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 - 통권 184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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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왜 영화 [서울의 봄]이 생각났을까?


  오지 않은 서울의 봄... 이런 생각을 하다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도 생각났고.


  막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싶은 '서울의 봄', 아니 그해 겨울.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었을까?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다. 분명 실현 가능했던 방법들이었고, 그 방법들 중에 몇 가지만, 아니 한 가지만 실현이 되었어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겠지.


  방법은 있었고 실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못했다.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안 했다고 보아야 하나? 안 한 이유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즉 '지피지기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라고 했는데, 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 : 서울의 봄 - 검색 이미지 (bing.com)


 세상에 반란군이 목숨을 걸고 진격하고 있는데, 평화협정이라니... 또 막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돌아서다니, 거기다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자리를 비우고 떠나다니,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의견을 묵살하다니...


그래서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고, '침묵의 봄'이 지속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지. 왜, 이번 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녹색평론]이 늘 해오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후 재앙이 아닌 생태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


우리 삶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계속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 바꿔야 한다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도, [녹색평론]에서 한 주장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지 않나. 80년대 독재를 겪었듯이, 지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후 변화로 고통을 받고 있지 않나. 아주 다양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 생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으니.


그러니 최근에 봄 영화인 '서울의 봄'이 생각날 수밖에. 녹색평론이 영화 속에서 쿠테타를 막으려고 애쓰는 인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영화는, 역사는 순간의 패배로 10년 넘게 그들의 천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10년 조금 넘었다면, 다행히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더 지속되지 않았지만, 기후, 생태 위기는 그렇지 않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 수도 있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영화와 이번 호를 연결지으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두 편의 글 때문이다. 정성헌/이문재의 대담을 실은 글인 '중심이되 중심이 되지 말라'는 글에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이 몇 개 실려 있다. 그 중에 이런 것...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상유십년(尙有十年)!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의 시간이 있다. 3년간 해보고 1년 조정기를 거쳐 다시 3년씩 두 번 더 해보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177쪽)


이 말이 희망을 준다. 이번 호 앞부분에 실린 '윤석열 정부 농정 나침반은 어디로 향하나, 뉴미디 시대의 언론과 정치 권력'을 읽으면서 현실의 답답함을 이런 지침을 읽으며 희망이 있음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서평으로 실린 '마음과 행위로 숲 만들기<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라는 글... 난지도를 공원으로 만드는 과정을 쓴 책에 대한 서평인데... 지금은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숲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쓰레기산이었을 뿐.


2012년에 1만 그루의 묘목을 심지만 단 한 그루를 남기곤 모두 죽었다고(254쪽)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12년간 3만 6,258명의 봉사자와 141종의 나무 13만 3,708그루를 심고 돌봤다고 한다.(255쪽)


앞에 언급한 정성헌의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에겐 10년의 시간이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으로 간다.


'시민을 넘어 천지인민. 국민 5% 즉 250만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177쪽)


난지도라는 장소를 사람들이 찾는, 숲(자연-동식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장소로 만드는데 오랜 시간, 또 운동가 몇몇이 아닌 함께 하는 여러 사람들의 참여가 있었다. 그렇다면 난지도보다 큰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정치인 몇, 시민단체 몇이 아니다. 시민이 아닌 천지인민이라고 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참여, 국민 5%의 참여가 있다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가? 아니다. 2016년을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그때 모인 국민들 5%가 넘지 않았을까? 그러니 바꿀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면 바꿀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그냥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 정치 상황뿐만 아니라 지구 차원의 환경(생태) 문제에 관련해서도.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과 달리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는 희망을 본다. 


이번 호에는 최근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지상군 투입 등에 대한 글도 있다. 읽으면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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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의 진화생물학 - 진화는 어떻게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만들었는가
롭 브룩스 지음, 최재천.한창석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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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물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물학계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윈에 관한 책들이 다시 많이 나오고 있기도 하고, 다윈의 학설을 계승한 학자들도 많은데... 이 책의 저자 또한 다윈의 학설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만의 용어로 심오한 논의를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일들과 진화론을 연결짓고 있다.


진화론을 경제학과 연결한다든지, 로큰롤이라고 하는 음악과 연결짓는다든지 이렇게 진화론이 생물학에 머물지 않고 우리들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진화론을 설명하는 책 답게 우리 몸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몸뿐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몸도 진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왜 이성을 지닌 인간이 비만이 될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훑어간다. 수렵채집을 하던 시기부터 농경을 하게 된 시기까지... 각종 합성식품을 만들어내는 현대까지.


먹을 것이 귀했던 인류는 저장하는 몸으로 진화를 했고, 그런 진화의 결과 소비량보다 많은 지방을 흡수하게 된 지금은 자연스레 비만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만이 진화의 결과라는 것인데, 단지 진화의 결과라고 생물학에만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고, 경제와 문화를 융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쩌면 진화는 (특히 자연선택은) 경제학의 원리와 같을지도 모른다. 최소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얻는 것. 그것이 진화로 우리 몸에 굳어졌다면 최소비용으로 너무도 많은 효용을 내는 음식들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또 그렇게 필요한 영양소(맛)를 섭취하도록 진화해 온 몸이 어찌 비만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비만을 이야기하면서 다음은 인구로 넘어간다. 여기서 인구라고 이야기했지만 일명 성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섹스'에 관한 내용이다. 하긴 인구와 섹스가 연결이 안 될 수가 없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라는 말이 있듯이 섹스 없이 인구도 없다. 물론 인간복제가 가능해진 지금은 섹스 없이도 인구를 늘릴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섹스 없이는 인구를 늘릴 수는 없다.


그러니 섹스는 진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지 진화와만 관련이 있지 않고 경제와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 점을 여러 장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일부다처제'를 생각해 보자.


'일부다처제'라고 하면 모든 남성들이 찬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부다처를 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선 많은 여성에게 경제적인 윤택함을 부여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 다음에는 권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도 많은 권력을 지니면 더 많은 혜택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소수가 많은 여성과 결혼을 하면 결혼을 하지 못하는 남성이 남는다. 이들은 어떻게 될까? 그냥 나는 어쩔 수 없어 하고 말까? 아니다. 자포자기한 사람들, 어떤 행동을 해도 손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미래가 없기에, 그들은 사회불안 요소가 된다. 사회학적으로도 그렇다. 이는 단순한 진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전적으로 우수한 종자가 자신의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서 다른 약한 종들을 억압하면 약한 종들은 도태되지만, 도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난다.


특히 인간들처럼 70억명이 되는 개체수를 지닌 집단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자연스레 '일부다처제'가 '일부일처제'로 변화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 또 성적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순차적인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순차적인 일부다처제는 결혼-이혼-결혼-이혼-결혼 등의 과정을 거쳐 두 명 이상의 배우자로부터 자손을 낳는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 사회에서 우성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기회가 없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무모한 행동도 한다. 사회불안이 야기된다. 우성유전자들도 혼란에 휩쓸리면 자신들의 유전자를 남기기 힘들어진다. 그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타협이 필요하다. 일부일처제가 다수의 문화로 정착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로큰롤(락 앤 롤)도 마찬가지다. 가장 성적인 음악이 로큰롤이라고 한다. 이들 스타들은 바로 성적으로 우수하다고 뽐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락스타에 열광하는 것은 진화의 결과라고 한다.


화려하고 멋진 수컷... 우수하다고 진화를 통해서 선택되었지 않은가. 락스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물을 보라. 화려한 수컷들은 자신들의 유전자를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천적들에게 잡힐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암컷들의 선택을 받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가능성 또한 높다. 락스타들의 이른 죽음을 이렇게 동물 수컷들의 화려함과 연결을 짓는다. 


화려함 뒤에 있는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이 책은 진화론과 비만, 인구, 음악을 연결짓고 있다.


학술적인 논의를 한다기보다는 우리가 늘 접하고 있는 부분을 진화론과 연결지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진화론에 대해서 반감을 지니지 않게 된다. 또한 진화론이 생물학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예술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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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3-12-20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락스타에 열광하는 것이 진화의 결과라는 주장이 정말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음악에도 진화론이 엮일 줄은 몰랐는데요..!!!! 제가 락스타를 사랑하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나봅니다..😻

kinye91 2023-12-20 14:20   좋아요 0 | URL
저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 책을 읽어보니 진화론과 락음악이 어느 정도 관계가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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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이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젊은이들이다. 대체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방광, 나의 지구'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젊은이가 겪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대변한다.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날 그날 먹고 살기 바쁜,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 힘든 그런 사람들.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고통이 미래에도 계속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현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좌절한다.


집을 구하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기도 힘들며, 가족들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이 이 소설집에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아주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는다.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기에는 그런 삶이 만연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희 미래는 없어!'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고단한 삶일지라도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소설집의 제목이 된 소설 '젊은 근희의 행진'을 봐도 그렇다. 요즘 추세에 맞게 유튜브 방송을 하는 근희. 그런 근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문희. 하지만 문희가 아무리 못마땅하게 여기더라도 근희는 근희의 생활이 있다.


이 점을 근희의 편지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라는, 그런 평가는 편견으로 이루어지고 더욱 강화될 뿐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아달라는 근희의 편지. 그것이 바로 기성세대의 눈으로 청년들을 평가하지 말라는 의미다.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관점(그것이 옳다고 여기면서 젊은이들의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재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을 고수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훈계는 훈계가 아니라 잔소리, 또는 꼰대짓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삶을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만큼 이 소설집에서는 200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 힘들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기성세대들이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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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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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가지 재료가 나온다. 레시피라는 말이 제목에 있으니, 요리에 관한 글이 있어야 한다.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레시피가 나온다. 그 장에 해당하는 재료를 쓴 요리의 레시피.


그러나 중심은 재료가 아니다. 그 재료와 연결된 역사, 문화, 경제, 정치다. 그야말로 어떤 재료에도 역사와 문화, 경제와 정치가 녹아들어 있다. 그러니 요리에 여러 재료가 들어가듯이, 경제학에도 여러 요소들이 빠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어떤 음식 재료들이 나올까? 


마늘, 도토리, 오크라, 코코넛, 멸치, 새우, 국수, 당근, 소고기, 바나나, 코가콜라, 호밀, 닭고기, 고추, 라임, 향신료, 딸기, 초콜릿


총 18가지 음식 재료가 나온다. 이중에 낯선 재료들도 있다.(오크라) 또한 재료가 아니라 이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코카콜라)


음식이든 음식 재료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 얽힌 장하준의 경험은 수필을 읽는 느낌을 준다.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쓴 글... 하지만 곧 그런 개인의 경험에서 사회로 넘어간다.


재료와 얽힌 역사가 나온다. 가령 마늘하면 영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재료가 마늘이었다고 하는데, 또한 영국은 다른 나라 음식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은 다양한 음식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음식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지금 영국은 마늘을 예전만큼은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인데...


이렇게 마늘과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경제학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책의 머리말에 마늘 이야기나 나오는데, 영국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마늘을 싫어하던 음식에서는 단일성을 고집하던 영국이 어느 순간부터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경제학은 반대로 갔다고 한다.


저자가 영국으로 유학한 이유가 경제학의 다양성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영국에도 경제학은 다양한 이론들이 사라지고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 이론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그것이 문제라고 한다. 경제학은 세상을 읽는 학문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찌 단일할 수가 있겠는가?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고, 그 관점들이 부딪히면서 세상을 좀더 잘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야 하는데, 점점 주류경제학만 살아남는다면 그 사회가 경직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마늘로 경제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제 다른 재료들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풀어간다고 보면 된다.

                  

그 중에 최근에 겪은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하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 재료는 바로 '고추'다.


매운 맛, 고추... 향신료와 비슷하게 쓰이지만, 자, 고추와 경제학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우선 고추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또 고추의 맵기를 측정하는 단위도 알려주고. 


(여기서 고추의 맵기를 다루는 단위는 스코빌 척도라고 한다. 그냥 알아두자. 251쪽 주에 보면, 우리나라 청양고추는 1만에서 2만 5000 사이를 보인다고 한다. 맵다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못 먹는 청양고추가 이 정도인데, 아바네로 고추는 10만에서 75만 정도 된다고 하니, 맵기가 청양고추의 5배가 넘는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리퍼 고추는2200만이라고 하니, 상상이 되지도 않는다. 어디 가서 한국 사람들이 매운 것을 잘 먹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단 생각도 한다) 


친구와 스촨 요리 전문점에 간 이야기를 한다. 스촨 요리는 맵기를 고추 5개로 표시한다고...그런데 고추 표시가 없는 요리를 시키면 과연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니라고 한다. 여기가 반전이다. 고추 표시는 맵기를 표시한 것이지, 고추가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를 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추 표시가 없으면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착각하기 쉽다. 스촨 요리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다음 장하준은 고추와 경제학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바로 고추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에 해당하는 일들이 많지만, 돌봄 노동으로 이야기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총생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노동인데 노동으로 잡히지 않는다. 수치화되지 않는다. 마치 고추가 음식에 들어갔지만 고추 표시를 하지 않는 것처럼.


고추 표시가 없다고 맵지 않은 것이 아니듯이, 그림자 노동 역시 노동이 아닌 것이 아니다. 같은 노동이다. 그것도 코로나19로 인해서 돌봄 노동, 특히 그림자 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


코로나19의 공포가 지나가자 어떻게 되었나? 돌봄 노동에 대해서 잊지 않았나? 이것은 제도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하준은 개인의 변화만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의 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그 점을 요리의 재료를 시발점으로 역사, 문화, 경제, 정치를 아우르면서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경제학 책이 아니라 우리가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 레시피처럼 경제학 레시피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처음부터 끝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각 장마다 자신만의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장만으로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요리 레시피가 그렇지 않은가. 각 레시피가 독립되어 있고, 그 레시피로 요리를 할 수 있듯이, 이 책 또한 각 장들이 경제학에 관한 어떤 부분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누구나 따라할 수 있게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 레시피가 좋은 레시피이듯이, 장하준의 이 책은 경제학과 관련된 내용들을 쉽고 간결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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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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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우리나라 고등법원에서 위안부 피해 배상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2차소송 항소심이라고 하는데, 일본이 피해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상하다. 아직까지도 이런 재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재판 결과가 나왔음에도 일본은 배상을 하지 않고 있고, 일본이 해야 할 배상을 우리나라 정부가 기금을 걷어 보상을 하겠다고 하기도 하니, 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나라 정부도 책임이 있다. 비록 이 정부 들어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조선을 잇는 나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배상을 하는 것과 달리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아내려는 노력을 정부가 해야 한다. 피해당사자들, 또는 시민사회단체에 맡길 일이 아니다. 정부가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은 책임 방기라고 할 수 있다. 미래 운운하면서 과거를 지우는 일을 하려는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재판부가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게 한다. 정부가 일본 정부에 배상을 하라고 할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 모르쇠로 나올 테고, 우리나라 정부 역시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럴 때 김숨의 소설을 읽었다. [한 명]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들이 한명 한명 돌아가시고, 이제 한 명만 남은 상황. 그런 상황이라는 뉴스를 본 할머니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등록된 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위안부의 피해 상황을 증언할, 피해배상을 청구할 분들이 없어져,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비록 정부에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을 수 있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할머니.


할머니는 한 명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게 된다. 일본군에 의해 끌려가 온갖 험한 일을 겪었던 자신의 삶. 자신의 이름을 잃고 일본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그곳을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던 그 시절을.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지만, 자신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살아온 세월들. 지우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고, 잊으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 참혹한 과거들을 현재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할머니.


최후로 남은 한 명을 만나러 가면서 소설은 끝난다. 그렇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한 명이 돌아가셨다고 해도 역사의 증언은 끝나지 않는다. 한 명은 또 다른 한 명이 나타남으로써 역사의 증언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명 속에는 우리 역사가, 수많은 위안부들의 삶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한 명은 한 명이 아니다. 위안부 모두가 되고, 우리 역사가 된다. 우리가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되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소설은 전개된다. 과거의 비극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풍길이라는, 소설의 끝부분에서 한 명을 만나러 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할머니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는 결코 한 명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책임을 묻게 된다. 아무리 책임을 회피하려 해도 회피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과거를 묻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소리는 말이 안 된다. 과거는 미래로 가기 위한 발판이다. 결코 과거를 지워서는 안 된다. 과거는 미래가 실현되었던 현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한 명]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과 더불어 영화 [귀향]을 보면 좋겠다. 이 소설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이 영화 [귀향]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 여기에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에서 발간한 [6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기다림]도 읽으면 좋다.


60년, 이제 70년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기다리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다림의 의지조차도 일본 정부가 아니라 우리 정부가 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한 편의 소설이 이렇게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한 명의 사람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한 명은 한 명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 그 일을 겪었던 모두가 된다. 소설 역시 우리 역사의 일부가 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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