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읽는 옛집 -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
함성호 지음,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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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사상이 담긴 옛집을 읽는다

집이 사람에게 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현실은 집이 가지는 본래의 가치를 생각하기 이전에 재산 증식의 일환으로 부동산에 투자하는 의미가 더 커 보인다. 언제부턴가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이나 조건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집을 마련한다는 의미는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보다 큰 평수, 역세권, 집이 있는 위치 등을 고르는 이유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을 찾는 의미가 아닌 같은 크기의 집이라도 위치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현실을 반영하여 주거환경이 처한 조건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잘못이라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집이 주는 본래의 의미를 찾아보자는 생각이다. 집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면서 집 장만이 살아가는 목표가 된 현실에서 집의 주인인 사람의 가치를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이다.

 

집이 가지는 사전적 의미는 ‘자연적, 사회적 침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여 주거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건축물’이다. 이러한 집의 의미를 충실하게 살린 시대는 현대사회라기보다는 선조들이 살았던 지난 시대가 아닌가 싶다. 여기서 지난 시대라고 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비교적 가까운 조선시대를 의미한다. 그때도 일반 백성들은 집 한 칸 마련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 여기서 이야기하는 집은 조선을 이끌어간 세력인 사대부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집은 주로 목재와 흙으로 지어졌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집은 대부분 이런 사대부들의 집이다. 우리가 옛집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집들이 선비들의 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바로 그러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선을 이끌어간 주체 세력이었던 사대부들의 집들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집 주인의 독특한 세계관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집을 찾아내고 그 집이 담고 있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읽어 내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성향에 따라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삶의 지향은 일상생활에서의 몸가짐이나 자세뿐 아니라 주거지인 집이나 공부방의 역할을 했던 사랑채와 별채 등의 건축에도 반영되었다. 저자가 집을 읽는다는 의미가 바로 집에 담긴 그들의 사상을 엿보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가이며 시인인 저자 함성호의 눈을 사로잡은 집들은 어떤 집일까? 독락당, 양동마을과 향단, 산천재와 도산서당, 고산 윤선도와 다산초당, 김장생의 임이정, 우암고택과 팔괘정, 윤증고택과 암서재, 남간정사 등이다. 이들 모든 건축물은 수 백 년의 세월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세월 속에서도 집을 건축한 집 주인의 정신이 오롯이 살아있으며 후손들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역사적 흔적인 것이다.

 

집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보통의 경우 집을 비롯한 건축물은 본다는 의미가 맞을 것이다. 집을 본다면 무엇을 보는 것일까? 건축물인 집이 무엇으로 어떻게 지어졌는가가 우선이 될 것이다. 건축자재는 무엇이고 어떤 형태의 집이며 몇 칸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비롯하여 어떤 위치에 있는지 등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보는 것이리라. 하지만, 저자는 집을 읽는다고 한다. 이 읽는다는 점에 주목하면 같은 집을 다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읽어가는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건축물에 대한 다른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을 느끼게 된다. 우선, 저자의 조선시대를 뚫어보는 역사적 지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주목된다. 조선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지태해온 학문적 배경이 되는 성리학을 알지 못하고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역사학자나 사상가들을 넘어서는 혜안이 보인다. 하여, 저자의 눈에 보이는 집은 그냥 집이 아니다.

 

저자는 한국 건축사는 당대의 지배이념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변화 한다는 것이기에 양식사가 아니라 정신사로 읽어야 한다는 가설을 확인하는 과정이 이 책을 집필하는 동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집은 건축물 자체가 주목되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과 자연이 함께 어울려지는 점을 동시에 봐야 한다고 한다. 하여 조선의 집은 어떻게 생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위치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점을 주목한 책이기에 눈으로 보여주는 측면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집을 볼 수 있는 사진은 한정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그 사진 또한 독자들의 눈을 제한한다. 이런 구성은 집을 읽는다는 관점에 충실한 반영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글을 통해 머릿속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시각으로 볼 때, 퇴계 이황이 지었던 도산서당, 우암 송시열의 암서재와 팔괘정,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 다산 장약용의 다산초당, 윤증의 고택 등은 그냥 일반인이 살아가는 살림집을 넘어 그들이 지향했던 학문과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긴 또 다른 세상을 구현한 것이다. 그렇기에 집이 위치한 곳이나 담장하나 대문이나 마당 등에 그들이 담았던 학문의 세계는 일상으로 회귀되어 구체화 된다. 저자는 이를 차분한 발걸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건축을 전공한 전문가의 눈으로, 옛 사람의 삶이 담긴 역사적 흔적을 찾아가는 역사적인 눈으로 때론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집에 담고자 했던 학자들의 학문과 세계관 그리고 조선을 이끌었던 사상가들의 사상사를 함께 읽는 재미를 전해주어 독특한 맛을 느끼게 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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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속의 신체지도
샌드라 블레이크슬리 & 매슈 블레이크슬리 지음, 정병선 옮김 / 이다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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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관심으로 선택한 전공이 심리학이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전공수업에 실망하여 도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대단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심리의의 한 분야인 발달심리학이나 지각심리학이 바로 그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심리학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구체적 학문의 영역에 들어가면서 혼란을 겪게 된 사례다.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심리학 시간에 공부하고 있으니 어쩜 당연한 의문일지 모르지만 당시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겪으며 사람이 외부적 자극을 받아 이러한 정보를 적절하게 처리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는 결국 마음의 작용에 의해 행동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서 몸과 정신활동의 상호작용으로 그 사고의 영역을 넓혀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사람의 몸과 정신활동의 상호작용을 올바로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여전히 의문 속에 있는 것이 인지과정과 정신활동에 대한 것이다. 전문 학자들도 수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어 우리 몸이 가지는 신비를 하나씩 풀어가고 있는 점을 볼 때 대단히 어려운 부분이며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님을 알게 된다. 나의 이러한 관심은 일반인이 가지는 지극히 일반적 흥미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뇌 속의 신체지도’는 뇌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던 샌드라 블레이크슬리와 과학 전문 저술가 매슈 블레이크슬리의 공동저작물이다. 이 둘은 모자관계라고 한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점은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연결의 과정에 뇌 속에 신체지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지도(Body Map)'란 우리의 몸과 내장 기관, 그리고 신체의 주변공간까지 모든 것이 뇌 속에 부호로 지도화 되어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지도 덕분에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실제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자극과 환경의 변화에 적절한 결정을 하개 만들어 일상생활을 매끄럽게 영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체지도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상황의 변화나 조건이 달라지는 것에 영향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여 신체지도는 자라고 수축하고 변형되면서 우리의 필요에 부응하며 단순히 신체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주변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고 한다. 이를 확인하는 증거로 제시되는 것이 옷을 입거나 벗을 때, 자전거를 탈 때, 연장이나 도구를 사용할 때 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뇌 속의 신체지도’는 현대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의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분야의 실제 사례들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이 다른 정상에 서 있는 운동선수들과 아떤 차이가 있는지, 간질이나 자폐증 환자들이 보이는 증상을 해석하는 부분에서도 이를 설명하고 있다.

 

한 곡의 음악은 그 속에 다양한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호들이 상호작용으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몸도 각종 기관들이 이처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여 한 곳의 음악처럼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각기 영역이 충분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작용으로 우리 몸을 모든 것을 조율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몸은 이해 불가능 한 것에서 과학의 발달로 그 베일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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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 언제 어디서든 거부할 수 없고, 상관해야만 하는 질문
마르틴 부르크하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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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럴까?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책과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게도 철학은 낯설게 다가온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에 다양한 학문이 그렇다. 왜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일까? 혹 그동안 학문하는 사람들이 일반인들에게 학문과 관련되어 나름의 성을 쌓아두고 접근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해 본다. 사회의 어느 부분이든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이 존재하며 그 영역은 자신들뿐 아니라 이웃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정해주는 분위기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니면 학문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표현하는 방식이 일반인들과 다소 차이가 있고 이러한 차이가 일반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러한 벽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학문과 일반 대중 사이에 벽이 생기고 그로인해 편견이 날로 강화된다면 이는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학문의 영역이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동 떨어진다면 그 학문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출발하여 그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해 가고 또한 사람들의 삶의 가치와 지향을 한층 높여가려는 것이 학문의 출발이라고 할 때는 더욱 더 그럴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은 출발부터 학문에 대한 기존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있다. 특히,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거창한 이론이나 학설에 의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할만하다. 바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하면서 그렇게 당연하면서 사소한 것에 담긴 심오한 뜻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철학과 사상의 역사’다. 당연하고 사소하게 생각되는 키워드로 저자가 선정한 것들을 보면 금방이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알파벳, 동전, 하느님 아버지, 김나지움, 수사학, 진리, 법률, 십자가, 순결, 아르바이트, 시계, 세금, 개인, 자연, 역사, 진화, 섹스, 정보, DNA 등이다.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들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것들이 과연 당연하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저자가 당연하고 사소하다고 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러한 것들은 동전이나 알파벳처럼 생활과 밀접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정치, 국가, 역사나 경제와 같은 다소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당연하고 사소한 것에 해당하는 키워드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그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근원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키워드의 원작자를 대부분 찾을 수 없다는 공통점을 이야기하면서 그 키워드의 의미가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찾아 그 말의 어원까지를 살핀다. 그 속에서 자자가 주장하고 싶은 의미를 찾고 이를 통해 본래적인 사물이나 단어의 핵심으로 들어가고 있다. 철학과 사상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사람들의 일상에 익숙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이 사상가나 철학자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명제다. 이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분명하게 등장하지만 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철학적 명제가 도출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바로 철학이나 사상의 핵심을 담은 명제가 남는다. 이러한 명제는 수 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인간의 근본에 대한 유효한 질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자자의 이러한 이야기는 당연하고 사소한 것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은 결코 아니다. 근본으로 시작점으로 찾아가 그 출발로부터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고 있기에 그 시작점에서 보는 것은 진중하고 무거운 생각으로 연결된다. 바로 철학과 사상이 그것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철학은 의문에서 시작한다고 전재했듯이 의문할 수 있는 사람의 ‘생각하는 능력’에 방점을 확실하게 찍고 있다. 또한 너무도 사소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 속에 그토록 깊은 사유의 결과가 담겨 있는 것인지 새삼 놀라게 된다. 하여, 우리 일상에 늘 익숙하게 접하면서도 그 구체적 실체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각의 습관을 돌아보게 만들기에도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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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평전 - 우리 시대에 던지는 오백년 선비의 역사
이성무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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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긍정적 가치를 어떻게 살려야 하나?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주목을 받고 있다. 주목받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요인은 ‘밀본’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정도전의 유지를 담고 있다는 밀본은 무엇일까? 그것의 실제 존재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조선을 개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정도전이 꿈 꾼 나라에 대해 주목하기 때문이다. 정조전은 신하의 나라를 꿈꿨다. 강력한 중앙집권에 의해 왕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은 상징적의미가 크며 실질적인 권력은 신하들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를 설계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을 개창한 태조와 이후 왕권에 도전하는 왕족들과 대결하는 과정에 그런 꿈은 무너졌다.

 

밀본이라는 것이 바로 정도전이 꿈꾼 나라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이는 조선시대 권력을 양분했던 신하들의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권력에 방점을 두고 왕권과 대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하들의 권력의 중심이 되는 의정부를 구성했던 세력들은 누구일까? 고려의 신하와 조선이 개국하며 공로를 세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고려 왕조에 끝가지 충성하며 조선의 신하로는 살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대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선은 기틀을 만들게 된다. 이 중심에 사대부들인 신하들이 있었고 이후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조선은 움직이게 된다.

 

조선을 대표하는 말로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고 한다. 바로 선비들에 사상과 정치적 이념에 의해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움직였다는 것이다. ‘선비’라고 하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조선의 당쟁사와 정치 제도사를 연구해온 저자 이성무의 ‘선비평전’은 바로 조선을 이끌어온 선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문 지면에 연재한 글을 모아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선비의 역사적 유래에서부터 행적, 인간관계, 그들이 지향한 학문, 정치지형도에서의 힘의 역학관계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선비평전’에서 저자는 선비의 개념에 대해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 밝히며 그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가치와 삶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 학문의 중심이 되는 유교문화에 대해서 살핀다. 고려 말 이후 조선조가 진행되는 동안 전쟁이나 당파, 사화 등 각각의 정치지형에서 무슨 역할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며 그들의 사상적 지향점, 정치적 실천 등을 밝히고 있다. 또한 부록 ‘선비와 선비사상’에서는 선비들의 삶의 가치를 지탱해 준 철학과 정신세계를 체계적으로 살핀다.

 

“민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선비들의 덕치를 표방한 것이요, 백성들은 덕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다. 선비들은 지주이자 관료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정치 주체였고, 그들이 내세우는 여론정치도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했다.”

 

조선의 정치이념은 민본정치라고 한다. 이 민본정치가 담고 있는 지향점은 무엇일까? 저자는 선비는 특정한 계급을 형성하며 사회를 지배했다고 이야기한다. 민본의 민은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민은 정치권력의 중심 역할은 한 것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써 백성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선비라고 하는 계급이 가지는 이중적인 모습이 아닐까도 싶다.

 

저자는 본문에서 당파를 이야기하며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당파를 붕당으로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잔재이니 이를 탈피하여 올바른 개념정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제에 의해 정리된 개념이 그것뿐 아니기에 이 모든 것을 고친다면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송시열과 윤휴의 이야기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둘의 입장을 교조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보면서 양비론의 입장을 위하고 있다. 저자 자신의 시각이 무엇인지 밝힐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이 점은 사회적 논의나 공감대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나 전공한 학자의 의견을 밝히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판단의 근거를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이라는 나라와 선비는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였다. 불의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고 저항하거나 때론 권력의 투쟁과정에서 목숨을 담보로 당파를 세우고 반대당파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목숨보다는 의리와 명분이라는 대의를 앞세웠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이념과 가치와는 구별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시각은 저자가 ‘선비정신’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신적 가치로 삼을 수 있을지 조심스런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인다. 선비정신이 담고 있는 긍정적 가치를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깊은 사고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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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치세어록 - 난세를 사는 이 땅의 리더들을 위한 정조의 통치의 수사학 푸르메 어록
안대회 지음 / 푸르메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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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정조의 진면목을 살피다

왕조의 나라에서 권력의 중심은 왕에게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왕조국가 조선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은 권문세도가들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권력과 왕권이 상시적으로 충돌하며 양자의 힘의 구도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었다고 보는 측면이 강하다. 왕권이 강했을 때는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왕을 중심으로 정책이 집행되었으나 그러한 시기에도 신하의 견제를 상시적으로 받았다. 이렇다 보니 왕은 때론 명목상 왕일뿐 일 때도 있었다. 당파에 의한 무수한 사화가 이를 증명해 준다.

 

500여 년 동안 27대 왕을 이어오는 동안 치세를 잘하여 기억되는 왕으로는 몇 명이 되지 않는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 초 세종이나 세조를 비롯하여 후반기에 와서 영조나 정조 등은 나라를 반석위에 올리며 민본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왕들이다. 그 중에서 할아버지 영조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라 재위기간 24년 동안 당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운과 관련되어 어려운 시대를 보냈다. 하지만 정조는 치세기간 중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 설치,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듦, 실학을 발전시킴, 문화적 황금시대 등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김 왕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재위기간동안 정조 왕이 이러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근원한다고 봐야 하는가? 안대회는 그의 저서 ‘정조 치세어록’을 통해 글쓰기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대 통치자들 중에서 정조만큼 글을 많이 쓰고 남긴 왕은 없었다고 하면서 학문하는 왕으로써의 정조를 살피고 있다. 이 책에 담긴 글은 정조의 글을 모아 엮은 ‘홍재전서’를 중심으로 ‘일성록’ 등의 자료에서 몇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선별하고 이 글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달았다.

 

저자 안대회는 정조의 어록에서 선별한 글을 나라의 근간이 되는 힘, 공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 임금의 길, 인재에 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법, 신하에게 이르는 말, 공정한 나라를 위함, 인간 정조를 엿보다 등 총 8가지 주제로 분류하고 묶었다. 왕으로써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권력의 중심에서 신하들에게 내린 교서, 인재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하여 인간 정조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글들이다. 특히, 난세로 표현되는 현대 정치를 돌아볼 때 지금도 정치가들이 머리에 세기고 살펴야 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정치의 근본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길은 백성에게 달려 있고, 백성을 배양하는 길은 먹을 것에 달려 있으며, 먹을 것이 풍족해야 교육이 가능하다. 교육하고 난 다음에도 반드시 조심스럽게 지켜주고 도와주어 이익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큰 근본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3년 뒤 첫 번째 조참에서 반포한 선언에 담긴 내용이다. 조참이란 문무백관이 한 달에 네 번 대궐의 인정전에 모여 국왕에게 문안드리는 의식을 말한다. 정조의 정치 틀을 확인할 수 있는 글로 경제, 인재, 국방, 재정 등에 관한 정조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오늘날 정치에서 무엇이 중심이어야 하는지 살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난히 학문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겼던 왕이 정조다. 또한 세손시절부터 써온 일기를 왕위에 오른 후에도 쓸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정조의 면모는 학문에 갇힌 고루함보다는 가을 산 단풍든 모습이나 국화가 피어있는 풍경을 보는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궁중 음악의 곡조가 빠른 것을 보고도 세상이 돌아가는 세태를 짐작하여 이를 바로 잡기를 지시했다. 감성이 메마르면 세상을 보는 눈도 메마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를 올바로 포용하려는 마음을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정조가 보여준 탁월함은 풍부한 감성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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