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브렌다 매독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어문학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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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바나클, 생소한 만남

역사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는 늘 그 사람을 뒷받침하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이 남긴 업적은 그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과 조건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했던 가족이나 이웃, 친구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삶의 지향과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족이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 중에서도 특히 배우자의 역할은 지대하다. 서양의 소크라테스의 부인이나 동양의 공자 부인의 경우는 악처로 유명하다. 그 악처와의 관계에서 많은 부분 영향을 받아 그들의 업적이 이뤄졌다고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경우는 아닐지라도 다시 한사람의 이야기를 접하며 부부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생각해 본다. ‘노라 바나클’은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를 있게 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둘은 나에게 지극히 생소한 사람이다. 우선, 제임스 조이스란 사람은 누구일까? ‘제임스 어거스틴 앨로이셔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 2. 2 ~ 1941. 1. 13)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신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이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율리시즈’와 ‘피네간의 경야’,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이 있다.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아일랜드 밖에서 보냈지만, 그의 정신적 가상적 세계는 그의 고향인 더블린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소설가로써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여인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여인이 이 책의 주인공인 ‘노라 바나클’이다. ‘조이스의 작품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도, 노라는 그가 자신의 걸작들의 기초로서 사용했던 고국에 대한 그의 살아있는 끄나풀인, 휴대용 아일랜드로서 봉사했다. 그리고 노라 바나클은 조이스의 모든 작품들의 여성 주인공의 모델 역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라 바나클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와 같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노라 바나클(nora barnacle, 1884~1951)은 아일랜드 항구도시 골웨이 출신으로 제빵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할머니 가족에게 보내져 자랐다. 그곳에서 무료학교를 다녔고 13살에 학교를 떠났고 수공 일을 했으며 호텔에서 하녀 일자리를 구해 일했다. 그녀가 20세에 운명의 남자 조이스를 만나 더블린을 떠나 유럽의 각지를 돌며 생을 마칠 때 까지 함께했다. 이 책은 그녀의 일생을 세계적인 전기 작가 브렌다 매독스가 기록한 책이다.


‘할머니는 너무나 강했어요, 그녀는 바위였어요.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인즉, 그녀 없이는 단 한 권의 책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조이스의 손자 스티븐 조이스 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조이스와 노라 사이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저자 브렌다 매독스는 노라 조이스의 엄청난 위트와 매력, 그리고 남편에게 준 영감은 제임스 조이스가 세계적인 작가로 설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20세에 만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렸고 무명작가와의 관계에서 어려운 경제활동을 책임졌으며 골웨이로부터 트리에스테, 취리히 등 유럽을 돌아다니는 동안 가족을 다스렸다. 이는 조이스라는 작가가 작품 속에 노라를 그의 작품 속에 담아내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본다.


‘조이스와 노라’는 생소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보니 이 전기문학인 ‘노라’는 노라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소한 느낌을 전해준다. 내용을 파악하고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는 것이 버겁다는 말이다. 이는 아일랜드나 유럽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문장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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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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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이율배반적인 두 얼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늘 조심스럽다.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그 개인이 속한 계층으로 범위가 넓혀졌을 때는 더욱 어려움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있어 그나마 의견교환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역사적 인물이라면 자료의 한계나 접할 수 있는 자료의 특성에 의해 더더욱 난감한 상황에 노이게 된다. 하여, 적절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특정계층인 ‘선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선비라고 하면 너무도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가 지조, 의리, 강직 등으로 이에 대한 적절한 평가나 기준도 없이 특정한 개인에 대한 이미지가 전체 선비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는 경향성이 다분하다. 이러한 평가가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거울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나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지만 한 시대를 평가하고 그것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정신을 이야기할 때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기준에 의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합의가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선비라고 하는 이미지가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다분히 강조되고 주목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라는 책의 저자 계승범이 그다. 저자는 역사를 전공하고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우리 시대에 통용되고 있는 ‘선비’에 대해 검증을 하자고 나섰다. 우선, 저자는 선비라고 하는 말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선비라는 말에 정신이라는 단어가 붙어 새롭게 만들어진 ‘선비 정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따져 보자는 것이다.

 

‘조선’에서 선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선비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유교와 성리학 그리고 조선의 정치다. 이를 통합적으로 살펴야 비로소 선비에 대한 종합적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전재한다. 개인으로써가 아니라 선비가 처한 조건과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에 걸 맞는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비’와 ‘선비 정신’이라는 것에 대해 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긍정적 담론으로 형성되고 있는 선비 정신이 한 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나아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신적 표상으로 ‘선비 정신’을 이야기 하고 있기에 그 선비 정신이 과연 우리 시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지배계층으로서 자기들 본연의 임무에 태만하고 책임을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지배층이었다.’

 

저자의 시각은 비판적이다. 때론 감정적이기까지 한다. 조선의 정치와 절대 부관할 수 없는 선비가 조선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왔느냐며 그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주장하기도 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요약할 수 있는 유교의 이념을 몸에 익힌 선비들이 수신제가와는 별도로 치국평천하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들이 지향하는 이상과는 동떨어지는 지극히 편협하고 당파적이었으며 때론 치졸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지적과 시각에 한편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선 듯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게 하는 부분도 있어 보인다. 이는 지금까지 선비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도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였고 그런 부분에 익숙해져있는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을 개인의 취향과 지향하는 바에 의해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게 된다면 분명 문제 있는 관점일 것이다. 선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선비의 검약한 생활이나 의리, 지조 등 좋게 보이는 부분만을 가져와 그것이 선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만들어간다면 분명 잘못이다.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시각으로 본 선비의 모습은 그렇게 긍정적인 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선비에 대한 검증은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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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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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힘, 분노

2011년 우리 사회에서는 ‘나꼼수’가 유명하다. 그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잘나가는 몇 사람이 막말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나타내서일까? 아니면 보통사람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거침없이 외치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거침없이 외치는 목소리는 그 다양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경제적으로는 없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말의 내용과 방법이 코너에 몰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2011년 말 한국사회는 각계각층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불투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정치권의 혼란과 끝없이 불황의 늪을 헤매고 있는 실질경제, 예측 불가능한 남북관계 등 어느 하나도 미래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관심에서 벗어나 자신이 느끼는 사회적 부조리에 감정을 나타낼 줄 아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온갖 사회구조적 모순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도모할 무엇이 있고 그 일에 나도 담담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사회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보는 사람이나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를 비롯하여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공감하며 아파하고 함께 살아갈 희망을 찾고 있는 것으로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감정의 공유가 출발이다.

 

‘분노하라’는 바로 그런 공유된 감정의 밑바닥에 무엇을 깔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타인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공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분노’라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 사람, 93세의 노인인 스테판 에셀이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육성이다. 전직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국제기구에서 국제인권선언 작성에 참여한 사람이다. 그가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현실과 국제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분노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회 양극화나 외국 이민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등에 대해 프랑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던 레지스탕스 정신을 계승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세계화가 대세인 현 국제정치는 어느 한 나라의 문제가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한다. 우리에게도 당연히 귀기우려야 하는 사회적인 문제이며 핵심 과제인 것이다.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이기에 적극적으로 분노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분노의 표현으로 비폭력을 이야기한다. 폭력을 부르는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는 방법이 비폭력만 있는 것이 아님도 말하고 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를 수밖에 없지만 폭력으로만 대항한다면 사회 전체 입장에서 볼 때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분노하라’는 한 생을 긍정적으로 살아왔던 노인이 삶에서 얻은 교훈을 젊은이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는 짧은 글이다. 하지만, 이 글에 담긴 내용을 결코 짧지 않다. 그리고 간단한 문제 또한 아니다.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분노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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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의 습격 - 먹거리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 놀라운 기록
유진규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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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를 둘러싼 논쟁의 현장을 가다

음식,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꼭 필요하다는 것은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는데 영양소를 공급하는 것으로서 음식만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것까지 포함된다. 많은 사람들은 식도락을 즐긴다고 한다. 거창하게 식도락이라고 하지만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을 즐기기 위해 먹은 음식이 식도락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침치나 라면 하나라도 즐기며 먹는 것이 좋은 것이리라.

 

이러한 음식은 나라와 민족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역사를 이어온 음식 문화 속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고기를 주로 먹거나 야채를 주로 하는 식단은 사람들이 살아온 자연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그 나라와 민족에게 아주 적합하고 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음식문화가 흩트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건대이후 산업사회에 접어들며 산업화, 세계화라는 흐름에 힘입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패스트푸드로 일컬어지는 음식이며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비슷한 음식으로 통일화되어가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다국화 된 농축산물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물 중에는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키워진 농축산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적불명이며 어떤 경로를 통해 키워진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는 것이다.

 

이 음식이 문제라고 한다. 현대인들의 성인병이나 심장질환 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음식이고 이 음식에 대한 다양한 편견이 만들어졌고 그에 의해 우리의 음식문화가 영향을 받고 있다. 하여,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은 날로 늘어나고 이러다보면 향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안전한 먹을거리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SBS스페셜의 ‘옥수수의 습격’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음식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하고 있다. 옥수수가 문제라는 것이다. 옥수수라고하면 어릴 적 추억뿐 아니라 현대에도 훌륭한 간식거리가 분명한데 무엇이 문제라는 것일까? 옥수수가 문제라는 것은 옥수수로 만든 사료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사료가 전 세계 가축들의 여물통을 점령하면서 그로부터 온갖 이상 현상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옥수수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종이, 마분지, 텍스타일, 접착제, 배터리, 세제, 코팅재료, 물감, 잉크, 크레용, 분필, 염료, 플라스틱, 아세트산, 살충제, 성냥, 유기용제, 화장품, 1회용 검과 접시’를 비롯하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제품으로는 ‘맥주, 술, 탄산음료, 피자, 유아식, 캐러멜, 껌, 아이스크림, 햄, 식초, 치즈, 초콜릿, 사탕, 젤리, 잼, 땅꽁버터, 케첩, 시리얼, 식빵, 팬케이크가루, 과자, 콘플레이크 등 실로 다양하다.

 

그렇다면 옥수수의 어떤 성분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지방산의 일종인 오메가-3 지방산과 오메가-6 지방산의 균형이 무너져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오메가-6 지방산은 체내에 지방을 축적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비만, 심장병, 고혈압, 알레르기, 불임, 폭력성 증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각국 여러 나라들을 직접 취재하며 각 나라의 농업실태와 가축을 생산하는 시설 등을 확인하며 예전에 초지였던 곳이 옥수수 농장으로 바뀌는 현장을 확인하며 이렇게 변화된 배경을 살핀다. 또한 의사들에 의해 기피식품인 고기나 지방 등을 적극적으로 먹으면서도 비만이나 알레르기 등 우리의 신체의 이상이 있는 부분을 개선한 사례들을 살핀다.

 

‘옥수수의 습격’에서 제기하는 음식의 문제는 균형의 문제다.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 함유된 각종 요소를 적절하게 균형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우선 질좋은 음식재료가 생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속에서 재배된 좋은 먹을거리를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으로 모든 인류가 풀어야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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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스캔들 - 내 심장은 그댈 향해 뛰고 있소
홍지화 지음 / 작가와비평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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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엇을 사랑이라 이름 할 것인가?

세상구경 중에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 불구경과 싸움이라고 한다. 그런 세상구경에 하나를 더한다면 남들의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어쩜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흔히 말하는 아가페 보다는 에로스가 더욱 관심을 끄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속내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지만 말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책이 선 보였다. 그것도 일반사람들이 아닌 유명한 거장들의 사랑이야기를 담았기에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는 이미 충족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름하여 ‘거장들의 스캔들’이 바로 그 책이다. 이미 인류의 연애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여 여덟 명의 대 문호들을 거론하고 있다. 그 주인공으로는 빅토르 위고,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에드거 앨런 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그리고 그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들이다.

 

이들 거장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저자 주목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고 그런 스캔들의 주인공들이 문학사의 큰 획을 그었던 대 문호들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주목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겉으로 드러나는 점은 거장들의 ‘연애’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애정의 행위’를 주요하게 살피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추구가 아닐까 싶다. 무엇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거장들의 스캔들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보인다. 흔히 짝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마음이 그것 아닐까? 살아생전 겨우 두 세 번 본 것이 다이지만 평생토록 가슴에 담고 자신의 작품의 주제가 될 만큼 간절했던 사랑도 있다. 수많은 남자들의 삶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마흔이 넘어서야 첫 임신했던 살로메의 남성편력도 있고, 평생 동안 사랑을 찾아 다녔던 사랑중독증환자라 불러도 좋을 괴테,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랑도 있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드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이야기에서는 현대사회에서도 수용하기 힘든 사랑의 모습이 보인다.

 

건강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있을까? 이 말은 남자와 여자 사이 우정을 이야기 할 때 주로 들먹이는 말이다. 인류가 보여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랑의 모습에서는 이 둘의 적절한 조화가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에는 지속적인 사랑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점 또한 확인 시켜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 진심어린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꽃이 열매를 맺을 때, 그것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다.”라고 보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열매는 무엇을 의미할까?

 

거장들의 스캔들에서 보여 지는 사랑에서 그 답을 찾자면 ‘영혼의 자유’가 아닐까? 하지만 이 말은 지극히 관념적이다. 사랑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기에 실제 생활에서 다양하게 겪게 되는 감정상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 없다. 수수깨끼 같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에서도 그것이 정답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사랑의 모습은 실재한다. 그 모든 사랑이 다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인간의 감정은 인간이 가지는 본래적 속성에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사회 문화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감정도 있다. 거장들이 숱하게 애정행각을 벌이는 대상이 유부남 유부녀인 것이 문화권에 따라서는 금기되고,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변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감정의 표현도 달라진다. 그렇기에 사랑에 앞서 보다 접근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바라볼 때 각각의 존재를 나와 같은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어쩜 이것이 저자가 말한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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