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밖에 나가보면 팬데믹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바깥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가 아니니, 이제는 거리에서도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이 제법 보인다.


  스포츠 경기장에는 관중들이 들어섰고, 학교는 모두 등교수업을 한다. 또한 시위도 일어나고 있다. 


  소위 먹자골목이라는 곳에 가보면 길거리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음식을 앞에 두고 도란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과연 팬데믹이 끝났는가? 사람들이 모두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빅이슈 이번 호를 읽으면서 팬데믹이 끝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팬데믹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 처한 위치에 따라서 감염병 시대를 맞이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또 피해도 달라지는데... 아직 팬데믹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번 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이런 다양성, 빅이슈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빅이슈는 사회적 약자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적 강자들을 다루지도 않는다. 그냥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을 나누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건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본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대한다. 쉽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은 일.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사람보다는 먼저 그가 처해 있는 위치, 또는 그의 특징을 먼저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라는 보편성은 그 개별성 속에 숨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빅이슈는 사람이라는 보편성을 먼저 본다. 보편성 속에서 각자 지니고 있는 개별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빅이슈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이가 없다면 다양성이 없을테니, 다양성이란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 아니던가. 그러니 빅이슈에 실린 글들, 또 나오는 사람들이 지닌 다양성은 빅이슈를 만나는 사람들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이번 호에 표지 인물로 나오는 정은혜 작가부터 서점과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람, 전직 공무원, 아이를 키우는 워킹 맘, 성우, 또 퇴직하고 제주도를 걷기 여행한 사람, 그리고 칸 영화제를 취재한 기자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읽을거리도 다양하고... 이런 다양성, 보편성을 잃지 않은 다양성 때문에 팬데믹 이후에 빅이슈를 판매하는 빅판들도 팬데믹이 종식되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빅이슈를 매개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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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장이 쓴 글 제목이 '질문'이다. 질문? 좋은 말이다. 질문이 있어야 한다. 이번 호 표지 인물은 배우 김지원이다. 김지원과 인터뷰한 내용을 읽으면서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김지원 배우가 빅이슈에 먼저 연락해서 표지 인물 사진을 찍었다는 점. '질문'이라는 주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배우는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 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사람.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만 질문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역할에 대해서도 질문해야 한다. 연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또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호흡을 맞추어야 할지 질문하고, 연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좋은 연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연기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을 할 수 있으려면 주의 깊게 살펴여 한다. 자기 관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가령 이번 호에 실린 대학에 가기를 거부한 사람의 글...그는 인터뷰한 글(한연화 씨의 대학 거부 그 후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 '여정은 시작됐다'는 글)에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은 굳이 대학을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대학 거부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해주실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일단 첫째,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웃음)"(57쪽)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도 좋지만, 이 말 속에는 우리 사회의 대학, 대학 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내게 대학이 꼭 필요한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부모가 가라고 하니까, 또 남들이 다 가니까, 그냥 가야 할 것 같아서 등등의 이유로 대학 진학을 한다면 이는 질문이 없는 삶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시류에 휩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웬만하면 대학 거부하지 말라는 말은 질문을 먼저 하라는 말로 들어야 한다. 대학은 내게 무슨 의미인가? 대학을 가지 않고 받을 수 있는 사회적 편견에 대해서 나는 버티거나 이겨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 더 많은 질문들... 그 뒤에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말이 '웬만하면'이란 말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질문을 이번 호에서 몇 가지 더 찾아보면, 장애인들이 자활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질문해야 하고, (강남역 김영덕 빅판의 인터뷰 글, 영화 속에 산다와 발달장애 여성들의 일자리를 만드는 프란치스꼬 빵집을 소개한 글인 빵으로 연결되는 곳을 읽으면 된다), 사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진냥이 쓴 투자 교육이 아니라 경제 시민 교육을!이라는 글과 오후가 쓴 '가짜' 뉴스가 아닌 가짜 '뉴스'를 읽으면 좋다)도 해야 한다.


어쩌면 질문하는 법을 잊고 또 잃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주어진 대로만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질문을 하듯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사회 속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에 서서 살아가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무대에 서고 싶은지도 질문을 해야 하고.


빅이슈는 그러한 질문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질문을 하게 하는 잡지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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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자, 전시회로'라는 제목이 있다. 코로나가 우리 생활을 완전히 제약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때가 되었다.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했고, 학교는 모두 등교 수업을 하게 됐다.


  학생들도 체육시간에 마스크를 벗어도 되고, 교실에서는 드디어 짝도 생겼다고 한다. 짝!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눌 사람. 코로나로 학생들은 짝도 잃었고, 대화도 잃었고, 몸을 움직일 시간도 잃었었다. 게다가 함께 잠을 자는, 학창시절 가장 큰 즐거움인 수학여행도 잃고 지냈으니...


  어떤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두 해가 지나고, 이제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이때를 맞이하여 빅이슈에서 다룬 주제가 바로 '전시회'다.


나하고는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장소. 전시회.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런 때를 맞아 빅이슈가 소개하고 있는 전시회에 가보아도 좋을 듯 싶다.


전시회와 더불어 저번 호에 이어서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보다는, 그들의 투쟁에 응원을 보내는 글들을 실었다. 그래. 언론에서는 중립을 표방한답시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을 함께 내보냈지만, 과연 그것이 중립일까?


중립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약자들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언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같은 말이라도 어느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임을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음을...


그것을 같은 비중으로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중립이라고 하면 그 중립은 강자 편을 드는 일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전시회'가 '장미'라면 '지하철 타기'는 '빵'이다. 장애인들이 전시회에 가려고 해도 지하철(버스)을 제대로 타고 갈 수 없다면, 전시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빵과 장미'로 대표되는 인간의 권리인데, 이들은 '장미'를 향유하기 위해서 '빵'이 확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빵'조차도 확보되지 않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다.


이번 호에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글이 실렸는데, 묘한 등치를 이룬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회를 즐기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두 주제가 함께 실린 이번 호는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에 탱고에 관한 글이 이 두 주제를 묶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탱고를 둘이 함께 추는데, 혼자만 잘한다고 상대 생각없이 제 멋대로만 춘다면, 그 춤은 볼썽사납게 되어버리고 만다고.


'나는 팀의 목표를 서로 잘 연결되어 기분 좋은 순간을 창조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를 위해 리더는 상대방이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상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본인도 움직여야 한다. 분명히 리드하지 않거나, 팔로워의 움직임을 확인하거나 기다려주지 않은 채 혼자만 급히 움직인다면 역할을 정성껏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는 불쾌한 순간과 보기 싫은 몸짓이다. 나는 대부분의 팔로워가 자신을 '추하게' 만드는 리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68쪽) 


리드와 팔로워를 정치인과 시민으로 바꾸고, '추하게'를 '힘들게'로 바꾸면 우리나라 정치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이때 팔로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장애인도 팔로워에 해당한다. 그들도 한 팀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춤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출 수 있게 리드해야 한다. 리드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지하철 출근 투쟁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치인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춤을 추는 리더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 팀은 제대로 춤을 출 수가 없다.


중립이란 바로 이렇게 리더가 제 역할을 해서 팔로워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힘들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하는 데 있다. 그것이 바로 중립이다. 양쪽 다 문제가 있다 또는 양쪽 다 이해가 간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


그래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함께 다룬 이번 호는 '빵과 장미'처럼 함께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런 주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렇게 '빵과 장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한 [빅이슈] 275호가 중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맙다. 이렇게 중립을 지켜주는 잡지가 있어서...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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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편함.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이다. 불편이라는 말 자체가 편하지 않다는 말이니, 편하지 않은 상태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불편함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나 혼자 살아가도, 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 불편한데, 남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는, 그야말로 불편함들이 연속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불편함을 모조리 편안함으로 바꾸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만들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모든 불편함을 제거한 사회가 유토피아가 아니라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최소화한 사회가 유토피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불편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불편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상태가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이번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호 기획기사가 '모두의 길을 위해, 장애인 이동권'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전국장애인차별 철폐 연대에서 지하철 출근 투쟁을 했다. 출근을 하는데 그들은 투쟁이어야 한다. 투쟁? 싸움이다. 왜? 장애인들이 제대로 출근을 할 수 없으니까.


그들의 출근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뉘었는데... 우리는 몇십 분, 또는 몇 시간 불편하지만, 이 분들은 평생을 불편하게 살아왔으니, 우리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 분들의 투쟁을 지지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왜 출근시간에 이런 투쟁을, 그것도 이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하느냐며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이 비난할 문제일까?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고, 비장애인들에게는 조금 불편한 문제라도 장애인들에게는 생활을 할 수 없는 불편함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사회의 수준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생활할 수 있도록 환경개선을 해달라는 요구에 동참은 못해도 지지는 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지지는 하지 않더라도 비난은 하지 않아야 함께 사는 세상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


빅이슈에서 이런 장애인 출근 투쟁을 다룬 사실이 빅이슈 답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이런 글을 싣는 일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조금 불편해서 다른 사람이 더 편해진다면 그런 불편은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생각을 한다.


장애인 출근 투쟁과 겹쳐 지하철(전철)에 있는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떨 때 보면 임산부가 아닌 사람들이, 그것도 남자들이 그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임산부가 없으니, 타면 비켜주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나 본데, 본래 비어 있는 자리와 앉아 있는 사람이 일어나 앉으라고 하는 것은 차이가 난다.


그러니 비워두는 불편함. 그것은 임산부의 편리를 고려한 내 불편함일 뿐이다. 여기에 왜 임산부 자리가 기존 자리와 넓이가 같을까 하는 의문. 보통 지하철(서울을 기준으로) 한 줄에 7명이 앉을 수 있다. 그 자리의 맨 끝에 임산부 배려석을 두었는데... 가운데 다섯 명이 앉는다. 비좁다. 임산부는 행동반경이 더 크고, 좀더 쾌적하게 앉아가야 하지 않나.


그러면 임산부 배려석이 있는 칸은 총 좌석 수를 6석으로 하고, 임산부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넓이를 다른 사람의 1.5배로 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할텐데... 그냥 기존 좌석에 임산부 배려석이라는 표지만 달 게 아니라... 좀더 넓은 자리라면, 비워두었을 때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앉기에 망설여지지 않을까 하는데...


마찬가지로 장애인 주차구역도 그렇다. 장애인들에 대한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는 사회라면 굳이 표시를 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주차하지 않고 좀 멀리 대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


내가 조금 불편해야 다른 사람이 편해질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 모두가 조금씩 불편하게 살아가는 사회... 쓰레기통까지 가는, 반려동물들의 배설물을 치우는, 질서를 지키는,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등등의 불편함... 그건 불편함이 아니라 모두의 편안함으로 가는 길이다.


빅이슈 274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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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꽃 2022-05-07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도 디스토피아와 다르지 않은 거 아닐까 합니다ㅜㅜ

kinye91 2022-05-07 10:59   좋아요 1 | URL
그래요. 내가 조금 불편해질 수 있는 것도 여유 있는 마음 아닐까 해요. 유토피아는 마음의 여유에서, 디스토피아는 여유 없음에서 오지 않을까 해요.
 

  이번 호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폐양어장 길고양이 학대 사건을 다룬 글도 있고, 책에 대한 글, 돌봄에 대한 글도 있다.


  돌봄에 관한 글은 사람을 돌보는 일도 있지만,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돌봄도 있으니, 이번 호를 읽으면 이런 돌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본 호를 관통하는 말은 돌봄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랑=돌봄=연대.


  돌봄이란 일방적일까? 일방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돌봄은 양방향일 때가 더 많다. 일방적으로 베푸는 경우는 없다. 베풀면서도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돌봄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사랑이다. 로맨스라고 하는 것. 로맨스는 일방일 수 없다. 


사랑, 즉 로맨스는 양방향이다. 혼자만이 줄 수는 없다. 함께 할 때 사랑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번 호 표지는 소설로, 웹툰으로도 나온 '상수리나무 아래'를 소개하고 있다.


소설을 읽지도 웹툰을 보지도 못했기에 무어라 말하기 힘들지만, 이번 호에 나온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사랑이 돌봄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서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그 상처를 보듬고, 상처를 딛고 좋아지는 과정. 이렇게 사랑은 완벽한 남과의 만남이 아니라 만나면서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결국 사랑은 돌봄이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 이 사랑이 사람에게만 해당할까? 아니다. 동물이나 식물 모두에게, 또 동식물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이렇게 나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는 일. 그런 사랑, 내가 돌보고, 또 다른 존재들이 나를 돌보는 일. 그런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빅이슈] 역시 마찬가지다. [빅이슈]를 구입해 보는 일이 일방적이 아니라 양방향적이다. [빅이슈]를 통해 얻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고, 또 생각하지도 못했던 존재들을 만나게 되는 일... 이번 호에서 언급한 2020년 임금근로일자리 월 소득 중간 값, 즉 중위소득 금액... (49쪽) 242만 원. 이 숫자가 사랑과 돌봄과 연대를 함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42만 원.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숫자. 그러나 생각해야만 하고, 알고 있어야만 하는 숫자. 왜냐하면 이 중간 값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돌봄이라는 말이 시혜라는 말을 연상시킨다면 '연대'라는 말로 바꿔 이야기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회 연대는, 나도 힘들지만 내 눈길 밖에는 나보다 어려운 이들이 많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과장된 빈곤감, 무리한 자기 연민은 여유 있는 이들이 소득을 갹출해서 약자를 위한 안전망을 만들고, 그래서 계층 하락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어 다시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시도에 나설 용기를 내게끔 하는 복지의 선순환 구조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다' (성현석, 월급에 대해선 겸손하지 말자. 51쪽)


이 말을 확장하면 바로 사랑은 돌봄이고, 연대다. 나홀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활동, 이것이 바로 사랑, 돌봄, 연대다. 이들은 결국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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