들이 지니는 어려움은 많다고 볼 수 있다.


돌봄이나 교육 등을 가족에 맡기고 있으니, 이는 공동체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 즉 기존의 가족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저자의 주장이 맹랑하다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기존 가족이 하던 일을 공동체에서 할 수 있다는 상상, 아니 하게 해야만 한다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가족을 완전히 해체하자는 주장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국가가 특히 의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자기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돌봄제공자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도록 만드는 동시에, 민간에 내맡겨진 돌봄에 반기를 들고, "부모의 권리"에 저항하고, 모든 사람이 다수의 돌봄을 받는 게 정상인 세상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58쪽)


가족을 핏줄로만 제한하지 말자는 제안, 그리고 다른 여러 종류의 가족들이 있을 수 있음을, 특히 특정 가족으로 한정하면 가족-국가가 구분이 되고, 내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과는 분리되고, 또한 국가들끼리 분리된 상황을 유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한 구별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가족을 해체하자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반감을 잠시 묻어두고 한번 읽어보자. 과연 가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가족의 울타리를 공고하게 하면 할수록 사회공동체는 책임을 덜고, 공동체 의식은 더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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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곳.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소에는 수많은 삶들이 거쳐간 역사가 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삶들이 겹쳐져 있는 곳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런 삶의 축적으로서의 장소를 서효인이 시로 썼다.


  장소가 시가 된다. 장소에는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지명이 아니다.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또 삶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장소다.


그런 장소에 대한 시들... 많은 지명이 나온다. 우리가 잘 아는 지명들만 꼽아도 여수, 이태원, 강화, 남해, 부평, 강릉, 목포, 인천, 진도, 평택, 서울, 구로, 안양, 나주, 안성,, 파주, 마산 영광, 철원 등등 많은 장소들이 나온다.


우리가 살아온 장소들. 또 조상들이 살아온, 미래 세대가 살아갈 장소들. 이 장소들에 얽힌 삶들. 그것을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 중 '진주'란 도시를 생각해 보자. 진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논개? 남강? 기생? 냉면?


이 모든 것이 진주란 도시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은 진주에서 백정을 떠올린다. 형평사 운동을 되살려낸다. 형평사를 불러오기 위해 돼지고기를 소환한다. 그렇게 시인은 '진주'란 장소에서 많은 것들을 불러낸다.


진주


  지난 주말에는 동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두 근을 떼서 먹었다. 수육용이요, 비계는 싫어요, 했을 뿐인데 돌인지 고기인지 알 수 없는 돼지가 몸을 털었다. 이번 주말에는 기차를 타고 진주에 갔다. 옆자리에는 지난번 그 정육점 주인이 탄 것 같은데 그때 감히 따지지 못했던 고객으로서의 품위와 권리 같은 것이 떠올라 백정처럼 분해지는 것이다. 진주에 도착할 때까지 분한 마음으로 졸다가, 창밖을 보다가 했다. 왜 질긴 돼지고기를 성토하지 못한단 말인가. 졸리지도 않으면서 눈꺼풀을 닫은 채 진주에 닿았다. 작년 여름에 누구는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다 보기 좋게 실패했다. 돼지고기에 술추렴하며 몸을 털었다. 진주에 도착하니 남강이 보이고 강에서 부드러운 비계 같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정육점 주인이 날아가고 없다. 어디 갔지? 어디 갔노? 흩어지고 없다. 질긴 고기처럼 입을 다물고 동덩이처럼 자리에 앉아서 전화고 받고 서류도 쓰고 했다. 문득 관광객의  품위와 권리가 떠올라 남강에 몸을 비추어보았다. 때는 1923년이었다. 진주 남강에는 백정들이 모여 운동 단체를 만들었고 그것을 형평사라 했다. 비닐봉지에 든 고기 두 근이 바스락 소리를 내었고,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 몸을 털었다.


서효인, 여수.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2쇄. 100-101쪽.


형평사 운동은 성공했을까? 백정 자식과는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는 그 완고한 사람들이 있던 시대에... 그들은 평등을 외쳤는데, 21세기에 와서 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단결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노조 결성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또는 노조를 만들어도 무력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돼지고기에서 시작하여, 진주, 노동조합, 백정들의 단체인 형평사까지... '진주'에 얽힌 이런 삶들을 시인은 우리에게 풀어내 주고 있다.


그렇담 내가 살고 있는 장소는 어떤 삶들이 얽혀있을까? 문득 살펴보고 싶어진다. 지금 내 삶이 그 장소에 얽힌 삶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런 생각을 들게 한 것만으로도 이 시집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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