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도전 - 순수 이성에서 예언자적 죽음으로의 여정
문철영 지음 / 새문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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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영 교수님의 책을 읽었다. 대학에서 배울때, 심리학과 역사학의 접목이 필요함을 말씀하셨는데, 정도전을 심리학을 동원하여 해석해 내고 있다. 그때도 정도전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2일만에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고뇌하는 정도전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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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쏘다 - 김상옥 이야기 역사인물도서관 3
이성아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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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감동적이어서 잠자는 것을 잊고 책을 읽었다. 의열단의 뜨거운 피가 느껴지는 책이었다. 일제에게 통쾌하게 총을 쏘는 장면에서는, 마치 내가 총을 잡고 방아쇠를 당기는 느낌이었다. 이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갈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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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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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바로알고, 내일을 고민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을 읽고-

  

 

한홍구 교수를 현대사학자이자, 현재사학자라고 한다. 글쎄? 내가 대학교 학부시절, 대학원에 진학하려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모든 응시자가 다들 합격했는데, 유독 한명만 탈락했다고 한다. 왜? 떨어졌을까? 교수님이 ‘자네, 어느 시대를 연구하고 싶은가?’라고 묻자, ‘네, 저는 1970년대를 연구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교수님은 ‘자네는 정치학과에 가게’라는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한세대가 지나야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상식’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현재사학자’라고 자신을 당당히 밝히는 한홍구 교수! ‘현재’는 누구나 다들 알고 있고, 그렇기에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믿고 있다. 이러한 ‘상식’과 선입관이 물론 나에게도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숲속에 있기에 숲을 보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리듯이, 오늘을 살고 있기에 자신이 역사의 어느 부분에 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을 바로 알기 위해서, 현대사를 바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을 살아가면서 느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1.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더 무지한 우리.

푸른 눈의 현각 스님이 불교에 빠져들게 되었던 계기가 바로,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하버드를 다니던 학생을 불교로 입문하게 만든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는 “현재를 아는가?” 그리고 지금 이순간과 가장 가까운 “1970년대를 아는가?”라는 질문에 선듯 대답하기 힘들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처음 가르치던 때, 현대사는 시험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선입관과 현대사는 시사일 뿐, 역사가 아니기에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착각을 했다. 그러나, 현대사에 대한 맥락을 모르고, 단순한 사건만을 알았기에 제대로 수업을 진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1970년대에 관한 심도 있는 서술한 책을 만나기는 더욱 힘들었다. 이러한 갈증을 이 책은 깔끔히 해소해 주었다. 특히 간혹 신문에 간단히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 사건’,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사건’, ‘YH사건’ 등을 한홍구 교수는 특유의 차분하고 은유적이고 쉬운 어투로 쏟아내고 있다. 각각의 개별적인 사건으로 이들 사건을 알고 있었던 나에게 이들 사건이 하나의 맥락속에서 연결고리를 가지고 역사의 거대한 흐름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 학문을 위한 학문연구를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왔던 나에게는, 이처럼 쉬운 표현과 위트 있는 어투의 책은 무척이나 신선했다. 그뿐이니라, 과거사 진상 조사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다양한 정부의 자료를 섭렵하면서 깊이 있고 신문에서도 읽지 못한 사건의 이면을 읽을 때면, 마치 첩보영화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김형욱의 실종과 죽음’에 관해서는 그동안 신문지상에서 제기된, 다양한 설들보다도 한걸음 더 진실에 다가간 서술을 해주었기에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이밖에도 동일방직 노동조합과 반도상사 노동조합, 도시 산업 선교회를 탄압하기 위해서 정부나 중앙정보부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는 한홍구 교수 책을 읽은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통일벼의 빛과 허상, <신동아>에 실린 “1960년대 전반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 마을’을 떠났는데 왜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라는 글을 인용하면서 새마을 운동의 신기루를 설명할 때는 닫혔던 가슴이 확 열리는 느낌이었다. 농촌에서 자랐기에 농촌이 날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피부로 체험했는데, 초등학교에서는 “오늘날 처럼 농촌이 잘살게 된 이유는?”이라는 시험문제에, 정답은 “새마을 운동”이었다. 현실이 괴로운데 현실이 행복하다는 전제하에서 답을 물어보는 문제를 나는 풀수가 없었다. 이러한 진실들을 다른 책에서 얻기란 참으로 힘들었기에 이 책의 가치가 더욱 커 보이다.

 

 

2. 새롭게 알게 된, 너무도 어두운 그림자들

몇해전, 연수를 갔다가 일반사회 교사 출신의 교장이 역사과 선생님을 상대로 교육과정 연수를 진행했던 때가 기억난다. 역사공부를 자신은 TV드라마 ‘무인시대’를 보면서 한다고 자랑하더니, “우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많이 가르치고, 부끄러운 것은 안가르치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관련 서술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역사를 배우는 여러 목적이 있다. 그 중에서 한가지가 역사적 교훈을 얻는 것이다. 과거의 슬픈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것! 그것을 위해서 올바른 역사교육이 절실한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어쩌면 너무도 부끄럽고, 슬픈 역사이기에 숨기고 싶은 기억들을 정면으로 서술하고 있다. 군사독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군사독재에 저항한 역사는 민주화를 성취하기 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기지촌 정화운동’, ‘베트남 파병이 남긴 것’이 바로 우리가 감추고 싶은 역사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슬픈 역사는 ‘기지촌 정화운동’이다. 군대에서 정신교육 시간에, “나라의 남자가 멍청하면 그 나라의 여자가 고생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나라의 남자가 멍청해서일까? 광복이된 조국에서 많은 여성들이 ‘양공주’로 불리우며 살아왔다. 국가가 이를 방조내지 조장했다. 한홍구 교수는 “양공주에 기생한 국가 포주 제도”라고 서술했다.

 

“1964년 한국의 외화수입이 1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근10퍼센트인 970만 달러에 달했다. 한국 정부는 주말 외출을 나온 미군들이 오키나와나 일본으로 가 성매매하는 것을 국내에서 흡수하기 위해 기지촌 여성들에게 영어와 에티켓을 교육하려 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들을 “산업전사”, “안보전사”라는 명칭을 붙여 예절교육까지 시켰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군들이 훈련하는 사이사이에 욕구를 풀 수 있도록 훈련 중에도 이런 일을 했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까? 한 시민단체의 설문조사 결과 고등학생의 47%가 돈 10억 원을 주면 죄를 짓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는 것은 괜찮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상하이에서 어느 잘사는 집 청년이 나이 많아 보이는 농공의 뺨을 때리고 매값으로 돈을 던져주는 장면을 본 사람의 이야기를 했더니, 한학생이 “나도 천만원 주면 맞을 텐데....”라는 농담 섞인 말을 했다. 나는 긴 한숨이 나왔다. 돈이면 무엇이던지 다할 수 있어도 될까? 지조 있는 가난한 처녀가 부유한 창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옛말인가?

외화를 벌기 위해서 이땅의 가난한 처녀들이 “양공주”로 생활하는 것을 방조하고, “산업전사”, “안보전사”라는 명칭을 붙여준, 당시의 정부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 우리사회에 넘쳐나는 도덕불감증과 황금만능주의에 환멸이 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자되세요”라는 말을 외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고사성어가 현실로 다가오는 요즘의 우리사회를 반성해봐야 하지 않을까? 경제 성장만하면, 돈만 벌면, 독재를 해도 되고, 비도덕적인 일을 해도 된다는 생각이 혹시 이 시기부터 싹튼 것은 아닐까?

 

 

3. 1970년대, 오늘이 만들어지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시민의 승리로 끝났다. 그후, 국민 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이후, 그는 나폴레옹 3세로서 황제에 즉위한다. 일련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이후, 나폴레옹 1세의 통치시대를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펼쳐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기를 바로 보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박근혜 스스로 아버지에게서 정치철학을 배웠다고 말하기 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이러한 지금의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냉철하고도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 유신이라는 괴물은 가장 큰 머리 하나만 잘려나갔을 뿐이다. 10.26사건으로 그는 갔지만, 그의 잔당들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김재규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지만, 유신의 잔당들이 벌인 광주에서의 유혈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권력 서열상 1위 박정희와 2위 차지철, 3위 김재규는 죽었지만, 4위 전두환과 5위 노태우가 살아 남아있었다. 그들이 유신이라는 괴물의 다른 머리를 내밀며, 다른 모습으로 다시 우리에게 나타났다. 유신이라는 괴물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히드라’ 처럼 다른 얼굴로 아직도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민주화 정권이 들어서고 10년이 흘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는 강고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박정희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묻고 싶다. 이책에서 한홍구 교수는 ‘신유신의 밤’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고민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한홍구 교수의 고민을 나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소극으로 두 번 되풀이된다”는 말처럼,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지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과연 어리석은 백성이 아닌지 묻고 싶다.

 

 

대학시절,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은면, 나는 자신있게 “역사”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상대방은 한심하다는 듯이 “뭘먹고 살려고 역사과에 갔어!”라고 반문한다. 그들에 눈에는 대학은 취업훈련소로 보였나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본래 가치보다는 돈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돈이 된다면 그가 했던 잘못이 용서되고 미화되기도 한다. 그런데, 돈이 되지 않는 그 “역사”를 가지고 전쟁이 일어났다. 동아시아 3국의 역사전쟁은 물론, 한국 내부에서 시작된 “교과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황금만능의 시대”에 돈이 되지 않는 역사에 이렇게 사생결단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본원적인 질문에 우리가 답하려면, 멀수록 돌아가라는 겪언 처럼, 과거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홍구 교수의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은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필독서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된 역사를 만들고 싶다면, 바로 기록하고, 바로 기억하자!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이고,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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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 - 맥락이 보이는 한국사 60장면
남경태 지음 / 산천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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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식 역사 읽기의 이해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고

 

남경태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종횡무진 세계사』와 『종횡무진 동양사』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세계사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 세계사 대중 서적들을 뒤적이다 발견한 이책들은 나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물론, 역사전공자가 아니기에 일정한 한계는 있었으나, 상당한 내공의 역사서적을 집필했다는 것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남경태의 또 다른 책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게 되었다 .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에 다시 한번 빠져보았다.

 

1. 냉철한 비판과 다른 시선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의 한가지 특징은, 너무도 냉철한 비판적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한국의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서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친일 독재의 시선으로 한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은 예외이다.)

남경태의 이러한 냉혹한 시선은 ‘진경시대’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혹독하다.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조선이 택할 길은 말뿐인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이었다. 한때, ‘북벌론’은 마치 자주적인 운동인양 배워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소중화 의식’이 있었기에 우리 산천에 대해서 재발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진경시대’가 출현하였다. 이 시대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남경태는 이를 ‘우물안의 개구리’로 표현한다. 비록 진경산수화로 대표되는 위대한 문화 유산이 탄생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지만, 냉혹하게 본다면 ‘진경시대’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자신을 기형적으로 자각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남경태는 ‘권지국사’라는 표현도 냉혹하게 지적한다. 중국이라는 강국에 인접했기에 외교상에 중국의 책봉을 받아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고려와 조선의 초기 지배층들의 모습을 냉혹하게 ‘자주’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어찌보면, 자주적인 국가로서 너무도 치욕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러한 남경태의 냉혹한 시선은 때로는 독자를 불편하게도 한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사랑으로만 보아서 일까.....

 

2. 남경태식의 한국사 맥락

이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남경태 식의 한국사를 바라보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대’, ‘중화사상’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할 수 있다.

남경태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삼국통일을 ‘굴욕적인 삼국통일’로 평가한다. 단순히 ‘불완전한 삼국 통일’을 넘어 ‘굴욕적인 삼국통일’이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신라가 중국의 한 지방과 같은 입장이었고, 스스로도 그런 관계를 원했다는 점, 나아가 당시 동양의 국제 질서가 그랬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중국과 독립적이고 상당 부분 자주적인 것으로 보는 ‘현대적’관점은 과거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오히려 감추고 있는 것이다. (중략)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1천 300년간 한반도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게 아니라 중국이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중국 중심의 고대적 국제질서를 확립한 사건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삼국통일에 대한 남경태식의 새로운 관점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점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역사학계의 견해와는 달리, 사대주의 역사관으로 평가하며, ‘조선’과 ‘화령’이라는 국명중에서 ‘조선’이 근세 조선의 국명으로 낙점된 것을 지적하며, 조선왕조의 국호 조차도 사대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서양인이 조선에 오지 않은 이유가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굳이 조선에 까지 올 필요가 없었고, 조선도 스스로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굳이 별도로 서양인과 접촉할 통로를 열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다. 일본을 ‘왜’로 낮춰부른 것도 중국을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사대주의를 떨쳐 버리고 일어선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이다.

이러한 한국사를 보는 남경태식의 관점이 한편으로는 새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에 대한 지나친 비약적 폄하로 읽혀지기도 한다. 내치에서는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군사와 외교는 중국에 맡겼다는 남경태의 비약적인 지적은 동의할 수 없다. 분명, 고려는 ‘내제외왕체체’라 하여, 안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밖으로 중국과 외교를 할 때만 왕을 칭하였다. 그래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황상’, ‘황도’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고려의 왕의 곤룡포 색깔이 황제의 색인 ‘황색’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또한, 조선도 대외 평화를 위한 목적으로 명에 사대를 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면 실력으로 맞서려고 까지 했다. 단지 조선 후기에 와서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을 부모의 나라로 받드는 모습들이 나왔을 뿐이다.

 

3. 옥의 티

남경태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출신의 저술가가 아니다. 더욱이 이책은 저술된지 꽤 오래된 책이다. 그러기에 한국사 교과서와 다른 서술, 혹은 최근의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류를 범한 흔적이 있다.

첫째, ‘중국의 영향을 일직 받은 고조선은 곧 청동기 문화로 접어들었’다는 표현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표현으로 읽혀진다. 특히 최근의 중국 고고학계에서 요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과는 다른 별개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를 고조선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식 동검과 한국의 세형동검이 제작방식이 다르고 별개의 청동기 문화라는 것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분명이 적혀있다.

둘째, 대한제국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제국이라고 지적한 것은 어이가 없다. 대한제국은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셋째, 선덕여왕이 처녀의 몸이었으니 아들은 커녕 딸도 있을리 없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 - 선덕여왕 기사에 “이름은 덕만이다. ……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선덕여왕은 결혼을 하였다.

넷째, 발해가 당이나 일본과는 교류하였는데, 건국한 뒤 100년 동안이나 통일신라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국사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를 무시한 서술이다. 교류의 증거가 많은데, 그중에서 ‘신라도’라는 길이 있을 정도로 신라와 발해는 교류하였다. 이는 한국사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 고려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서술도 학계와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다섯째, 고구려와 백제를 제거하고 200여 년 동안 한반도의 단독 정권을 통일신라가 유지했다는 서술도 오류이다. 통일신라 북쪽 즉, 대동강 북쪽에는 엄연히 발해가 있었다.

여섯째, 이승만 정권에서 추진한, 농지개혁의 결과 ‘지주-소작 관계가 그대로 온존’ 되었다는 서술도 한국사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농지개혁이 되었고, 그래서 농민들이 북한에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며, 농지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을 지주가 6.25 전쟁 중에 헐값에 팔아버렸고, 이 때문에 지주가 산업자본화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사 전공자에게는 상식이다.

이책이 보다 더 좋은 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오류는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더욱이 한국의 독자가 읽어야 하니까....

 

역사에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고, 이러한 관점들을 통해서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한다. 이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대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교과서에서만 제시되던 한가지 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불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면, 한번쯤은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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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지음, 류한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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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세계사를 위한 또하나의 고민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고-

 

세계사 수업을 준비할 때면 언제나 ‘우리의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유럽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역시 유럽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에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받아들었을 때, 약 6백 쪽에 달하는 양장본에 압도되어 과연 제대로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기우였다. 학술 서적 같기 보다는 한편의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덧 나는 이 책에 빠져들었고 첫장을 펼쳐든지 5일만에 책을 손에서 내려 놓았다. 그리고 한동안 나의 머릿속은 이슬람으로 가득 찼다. 진정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내러티브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음을 깨닫고 혼동과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트였다는 희열을 느꼈다. 세계사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확신에 차있는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1. 중간세계 - 자신을 타자화한 ‘용어’에서 탈피하다.

타밈 안사리는 책의 첫장에 ‘중간 세계’라고 제목을 붙였다. 상당히 낮선 지역명에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사람을 사귈때에는 그 사람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야 하듯이, 역사를 서술할 때는 그에 걸맞는 정확한 용어를 선택해야한다. 우리는 너무도 ‘중동’, ‘극동’ 등의 유럽을 중심으로 한 용어에 익숙해져있었다. 그리고 이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용하고 있다. 타밈 안사리는 이러한 유럽중심의 용어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확한 용어의 사용에서 출발하여 타밈 안사리는 역사의 또 다른 페이지였지만, ‘기타사’ 혹은 ‘주변사’로 취급해오던 이슬람의 역사를 당당히 세계사의 중심에 놓고 서술하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곳, 그러나 사막으로 둘러 쌓인 이곳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무지했다. 중간세계를 무시했다기 보다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너무나도 무지했던 이슬람의 역사를 타밈 안사리는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역동적인 이슬람의 역사에 푹 빠져 들어갔다.

2. 오리엔탈리즘으로 부터의 해방

서구의 편견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에 우리는 우리를 규정짓고 이웃국가들을 오리엔탈리즘의 창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이 있었다. ‘왜? 동양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답변하려 했고, 그리고 답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서양인들은 ‘동양은 서양의 도움이 없이는 근대로 진입하지 못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여 그들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양인은 ‘우리는 너희의 도움이 없었어도 자본주의의 싹을 틔웠을 거야!’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어니스트 볼크먼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에서 이슬람의 학문은 칼리프나 술탄을 위해서만 존재했고 그들에게 독점되었기에 지식확산이 일어나지 못했으며, 서구와 같은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니스트 볼크먼의 이러한 주장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나는 타밈 안사리에게 보기 좋게 한방을 얻어 맞았다. 이슬람의 학문이 한사람에 의해서 독점되고 그를 위해서 존재했다는 것은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그렇다면 왜? 동양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타밈 안사리는 이렇게 말한다. 증기기관은 영국에서 보다 일찍 이슬람에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이를 양을 통째로 구울 때 사용했을 뿐, 이를 산업혁명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산업혁명 직전 영국보다 좋은 직조기계를 갖고 있었던 중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의 맥락 속에 발명품이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그 발명이 사회의 혁신을 촉진한다. 무슬림들은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이룬 반면, 유럽인들은 종교개혁 후, 오랜 세월 무너져 있던 사회 질서가 회복되기 시작할 때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이루었다. 이것이 서양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했고, 동양은 그러하지 못한 이유였다.

3. 또 다른 아프리카 - 중간세계

아프리카의 지도를 보면, 국경선이 일직선으로 그어져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란다. 바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지도에다 선을 그어 아프리카를 나누어 가졌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사의 불행을 중간세계에서도 보았다. 프랑스는 자신의 신탁 통치령을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나눴으며, 영국은 메카 셰이크의 둘째 아들에게는 이라크를, 첫째 아들에게는 요르단을 주었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의 장난질의 극치는 오늘날도 진행되는 팔레스타인 문제일 것이다. 현대 중간세계의 모순은 이미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그 씨앗이 뿌려졌다. 서구 국가들이 중간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테러리스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서구 국가가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인류 문명의 시작이며, 세계 4대 종교 중의 하나인 ‘이슬람’과 ‘기독교’가 발생한 이곳이 이제는 세계인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복잡한 지역이 된 것은 너무도 안타깝다. 아프리카의 부족간 갈등과 분쟁, 그리고 저개발 상태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듯이, 이슬람의 문제도 같은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너무도 씁쓸했다.

4. ‘자스민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서구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우리는 역사는 한명이 다스리는 전제군정에서 현대 민주정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증거 중에 하나가 지금 중간세계에 불고 있는 ‘자스민 혁명’이다. 나 또한 이러한 서구의 내러티브를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슬람도 민주주의의 빛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의 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하지 못했다.

이슬람은 종교이며 다른 종교들처럼 윤리와 도덕, 신, 우주, 필멸의 운명에 대한 독특한 믿음과 수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동시에 사회적인 프로젝트여서, 정치와 경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이자 민법과 형법의 완전한 체계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슬람인들은 독재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부활을 꿈꿀지도 모른다. 크리스트교가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면, 이슬람은 이슬람 공동체의 구현을 목표로 하기에 그들이 꿈꾸는 것은 우리가 그리는 현대사회와는 다를 수 있다. ‘문명의 충돌’,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을 너무도 경솔하게 사용하는 서구인들에게 너희의 관점이 틀리수도 있음을 이 책을 말하고 있다.

5.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가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이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승리했으니 이제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덤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에서 타밈 안사리는 고개를 가로 젖고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무슬림은 소련을 물리쳤다. 두 초강대국과의 대결에서 하나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이제 나머지 하나만 남았다. 이 급진파 무슬림들의 눈에는 역사는 이제 겨우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국을 궁지에 몰아 넣고 있지 않은가? 타밈 안사리는 2001년 9월 11일, 두 개의 세계사가 충돌했다면서 끝을 맺고 있다. 서로 다른 내러티브를 갖고 있는 세계사가 충돌한 것이다. 서로 대화가 되고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마주보아야한다. 그리고 같은 주제를 놓고 의견을 말해야한다. 그러나 저자 후기에서 말하듯이 서구의 세계사와 이슬람의 세계사는 너무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들의 말만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개의 세계사가 충돌한 현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저자는 해답을 내놓지 않고 끝을 맺고 있다. 그 해답을 찾는 것을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 놓았다.

대학시절 ‘무하마드 깐수’라는 교수님의 ‘아시아사’ 수강신청을 했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방학때 신문을 보고 나는 나의 눈을 의심했다. 한국말에 서툴렀던 그가 간첩 ‘정수일’이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A 폭격기’라는 별명 때문에 그의 강의를 수강 신청했던 나는 허탈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나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런데, 임용고사 준비에 힘들게 지내던 나는 그가 전향서를 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재판을 받으면서도 컴퓨터 속에 담겨진 자료만이라도 출판하게 해달라며, 이것이 시대의 소명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순간! 그는 왜? 동서 문화 교류의 역사를 시대의 소명이라고 하며, 남과 북의 이념보다도 ‘동서 문화 교류사’라는 학문에 강한 애착을 느꼈을까? 나는 정수일 교수의 말에서 이 책에서 던져 놓은 해답을 찾고자한다. 정수일 교수는 세계사는 ‘문명의 충돌’의 역사가 아니며, 교류의 역사라 주장한다. 고대 스키타이인들의 교류에서부터 현대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서로 교류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교류가 있을 때, 문명은 사멸하지 않고 발전한다. 정수일 교수는 이것이 자신의 시대적 소명이라 말했다.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관점에서 탈피해서, 서로 교류하며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세계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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