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여행하는 곳.

  낯선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이제는 낯선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낯선 언어를 만나 생소함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런 제주도에는 볼거리만큼이나 아픈 역사도 있다. 아픈 역사만큼이나 가족이 겪은 비극도 많다. 또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겪은 고통도 있고.


  단순히 관광으로 끝날 섬이 아니다. 그런 제주도를 아우를 수 있어야 제주도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곳. 제주도. 이 청소년 시집에는 제주의 이 모든 것이 다 녹아들어가 있다.


제주도 소년과 소녀가 느끼는 감정, 그리고 제주가 겪은 역사. 제주의 자연 등등. 이 시집에는 다양한 제주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해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시인이 해녀의 딸이라고 해서 그런지, 해녀의 생활이 시에 많은 편인데, 바다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배를 타고 멀리 나간다. 생계를 위해서.


이런 저런 제주도의 모습을,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를 통해 만나다가, 제주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폐를 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에서 만나고는 씁쓸해지기도 했다.


시인은 이런 시를 통해서 사람들이 제주도에 와서 제주도의 본 모습을 체험해야지, 오로지 자신들의 관점에서 제주도를 이해하고 행동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관광객들이 현지인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인식도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시를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우리들의 행태를 살펴봐야 한다.


 올레길은 돌아서


길은 주인이 없다지만

동네에선 널어놓은 깨가 먼저고

귤 실은 트럭이 먼저고

지팡이 짚은 할머니가 먼저고

아기 업은 엄마가 먼저라서

친구들과 우르르

올레길에 몰려다니다가도

한쪽으로 비켜서는데

길마나 코스 이름 번호 붙더니

전세 버스 타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는 

트럭도 막아서고

지팡이도 막아서고

우는 아기 막아선 줄도 모르고

널어놓은 깨를 툭툭 치며

즐거워한다

이젠 심부름 갈 때

올레길은 돌아서 간다


허유미. 우리 어멍은 해녀. 창비교육 2020년 초판 2쇄. 75쪽,


이런 제주도의 모습, 우리가 원하는 모습 아니던가. 올레길이 무엇인가. 그 지방의 모습을 체험하면서 걷는 길 아닌가. 그러니 그곳의 풍습을 해치지 않고 걸어야 하는데, 걸으면서 자신들 멋대로 행동하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하면 '온몸에 힘을 주고'(80-81쪽)이란 시에 나오는 문어와 같이 제주도를 대하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갯바위에 달라붙은 문어를' 맨 손으로 떼려는 사람들. 하이힐로 문어 다리를 찍는 사람들, 문어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제주도를 제대로 여행하지 않는 사람들 아닌가.


청소년시집을 통해서 여행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자주 가고 또 가고 싶어하는 제주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하는 시이기도 하다.


어쩌면 제주도는 지금 이 시에 나오는 '다리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관광객을 받아 낸 문어 / 바다 한 귀퉁이도 너덜너덜하다'(81쪽)는 표현처럼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하는 사람, 이 시집을 한번 읽고 가면 좋겠다. 제주도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지 않고, 가려져 있는 제주도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시집이 바로 이 시집이다.


꼭 제주도만이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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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7-23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속 올려주시는 청소년시집 참고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kinye91 2022-07-24 07: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청소년시집을 통해 잊고 또는 잃고 있었던 마음을 다시 찾기도 해요.
 

  "으르렁, 으르렁"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소리다.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담은 소리다. 머리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심장에서 나온 소리다.


  가식이 없다. 꾸밈이 없으니, 솔직하다. 솔직하기 때문에 한 순간에 불꽃이 일기도 하고, 금방 식어버리기도 한다.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특히 사랑에서는 더욱 그렇다. 감정을 따른다. 아니, 감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내 심장이, 내 몸을 움직인다. 


시집에 첫번째로 실린 시 '심장으로 걸어 볼래'에서 말하고 있다. '오늘부턴 좀 멋지게 걸어 볼래'라고... 멋지게 걷는 일, 그것은 바로 심장으로 걷는 일이다. 그래서 '심장으로 걸어 볼래'라 하고 있다.


이런 사랑은 자신의 모두를 걸고 있다. 그때는 전부다. 그것 말고는 없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도 사랑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시집에 단 한 번 '춘향'이가 나오는데, 그 춘향이가 햄버거와 함께 나오는 점이 현대시라고 할 수 있지만, 춘향이가 누군가.


사랑에 전존재를 건 사람 아닌가.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사랑으로, 사랑에게 전력질주한 여인 아니던가. 그런 춘향이가 바로 청소년 아닌가. 이팔청춘.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춘향이의 사랑은 죄일 수 있다. 특히 변사또처럼 기득권을 대변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죄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사랑은 더더구나. 


과연 사랑이 죄일까? 청소년의 사랑이 죄일까? 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인용하자.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죄다. 원죄다. 우리는 원죄를 안고 태어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교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윤회의 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 자체가 죄라면, 사랑은 당연히 죄다. 그런데 이 사랑은 죄를 벗어나게 해주는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사랑이라는 죄를 지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득시글한 사회.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불행한 사회다.


청소년시집이라고 하지만, 이 시집에는 그야말로 '사랑'의 난장판이 펼쳐지고 있다. 시집 곳곳에서 '으르렁, 으르렁' 소리가 들리고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그런 소리들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죄의 발견'이란 시.


죄의 발견


열일곱 살이 되고 나니 /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 아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사랑을 발견하는 일, 그깟 일이 / 뭐라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 너는 누구나 인생은 초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 아마추어 / 참 놀라운 일이다 /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곧 죄의 발견과 맞물려 있다는 / 사실 그러니까 그 애를 / 사랑하게 된 뒤 알았다 나는

괴물이 되었다는 걸 다행이라면 / 아름다운 괴물이란 사실 / 한순간 사랑이 바닥났다는 걸

열부 났네, 하고 비웃는 / 너 또한 아마추어 / 그 애에게 다 주고 남은

사랑이 없는 나는 걸핏하면 / 으르렁대지 선생님도 / 눈에 뵈질 않지 / 고아였으면 싶었지

그러니까 나도 / 아마추어 / 그러나 나는 결심했지 / 프로가 되기로, 그 애에게

몽땅 바친 사랑을 누룽지처럼 / 조금씩 훔치기로 했지 / 부모님과 선생님께 조금씩

나눠 주고 옆집 개에게도 / 아량을 베풀기로 했지 / 참 놀라운 일이다

사랑을 꺼내는 열쇠가 / 죄라는 건 죄를 꺼내는 열쇠가 / 사랑이라는 거짓말 같은

사실은,


김륭. 사랑이 으르렁, 창비교육. 2019년. 113-115쪽.

 

이 시를 읽어보라. 청소년에게 사랑을 하라고 하고 싶지 않은가. 청소년들이 사랑에 자신을 걸어봐야 그 사랑이 다른 사람, 다른 존재에게도 갈 수 있다.


온몸, 온마음을 바쳐 사랑에 빠진 경험이 없는 사람, 아마추어다. 그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사람도 아마추어다.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 사람에게만 빠져보았던 죄를 경험했던 사람이 프로가 된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청소년기에는 '심장으로 걸어' 봐야 하고, 사랑이라는 죄에 빠져봐야 한다. 


그래,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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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7-23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몹시 관심이 가는 시집이예요
읽어봐야겠어요.^^

kinye91 2022-07-24 07:44   좋아요 0 | URL
마음에 와 닿는 시들이 많아서 좋아요. 청소년들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우선 이 청소년시집은 이야기가 있다. 인물이 있고, 갈등, 사건, 그리고 해결이 있다. 해결? 물론 해결은 안 된다. 그냥 넘어갈 뿐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역설. 학교란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게 별다른 일이 없이 굴러간다. 이 시집에 나오는 탐정 역할을 맡은 화자도 그렇게 느낀다. 또한 사건 당사자로 나오는 인물들 역시 그렇다.


  모두들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사연은 사연으로 그들 가슴 속에 묻혀 있을 뿐. 그 사연을 끄집어내 풀어내게 하는 어른들이 없다.


  교사도 부모도 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친구들뿐.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으로 지목되는 학생은 정해져 있다. 의심이 가는 상황. 방범 카메라를 돌려보니 빈 시간에 교실에 들어간 학생은 두 명. 한 명은 모범생이라 할 수 있고, 한 명은 문제아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범인으로 지목당할까? 보나마나 뻔하다. 물어보지 않아도 범인으로 누가 지목될지 알 수 있다. 또 그렇게 처벌이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이 시를 통해 나온다. 한 편의 시가 아니라 여러 편의 시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서 소설을 읽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일어난 절도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는 점도 볼 수 있고. 그럼에도 이 청소년시집에서는 공부라는 틀에 갇힌 학생을 만날 수 있다.


자유롭게, 자신만의 꽃을 피우고 싶지만 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화단 밖에 핀 꽃') 상태에 머무는 학생들도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화단 밖에 있다고 꽃이 아닌가. 꽃은 꽃일 뿐이다. 이 시집 처음에 실린 시. 마음을 때린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은 자녀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하는 일이다.


제목과 내용이 역설적으로 연결된 이 시... 이렇게 하지 말기를 바라며.


  친절한 엄마


엄마는 나를 위해

발품을 팔아 새장을 사고

새장에 어울리는 그네를 사고

삼 년 치 모이를 사고

새장을 걸려고 이곳저곳에 못을 박았지


아침이면 새장에서

새소리가 아닌 고양이 소리가 나는데도

엄마는 새소리가 아름답다며

삐뚤어진 새장을 바로 걸어 놓았지


나를 위해 엄마는

아무나 기웃거리지 못하게 한다며

새장 문에 자물쇠를 달고

열쇠는 강물에 던져 버렸지


김현서, 탐정동아리 사건일지, 창비교육. 2019년. 10쪽.


삼 년만 친절해도 미칠 지경인데, 6년도 모자라 12년, 아니 대학까지 16년을 새장 속에 넣어두는 부모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과연 친절일까?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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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통 튀는 아이들.


  아이 때 통통 튀지 못하면 언제 튀겠는가.


  튀게 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튀면 안 되는 분위기가 강한 사회 아니던가.


  특히 학생 때는 튀면, 쟤, 왜 저래? 하는 눈길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아니다. 학생 때는 튀어야 한다.


  튀게 해야 한다. 우물 안에 갇힌 아이들이 아니라, 과감하게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틀에 갇히지 않고 틀을 거부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틀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통통 튀기 위해서는 충분히 놀아야 한다. 놀만큼 놀아야 하는데, 과연 놀게 하는가?


놀면 공부 안하고 뭐하니? 하는 소리를 듣지 않나.


정말, 놀아라고 하면 놀아도 되나? 하는 의문을 품지 않나.

이 시처럼, 정말.


놀라운 일


'오늘 실컷 놀아'라는 말

이 말이 진심으로 느껴질 때


그 말을 듣는 내 귀가

두 개밖에 없는 게 안타깝고


박수 치는 내 손이

두 개밖에 없는 게 아쉽다


김미희, 마디마디 팔딱이는 비트를. 창비교육. 2019년. 32쪽.


오늘 실컷 놀아라는 말이 놀라운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연한 일.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야 하는데,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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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우리말은 이 뜻인지 저 뜻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 시집 제목도 마찬가지다.


  '고딩 아빠'  고등학생이 아빠가 되었다는 얘긴지, 고등학생을 둔 아빠라는 얘긴지 제목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청소년시집이라고 하니까, 야, 고등학생이 아빠가 되었나 하다가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시집에 그렇게까지 할 수 있나, 이 나라에서?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의문은 곧 풀린다. 시집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고등학생 아들을 둔 아빠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시집 제목에 나오는 '나'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아빠이고, 그 아빠가 아들과 관련해서 일어난 일들을 시로 썼다.


청소년 처지에서 쓰지 않고, 어른 자리에서 아들을 바라보면서 아들의 생활이나 또 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들을 시로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딩 아빠는 고등학생을 이해하는 아빠, 고등학교라는 힘든 시절을 겪은 아들을 지켜보는 아빠다.


아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시로 풀어내고 있는데, 이 시집을 읽다가 학교는?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에 나오는 화자처럼 아들을 이해하는 아빠도 드물겠지만, 그런 부모는 아니더라도 학부모라고 하는 사람들보다도 더한 곳이 바로 학교 아닌가 하는 생각.


(한때 학부모와 부모를 대조시킨 광고가 있었다. 그 광고에 나오는 모습으로 학부모와 부모라는 용어를 쓴다. 광고는 이렇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xRXEYFV5w )


닫힌 곳. 막힌 곳. 일방적인 곳. 자치, 선택 운운하지만, 그것도 주어진 틀 안에서만 가능하지 않나? 틀을 벗어나려 하면 단박에 제재가 들어오는 곳. 학교.


아직도 교복을 없애지 못한 학교가 수두룩하고, 교문을 등교하면 닫아걸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학교가 많고, 학생 선택권보다는 학교 편의에 의해서 선택을 강요하는 그런 학교도 부지기수다.


더 가혹하게 말하면 학교는 꼰대들의 천국이다. 꼰대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특히 '축구공은 무죄'란 시를 읽으니, 더 답답한 마음이 든다.


축구공은 무죄


  학교에 한번 다녀가라는 선생님의 말을 들은 뒤 찾은 곳은 동네 인삼 가게다 선물용으로 좋다는 제품이 가격이 너무 비싸 비타500 음료수 두 박스를 들고 학교에 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님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면 땀이 많이 나서 자제를 시키거든요 땀 냄새가 많이 나면 수업 분위기에 방해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교무실에 와서 공을 달라고 큰소리를 쳐서 선생님들이 놀랐어요


  내가 공을 멀리 찰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교무실 유리창을 깨고 싶었다 방범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도망칠까 궁리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고딩이 냉장고에서 비타500을 꺼냈다 맛있다며 한 병 더 마셨다


정덕재, 나는 고딩 아빠다. 창비교육. 2018년. 75쪽.


1연에서 현재 학교가 학부모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지 잘 나와 있다. 예전에는 자식을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선물을 사들고 학교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비싼 것이 아니더라도 성의로 무언가를 가져가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란법이라는 교사와 학부모를 구제해줄 수 있는 법이 생겼다. 얼마나 고마운가. 선물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러니 이 시 1연에 나오는 인삼 사게 운운은 말이 안 된다. 비타500도 그렇다. 그 정도야 가능하겠지 하지만, 평가권이 있는 교사들에게는 그런 선물도 안 된다고 한다. 선물을 아예 해서는 안 된다. 법이 그렇다면 선물이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다행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부담스러워한다. 학교에 빈손으로 가기가 민망하다. 하지만 사들고 갔다는 말은 없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에서 한 박스만 들고 갔는지, 아예 안 들고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안 들고 갔으리라 생각한다. 법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데, 굳이?


2연에서 학교가 얼마나 꼰대스러운지가 나온다.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너무 구차하다. 땀냄새라니...그것 때문에 수업분위기에 방해가 된다니... 아이들이 뛰어놀 유일한 시간이 점심시간 아닌가, 점심시간이야말로 학교에서 학생들이 숨통이 트이는 시간인데, 그 시간마저도 뛰어놀지 말라고 하다니... 축구뿐이랴? 땀이 나는 운동은 모두 하지 말라는 얘기 아닌가? 그것도 당당하게... 축구공을 달라고 한 학생의 부모를 학교에 오라고 하다니...


꼰대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점심시간에 마음 놓고 뛰어놀고, 땀이 많이 나면 씻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확보해주려 해야 하지 않나. 그것이 학교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교사라면 축구 하지마!가 아니라 축구해, 너희들 씻을 공간, 또 쉴 시간 마련해 보도록 할게 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텐데.


3연은 학부모와 부모의 차이를 인식하게 한다. 학부모는 공부, 공부, 성적, 성적, 대학,, 대학하는데, 부모는 아이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렇다면 학부모(우리나라 학부모를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성적에 우선 순위를 두는 학부모를 이야기한다)라면 네, 선생님 주의 주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왜? 아이가 공부에 몰두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부모라면 아이가 점심시간에 신나게 뛰어놀지 못하게 하는 학교에 항의를 할 것이다. 그것은 학교의 월권이다. 또 책임방기다. 씻을 공간을 마련도 해 주지 않으면서 무슨. 그러니 화자가 공으로 유리창을, 학교 유리창을 깨버리고 싶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방범 카메라가 도처에 있는 학교 현실도 드러나 있지만, 아이들이 숨쉴 수 없게 만드는 학교에 구멍을 내서 숨구멍을 틔워주고 싶은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부모를 둔 고딩, 집에 와서 학교에 가 있어야 할 비타500을 맛있게 먹는다. 그렇다. 고딩에게는 비타민이 필요하다. 이 비타민은 비타500에만 있지 않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들, 어른들에게 있다.


부모에게 이해받고 자라나는 고딩. 그에게는 이미 비타민이 있다. 힘을 낼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러니 이 시에 나오는 학교는 꼰대다. 그래서는 안 되는. 그래도 고딩에게는 자신을 이해해줄 부모가 있다. 비타민이 있다. 이것도 없는 아이들은? 성적의 노예가 되어 시키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학교는 그런 곳이어서는 안 된다. 또 부모도 그런 부모여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비타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고딩 아빠다' 시집을 읽으면서 이런 부모라면 아이에게 비타민이 되어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부모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학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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