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니,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라

 

 

작자 미상, 이재 초상(李縡 肖像)

조선 19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나이 들어 내 모습이 어떨까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초상화가 바로 이 초상화다.

 

誠於內 形於外 마음에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은 저절로 외모 밖으로 드러나지 마련이다.” 이런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합한 그림이다. 똑바로 앉아 두 손을 반듯하게 맞잡은 선비가 강렬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듦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 의지가 손상됨이 없다. 복건과 심의 차림의 모습이 단정하여 선비의 기상을 돋보이게 한다.

 

평생을 한결같이 학문과 수양으로 살아왔을 선비의 꼬장꼬장한 성품이 엿보일 듯하다.”

훌륭한 초상화란 외모 뿐 만이 아니라 그 인물이 가진 성격이나 인품이 그림 속에 묻어 나와야 한다. “一毫不似 便是他人 터럭 한 오라기가 달라도 남이다라고 불렀다. 이렇게 조선의 초상화는 예쁜 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모습 즉 참된 모습을 그리려 했기 때문에 외면보다는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 초상화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그런 초상화에 담긴 주인공의 삶을 닮아 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 초상화는 전() 이재 초상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오주석이 한국미 특강에서 날카로운 눈썰미에 의해 이채(李采) 초상임을 밝혔다. 이채(李采, 1745-1820)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재(李縡, 1680~1746)의 손자다. () 이재 초상은 이채 초상보다 십여 년 더 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주석에 의해 제 이름을 찾은 것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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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풍경 - 나이듦에 직면한 동양의 사유와 풍속 한국국학진흥원 교양총서 전통의 재발견 4
김미영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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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회의 나이듦에 대한 고찰

우리 사회도 현재 고령화 사회를 넘어 2018년이면 고령사회가 된다. 이는 결국 나이든 노년층들이 사회의 많은 부분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령사회의 주역들인 노년층들은 어떤 삶을 준비하고 누려야 할까? 한 해 5000명이 넘는 노년층에 속한 사람들이 자살하고 있다는 통계를 이를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급함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년에 대한 종합적 고찰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전통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교양총서를 발간해 왔는데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에 이어노년의 풍경은 그 네 번째에 해당한다. 관련 학자들이 모여 의견을 모으고 다수의 집필진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노년은 육체적, 정신적 힘이 약해지는 때를 일컬어 말한다. 이는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청, 장년기를 지난 시기이기에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이젠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인식이 노년에 대한 이해의 전부일까? 우리 선조들을 포함한 동양사회에서 노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나이듦에 직면한 동양의 사유와 풍속을 통해 노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기회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노인의 열 가지 좌절이란,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에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에는 눈물이 흐르며,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되어도 눈앞의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은 없이 모두 이 사이에 끼며,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지는 것이다.”성호 이익이 노인의 좌절 열 가지에서 한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니이듦이 반가운 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나이듦에 대한 상대적 열망으로 자연스럽게 장수가 주목받았다. 하지만, 오래 사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사는 것에 바른 것인가에 대한 고찰도 당연히 함께했다. 막고자 한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기에 순리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그 예로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명성을 얻은 거장들이 노년을 사는 방식에 주목했다. 오랜 기간 노장 정치가로 황희와 신개, 일찍이 은퇴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즐기며 노년을 보낸 김상헌과 이현보의 삶을 보며 그 속에서 노년의 삶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살펴 다양성을 확인한다.

 

이렇듯 노년의 풍경에서는 조선 시대 노년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문학, 그림 등을 매개로 살피는 것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의 노년에 대하는 풍속과 죽음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주제를 통해 노년의 삶에 대한 의미를 이해한다. 다양한 인물, 그림, 풍속, 고전작품 등을 통해 동양사회에서 노년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를 기반으로 어떤 삶을 꾸려왔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선인들이 어떤 노년을 보냈으며 그들로부터 배울 지혜와 경험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풍경을 흥미롭게 음미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노년이 문제되는 것 중 하나는 준비 없이 맞이한 노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해 후반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조기에 사회로부터 퇴출당하고 나서 상실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다. 이제 사회적으로도 이런 노년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하고 개인적으로도 노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 양자가 적절하게 결합하여 삶의 경륜을 지닌 노년층이 사회 속에서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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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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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해야 할 디아스포라

시작부터 착오였다. 주된 관심사 중 하나인 조선시대 미술에 관한 책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좁혀 생각해 온 탓이라 자책하더라도 이 책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다. 고조선, 조선, 그리고 지금의 조선이 담고 있는 의미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우리 민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굳이 우리라는 단어 대신 조선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분명해 진다. 우리가 포괄하기에는 다소 머뭇거려지는 것들에 대한 나름의 대안이기 때문이다.

 

서경석은 재일조선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일본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 늘 민족과 우리라는 정체성의 문제가 함께 한다. 그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20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서승·서준식의 동생으로 국가주의적 폭력의 생생한 증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민족과 우리라고 하는 범주에서 약간 벗어난 존재다. 이 벗어난 존재이기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이 디아스포라일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 인을 이르던 말에서 유래된다. ‘민족과 우리라는 범주에서 그 주변을 맴도는 삶과 생각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서경석의 이러한 사고의 결과물이 나의 조선미술 순례. 미술을 통해 미술가들의 삶과 작품 속에 담겨진 이야기를 대담을 통해 얻고 저자 서경석의 생각을 담았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현재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미 고인이 된 사람도 있다.

 

긍지 높은 촌놈-신경호, 완고한 맏아들-정연두, 우아한 미친년-윤석남, 분열이라는 콘텍스트-이쾌대, 성별조차 초월한 이단아-신윤복, 이름이 많은 아이-미희=나탈리 르무안에서 사람이 아름다웠다-홍성담, 그녀의 붓질-송현숙에 이른다. 모두 어느 경계에 서서 그 이곳과 저곳을 이어갈 무엇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경호에게는 5.18를 중심으로 민족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나, 애착과 객관성의 미묘한 균형으로 본 정연두, 여성과 재일조선인이라는 관점에서 공유함으로써 독특한 관계가 설정되는 윤석남, ‘군상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의 이쾌대에게서 월북한 작가라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포함하는 다중성의 출발이다. 저자가 신윤복에서 찾는 것 역시 시대상황에서 용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작품세계를 통해 본 다중성일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디아스포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가 미희다. 해외 입양아로 아버지를 일본인으로 확신하기에 더 중첩된 의미가 있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는 한국과 전 세계를 활동무대로 하는 미술가들을 찾아내 그들과 대화를 통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작품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미술가들과의 대화 속 공감대를 형성하는 매개로 서양 미술과의 비교는 동 서양을 시대비교를 통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촐르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보인다.

 

우리 민족이라는 범주에서 현 시대가 요구하는 의미의 확장이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재일 조선인, 중국동포, 20만 명이 넘는 해외 입양아에 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과 그 자손들. 여기에 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들과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이미 민족과 우리라는 범주에는 그 의미가 확장될 수박에 없는 요소들이 넘쳐난다.

 

이런 현실이 저자 서경석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에 주목된 것으로 보여 진다. 그 관심사를 미술을 통해 밝히며 의미의 확장을 시도해가고 있다. 우리가 애써 인정하기 싫거나 머뭇거리는 사이 현실이 된 문제에 대해 직시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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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장자를 만났다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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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우리들에게 동양사상이라고 하면 유독 공자의 유가사상이 중심인 까닭은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그리 멀지 않은 조선일 것이다. 그 조선을 이룬 핵심 사상이 바로 유교부터 출발하는 성리학이었다는 점이 작용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명나라 멸망이후 소중화 사상에 빠진 조선 지배층은 주자학이라는 단일 사상으로 세상을 지배하여 사상적 공백기를 만든 것이 오늘날 다양한 사상적 흐름을 놓치는 것이라고 본다. 동양사상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와 장자 중 특히 논어에 주목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오며 중국의 제자백가 이후 수많은 사상 중 새롭게 주목받는 사상이 장자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장자하면 무위자연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한다. 충분히 현실 도피적으로 들리기 쉽다. 이런 점은 장자가 살던 전국시대가 전란과 정치적 소용돌이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회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렇기에 장자가 혼란스러운 현대사회에도 잘 어울리는 사상으로 여겨진다.

 

강상구의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부제를 단 그때 장자를 만났다는 그렇게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주목한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이는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키워드이기에 현대사회에 장자가 주목받는 이유가 될 것이다.

 

저자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만난 장자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자 강상구가 본 장자는 무엇일까? “답답한 세상, 규범에 날 가두는 공자보단 자유로운 장자를 만나라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장자를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는 법을 이야기 한다는 편견에서부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람 속에서 살 것을 전제하고,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사람도 나만큼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장자의 시작이요 끝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강상구는 노자와도 구별하며 노자가 말한 무위는 무지몽매한 백성을 다스리는 지배의 기술인데 반면, 장자의 무위는 험한 세상 살아가는 삶의 기술이다. 지배는커녕 차라리 피지배의 기술에 가깝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점은 학은 다리가 길어서 좋고, 오리는 다리가 짧아서 좋다. 다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르다. 그것을 틀렸다고 덤비기 시작하면 세상사 꼬인다. 꼬인 세상에서 살자니 지치고 숨이 막힌다. 기지개를 한번 쫙 펴고 싶다. 답답한 세상에선 인위적인 틀에 날 가두는 논어보다는 자유로운 장자가 제격이다.”는 것이다. 사회구성원으로써 삶에 주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주목하여 다른 사람과 자신의 다른 점을 틀림으로 확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때 장자를 만났다의 매력 중 하나는 동사양의 철학사상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장자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인 어떻게 살아야 한다가 아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다데에 주목하는 장자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한 서양철학을 절묘하게 엮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사상보다 서양철학에 더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요소로 보인다.

 

나를 잃어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에게 주목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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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롭고

살가운

어머니 사랑"

 

  

변상벽(卞相璧), 모계영자도(母鷄領子圖)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어릴 적 자주 보아서 눈에도 선한 모습이다. 아장거리며 걷는 병아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미닭의 모정을 느끼기에는 어린 나이였을까? 볏짚으로 바람을 의지한 곳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모습 그 자체로만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변상벽의 모계영자도에서 단연코 이목을 사로잡는 부분은 여섯 마리 병아리가 어미닭의 주둥이 주변에 모여 있는 장면이다. 누구에게 줄까? 오주석이 한국미 특강에서 이를 걱정했더니 양계장을 운영하셨던 분이 "암탉이라는 게 모정이 아주 살뜰힌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곡식 낟알을 하나 주워도 그냥 먹으라 휙 내던지는 게 아니라, 병아리 가는 목에 걸리지 않게끔 주둥이로 하나하나 잘게 부서 먹기 좋게 일일이 흩어 준답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병아리의 솜털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해서 놀랍고, 어미닭을 중심으로 병아리들의 움직임에서 놀라운 모정을 담고 있다. 닭 가족의 나들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그림에서 정작 아버지 닭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오주석은 꽁지깃이 길게 뻗쳐올라 기세가 장한 토종 수탉 꼬리를 함께 그렸다면 암탉과 병아리를 압도하여 다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그냥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보았다.

 

오주석은 이 그림의 주제를 '살뜰한 모정(母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도타운 모정이 살갑게 드러난 닭과 병아리 그림으로서 이렇듯 정다운 암탉 그림은 세상에 달리 없다고 단언하였다.

 

d; 그림을 그린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1775)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서 특히 닭과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계(卞鷄), 변고양, 변괴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그의 고양이와 닭 그림은 세밀하고 사실적이며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볼 때마다 동물화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이는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면밀한 관찰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곧 사람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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