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출 없이 0원으로 소형 아파트를 산다 - 300만 원으로 100억 자산을 이룬 부동산 소액투자의 기술
잭파시(최경천) 지음 / 다산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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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이든, 코인이든, 주식이든 볼 때 마다 이게 무슨 짓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불장에 뛰어들지 못한 개인적인 아쉬움도 갖고 있으며, 근로소득자가 수 십년을 노력해야 만질 수 있는 돈을 일거에 벌어들인 것을 보아도 어처구니가 없다. 게다가 부동산, 코인, 주식은 벌어 들인 돈에 대한 세금도 천차 만별이다. 사실상 부동산은 조정지역이라면 10억이 올랐어도 내가 다주택자라서 중과된 양도세를 내게되면 가져가는 돈은 2-3억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식은 내 보유 주식 금액에 따라 이것보다 한참 적은 세금을 낼 것이며, 코인은 그나마도 없다. 

 부동산의 경우 경제 성장 없이 2배 정도 오른 것을 보면 허구란 생각 뿐이다. 집이 두 채인 사람은 큰 의미가 있다. 한 채를 100% 수익을 거두며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금을 크게 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채인 사람은 당장 그것을 팔고 지방으로 내려 갈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도 있고 내 직장에, 생활이란게 있어 이렇게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2배가 올랐다고 해서 모두가 이 가격에 팔 순 없다. 만약 상당한 수가 이 가격에 집을 내놓는다면 폭락할 것이다. 결국 상승한 집값이란건 내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금액의 상승, 그리고 지금 집을 팔고 그걸 받아줄 사람이 있을 때 수익을 거둘 기회정도로 보인다. 물론 이것도 상당히 큰 혜택이자 장점이다.

 세계적으로 금리가 크게 인상하며 부동산, 코인, 주식 모두 폭락 중이다. 투자 주기에 접어들어 막 시작한 하락장이기에 적어도 2-3년은 하락장을 탈 것이란게 중론이다. 2008년에 시작한 하락장은 갑작스럽게 터진 것이었지만 이번 하락장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8년의 하락장은 한국의 경우 2008년부터 2013년정도 까지 이어졌고 과거 2000년대 초반의 상승 분을 거의 반납했었다. 이번 하락장은 사실 2019년 정도에 양적완화의 중단과 더불어 시작되었어야 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그 끝이 미뤄졌고 양적완화가 더욱 크게 이뤄져 풍선은 더욱 커졌다. 때문에 그 골은 더욱 깊고 길게 형성될지도 모른다. 

 이런 하락장에 읽은 투자책이라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금리 인상을 예상하지 않고 책을 서술한 것이기에 더욱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읽으면서 배울만한 점과 독특한 점도 적지 않아 괜찮은 편이었다. 저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소득이 그리 크지 않고 가진 것 없는 흙수저이기에 무피투자나 플피투자에 집중했다. 그래서 투자 10년간 100억대의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투자금 자체를 적게 잡기에 다른 부동산 책과는 다르게 서울의 주요 부동산에 대한 투자는 많지 않다. 경기권과 특히 서울 북부인 고양 등지와 인천에 투자가 많고 지방 아파트에 대한 투자가 많다. 특히, 조정지역에 대한 양도세중과로 인해 지방의 공시가 1억 미만 아파트 투자가 많다. 이렇게 하면 양도세가 중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투자는 역시 시기가 중요하다 말한다. 부동산 투자 역시 시기를 타며 대개 상승장 5년 하락장 3년이다. 물론 부동산은 장기 우상향한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 주기에서 상승의 끝 부분에 투자했다면 긴 하락장을 견뎌내고 다음 상승장에서 그 상승이 자신의 투자금을 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하락기의 끝 부분에서 투자를 한다면 상승장의 상승분을 고스란히 가져갈 수 있다. 저자는 상승장이 5년 주기를 갖는다고 하는데 이는 불황기 미분양으로 장기휴업중인 건설사가 회복기에 들어서면 다시 아파트를 짓고 분양 계획을 갖는다. 하지만 상승기 초기에는 매수세가 작아 완판에 자신감을 갖기 힘들고 그래서 분양가도 낮게 잡는다. 이후 시간이 지나 상승기 2-3년차가 되면 분양을 시작하고 완판된다. 분양 후 입주까지는 3년이 걸린다. 그렇기에 상승장이 5년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차별성은 부동산 투자에서도 불황기를 견딜 수 있는 전략을 제공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6:4전략, 4:2:2:2전략이라 부른다. 6:4 전략은 수도권에 6을 지방에 4를 투자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도권은 세계적인 부동산의 주기를 따른다. 하지만 지방은 그렇지 않다. 수도권을 따르기도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기에 공급과 수요가 굴러가는 시기가 다르다. 때문에 수도권은 불황이어도 지방은 오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 수도권 부동산의 불황기에 지방은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은 4:2:2:2전략이다. 이건 수도권 아파트4, 지방의 공시가격 1억 이하 아파트 서울 인천 지역의 구축 빌라, 서울의 오피스텔에 각각 2를 투자하는 것이다. 수도권 아파트는 장기투자, 지방의 저렴한 아파트는 수도권과 다른 상승 주기를 노린 투자, 구축 빌라는 장기적 재건축 재개발을 노린 투자, 오피스텔은 서울 중심가에 대한 접근 및 현금흐름을 위한 투자다. 저자는 갭투자를 위주로 하지만 현금흐름도 중시하는데 불황기의 현금압박을 견뎌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책에는 저자의 실전 투자 경험 사례와 중요한 자료를 획득하는 방법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불황기에 나온 책이기에 특이하고 독특했다. 오늘 라디오에서 한 펀드투자자가 나왔는데 지난 기간 동안 자신들의 펀드가 200% 정도의 수익을 기록했다고 했다. 하지만 들어왔다 나간 펀드 가입자 중 그만한 수익을 거둔 사람은 절반이하라고 한다. 그만큼 투자는 무엇이든 들어가는 시기와 불황을 견뎌내는게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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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미래 교육 대전환 - 입시교육의 붕괴와 고교학점제, 특별한 교육만 살아남는다
김보배 지음 / 길벗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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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이후 교육광고엔 하나의 큰 변화가 생겨났다. 과거엔 메가스터디나 구몬 등 학습지나 학원이나 온라인 강의 광고가 주류였다면 코로나 이후에는 엘리 하이처럼 인공지능에 의한 자기 주도적 또는 개별학습을 제공하는 광고가 대세가 된 것이다. 코로나로 학교 교육이 체계적 학습을 제공하지 못하고 부실한 원격 수업을 제공하자 빠르게 대체재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온라인 도구 혹은 인공 지능을 활용한 지식 학습은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공교육인 학교 현장에도 이런 도구가 들어오는 것은 시간의 문제라고 본다. 최고의 학습은 개인의 수준과 흥미에 맞춘 개별화 학습이고 현재의 일인 교사와 다수 학생 체제로는 이런 대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빠르게 지식 학습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도입할 가능성이 높고 후발 주자 일수록 이 부분에 사람 선생님의 오래도록 의존하며 뒤쳐질 것이다. 물론 이런 시대가 도래해도 인간 선생님은 중요하다. 누군가 이들을 관리하고 인간적으로 대하고, 협력 학습이나 동기부여, 혹은 마을교육이나 프로젝트를 구성하여 온라인에서 학습한 것으로 협력하여 구현할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온라인 학습 시대가 소위 공부의 추월 차선을 제공한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는 학습의 양극화를 크게 불러올 가능성이 높은데 온라인 시대는 시공을 초월하여 매우 강력하고 멋지며 수준 높은 학습을 제공하면서도 극강의 유혹도구로 사람을 파편적 지식과 유희에 매몰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최근 기업은 더 이상 스펙이나 학벌, 지식에 얽메이지 않는다. 국내 기업들도 생존을 위해 블라인드 채용을 늘리고 있다. 카카오는 인재 채용 기준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기, 무엇이든 본질만 남기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나보다 동료의 생각이 더 옳을 수 있다고 믿기, 스스로 몰입하고 주도적으로 일하기, 세상을 선하게 바꾸려고 노력하기 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학원을 다니며 문제풀이식 능력을 양성하는 자가 아닌 어려서부터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탐색하고 이를 통해 몰입하여 학습한 지식을 실제 생활 문제를 해결하며 키운 역량을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즉, 미래인재는 어떤 분야의 탁월함을 갖고 그 탁월함을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나누는 친절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탁월함은 깊이 있는 질문과 비판적, 창의적 사고에서 비롯하며, 친절과 소통은 타인과의 공감, 의사소통, 협력능력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런 미래인재의 역량은 온라인 도구를 활용한 공부의 추월차선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게 책의 주장이다. 온라인 학습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물리적 한계와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가상 기술이 발달하면 실제 화성에 가지 않고도 위험한 화산을 가지 않아도 이를 체험할 수 있다. 역사속의 현장이나 주요 민주화 운동 사건의 체험도 가능하다. 매우 폭넓고 실제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음은 아이의 수준과 흥미에 따른 맞춤형 학습의 제공이다. 현재는 모든 아이가 한 교실에서 같은 수준의 수업을 받는다. 그래서 최고의 수혜자는 딱 중간 수준의 학생이 되며 이보다 우수하거나 못하다면 피해자가 된다. 온라인 학습은 개별학습으로 이를 해결한다. 마지막은 실제 생산해보는 즐거움이다. 온라인 학습 도구는 코딩이건 앱개발이건 3D 프린팅이던 도구를 이용해 자신이 단순 소비자나 학습자가 아닌 생산자로써의 경험을 갖게 한다. 

 이런 온라인 학습을 잘 이용하여 공부의 추월차선을 타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목적과 관심사가 분명해야 한다. 공부의 추월 차선을 타려면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 번째, 스스로 생각하고 아이의 입을 여는데 도움을 주는가 이다. 두 번째, 조금 더 어려운 단계의 도전 과제가 있는가?, 세 번째는 아이가 메이커로써 주도하는 온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이나 활동과 연계가 되느냐이다. 세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언급한 자기주도성을 위한 동기와 관심사다. 이는 다양한 경험과 자기 효능감에서 나오는데 자기 효능감은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결정해 성공해나가는 누적경험에서 비롯된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자기 효능감은 물론 자신의 관심사를 잘 모르기도 하는데 이 경우 부모나 선생님이 항상 내가 너의 생각을 늘 궁금해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보면 관심사로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온라인 학습을 통해 공부의 추월차선을 탔다해도 이를 현실의 문제에서 해결해나가는 경험을 가지면서 이런 지식을 체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의 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공적으로 협업하려면 자신의 강점과 상대의 강점을 알고 그것을 조화시키는게 중요하다. 이 협업능력의 양성은 생각보다 어렵다. 학교교육에서라면 무엇보다 자주 어울리고 협력하는 경험을 제공하는게 중요하다. 때문에 최근 교육현장에서는 협력적 문제해결 평가를 중시한다. 또한 공부만이 아니라 놀이나 운동 기회를 충분히 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통해 서로 협력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협력의 양성은 가능하다. 가족 구성원이 서로의 강점을 찾아 인정해주기, 또는 서로의 감정이나 생각에 공감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추월차선을 제공할 온라인 학습의 시대가 눈앞에 있지만 아직 공교육 현장의 반응은 더디기만 하다. 1인 1기기 보급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이 달성되더라도 현장의 교사들이 대부분 인터넷 검색 이외에는 다른 기기 활용 학습법을 학생들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물질적, 정신적 도구 모두 현저히 부족한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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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유산 - 역사와 과학을 꿰는 교차 상상력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획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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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에서 과거 유산과 첨단기술을 연결하여 엮은 책이다. 하지만 책에서 양자가 비중이 비등하진 않고 유산에 더 초점이 가 있다. 그리고 연결도 좀 매끄럽진 못한 편이다. 그럼에도 첨단지식과 과거역사문화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첫 장은 미술이다. 미술은 시점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회화가 평면인 만큼 동서양 모두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았다. 서양은 15세기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거울을 이용해 투시원근법을 개발했다. 이후 소실점을 그림에 한 개나 두 개, 세 개도 사용하며 과학적 접근을 한다. 동양은 이를 하늘로 올라가 극복했다. 부감법을 개발한 것이다. 

 한국은 조선시대 부감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리는 대상의 규모에 따라 높이를 달리 할 수 밖에 없었고 고공부감법, 고공경사부감법, 저공경사부감법, 평행사선부감법을 이용했다. 고공부감법은 하늘의 높이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궁궐의 장대함이나 많은 인원을 동원한 행사에 적합했다. 고공경사부감법은 시선을 약간 뒤로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경사각을 표현한다. 정산의 금강전도, 김홍도의 월야선유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다. 저공경사부감법은 살짝 만 뒤로 올라간 것으로 규모가 작고 대상을 크게 그려도 되는 풍속화에 적합했다. 서당이나 단오풍정 등이 이 방법을 사용했고 공간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다. 평행사선부감법은 고공경사부감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부감법의 최종판이다. 고공경사부감법을 취하되 건물만을 특이하게 정면에서 45도를 비틀어 그려 입체감을 드러낸다. 규장각도나 화성행궁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으며 가까운 것을 오히려 작게 그리고 먼 것을 크게 그린다. 

 한국에는 평행사선부감법으로 제작한 대작으로 효명세자가 남긴 동궐도가 있다. 크기가 무려 576*273으로 창경궁과 창덕궁, 비원등 당시 궁궐의 전체를 남겼다. 워낙 대작이었기에 여러 화원이 나눠 그렸는데 그럼에도 하나의 시선으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 대단하다.

 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도기와 석기, 자기로 구분한다. 기준은 온도인데 도기는 80-1100도, 석기는 1100-1250도, 자기는 1250도 이상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삼국시대 백제토기는 800-900도였고 통일신라의 토기는 900-1000도, 조선 백자는 1250도 내외로 부합한다. 도자기는 유약을 쓰는데 그 역사는 철분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분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 색이 바뀌는데 흑색은 10%, 붉은 색은 5-10%다.  

 최초의 청자는 중국 한나라에서 1세기 쯤 탄생했다. 중국 항주 인근 절강성이 청자 집단 산지로 이후 1000년이 지나서야 고려에 들어왔다. 청자 생산의 핵심은 알맞은 태토를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약, 세 번째는 불을 때는 기술이다. 고려 청자의 가마기술은 아마 10세기 경 중국 월주요지역에서 장인을 통해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는 가마 밑바닥에 뒤집어 놓은 듯이 동그란 모양으로 깔려있는 감발이란 것을 쓰는데 이는 보조역할을 한다. 감발을 사용하면 자기에 열을 고르게 전달해 발색이 좋다. 하지만 소수만 소성할 수 있기에 비용이 많이 들고 고급청자에만 쓴다. 

 백자와 청자는 태토가 매우 다르다. 청자는 논밭 1미터 정도 아래의 흙이 적합하고 강진과 부안의 것이 좋으며 양도 풍부하다. 하지만 백자는 돌을 부순 흙이 적합해 산 꼭대기에 태토가 있다. 여러 지역의 태토를 배합하기에 흙의 확보가 매우 어렵다. 유약은 재를 쓰는 것과 납을 쓰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재를 쓰는데 납유약은 인체에 해롭기에 써도 주로 자기의 외부에만 쓴다. 납유약은 중국의 당삼채에 적합하다. 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각종 색상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는데 그래서 당삼채의 색이 총천연색을 띄게된다. 반면 재유약은 채색이 어렵다. 무슨 나무 재를 얼마나 섞느냐가 중요하다. 

 중국의 가마는 상당히 규모가 크다. 높고 길이도 긴데 반면 고려의 것은 높이도 낮고 길이도 짧다. 중국의 가마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고려의 것은 애초 소량생산 용이었던 것이다. 고려의 것은 대량생산은 어려운 반면 가마가 작기에 온도의 조절이 좋고 소성과 냉각이 쉽고 빠르다. 때문에 색이 좋고 고급청자가 잘 나온다. 청자의 색은 역시 철과 관련하는데 유약의 철이 환원하면 푸른색으로 변화한다. 가마 안의 장작이 타면 탄소가 발생하는데 탄소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가 되어 날아간다. 이렇게 공기 중의 산소를 조절하여 산화환원을 조절해 색을 내는 것이다. 

 처음엔 아궁이에 소량의 장작을 넣고 문을 열어놓는다. 이러면 산소가 들어와 탄소와 결합하고 산소는 유약의 산화철과 결합하여 산화가 더욱 진행된다. 그러다 900도에 이르면 장작을 3-4배 넣고 문을 닫는다. 이러면 산소가 급격히 줄고 탄소가 늘어난다. 그리고 이 탄소가 유약의 산소를 빼앗아 유약을 환원시키는데 이려면서 푸른 색을 띄게 되는 것이다. 

 고려청자의 백미는 색과 더불어 상감이다. 하지만 상감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릇은 구우면 부피가 줄어드는데 청자는 15%, 백자는 20% 정도가 감소한다. 태토와 바른 유약의 열팽창계수가 같아야 같은 비중으로 줄어 균열이 없는데, 이를 맞추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대부분의 청자와 백자는 약간의 균열이 있다. 여기에 상감을 하면 태토와 유약, 그리고 백상감토, 흑상감토 4박자가 맞아야 한다. 고려청자는 중국 청자보다 색이 좋은데 이는 가마와 관련한다. 고려의 가마는 작아 빠른 냉각이 가능해 유약에 결정이 적다. 때문에 난반사가 적어 색이 잘 나는 것이다. 

 조선의 백자는 시기마다 사실 색이 조금 씩 다르다. 순백색으로 시작해 회백색, 백옥색, 청화백자로 이어지는데 가장 최고는 백옥색을 띤 18세기 백자다. 백자가 회백색을 띄는 시기는 나라 경제가 어려워 태토 확보가 어려웠던 시기다. 백자는 청자와 다르게 상감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데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초벌구이 한 백자는 표면이 입체이니 당연히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우며 매우 건조하므로 수분을 빠르게 흡수한다. 때문에 한붓으로 빠르게 그리지 않으면 먹이나 물감을 모두 먹어버린다. 여기에 재벌하면 크기가 더 작아지기에 애초에 그림을 그릴때 축소 될 것도 감안해야 한다. 

 김정호는 평생 지도를 제작했다. 그는 30대였던 1834년 청구도를 제작했고 1859년 동여도를 완성하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한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를 초고로 삼아 판각한 것이다. 김정호는 지도제작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지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여 지도와 지지를 항상 같이 제작하였다. 지도에는 정보를 담는데 큰 제약이 따르기에 그는 지지를 같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대동여지도의 지지편이 대동지지다.

 대동지지는 32권은로 1권이 서울, 2-24권은 8도의 각 군현, 25도는 산수고, 26도는 변방고, 27-28권은 정리고, 29-32권은 방여총지다. 정리고는 각종 도로망이고 방여총지는 단군에서 고려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영역을 담은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오해는 세간에 널리 펴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도를 평생 전국을 돌며 실측해서 만들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옥사설이다. 이는 과거 교과서에 이렇다할 근거없이 짧게만 실렸던 것이 널리 퍼진 것으로 아마도 내용이 극단적이어서 였을 것이다. 책의 저자는 이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실측이다. 아무리 공간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도라도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를 그냥 걸어서 지도로 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아파트단지는 단순하기로도 한데 경계가 복잡하고 산과 물이 접하고 고저가 있는 과거 조선의 군현은 어떨까. 물론 산 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조망하는 방법도 있으나 전국을 이렇게 하기도 힘들고 막상 높은 곳은 시계가 나쁜 경우도 많다. 때문에 저자는 김정호가 실측이 아닌 방대한 자료를 얻어 이를 토대로 종합하여 지도를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기에 옥사설도 말이 안된다. 방대한 자료를 관으로부터 얻어 지도를 제작할 수 있던 자가 정부와 갈등관계이긴 어렵다. 저자는 사실상 김정호가 정부의 의뢰 혹은 관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제작하였다. 목판은 약점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단색 표현으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필사지도와는 다르게 많은 정보를 넣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 동여도에는 지명이 1만 8천개인데 대동여지도에는 1만 2천개로 줄어든다. 김정호는 심사숙고하여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고 중요도를 기준으로 6천개를 떨군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에는 특이하게 산과 강등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도로망만은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대에도 직선도로가 매우 드문데 조선에 직선도로가 웬말일까. 여기엔 김정호의 의도가 담겨있다. 목판본은 언급한 것처럼 단색이기에 도로망마저 실제로 그리면 산맥 및 하천 등 다른 것과의 구분이 매우 어려워진다. 이에 김정호는 도로를 직선표기하고 거리를 알려주기 위해 눈금표기 하였다. 때문에 지도를 보는 사람은 군현간의 실제 거리를 매우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또한 김정호는 실제 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군현 사이에도 도로를 그려넣었는데 이는 도로는 없더라도 각 군현간의 관계망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여러모로 머리를 많이 쓴 셈이다. 

 조선에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와 봉수, 필마가 있었다. 이중 가장 빠른 것은 봉수인데 속도가 시속 100km였다. 하지만 봉수는 매우 단순한 의도만 전달 할 수 있었는데 봉화가 5개여서 개수에 따라 정보가 달랐다. 하나면 평시이고 두 개면 국경에 접이 출몰, 세 개면 적의 침범, 네 개면 척의 침공, 다섯 개면 전투였다. 하지만 정보전달이 매우 단순하고 실수가 잦았으며 봉수꾼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필마에 더 의존했다.

 조선은 말을 통한 소식연결을 위해 전국에 역을 운영했다. 말은 시속이 60km로 빠르나 지구력이 약해 대충 30리 간격으로 역을 배치했다. 이로 인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15-20일이면 소식이 도달했고 실제 임진왜란때 선조는 3일 반만에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큰 규모의 역은 전국 41개 작은 역은 504개 였다. 찰방이라는 관리가 역의 총책임자였고 그 밑에 역리가 있었다. 큰 역에는 역리가 20-30명, 작은 역에는 2-3명 배치되었고 그 아래 역노비가 다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암행어사가 동원하는 인원이 바로 이 역노비다. 1808년 전국 역에서 보유한 말의 수가 5380필에 달했다 .상당한 수인데 아마 전란이 일어나면 군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역에서 말을 사용할 권리를 증빙하는게 마패다. 마패는 세 가지 역할을 했는데 역에서 말을 빌리고 ,신분을 증명하고 , 공문서에 도장으로 쓰인 것이다. 10마패는 왕, 7마패는 대군, 6마패는 정2품이상, 5마패는 종2품 관리이고 그 아래는 1-5마패를 썼다. 마패는 나무나 철로 초기 제작했는데 부식을 막기 위해서 나중에는 구리 마패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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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역사 기행 - 한반도에서 시베리아까지, 5천 년 초원 문명을 걷다
강인욱 지음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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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4대 문명을 지금 사회의 시원으로 보지만 이는 농경사회, 특히 서구적 시각에 가깝다. 채집 및 유목은 농경보다 오래되었고, 특히 반건조지역인 초원은 화약의 발명으로 무력화되기 전까지 적은 인구수에도 인류문명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다. 많은 문화 및 기술의 전달 통로 역할을 하였고 단절된 농경지역을 교역로로 연결했으며 때론 막강한 군사력으로 농경제국을 허물고 세계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때문에 저자는 초원은 적어도 5대 문명쯤 취급받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 초원 문명중 농경사회에 삼켜지지 않고 이렇다할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보니 초원의 역사 역시 제대로 발굴되지 않는 측면이 상당하다. 

 농경문명을 계승한 지금의 국가들은 초원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을 갖는다. 우선 대국들은 과거 초원에 당한 것을 생각하며 야만이나 이질적이고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도 그들이 이룬 대제국을 이중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 한다. 그리고 주변부의 국가들은 초원을 웬지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고 싶어한다. 동아시아로 치자면 전자는 중국, 후자는 한국과 일본의 태도다. 하지만 둘다 옳지 못한 태도이며 기본적으로 초원이 농경국가와 꾸준히 교류하고 기술문화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린 초원을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만 인구가 적은 만큼 그 지역은 인구부양력을 갖지 못한 매우 혹독한 지역이다.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혹독하고 길다. 초원은 이 짧은 여름에 자라난 풀에 의존한다. 식량이 없기에 유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효과적 가축 통제와 목초지로의 빠른 이동을 위해 식량수단이던 말을 이동수단으로 길들였다. 장성한 아들이 먼저 분가하여 새로운 목초지로 떠나기에 초원에선 마지막까지 남은 막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한다.

 말을 길들이는데는 3가지 중요한 마구가 필요했다. 우선 재갈이다. 재갈은 말의 이빨을 뽑아서 끼우거나 어금니를 갈아낸 후 끼우는 것으로 약간의 힘으로도 고삐를 당겨 말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재갈이 개발되고 나서야 말에 탄 인간이 안정적으로 말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안장이다. 말의 등뼈는 울퉁불퉁하여 등에 타면 탄 사람에게 상당한 부상과 불편한 감각을 준다. 때문에 안장을 개발해 등뼈를 덮고나서야 사람은 안정적으로 승마를 할 수 있게 디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병이 등장한다. 마지막은 금속제 등자다. 등자는 이전에 개발되었지만 금속제 등자는 3-4세기 고구려고 처음 개발했다. 금속제 등자로 중무장 기병이 등장한다. 말위에서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거나 말 자체를 무겁게 무장시키면 승마자가 안정적일 수 없었는데 금속제 등자의 등장으로 큰 훈련없이도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바로 이 금속제 등자의 발명으로 탄생한 것이다. 

 말을 어느정도 다룰 수 있게 되자 전차가 등장했다. 전차는 무기이면서 신과 인간을 잇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전차는 매우 비싼 무기였는데 바퀴살이 개발되고나서 더욱 활성하한다. 유명한 카데시전투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맞붙었는데 히타이트는 바퀴살을 개발해 전차를 경량화한 덕에 3명이 전차에 승선했다. 한명의 방어, 한명의 공격, 한명의 운전이다. 반면 이집트는 기존처럼 한명 공격방어, 한명 운전으로 크게 불리했다. 전차는 기원전 11세기가 되어서야 중국 상나라에 전파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에선 별로 쓰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한반도와 만주에 큰 전쟁이 없던 중교중심의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과 산악지형이 많아 전차가 별로 쓸모가 없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초원 민족은 승마를 하기에 생식력이 낮았다. 승마는 위험한 것으로 격렬하게 오래 말을 타면 자연거세 확률이 높았다. 유목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여 보상하였고 생식과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전투에 집중해 무서운 전투력을 가진 전사로 거듭났다. 유목사회는 인구유지를 위해 생식력을 보존한 다른 사람들이 많은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입양시키는 방법과 전쟁포로를 집단에 유입시키는 방안을 썼다. 

 사슴은 초원에서 생활에 필수적인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에 매우 중요한 문화적 모티프가 된다. 사슴을 숭앙하는 풍습이 초원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도 이어진다. 기원전 9-5세기 초원에는 사슴돌이 만들어진다. 이는 2미터 정도 크기로 자바이칼, 알타이, 몽골 등지에 분포한다. 전면을 사슴문양으로 채운 이 돌은 전체가 초원전사를 의미한다. 귀부분엔 그래서 귀걸이가 허리부분엔 허리띠와 칼 문양이 등장한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역동적인 형태의 사슴을 새긴 청동이나 목제 장식품을 애용했다. 그들이 그린 사슴은 종류만 10종 이상에 자세도 매우 자세하여 사슴에 대한 상당한 관찰과 관심을 보여준다. 한편 사슴문화는 한반도에도 펴졌는데 그래서 기원전 3-1세기 사슴문양 청동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사슴문화가 크기 않은 지역이다. 

 중국에선 초원 세력을 야만시하고 적대하지만 그들의 역사에 초원은 역시 깊이 자리한다. 중국은 초원세력인 원과 청, 요와 금을 겪었고, 몇몇 한족(?)왕조는 사실상 초원과의 연합세력이다. 우선 주나라를 들 수 있다. 주는 중원에서 서북방면으로 건너간 일파가 현지에서 주변 세력과 연합하여 힘을 키운 후 다시 중원으로 진출해 상을 멸하고 세운 나라다. 전국시대 조나라도 있다. 조나라의 무령왕은 인근 약소국인 중산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다. 중산국은 유목문화를 받아들여 강한 기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당하지 못한 것이다. 무령왕은 당시 중원인이 남여 모두 치마를 입던 것을 호복인 바지를 스스로 입고 명령하며 기병을 키웠다. 결국 이들은 중산국을 멸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다. 다음은 진이다. 진은 위치 자체가 중국 서북방면으로 애초에 중원과 거리가 멀다. 진은 오래된 국가인데 기원전 7세기에 묵공이 서융을 제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비로소 세력을 떨치게 된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특이한 양식으로 4세기 갑자그 등장해 200년간 유지된다.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고분이 매우 유사하다. 파지릭 고분은 무덤 주변에 둘레돌을 두르고 무덤 위로 돌을 쌓고 안에는나무 무덤방을 놓는다. 둘 다 유라시아에서 매우 드문 방식이다. 신라와 가야에는 후발주자이고 고구려 백제와 달리 북방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북방 문화가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천마도와 황금보검 가야에서 출토되는 철제무기나 마구등이 그러하다. 학계에서는 한때 이들 지역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예가 내려와 강하게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저자는 그런 인구이동의 흔적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소국인 이들에게 이런 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강한 힘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스스로가 북방과 대결하며 교류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고구려와 강한 문화적 정체성과 폐쇄적 농경문화의 백제에 비해 바다를 접해 개방적이고 오히려 교류가 원거리로 가능했던 이들 지역이 영향을 받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로 추정한다.

 한국의 대표적 먹거리 문화인 불고기는 사실 농경과 유목문화의 결합품이다. 초원에선 샤슬릭이란 꼬치구이가 오래전 부터 유행인데 그들은 양고기를 꼬치에 끼워넣고 다니며 불에 쉽게 구워먹곤 했다. 이를 발전시킨게 고구려의 맥적이다. 맥적은 반농반목 국가인 고구려에서 콩류의 양념을 고기에 재워 꼬치 형태로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고기와 양념이 없는 고기는 아무래도 비린내가 나기 마련인데 맥적은 양념을 하여 이것을 잠재운 것이다. 맥적은 중국과 초원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고, 조선의 설하벽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산적과 너비아니로 이어졌다. 지금의 불고기는 콩과 고추장류 양념에 채소를 곁들이는 것으로 완벽한 초원과 농경의 융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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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7-05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기병이 등장하자 전차도 등장했다’는 의미는 전차가 기병 이후에 나왔다는 의미인지요?
그렇다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전 전차가 먼저 나오고 한참 후 기병이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닷슈 2022-07-05 22:01   좋아요 1 | URL
아니요, 북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차 이후 기병입니다. 어느 정도 말을 쓸 수 있게 된다음 전차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좀 문제가 있네요. 고쳐야겠습니다.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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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의 책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초년 시절 본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었다. 지금 보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당시만 해도 간신히 읽고 잘 이해도 안갔었다. 전공이 경제학이었음에도 말이다. 책에서 유시민은 경쟁과 그를 위한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경제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소위 자유주의 계열의 부자의 경제학과 평등과 복지,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빈민의 경제학'을 나눠 제시하였다. 

 이번 '역사의 역사'도 그렇게 나눴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오직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입장과 주관적인 서술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물론 당연히 저자는 이 정도 생각은 해보았을 것이고 그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서술을 했을 것이다. 

 책 '역사의 역사'에서는 고대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진 시점부터 최근의 역사서술을 망라한다. 물론 중요한 역사서와 사람만이다. 처음으로 다룬 것은 당연히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만큼 역사를 저술했고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다. 두 사람 모두 문자시대 초기의 사람으로 당시 대부분의 정보는 구술로 전해졌고 문자로 접한 것도 구술을 문자화한 것이었다. 많은 정보가 전달과정에서 즉시 사라졌고 살아남아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왜곡, 각색, 변형되었다. 이들은 이런 시대를 살았기에 상당히 지금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많은 역사서를 쓸수 밖에 없었지만 매우 의미있는 작업을 해내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당대의 문명이었던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문명에 대한 지리, 인정, 도시 ,민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내었다. 그리스 인임에도 이들 문명에 대해 불편부당하지 않았고 적절한 분량을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그래도 그의 성향은 딱딱한 사실 중심보다는 군데군데의 빈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채워나가는 서사꾼이나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정보의 진위와 가치를 비교적 꼼꼼하게 점검하였고 사실을 시간순으로 배치하며 신화와 전설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래서 그의 역사서는 현대의 역사서와 비슷한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 여기에 주요사건들이 서로 몇년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서술하여 현대의 역사가들이 해당 사건의 연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시아의 역사가로는 역시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 국가의 흥망, 다야한 사회 제도의 특성과 변화, 개인의 생애, 전설과 신화에서 한 왕조에 이르는 수천년 중국 사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중국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로 종이가 없었음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사실을 중시한 사마천은 사기를 쓰며 무려 103종의 책을 참고 했다. 역시 죽간이 없었기에 최초의 사기는 죽간에 남았다. 본기 12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열전70권 총 130권이다. 본기는 황제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의 행적과 업적을, 표는 중요한 역사적 서술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서는 도덕, 음악, 군사, 천문, 치수 등 고대 중국 문화나 제도의 특징과 변화를,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왕과 제후를 비롯하여 황제까진 아니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친 권세가에 대해, 열전은 지식인, 정치인, 강도, 자객, 광대까지 독특한 개인의 생애를 다뤘다. 

 사마천의 이런 역사서술체계는 기전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까지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한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사마천의 사기도 약점은 많다. 우선 주변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비판한 공자의 춘추필법을 따라 부정확하고 단편적이며 편향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에 기록된 사실이 빈약한 열전에서는 문학적 상상력도 많이 발휘한다. 물론 이 부분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슬람 세계엔 그 유명한 이븐 할둔이 있다. 그는 역사 서설을 썼는데 그의 특이한 점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7개의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역사서설은 과학과 역사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책 뒷부분에 언급하는 총균쇠 및 사피엔스와 닮았다. 이븐할둔은 뜬금없게도 역사서설 중반중반에 과도할 정도로 신에 대한 찬양을 하는데 유시민은 당시 종교적 압박이 강했던 이슬람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것을 파악한다. 

 유럽으로 돌아가 랑케가 등장한다. 그의 시대는 산업과 과학의 시대로 랑케는 많은 학문들이 전문화하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태어나 자신의 전문분야에 전문역사학자로 일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보수적 성향으로 군주제를 옹호했기에 유럽의 여러 각종 문서와 왕실 도서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랑케는 과학기술문명은 진보하나 인간의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역사철학을 보였는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니 신학과 군주정이 옹호되었다. 랑케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큰 사고를 불러왔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역사가 객관적 학문이라는 생각을 불러와 많은 역사가들을 정치적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도 있었다. 

 유시민은 맑스도 역사가로 본다. 그의 공산당 선언이 역사의 주체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있었던 노예, 농노, 노동자, 농민 등의 피지배계급을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만드는 주역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유물사관도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만 해도 물질적인 것 보다는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질서나 이성, 법칙에 대한 관심이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맑스는 물질이 먼저이고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나중이라는 유물론을 주장했다. 

 조선의 역사가도 언급된다. 우리의 역사가로 유시민은 박은식과 신채로 백낙준을 거론한다. 박은식은 조선망국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와 이순신전, 안중근전을 남겼다. 박은식은 다소 옛 인물로 개명유학자이기에 한문이 가장 편해서인지 순한문체로 저술했다. 때문에 초기엔 보수적인 시각도 남아있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훗날 쓰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한다. 신채호는 고대사 검증에 주력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남겼는데 사실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다루고 싶었으나 무장투쟁운동에 주력하고 체포되고 옥사하게 되면서 단군부터 백제의 패망까지만을 다루게 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주터전이 한반도로 국한된것이 아니라 만주나 요동까지였음을 밝혀냈다. 

 에드워드 카는 랑케와는 다르게 정확성은 역사가의 미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사실은 이야기로 남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다. 역사가가 그 사실을 남기고 다루어야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랑케는 객관적 역사 서술을 위해 문헌을 무척 중시했지만 사실 이 문헌조차 어떤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만을 주목해 기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하다. 크로체는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로고 선언했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평가하는 것이 된다.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주고 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반대로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기도 한다. 즉,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19세기까지 역사가들은 민족이나 가문, 왕조, 사회, 지역,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서술했다. 하지만 토인비가 등장하면서 역사는 문명단위로 승격된다. 토인비는 유럽은 역사가 모두 연결되어 대영제국을 제외한다면 개체로 연구할만한 국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슈팽글러의 영향을 받았는데 슈팽글러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한물간 천동설과 동격취급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역사도 중시하는 자신의 역사관을 지동설로 취급하고 스스로를 역사학의 코페르니쿠스로 칭하기도 했다. 토인비는 그의 관점을 받아들여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역사를 서술했다. 토인비는 20개가 넘는 당대 문명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였고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았다. 그는 인종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였고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정과 실패로 흥망성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토인비가 말하는 도전은 다섯 가지로 척박한 땅이 주는 도전, 새로운 땅이 주는 도전,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침공),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사회의 진보는 이런 도전에 대해 소수의 창조적 천재에 의해 이뤄진다. 이들이 이런 도전을 창조적이고 성공적으로 다루면 비창조적 다수가 결국 이를 따르게 되고 사회는 성공한다. 이를 미메시스라고 한다. 하지만 창조적 소수자는 언젠간 그 창조력을 잃는다. 그러면 비창조적 다수는 기존의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것이 네메시스다. 

 창조적 소수자는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망하는데 일시적인 자아의 우상화, 일시적인 제도의 우상화, 일시적 기술의 우상화가 그것이다. 용어는 다르지만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새로운 도전에 적응못해 나타나는 문제다. 토인비의 패러다임에서는 세 집단이 있는데 창조적 소수자와 내적 프롤레타리아트,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다. 내적인 집단 내부의 노예, 농노, 천민, 노동자등 피지배 계급이며 외적은 문명 외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집단으로 야만인이다. 이 세 집단의 상호관계가 문명의 향배를 좌우한다. 

 최근엔 역사서술의 하나로 인류사가 등장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첫 등장에서 가장 최근을 다루는 인류사가 역사서술의 단위로 대두한 것이다. 인류사는 실제 과학과 역사를 전면 통합한다. 그래서 총균쇠나 하라리의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및 그외 여러 학자가 다루는 최근의 인류사 책을 보면 이것이 과학서적인지 인류학 서적인지 헷갈리는 이유다. 총균쇠를 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토인비와는 다르게 환경을 인류사에 주 원인으로 다뤘다. 인간의 차이 및 사회 문화와는 크게 무관하게 인류사는 환경이 좌우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륙마다 가축, 작물의 분포가 큰 차이를 보이고 확산과 이동의 속도가 대륙마다 지형, 기후에 의해 크게 다르며, 대륙마다 고립도가 다르고, 대륙마다 인구과 민족 분포가 다름을 제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4가지는 객관적 증명이 가능한 것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더 나아가 인류사는 사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생물학적 사건이라 말한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혁명인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났는데 다른 모든 혁명을 사실상 촉발한 첫번째 혁명인 인지혁명이 인간 뇌의 생물학적 변화로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과학혁명이 인류사의 마지막 혁명이 될 것으로 파악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에서 벗어나 호모 데우스의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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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6-28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방대한 내용을 기준점을 잡아 정리하는 능력 참 부럽습니다.

닷슈 2022-06-29 16: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꾸 정리만 하고 제 생각이 잘 안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2-06-29 18:38   좋아요 1 | URL
네엣? 닷슈님 생각이 안 들어가다니요ㅠㅠ 너무 잘 쓰시는데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시다니... 또 부러워하면서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