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의 품격 - 조선 지식인 문화의 정수, 한시 이야기
김풍기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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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삶을 담은 한시(漢詩)

()가 일상에서 얼마나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올까? 특별히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현대인들이 시를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시가 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성찰하여 시인만의 언어로 표현된 시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것이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삶이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빼앗겨버린 탓으로 돌리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시 작품을 남겼던 옛 선비들에게 시란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을 살았던 선비들의 일상은 시, , 화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선비 된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풍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또한 선비 된 자의 사회적 의무가 관료로 진출해 뜻한 바를 펼치는 것이었던 시대에 시를 짓는 능력은 필수조건이었다.

 

조선을 이끌어온 한 축인 선비들을 웃고 울게 했던 시는 당연히 한시였다. 이런 한시가 한자가 일상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한시도 멀어졌다. 그렇지만 조선 선비들에게 한시는 출세의 도구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았기에 한시에 담긴 옛 선비들의 정서와 뜻은 살아남아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한시를 보다 가깝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김풍기의 한시의 품격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주류 문화인 한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조선 지식인 사회와 문화를 읽어낸다. 한시를 매개로한 당시 사회적 환경을 읽고 있다. 한시를 공유하며 한시를 매개로 교류했던 사대부를 비롯한 승려, 중인들의 교류 속에서 당시 살았던 선조들의 삶의 풍경을 살핀다. 한시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시마와 같은 말이 등장했을까? 또한 옛것을 인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문화에서 표절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자존심을 건 문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 날선 비평의 세계에서 한시가 어떻게 살아남아 전해지는지 등 조선 지식인 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춘다.

 

한편의 시가 갖는 힘은 실로 막강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그 신분제도를 무력화 시기도 했고, 권력의 길로 나아가는 과거시험의 당락을 결정지으며 술한잔에 밥까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는 호구책이 되기도 했다. 이런 시에 대한 당시 지식인이었던 선비들의 열망을 짐작을 넘어선 자리를 차지한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한시를 두고 선비들이 느꼈던 희노애락을 살펴 한시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일상에서 멀어진 한시에 대한 애정으로 한시를 다시 읽고 그 한시에 담긴 사람의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반갑다. 한시의 창작 배경이나 한시를 누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시를 독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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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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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지 말라

권력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의 생각은 그 나라 온 국민의 일상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치가 일상과는 멀어져 보이지만 숨 쉬는 것 빼고 하루를 살아가는 전 과정에서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숨 쉬는 것조차 정치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느끼며 정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간극이 정치가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개인의 사익을 추구하는 바탕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치가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권력의 근거가 되는 국민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국민의 일상이나 삶에는 관심 없고 권력의 유지나 집권을 위한 그들의 밥그릇 싸움 말고는 보이지 않으니 한심하기만 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면에는 그들을 뽑은 국민들의 선택도 반성해아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권력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와 그 시간을 함께해 온 것이기에 우리 역사에서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사실로 꼽을 수 있은 것이 조선사의 얼룩을 만들었던 당쟁이 아닐까 한다. 특히,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사건을 보면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없다는 권력의 속성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야기는 다양한 장르에서 다뤄져왔다. 하지만, 각기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만 있을 뿐 이렇다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미흡한 것이 아닌가도 싶다. 사도세자의 사건을 바라보는 눈은 노론응 중심으로 하는 그동안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재운의 사도사제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역시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가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존 노론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소론 온건파의 시각에서 살핀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의 당파는 동인과 서인, 그리고 서인에서 확장된 노론 소론 등으로 깊이와 무게를 더하며 갈라져 왔고 이 과정에서 당파의 권력을 잡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심지어 왕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왕권이 약했던 왕은 그들의 세력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치열한 권력 싸움이었는지 잠작도 못할 정도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역시 경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이들 당파와 무관하지 않게 왕위 올라 그들의 지지 없이는 왕의 자리조차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이런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왕세자가 바로 사도세자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당파와는 상관없이 유지된 시각이다.

 

여기에 이재운 작가는 노론의 시각으로만 이야기되어온 그동안의 시각에서 소론 그것도 온건파의 시각으로 사도세자 문제를 살핀다. 이는 권력의 싸움에서 밀려나 일정정도 거리르 유지한 사람들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있다. 하지만, 작가 이재운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그동안 회자된 당파싸움이나 영조의 이야기 등을 지나치게 반복하고 있고 실질적인 시도세자의 이야기는 뒷부분에 극히 짧은 분량만을 할애하여 당파싸움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내명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라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의 흥밋거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특히, 사족과도 같은 자신의 가문이야기를 중간 중간에 끼어 넣어 소설적 흥미도 반감시키고 있다. 뛰어난 성군의 자질을 가진 이미지와 정신병자의 이중적 모습에서 벗어나 사도세자의 진면목을 찾아간다는 출발점에 부합하지 못한 이야기 전개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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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 비친 달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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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글에 주목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의 마음을 표기하고 전달하는 도구로써의 문자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한글도 만들어지는 당시와 비교하여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가장 큰 변화는 1933.10.19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던 것을 다시 외국문자의 표현에 불리한 것이 있다고 하여 다시 변화를 거쳤다. 이로부터 사라진 글자로 인해 한글 창제 당시의 정신이 조금은 후퇴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인류가 만든 수많은 문자 중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한글은 그 창제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보니 다양한 추측을 낳았지만 그 중심에 세종이 있었다는 점은 확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나 세종의 자식들이 밀접히 관련된 이 창제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드라마나 문학작품에서 다루어왔지만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작품이 있다.

 

정찬주의 천강에 비친 달은 바로 한글이 창제되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으로 신미 대사라는 승려를 주목하여 한글창제 당시의 상황을 문학작품으로 엮은 것이다. 한글 창제과정에 세종과 더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기록에 남겨질 수 없었던 사연을 소설로 그려가며 당시 시대적 조건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세종은 원경왕후의 4재를 기리는 천도재가 있던 날(세종 2(1420) 86) 아버지 태종에 의해 만들어진 사찰에서 신미와 만난다. 세종 당시 왜의 대장경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위해 다시 신미와 그의 스승 함허는 궁궐에서 세종과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비밀스러운 문자 창제의 과정이 시작된다. 불교를 놓고 사대부들과 밀고 당기는 실랑이 속에서도 비밀스런 임무는 계속되고 세종이 밝힌 글자의 원리를 바탕으로 신미의 범어 문자의 원리를 적용하여 우리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자로 신미에 의해 불교 경전이 번역되고 이후 8년 만인 세종 25(1443) 1230일에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 놓고 공식적으로 훈민정음의 창제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신미 대사는 어떤 사람일까? 신미 대사의 친동생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영산김씨 족보등에 기록된 문헌자료와 신미 대사의 부도탑(보물 제1416)이 있는 복천암의 복천암사적기(福泉庵事蹟記)"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信眉大師)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는 기록 등에 의해 그의 존재와 한글 창제과정에 관여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작가 정찬주는 이러한 기록들에 의해 확인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신미 대사를 중심으로 한글 창제 과정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세종 제위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불교가 처한 현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선택한 사대부와 수백 년 이어온 불교의 사이의 마찰 등을 세밀하게 그려가고 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왕가 속에 유지되는 불교에 대한 믿음은 문자에 소외되었던 백성들에게 불교의 경전과 부처님이 생애를 알리고 싶은 양자의 교착점이 되는 것으로부터 문자의 창제가 시작되었다는 시각이다.

 

남송시대의 선승 야보 도천이 남긴 대나무 그림자는 섬돌을 쓸어도/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달빛이 연못을 깊이 뚫어도/물에는 흔적하나 없네에서처럼 섬돌에 미련을 두지 않은 대나무 그림자나 연못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려 하지 않는 달빛처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에 관한 흔적은 미련 없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찬주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 창제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자유와 문명의 꽃을 피워 새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열망과 의지는 국가나 국민들의 오늘날 한글에 대한 자긍심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펴 다시금 한글에 대해 주목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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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 - 이병도와 그 후예들의 살아 있는 식민사관 비판
황순종 지음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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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와 그 후예들은 답해야 한다

오늘날 역사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주류세력에 대한 전면전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역사의 전면전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동북아역사재단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역사학자들에게 수많은 질문과 공청회, 토론회를 제안한 일에 대해 그동안의 침묵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답을 내 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출판물을 통해 역사의 사실에 대한 시각을 놓고 전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중심에는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이라는 역사를 보는 시각의 차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학문적 견해를 내놓는 학자들에 대한 태도로부터 보여지는 역사학계의 학풍의 문제까지 더해져서 불거지는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하여, 그동안의 출판물 중 이덕일의 한국사, 숨겨진 그들의 진실’, 이주한의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와 같은 출판물을 통해 공개적으로 식민사관을 신봉하며 한국 주류사학자로 행세하며 온갖 악행을 벌이고 있는 학자들에게 문제제기를 해 왔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자신들의 정당한 견해를 제시하거나 토론회나, 공청회를 통해 학문적으로 토론을 전개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이 형성한 학문권력을 통해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들을 설자리가 없도록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특히, 2012년 경기도교육청과 동북아역사재단을 둘러싼 경기도교육청 자료집 사건, 동북아역사재단이 국민 세금 10억 원을 들여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라는 곳과 함께 펴낸 한국 고대사 관련 6권의 영문 서적을 둘러싼 식민사관 해체 국민운동본부와의 공방, 그리고 풍납토성 초축 연대의 수정 시도라는 비열한 행태 고발 등을 통해 식민사관이 21세기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무한증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한국의 역사학계의 현실을 돌파구를 마련코자 이덕일의 우리 안의 식민 사관이 총론적 성격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면 황순종의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은 각론으로 들어가서 핵심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파헤쳐 문제의 본질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인다.

 

황순종의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에서 주목하는 이야기는 고조선 대신 한사군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의 기획이며, 그들의 노림수는 우리 민족이 자체 발전 능력이 없으며 중국(한나라)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서 비로소 발전했다. 즉 우리 민족의 근원을 뿌리째 뒤흔드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라며 이 항목들에 대해 밝혀간다. 또한 이병도를 비롯하여 신석호, 이기백, 노태돈, 서영수, 송호정 등 이러한 식민사학자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일을 벌려왔는지를 밝혀간다.

 

이덕일이나 황순종의 공통된 지적은 식민학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없거나 사료를 조작하여 만든 허황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바로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이 1차 사료에 근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거나 할 능력이 없는 것이라는 비판까지 받으면서도 그에 대한 자신들의 견햐를 정당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학자로써의 기본소양이 의심된다는 것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덕일이나 황순종은 이에 대해 사기, 수경, 후한서, 산해경등의 고대 문헌 철저한 사료 고증을 통해 식민사학자들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한다.

 

식민사학자, 그들의 가면을 벗겨 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해 우리의 대책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이 길 만이 정체성의 혼란이나 국가적 위기 상황에 올바른 대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올바로 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위한 필수항목이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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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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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자, 그들의 가면을 벗긴다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하나로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가에 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은 그 사람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환경을 포함하여 사람을 대하는데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세계관으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그런 판단으로 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른 집단이나 정치적 집단은 바로 이런 세계관에 기초한 사람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뭉친 집단은 다시 그들만의 세계관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몸부림을 한다. 세계관의 문제는 개인이나 집단을 넘어 국가를 운영하는 부분에 잇어서는 더욱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단의인 국민들을 중심에 두고 그 국민의 안위와 행복을 위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에 따라 갈리게 된다. 이런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그 주변에서 국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어떤 세계관을 갖는가의 문제는 국민의 안위와 행복에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인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가 운영 시스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특히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국익을 위한 기반이 되는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한마디로 말해 국사 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에서 빼거나 선택과목으로 선정한 현실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역사는 국가와 민족의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가꾸어갈 것인가에 대한 시금석과 같은 역할을 하는 학문이며 국민의 기본 교육 프로그램에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부분이다. 허지만 현실은 이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고 어떤 방향으로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공론을 모아 올바른 역사인식의 토댈 활용해야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다.

 

이덕일의 우리 안의 식민사관는 바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현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역사를 보는 시각으로 조선총독부 관점 vs 독립 운동가 관점를 제시한다. 일제치하에서 일제의 침략주의적 시각으로 만들어진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역사의 두 시각의 차이가 그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선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 도출되는 이 시각의 문제가 현실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할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는 것은 그동안의 역사를 보는 시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기반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이덕일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미스터리와 의문에 대한 문제제기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를 집필하며 독자들과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해 온 역사학자다. 그는 정치사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현재 역사학계가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로 식민사관의 청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집중적인 저술을 통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에 온 힘을 쏟고 있다고 보인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이덕일의 문제제기는 왜 아직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에 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조선의 역사를 자신들의 침략의 이념적 기반으로 삼기위해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의도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만든 기구가 총독부 신하 조선사편수회였다. 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조선총독부 관점의 식민사관을 만들어 우리의 민족혼 말살하고 조선의 백성들을 일본국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민사관을 추종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자행된 역사테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요한 문제제기의 이유가 된다.

 

자자가 앞서 지적한 두 가지 관점 즉, ‘조선총독부 관점 vs 독립 운동가 관점의 가장 큰 논점은 두 가지로 한사군의 위치는 어디인가?’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이라고 지적한다. 조선총독부 관점, 다른 말로 식민사관이라고 불리는 관점은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이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이어져 오며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를 장악하여 일선 교육 현장에서 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문제로는 ‘2012년 경기도교육청과 동북아역사재단을 둘러싼 경기도교육청 자료집 사건과 동북아역사재단이 국민 세금 10억 원을 들여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라는 곳과 함께 펴낸 한국 고대사 관련 6권의 영문 서적이다. 특히,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행한 영문서적의 내용이 국가의 정책으로 국가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내용으로 심지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제 침략적 시각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었다는 저자는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극우 일본의 사관을 전파하기까지 하고 있는 사학계의 추악한 실태를 국민들 앞에 낱낱이 고발하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식민사관에 의해 중국과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학자들의 실명을 밝힌다. 그들은 바로 이병도, 신석호, 서영수, 노태돈, 송호정, 김현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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