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어쩌면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들뿐이라는 사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과연 나에게 보이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내게 보이지 않는 면이 분명 있을텐데,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면을 보려고 노력했던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가짜뉴스는 사라진다. 빅이슈에서 가짜뉴스를 다뤘는데, 가짜뉴스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진실은 그만큼 단순하다. 너무 어렵게 진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그 단순함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데는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에겐 가혹하게, 타인에겐 관대하게, 그리고 잘못한 것이 생긴다면 인정하고 사과할 것'(17쪽. 오후, '가짜뉴스 속에서 일단 대충 살아남기' 중에서)


참 단순하다. 그런데 참 어렵다. 자신에게 가혹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옛 성현의 말도 실천하기 힘든데,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일... 남을 관대하게 대하는 일.


이런 자세만 지니고 있어도 지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망사고는 막을 수 있다.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데, 그 노동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는 일이 빈번하다니...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어떤 환경인지 꼼꼼하게 챙기는 사업주, 관리자들이 얼마나 될까? 이윤보다도 노동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경영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내는 이윤이 어디서 오는지, 노동이 없으면 이윤도 없음을 잘 알고 있을텐데...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가혹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가 떨어지거나 끼이거나 절단되거나 또는 서서히 몸 속에 스며드는 독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은데, 사과, 진정성 있는 사과가 이루어진 적이 있던가. 그때그때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인 사과만 있지 않았나.


그러니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긴 자신이 한 말을 기억도 하지 못해 사과조차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게 된다.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빅이슈 이번호에는 그런 보이지 않던 면들이 실려 있다. 그런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동물영화제 소개를 통해서 동물들의 삶을 생각하게 하고, 영화를 통해서 특성화고를 나오고 취업을 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유의 비극은 단 하나의 명징한 이유로 발생하지 않는다. 겹겹의, 연쇄의 원인 그 속에서 침묵한 입과 방관한 눈 속에서 오랜 시간 꾸준히 퇴적돼온 결과다. 열하홉 살 외주업체 노동자의 죽음, 현장실습 고교생의 죽음,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뉴스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30쪽. 정지혜, '우연을 기다리는 유연함으로' 중에서)


영화 <다음 소희>에 대한 글에서 나오는 말이다. 소희란 주인공이 겪는 일들을 그린 영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 


이 글에서처럼 사고는 정말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때마다 사과, 사과... 그러나 그 사과가 잘못을 바로잡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지... 오히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가혹한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계속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으로... 그래서 정문정이 이번 호에 쓴 '내가 아는 세상이 평균이 아니니까'라는 글에서 한 말을 곱씹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것이 상대에게도 통할까? 아닐 수 있음을...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면 가짜뉴스부터 시작해서 타인에게 가혹한 그런 환경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은 복잡한 일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간단하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시 명심하자. 나에게는 가혹하게,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그리고 잘못은 진심을 다해서 사과하기.


빅이슈 이번 호, 내 태도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게 보여준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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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읽다가 불현듯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가난은 가난을 치장한, 보여주기식 가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방송에 나오는 가난은 이상하게도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난의 냄새를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봉준호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로 인해서 극명하게 갈린 빈부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런 냄새.


  이들은 아무리 행복하게 지내도 가난의 냄새를 없애지 못한다. 몸에 배인 그 냄새는 향수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도 사실 가난의 냄새는 절실하지 않다.


반지하에 사는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행복이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서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집이 침수되고 물건들이 못 쓰게 되었을 뿐, 그들은 가난에도 행복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가족들이 풍기는 그런 행복의 냄새. 과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럴까? 그런 집도 있다. 물질이, 돈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가족을 불행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가난의 냄새는 행복의 냄새로 덮어지지 않는다. 행복의 냄새를 가난의 냄새가 압도한다. 그리고 처절하다. 처절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더 처절하기도 하다. 


박완서 소설에서는 부자들이 가난을 체험한다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빼앗아간다고 나와 있지만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틀린맞춤법으로 읽는 도둑맞은 가난, 알라딘 비매품, 75쪽.)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한 글이 바로 박현주 글 '가난이 드러날 때 감춰지는 것들'이다. 이 글 마지막 부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렇게 진짜 가난은 뒤로 더 물러나고 숨겨진다. 나는 드라마가 그려내는 건 대체 어떤 가난인가 생각하게 된다.(16쪽)'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난한 집이 가난하지 않다. 물론 가난을 상대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에 나오는 반지하 생활과 실제 반지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경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았을 을지로의 풍경들.32-37쪽)과도 다르다. 


그러니 이번 호에 실린 지수의 글 '반지하 SOS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에서 말하고 있는 '개발주의를 내세우며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존재할 자리를 없애버리는 지금, 불평등이 곧 재난임을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집은 인권이다. 주거권은 생명이다. (57쪽)'는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가난은 포장될 수 없다. 방송에 나오는 가난이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처절한 가난, 이는 화면으로 보여주기 힘들다. 그렇더라도 가난을 덮는 그런 가난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삶, 거기서 겪는 어려움,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모습... 


어쩌면 영화 '똥파리'에 나온 가족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 이 영화에서 가난은 정말 지지리도 가난한, 그런 가난의 냄새, 불행의 냄새가 스멀스멀 나오는데,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잘 나타나고 있으니... 그런 영화, 드라마를 방송에서 보고 싶단 생각.


이번 호를 읽으면서 그래서 반지하를 주거공간으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그들을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집, 홈리스, 빅이슈. 그리고 사회의 책임. 국가의 책임. 나라도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 이제는 사라져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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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말, 무엇을 덧붙일까... 그래, 빅이슈를 읽고 무엇을 덧붙일까 하는 고민을 한다.


  굳이 무엇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냥 읽으면 되는 잡지 아니던가.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점들을 생각하게 해주니, 그 자체가 이미 내 삶에 덧붙여지고 있는 셈인데...


이번 호에는 직업에 관한 글들이 제법 있단 생가을 했다. 다양한 직업에 대한 소개.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커버스토리는 늘 어떤 직업을 지닌 사람들 이야기니, 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교사의 이야기도 있고,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 이야기도 있다.


이런 직업과 더불어 집에 대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소위 정상가족이라는 말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글, 김경서의 '비정상적 빈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빈곤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빈곤한데도 호소할 수가 없는, 정상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왜 그들의 삶에 정상-비정상이라는 말로 덧붙이려고 하는지, 그냥 그들의 삶을 그대로 인정해주면 되는데... 


이런 덧붙임은 쓸모가 없는데, 빅이슈를 통해서 그 점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번 호에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담은 존재를 소개하고 있는데, 급속도로 디지털화 된 세계에서 예전의 존재들에 대해서 느끼는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글들이다.


아, 나도 그랬었지. 나도 저런 존재들과 함께 했었지...카세트 테이프... 한참 듣다보면 테이프가 늘어져서 소리가 길어지던 그런 테이프에 대한 생각.


한 곡 한 곡을 빈 테이프에 녹음하던 시절에 대한 생각. 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선물하고 선물을 받던 그때에 대한 추억. 그런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다.


그렇게 다시, 지나온 세계를 생각하고, 지금 사는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고, 좀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빅이슈.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내 삶에 무언가를 더 채워주는 잡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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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는 이번 호를 여는 글에서 '마법'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마법? 우리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 마법처럼 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마법이라는 말은 현실을 넘어섰다는 말과도 같다. 현실이 어려울 때 우리는 마법을 기대한다. 이 현실을 잊고, 이 현실보다는 나은 현실을 원할 때 마법처럼 그런 현실이 다가오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마법이 아니다.


  마법 같은 일은 이상하게도 힘 센 사람에게는 잘 이루어지만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작 마법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데...


그래서 신데렐라에서는 마법의 힘으로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참여한다. 옛이야기든, 솔닛이 쓴 [해방자 신데렐라]든 그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다만 마법 그 후가 다르다. 마법으로 자신이 바뀌었는데 그것에만 만족하면 마법은 언제든지 풀린다. 힘없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듯이. 


하지만 마법임을 알고 마법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자신의 현실로 돌아올지를 스스로 결정하면 마법은 지속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마법이다. 순간적으로 잊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현실을 바꾸는 힘. 


빅이슈 이번 호 편집자가 말한 '마법'과 다른 의미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곧 '핫체리 엄지척(오후 14-17쪽)'을 읽으면서 안 좋은 쪽으로 마법을 부리는 존재를 발견했다.


언론이다. 그렇다. 강한 존재에게는 약하고, 약한 존재에게는 강한 그런 언론. 아니면 좋겠지만, 지금 언론의 행태는 앞에서 말한 것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노동자들의 파업을 보도하는 내용에서는.


그러니 잘 읽어야 한다. 글자만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자료만을 믿어서도 안 된다. 이 글에 나온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에 관한 보도를 예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임금을 30% 인상하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30%, 엄청난 인상률이다. 그런데 이들이 예전에 임금 30%를 삭감당했다는 기사는 없다. 30% 임금을 삭감당하고 몇 년 지내오다 회사가 조업을 잘하고 있으니 다시 30%를 올려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터무니 없는 임금인상 주장이라는 논조가 많다.


이대로라면 30% 인상도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지 임금이 인상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점을 지적한 언론은 별로 없다. 더 꼼꼼하게 기사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통계들을, 사실들을 언론을 통해서가 아니면 일반인들은 알기 어렵다. 언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남들보다 더 꼼꼼하게 사실관계를 따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어떻게 되어 왔는지도 살펴야 하고. 그들이 '체리피킹(cherry picking: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가져와 주장을 뒷받침하는 행위)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 체리피킹은 마법을 부릴 수도 있다. 통계를 통해서 사실인 양 제시하지만 약자층을 옭아매는 고리로 이용할 수 있으니, 약자에게 체리피킹은 자신들을 옥죄는 마법일 수밖에 없고, 강자에게는 그들을 옭아매는 마법일 수 있다.


그런 마법은 필요없다. 참고로 이 글을 쓴 저자는 '체리'라는 말을 빌려와 제목을 달았다고 한다. '체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참 나, 이 체리가 이렇게 우리 사회를 뒤흔들 줄이야.


여기에 '생존이 곧 투쟁이다(46-51쪽)'라는 글을 읽어보면 옥천에 사는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 마법이 필요한 존재는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그런 노력들이 마법처럼 자신들의 생활을 바꾸기를, 자신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마법끼지 필요하지는 않다. 그냥 그들을 사람으로 바라보면 된다. 나와 같은 사람.


이 글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우리들의 마음이, 태도가 마법처럼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니가 베트남에서 온 물건이 아닌데, 인구를 유지하는 역할을 할 뿐인 물건 취급을 하는 거죠. 언니가 '나는 물건이 아니야.'라고 말해요. 자유롭게 인간으로 살고 싶은데, 그걸 뒷받침해주는 정책이 없어요. 실상 언니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한국 사회였음에도 언니가 그 '필요'를 벗어나는 순간 쉽게 버리는 거예요.'(51쪽) 


이런 데서 마법이 필요하다. 통계를 감추거나 필요한 부분만 유리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이번 호는 읽을 글이 많다. '돌봄의 기술자들'이라는 꼭지에 실린 '통역사, 케어러, 부모의 딸, 그리고 부모의 부모'라는 글도 여러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도 마법이 필요함을. 아니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 마법이 필요함을 느끼게 하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마법처럼 살아가는 빅판의 이야기도 좋고. 힘들게 살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여성 홈리스 이야기에서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마법이 필요함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마법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또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우리 사회,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에게 마법이 필요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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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끝. [빅이슈 281호]는 여름을 특집으로 삼았다. 여름이 끝나갈 때, 여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잡지.


  우리는 여름을 더위와 비로 겪지만, 그런 겪음을 통해서 여름을 보내면서 어떤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여름이란 자고로 더워야 한다고... 무성한 녹음 속에서 더위를 피하기도 하지만, 그 더위를 온몸으로 겪기도 해야 한다고.


  물론 더위로 인해서 너무 고통을 받는 사람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여름이라고 해서 생각이 났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번 호는 여름에 청량한 마음이 들게 한다.


여름에 보면 좋은 영화,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점도 좋았고. 특히 이 말... 서로가 함께 지내야 할 때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이해란,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신뢰에서 시작된다' (43쪽)


여름의 끝에서 이 말을 생각한다. 이해, 서로 함께 지내는데 필요한 신뢰에서 시작한다고. 이런 신뢰를 통해서 이번 호에 실린 '늦게 철들 수 있는 권리'를 읽어보면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깨닫게 된다.


얼마 전에 만5세 초등학교 입학을 추진했었는데, 일찍 철 든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가 하면 그 아이들은 대학교에 진학하기보다는 일찍 사회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다. 약 5%. 반대로 늦게 사회에 진출하는,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대학을 나온 아이들도 약 5%.


그러나 이 두 집단을 대하는 태도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들이 나름대로 하고 있는 고민들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고려하고 배려하고 있는지.


일찍부터 취업하는 5%들과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5%를 비교해보면 과연 우리는 누구를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글 마지막에 있는 문장 둘. 


'가난하게 태어나도 너무 빨리 철이 들 필요가 없는 사회를 희망한다. 아이가 천천히 철이 들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어른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17쪽)


그런데, 무슨 만5세. 초등학교 취학. 더 일찍 철 들라고 강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적어도 이 글이 그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주로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일찍 철 들었는데... 그것을 일률적으로 앞으로 당기고 싶어하니, 그래도 능력 있는 집에서는 아이들이 철 들 시간을 더 늦출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더 빨리 철들라고 하는 꼴이 되니...

 

[빅이슈]를 읽으면서 몇 년째 읽으면서 그러한 시간들이 빅이슈를 신뢰하게 만들고, 또 빅이슈를 이해하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힘든 여름을 난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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