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처럼 서러워서 작은숲 에세이 4
김성동 지음 / 작은숲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난 시간의 기록인 역사는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다. 승자의 기록이 역사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당대 승리한 자의 시각에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을 축소, 삭제, 은폐, 왜곡 등의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기록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록을 만들고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역사 기록이기에 이를 볼 때는 엄격한 시각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역사를 보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그 해석은 천지차로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더욱더 그러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중심에 두고 바라봐야 정당한 역사해석이 될까?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의 중심이 시대정신과 맥을 같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시대정신이란 결국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이기에 당시에도 옳고 역사를 해석하는 시점에서도 올바른 것, 바로 의()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의 의()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도리를 일컬어 말한다. 그 속에는 나라와 나라, 집단과 집단 간, 개인과 개인 간의 의리 뿐 아니라 스스로 세운 자신의 뜻을 지켜나가는 것 역시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된다. 그렇기에 안으로나 밖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그 모든 것의 기준을 세움에 있어 바로 인간의 도리를 우선에 두었던 것이다. 이 의()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의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로 기억하는 많은 것들이 과연 올바른 기준에 근거한 선택과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사실과는 어긋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때마다 알 수 없는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이 책 김성동의 염불(念佛)처럼 서러워서도 같은 울분을 느끼게 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김성동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언급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거나 축소,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 일들을 오늘의 주제로 불러오고 있다. 김성동은 오늘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역사에 주목한 것이다. 바로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래서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라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어른의 가르침을 담은 이야기로 읽힌다.

 

김성동이 주목한 역사로는 패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륙백제, 궁예, 묘청, 신돈, 이징옥, 김개남, 김백선, 최서해 남로당 등이 그 대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패배자라는 것이다. 기존 역사서에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철저히 승리자의 시각에서 지워지고 왜곡된 기록으로 남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알지 못하여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부끄러울 수도 있는 과거를 올바로 청산하지 못한 점을 들고 있다. 청산해야 할 과거는 조선조 말 탐관오리와 아전배 친일파 미제국주의 세계 지배 전략인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친미파 오늘의 수구 기득권층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청산해야할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으로부터 많은 부분에서 덜미를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무엇을 올바로 극복할 것인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백 명의 피지도 못한 목숨을 바다에 수장시키고도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입에도 올리는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발길이 붙잡힌 것을 개탄한다.

 

기존 역사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역사를 김성동은 주목하며 그 사람들의 면면을 다시 밝힘으로써 패배자라는 이름으로 역사에서 밀려난 우리 선조들이 이루고자 하였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던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움직이다가 어떻게 그리고 왜 쓰러지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의 진실만큼은 알아야 하는 것이 자손 된 도리라는 것이다.

 

하여,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사라지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 월간미술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그림은 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살아가다 보면 이 말은 여러 가지 일에서 너무도 쉽게 확인된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관심 있는 그림 한 점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속에 담긴 사람의 진솔한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리 쉬운 게 아니라면 것을 그림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자 한다면 그 분야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자신 마음 속 울림과 어우러졌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 이런 생각을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다. 예전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우리 그림이 주는 묘한 매력에 빠져 관련 서적을 하나 둘 모으다 보니 겹쳐지는 저자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사람이 오주석이다. 오주석이라는 사람의 우리 그림에 대한 독특하고 감칠 맛 나는 그림 읽기를 보면서 그의 가슴이 얼마나 넓고 깊었을지 상상해 보곤 했다. 그의 우리 것,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탐구정신과 책임감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그 마음이 보여 그의 글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오주석(吳柱錫)은 지금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동양사학을 고고미술사학을 공부한 그는 조선시대의 그림과 단원 김홍도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와 해설을 내 놓았다. 그는 학교 강단에선 학자로써 머물지 않고 자신의 연구 성과를 보다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49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유작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에는 조선시대의 그림이 중심이다. 누구나 알만한 한번쯤은 보거나 들었을 우리 옛 그림 27점을 그 만의 시각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가 선정한 그림에는 김홍도, 신윤복, 강세황, 김정희, 이인문, 정선, 강희안, 김명국 등 조선시대를 주름잡았던 당당한 화가들의 그림이 담겼다. 이러한 그림을 해석한다는 것은 워낙 유명한 그림이기에 전공자로써 부담스러운 점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화가와 그림을 해설한 기존 학자와 전공자들의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주석의 그림 읽기는 전공자의 박식함이나 전문성을 넘어선 무엇이 있다. 그는 전공자로써의 전문지식에 우리 그림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가슴으로 읽는 따스함으로 그림을 읽어주고 있다. 그림을 읽어간다는 것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시작한 그의 그림 읽기는 그림 속 무엇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마음과 그 그림을 읽는 독자의 마음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내 감동을 바탕으로 하는 소통의 기회를 안겨주는 것이다. ‘감상은 영혼의 떨림으로 느끼는 행위인 만큼 마음 비우기가 중요하다’고 한 이유를 알만하다.

오주석은 ‘우리 옛 그림 안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인 까닭이 들어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우리그림 하나 대기가 힘들다’는 현실의 안타까움이 들어 있다. 그의 가슴과 눈을 통해 발견하는 우리 그림 매력이 한 층 더 살아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는 말의 진가를 그의 그림 읽기에서 확인한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우리 그림에서 발견한 감동을 모든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던 마음이 너무도 쉽게 발견되기에 생전에 좋아했던 화가 김홍도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 차고 맑은 가을, 성근 숲, 달이 뜬다.’을 읽어주는 오주석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은 그림을 읽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의 모범답안 같다. 그림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오주석의 그 마음을 따라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치는

경치대로

대단했어도

나는

여전히

나일 뿐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중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

조선 1757, 종이에 수묵담채

 

18세기 중반 조선의 그림일하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눈에 익은 산수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림이다. 하지만, 표암 강세황이 평안도 개풍군 오관산 영통동으로 들어가는 길을 그린 작품이다. 민둥산에 커다란 바위가 제각기 자리를 잡고 그 사이로 난 산길을 말 타고 가는 사람이 화가 강세황으로 보인다. 거대한 산과 큰 바위 사이 보일 듯 말 듯 한 크기로 그려졌지만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이 말구종과 말을 탄 사람에 있다.

 

왼쪽 상단의 강세황이 쓴 화제를 보면

"영통사 계곡 가에 어지럽게 흩어진 바위들은 정말 굉장해서 크기가 집채만큼씩하며 시퍼런 이끼로 덮여 있다. 처음 대했을 때 눈이 다 휘둥그레졌으니, 전하는 말로는 저 아래 연못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지만 믿을 만한 말은 못된다. 그러나 그 주변 웅장한 구경거리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지극히 단순화 시킨 산과 바위의 모습이 오히려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기존 옛그림의 산수화와는 다른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산과 바위를 채색한 느낌이 새롭고 더욱 사람의 크기를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그렸다. 자연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일수도 있지만 영통동구의 느낌이 화가 강세황에게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가는 놀랄 것 다 놀라면서도 제 정신만은 끝내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맑고 낙천적인 기분이 편안하게 작품 전체에 녹아 있다. 구성은 단순하며 바위의 세부 표현 역시 아주 간결하다. 특히 이 그림은 유별나게 개성적이고 이채로워서 비슷한 예를 다른 그림에서 찾아낼 수 없다.”

 

오주석은 그의 책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에서 영통동구도에 대해 한 말이다. 강세황이 활동하던 당시에 이미 서양화법이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의 유행한 화풍이다. 기존 중국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던 것에서 조선 산수의 실경을 바탕으로 화가가 추구하는 정신세계를 담는 것을 말하고 있다. 겸제 정선의 경우 남종화법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화격을 이룩하고 전통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진경산수화의 정형을 수립하였다. 진경산수화 작품으로 정선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 김홍도의 사군첩등이 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 개정신판 손철주의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오픈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 가까이 더 가까이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문화라는 단어다. 문화가 유독 가을에 어울리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스산하지는 날씨와 떨어지는 낙엽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가을이라는 계절이 담고 있는 특성과 문화가 잘 어울리는 것으로 자리 잡았고 이 가을에 각종 전시회를 비롯하여 공연 등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럴 때 그림을 전시하는 갤러리에 들러 느긋한 마음으로 그림에 빠져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림을 눈앞에 두고서 막막해 지는 마음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림 난 잘 모르는데로부터 출발한 그림에 대한 마음의 장벽은 의외로 커서 다시는 그림을 찾게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로 이미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그림과 사람들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친절하게 안내하는 사람이 있다. 손철주가 그 사람이며 이 책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손철주는 이 책에서 갖가지 장애요소로 인해 그림과 친해지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백문불여일견'며 직접 보고 많이 보기를 권한다. 한발 나아가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낌 바를 이야기하라고 까지 한다. 여기서 전재되는 것은 오독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신의 느낌을 피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감상은 편견이자 독단이기에 각각의 그림 해설 속에 숨겨진 저마다의 독단편견을 간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독도법이라고 말한다. 화가의 의도는 개의치 말고 느껴지는 대로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그림은 언제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꼭지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저자의 그림에 대한 욕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앞섶을 끄르고’, ‘앞섶을 여미고등으로도 모자라 프롤로그 - 마음껏 떠듭시다’, ‘에필로그 - 사라지고 싶구나와 같이 그림 앞으로 사람들을 다가서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읽어주는 책으로보다는 그림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안내하는 것에 중점을 둔 책으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산수는 산과 물이다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그림 읽어주는 것을 보면 작품 하나에서 보이는 것만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맞게 여러 작가의 그림을 통해 그림 속에 담긴 화가의 마음과 이를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이 어떻게 교감할 수 있는 지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정선의 박연폭포와 내연산삼룡추, 심사정의 선유도, 마권의 수권도 등을 같은 주제로 비교분석하여 그림 속의 내밀한 정서를 밝혀준다.

 

그렇다고 저자의 그림 읽어주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만만치 않다. 한국화, 동양화, 서양화를 넘어서 사진에 도자기를 비롯하여 각종 예술작품을 망라하여 섬세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저자의 그림에 대한 발걸음은 그림을 넘어 책으로까지 넓혀진다. ‘그림 속은 책이다가 그것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그림 앞에 장벽을 치워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더 그림과 친근하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 손철주의 배려로 보인다.

 

저자 손철주의 그림을 읽어주는 글맛이 아무리 좋더라도 자신이 직접 그림을 마주하며 느끼는 공감과는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백문불여일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 책을 통한 저자의 응원에 힘입어 이제 발걸음을 미술관과 갤러리의 전시장으로 옮겨 직접 그림과 친구하는 일이 남았다고 본다. 장벽 넘어 먼 그림에서 즐겨야 할 대상으로 그림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길잡이로써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는 충분히 활용되어야 할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삐 풀린

자유로운

천성,

예술 속에서

살아나다"

 

 

 

오원 장승업(張承業) 호취도(豪鷲圖)

19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담채

 

취화선임권택 감독, 최민식 주연의 영화에서 만난 장승업은자유였다. 사회적 제약과 신분적으로부터의 구속을 벗어버리고 싶은 갈망을 보았다. 그에게 그림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무수히 많은 일화와 기이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장승업의 삶에서 그림은 그의 전부였을 것이다.

 

장승업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이는 '호취도'의 독수리를 보면 살아 숨쉬는 장승업의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싶다. 취화선에서 지붕에 걸터앉아 울부짓던 장승업의 모습이 겹쳐진다. 위의 매는 살기등등한 눈매와 날카로운 부리로 금방이라도 먹이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보이며 아래의 매는 막 사냥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지 조용히 앉아있다. 이처럼 상반된 모습의 두 마리 독수리가 화면을 장악하고 있다.

 

땅 넓고 산 드높아 장한 의기 더해 주고(地闊山高添意氣)

마른 잎에 가을 풀 소리 정신이 새롭구나(楓枯艸動長精神)

 

화제를 쓴 이는 정학교(丁學敎, 1832~1914, 조선말기의 문인서화가로서 장승업의 작품에 화제를 많이 썼다). 호취도의 독수리와 화제의 글씨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시와 그림에서 그린 이와 글쓴이의 마음이 저절로 통한 경지가 아닌가 싶다.

 

화폭에 선득하니 차가운 바람이 인다. 그것은 자연의 바람이 아니다. 기인奇人 장승업이 큰 붓에 진한 먹물을 듬뿍 묻혀 사납게 휘둘러 댄, 고삐 풀린 천성의 자유분방함이 일으킨 회오리바람인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나무는 나무, 독수리는 독수리, 풀잎은 풀잎이다. 어느 하나 틀에 맞춰 그린 것이 없으니, 과장과 왜곡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넘쳐나는 이 생명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이기 이전에 움직임이고, 보고 있는 동안 그대로 음악이다.”호취도에 대한 오주석의 평이다.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과 비교해 자기가 그들 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신감에서 나 자신도 원()”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말기에 근대회화로의 전통을 이어간 장본인이다. 산수, 인물, 영모, 기명절지, 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을 모두 잘 그렸다. 술을 너무 좋아해 취명거사(醉瞑居士)라는 호를 짓기도 했다. 왕의 명으로도 잡지 못한 장승업은 그림 속에서 진정 자유로웠던 장승업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