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역사 - 중세에서 현대까지 살인으로 본 유럽의 풍경
피테르 스피렌부르그 지음, 홍선영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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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일상이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그렇지 않고 타의에 의해 생명의 끈을 놓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의 대부분은 전쟁이나, 살인이다. 스스로가 아닌 타의에 의해 죽음을 맞는 경우는 어떨까?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무수한 관심을 불러왔다. 각종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사회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도 타의에 의한 죽음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역사다. 그렇다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방관하거나 방조하거나 때론 묵인 또는 조장하기도 한 사회적 환경은 그 시대의 권력에 의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책 ‘살인의 역사’는 수세기 동안 역사에서 벌어진 살인의 변천 과정에 대한 탐색이다. 살인에 대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을 중심으로 이를 시대 순으로 살피고 있다. 저자가 이 살인에 대해 주목하며 살피는 이야기의 중심은 중세시대의 복수극, 제도저적 장치를 마련하며 진행되어 온 살인의 불법화, 초기 유럽 사회에서 벌어졌던 남성들의 결투,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살인의 광기, 살인의 주변화 등이다.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문명화에 따른 살인의 변화를 함께 엮어내며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살인의 사회적 의미와 문화적 매락을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살인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살인은 개인적 감정의 폭발 보다는 당시 사회 문화적 영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살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개인적인 복수의 수단으로 상대방을 죽이던 중세는 이러한 살인은 큰 범죄 행위가 아니었다. 개인의 도덕심에 의존한 자책 그 이상을 넘어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살인이 중대범죄이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된 것은 국가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이후의 일이다. 가치관의 변화,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확립 등에 의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이다. 

저자는 살인의 주요한 원인으로 ‘명예’를 들고 있다. 이는 중세시대 남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지 위한 살인은 묵인 되는 등 사회적 합의가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예는 개인보다 가문이나 집단 등의 명예가 더 소중한 것이었다. 저자가 예로 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 표본이다. 이러한 부분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쌍둥이 빌딩에 대한 비행기 테러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지만 그것을 저지른 집단에서 보면 집단의 명예를 지키지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대에 들어 살인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선진국으로 알려진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묻지마 식의 폭력과 살인의 증가는 저자가 살핀 점차적인 살인율의 감소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현상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환경, 국가의 제도적 장치마련 등으로 감소되었던 살인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역사와 범죄의 접점에서 사회의 이면을 살인이라는 현상을 통해 탐색하고 있는 저자는 이를 개인의 안전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의 사고방식과 연결시키며, 살인율이 증가하는 이유로는 세계화와 지역주의의 대두로 인한 민족국가의 상대적인 약화를 든다. 또한 국가의 행정력이 사라진 도시의 슬럼 지역에서 육체적 힘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명예 관념이 부활하면서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최근 복지국가로 사회적 보장제도가 아주 잘된 나라고 평가받는 노르웨이에서 희대의 살인 폭력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는 뉴스를 통해 날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폭력 사건을 접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혹, 살인을 포함한 폭력에 대해 그것을 저지른 사람을 이 사회 문화가 그 길로 내 몰고 있지나 않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본성을 지키고 개인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가 놓치고 있는 무엇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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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배신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윤리적 판단을 실험하다
콰메 앤터니 애피아 지음, 이은주 옮김 / 바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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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동의 도덕적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하는 판단이 맞을까?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선택의 다양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물음에 답해야만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음에 대한 답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대부분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이나 사회적 규범 속에서 그 답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자신의 가치와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사람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인식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분명 기준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판단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으로 철학, 심리학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연관 학문으로 인지심리학, 행동경제학 등이 있다. 이들 학문의 탐구영역은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였다. 즉 환경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동을 실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의 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여부이다. 이 책 ‘윤리학의 배신’은 바로 그러한 학문의 탐구과정에 대한 결과를 담았다. 부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윤리적 판단을 실험하다’처럼 다분히 그 목적이 그간 인간에 대한 이해에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될 위험성을 농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람들이 행위에 대한 근거로 드는 윤리적 직관이 사실은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새로운 경험적 도덕 심리학이 아주 오래된 철학적 윤리학의 과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고찰이다. 바로 ‘성격에 대한 고정관념’, ‘자신의 윤리적 직관’을 의심하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가 다양한 실험을 실례로 들어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데 어떤 과정을 거치며 결정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윤리나 도덕으로 여기는 가치가 단지 성격이나 직관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심리적 요소가 개입된 결과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이는 전통적인 도덕철학과 저자가 주목하는 실험철학 간의 대립 양상을 보인다는 시각을 추가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 양상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으로 작용되길 바라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실험적 심리학의 관심분야인 인간의 도덕성의 시작에 대해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기저를 이루는 반응양식으로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동료들의 다섯 가지 모듈을 제시한다. 그것은 동정심, 상호주의, 위계, 순수, 외부인과 성자(내집단과 외집단) 등이며 이를 통해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실험들은 우리의 윤리학적 사고와 직관, 그리고 인류의 번영 혹은 행복과 관련된다. 바로 실험철학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들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무엇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선택을 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의 근거를 명확히 알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선택에 의해 완급 조절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윤리적 판단’에 대한 실험은 그 알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의 한 방법일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용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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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학 -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 Wisdom Classic 3
신동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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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만 존재하는 사회의 핵심논리?
승자만이 기억되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누구나 승자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결코 누구나 최후의 승자는 될 수 없다. 언제나 최후의 승자는 1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역사 이래 끊임없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갔을까?

사회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처세술이다. 세상이 복잡하면 할수록 그 험난한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영웅들이 나타나고 그들에 의해 최후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어지고 또다시 세상은 그 권력에 의해 지배 받게 된다. 이렇게 권력의 최후의 1이 되기까지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를 우뚝 세워가고자 하는 것이 역사와 옛 선인들의 삶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향한 인간의 몸부림은 개인의 역사를 넘어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지배를 꿈꾸게 했다. 이는 전쟁이 그것이다. 현대 들어 무기를 앞세운 전쟁뿐 아니라 자원을 확보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는 보이지 않은 지배가 더 극심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세계경제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현대에는 그러한 양상이 더한다. 그동안 미국을 중심이었던 서구에서 중국과 인도를 필두로 하는 동양으로 옮겨오고 있다고 한다. 이미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G2의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혼란기에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반드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라고 하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은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을 이뤘다. 향후 예측되는 부분에서 미국을 넘어서 G1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중국의 힘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자는 것이 이름도 생소한 이 책 ‘후흑학(厚黑學)’이다. 중국 5천 년 역사를 관통하는 처세의 비밀이라고 하는 '후흑'은 글자그대로 해석하자면 ‘후흑(厚黑)’은 두꺼운 얼굴을 뜻하는 면후(面厚)와 시커먼 속마음을 뜻하는 심흑을 줄인 말이다. 이는 중국 청조가 망하는 격동기에 등장하여 수 천년동안 중국을 통치한 성공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 핵심은 ‘실리를 위해 도덕을 폐하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삼국지연의’와 ‘삼국지’ 등 중국 기서들을 바탕으로 그 속에 나타나는 영웅, 호걸, 왕후장상, 성현들을 살펴 후흑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면밀하게 살핀다. 오월동주의 구천과 부차, 유방과 항우, 장량과 한신, 조조와 유비, 손권과 사마의, 장개석과 모택동 등이 그들이다. 이렇게 살핀 결과 이들의 공통점은 ‘간사한 계책이 넘치고 천하의 성인들도 상대의 목을 꺾는 비열한 술수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흑의 기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고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독특하다. 그리고 한자를 후흑이 시각으로 보는 것도 새롭다.

후흑을 기본으로 해서 살핀 중국의 역사는 새롭다. 저자는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역사는 이뤄져 왔음을 전재하고 있다. 하여 G2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결과제이며 분명하게 대안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해 가는 동안 어쩔 수없이 남는 문제는 한쪽 측면을 극도로 부각하는 인간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정당한가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함은 당연하다. 도리를 먼저 생각하며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는 것이 시대에 뒤쳐진다는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승패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 이를 놓고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마치 모든 인간관계가 이것뿐 인양 한다면 그것이 올바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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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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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고 싶은 사람 이덕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쩜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서 ‘그냥’이라는 대답은 좋아하는 이유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많고 많은 이유 중에 딱히 꼽아 대답해 주기가 마땅치 않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나 역시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이 책을 통해 얻었던 행복은 한 사람의 삶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나 후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 역사에서 그러한 사람으로 조선 후기 청장관 이덕무와 해강 최한기를 기억한다. 이덕무는 저자출신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책을 탐했던 사람이고, 최한기는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책을 모으는 것에 쏟아 부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몇 년 사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정조왕의 발탁에 의해 그 진가를 발휘했던 이덕무에 대해서는 다소 알려지고 있다고 보인다. 특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간서치(看書痴)라는 별명으로 더욱 알려졌다. 그야말로 책에 미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덕무 스스로 지어 붙인 것이다.

이 책 ‘책에 미친 바보’는 바로 그 이덕무의 문집들에서 산문을 선별하고 엮어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다.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과 교유하면서 박학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대학자이다. 한시로 청나라에까지 그 명성을 떨칠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덕무의 삶은 후대를 살아가는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그가 남긴 문집으로는 영처문고, 아정유고, 청장관전서 등이 유명하다.

‘책에 미친 바보’ 이 책은 그가 스스로를 불렀던 간서치(看書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덕무의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섬세한 감정과 일상을 살아가며 자신과 교류했던 벗들에 대한 솔직하고 따스한 마음이 잘 드러나는 산문들을 모았다. 크게 여섯 체계로 구분하여 엮은 산문들에는 이덕무 스스로가 자신을 돌아보는 내용, 간서치라 스스로를 칭한 책을 읽는 이유, 이덕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장과 학풍, 자신이 마음과 학문을 나누었던 벗들과의 이야기, 유학자로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며 선비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선비 이덕무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던 마음들이 오롯히 담긴 글들이 담겨 있다.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되리라.”

간서치 이덕무가 책을 대하는 태도다. 이 책에 담긴 산문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에 빠져 살았던 사람임을 여실하게 알 수 있다. 책을 대하는 자세와 책을 읽는 방법, 그리고 책을 읽은 후의 감상,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본받고자 하는 이덕무의 책 탐이 어떤 의미인지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덕무는 마냥 책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수양하는 유학자의 모범을 보였다. 사람이 살아가며 진실로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책을 통해 배우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책읽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보면 잘 나타나고 있다고 보인다.

조금 크다 싶은 서재를 만들었다. 시골로 삶의 공간을 옮기는 과정에 가장 중점을 둔 공간이다. 서재를 만들며 염두에 두었던 것이 이덕무의 책을 읽는 독서讀書, 책을 보는 간서看書, 책을 간직하는 장서藏書, 책의 내용을 뽑아 옮겨 쓰는 초서抄書, 책을 바로잡는 교서校書, 책을 비평하는 평서評書, 책을 쓰는 저서著書, 책을 빌리는 차서借書, 책을 햇볕에 쬐고 바람을 쏘이는 폭서曝書의 구서라는 말이었다.

이 책과 비슷한 제목의 소설책이 있었다. ‘책만 보는 바보’ 안소영이 지어 2005년 보림에서 출간한 소설책으로 부제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처럼 중심이 벗과의 사귐에 있다. 이 책을 통해 실학자와 문장가로 이덕무 보다 인간 이덕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그가 나오는 책이라면 무조건 수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선조들이 남긴 우리글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이덕무는 바로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했던 사람이다. 하여 그의 삶을 닮고자 했다. 

탁월한 문장가 이덕무의 산문을 현대인들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번역한 글이 돋보이는 책이다. 아쉬운 점은 책머리의 박제가 글에 중복되는 단어와 자화상 해설부분에 있는 이덕무의 죽은 년도에 대해 잘못된 표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록에 실린 이덕무 연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원문은 이덕무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실린 원문은 비록 한자 실력이 미치지는 못하지만 짧은 원문과 번역문을 번갈아 보며 원문이 주는 매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역자의 해설이 있어 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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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을 벗고 사람을 담으려오 - 소설로 쓴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문학
김용필 지음 / 문예마당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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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굴레를 벗고
사람의 삶에서 타고난 조건이 얼마나 작용할까? 신분제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던 시절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출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이다. 어떤 사람은 두루두루 갖추고 태어나 그것을 기반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지만 그와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다. 또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태어나 하나 둘 갖추어 나갔던 사람도 있다. 각기 다른 조건에서 태어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것으로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 역사를 살았던 사람을 찾아보고 그의 생애를 살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삶을 통해 지금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우리 역사에서 천재로 태어났지만 불우한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꼽는 사람이 몇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도 그들 중 한명이 아닐까?

박지원(朴趾原)은 1737(영조13)~1805(순조5)년간을 살았던 사람이다. 다분히 소설가로 기억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가 남긴 열하일기라는 불후의 명작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소설로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이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이며 북학파로 불리는 실학자의 선두에 선 사람이다. 반남 박씨, 내노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의 영향과 당쟁에 휘말려 관직에 나가는 것이 좌절되고 정조의 등용으로 관직에 나가 자처하여 한직을 전전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덕무, 박지원, 이서구, 홍대용 등 백탑파를 중심으로 실학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동안 열하일기라는 박지원이 남긴 견문록과 여러 가지 소설을 통해 작품으로 알고 있는 박지원의 생애와 삶에 대해 주목하는 소설이 등장했다. ‘양반을 벗고 사람을 담으려오’는 혼란스러웠던 시대,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기엔 너무나 각박했던 시대를 살았던 박지원의 가계, 인생행로, 벗과의 사귐, 사랑에 대해 흥미 있게 그려낸 것이다. 

‘양반을 벗고 사람을 담으려오’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실학파로써 그가 남긴 작품과 그 속에 담긴 사상보다는 개인적인 삶 그리고 그 주변부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백탑파를 중심으로 그들과의 교류에서 보여주는 박지원의 실학에 대한 확고함은 있으나 그것의 근간이 되는 사상의 탐구과정에 소홀하게 그려진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소설적 구성이라는 성격상 옥봉이라는 처자와의 교류를 그려가는 점을 보면 사상가로써 박지원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희석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나 싶다. 

박지원의 소설의 특징을 패관문학이라 한다. 사대부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에게 두루두루 읽힐 글을 쓰고자 했던 결과가 연암체라는 독특한 글로 나타난 것이리라.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등용해 준 왕 정조로부터 지탄의 빌미가 되기도 했던 그의 글이 그의 이러한 뜻대로 얼마나 일반 백성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과 사회 주도층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연암 박지원의 깊은 마음가짐은 높이 평가될 수밖에 없으리라.

타고난 신분이었지만 그 신분으로 인해 더 암울한 생을 살았던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저자는 박지원의 그런 환경을 백분 활용하여 ‘양반을 벗고 사람을 담으려오’ 라는 시각으로 바라봤다. 계급사회에서 계급에 우선하여 사람의 가치를 담으려 했던 사람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어쩜 박지원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를 물질문명의 발달에 치어 그 존재감을 잃어가는 현대 우리들에게 더 주목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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