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계 교수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야기 - 철학자가 쉽게 풀어쓴 교양인을 위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강영계 지음 / 해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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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를 공부하면 세상의 진리를 다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사를 탐구해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세상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 철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철학은 인간의 이상을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세상의 진리를 알려줄 것 같았다. 그러나 철학은 철학하라 나에게 말하고는 진리를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심리학자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철학사에서도 중요시 여긴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의 근대의 세계관을 프로이트는 과감하게 전폭시켰다. 즉, 프로이트는 무의식, 은폐된 충동이 정신과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그의 주장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관념에 강력한 한방을 날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의 진리를 알기 이전에, 인간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꺼내들었다.

 

1. 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

  고전은 오랜 시간을 견뎌낸 책이라 한다. 오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고전의 지혜는 유효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전이 다시 반복되어 읽히는 이유를 체감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서양지성의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도 그리스 로마신화속의 오이디프스, 엘락트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원용해서 우리의 무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서양의 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적어 놓은 플라톤의 대화편은 서양고전 중의 고전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교육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프로이드의 자유연상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서양 고대! 지금으로 부터 까마득하게 먼 시기의 산파술이, 근대의 자유연상법과 유사점이 있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시대가 변하니, 지식도 새로운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어쩌면 고전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반나절에 애플의 모든 기술을 걸겠다."라는 말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 억압된 욕망은 정신병을 유발한다.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그가 지나치게 성문제에 집착한다고 비판을 하며 그를 떠났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대한 그러한 비판 자체가 인간에게 성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분석을 할때 자신의 내면의 은말한 것을 말하도록 유도하는 의사에게 환자가 적개감을 갖기도 하는 것과 유사한 원리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성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성은 웃음의 소재로, 소위 마초를 자랑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로 사용된다. '암호속의 여인들'이라는 영화에서 KGB 요원을 교육하면서 미국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아무도 정답을 알아 맞히지 못했다. 그때, 정답은 '쎅스'였다. 성이 상업화되고,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는 성 때문에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성을 너무도 억압당하며, 성은 우회를 찾는다. 이책의 늑대소년의 경우, 자위행위를 억압당하면서 사디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성적욕구가 다빈치처럼 잘 승화된다면, 엄청난 업적들을 쏟아 낼 수 있지만, 이것이 잘못된 우회로를 찾는다면, 정신병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적절한 자위행위는 정신건강상 좋다는 말이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욕구를 억누르게 하지말고, 적절히 이를 해소하도록 해야한다는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소가 될 수 없고, 해소 되어서는 안되는 욕구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책에나오는 어는 장모는 심각한 발작을 보인다. 그녀의 발작원인은 사위를 사랑하는 욕구가 억압되었고, 이것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욕구에 충실해야하는가? 아니면 도덕과 윤리가 허락하지 않기에 억압해야할까? 철학자 강신주라면 어떻게 조언을 할까? 프로이트의 치료법대로 사위를 사랑하는 장모의 욕망을 직면하는 것만으로 발작이 사라질까? 이러한 고민을 나에게 토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무어라 조언해야할까?

 

3. 종교는 강박노이로제의 환상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구강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으면서도 고통을 참고 연구에 매진한다. 그를 잡으러 온 나치요원들도 인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휴지와 같은 모습의 프로이트를 체포하기를 포기한다. 그러고는 "저 노인이 그렇게 도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란 말인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궁형의 치욕을 견뎌내면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이 생각날 정도로 프로이트는 영국으로 망명해서 구강암과 싸우며 불굴의 신념으로 연구에 매진한다. 이것이 그로서는 나치에 대항하는 최후의 저항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후기 저작들은 정신분석학을 문화를 읽는 수준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종교, 철학, 예술을 환상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그가 환상의 산물이라 무시했던 철학!! 그러나 철학사에 프로이트의 이름이 당당히 들어가 있다. 프로이트가가 무시한 철학은 철학사를 저술하면서 그를 소환한 것이다.

  철학과 함께 환상의 산물로 종교를 꼽았다. 프로이트는 종교는강박 노이로제의 환상이라 주장하며, 종교에 대한 해부에 들어간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종교는 "엄청난 환상의 세계를 대변하는 세계관"이라고 규정한다. 유아기에 과대평가된 아버지상을 되살려 그것을 현재안에서 신성으로 고양시킨다. 신은 아버지이다. 인간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가족의 윤리를 사회의 윤리로 확장시킨 유교의 모습이 어쩌면 인류 공통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재미있는 것은 청소년들의 경우,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되면 종교적 신앙도 상실되고 만다. 유아기에 자신을 돌봐준, 힘이센 아버지를 어른이 되어서도 갈구하고 그러면서 신을 창조한 인간! 그렇다면 신앙심이 높은 가족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높고, 신앙심이 낮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낮을까?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성립할까?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규정했다. 살불살조라는 임제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 종교를 극복한 프로이트!! 그러했기에 정신분석학을 정립할 수 있었지 않을까?

 

 

4. 자녀 양육에 참고할 지식들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부모가 자신의 똥을 닦아 주는 것을 허락하고, 자신의 똥 냄새가 좋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든데, 사실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똥은 아이들이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줄 수 있는 최초의 선물이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초의 선물을 부모에게 준 셈이다.

  오랫동안 별거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있다. 남편을 용서하지 않고, 이혼도 아닌, 그렇다고 정상적인 결혼생활도 하지 않고, 호적상의 결혼만을 유지하면서 별거를 하고 있는 가정이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사례를 읽으며,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용서하지 못해서 별거를 하고 있는 가정이 너무도 우려스러워졌다. 다빈치는 사생아다. 어머니에 의해서 길러지다가, 생모를 떠나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서 자라게 된다. 이러한 다빈치는 동성애자가 된다. 다빈치는 제자를 뽑을 때, 예술적 재능을 중시하기 보다는 외모를 중시여겼다는 사실은 나에게 쓴 웃음을 짓게했다.프로이트는 남자 노예가 남자아이 교육을 담당할 경우, 동성애로 기울 경향이 증가한다고 한다. 성충동과 성적 자극 및 그것들을 바탕으로 삼은 성적 대상의 선택에 있어서 부모의 상냥함과 권위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춘기의 청소년은 후에 히스테리 노이로제 증세를 보일 확률이 높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고 있다. 정상적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면 그 가정의 자녀는 정상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아이가 부모의 성행위를 목격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팟캐스트 '불금쑈'에 어느 성 전문가가 출연하여 너무 어릴 경우 부모의 성행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대답을 했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부모의 성행위를 자녀가 목격하면 그것은 커다란 충격으로 아이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자녀를 괴롭히게 된다. '불금쑈'의 성 전문가의 주장과 상반되는 내용이다. 그럼, 아이가 부모의 성행위 장면을 목격한 경우,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그것을 제시해주지 않고 있다. 성행위를 자녀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해결책인 것 같다.

 

5. 악마는 천사의 얼굴로 우리 주변에 있다.

  강자에게 아부하며 비굴하게 구는 사람이, 높은 권좌에 올라서는 잔인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전형적인 간신의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도 흔하게 본다. 가학적인 사디즘과 피학적인 마조히즘은 동전의 양면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조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강박 노이로제가 있는 사라은 극단에 치우친다. 지나치게 친절한자는 권력을 잡으면 폭군으로 군림할 수 있다. 지나치게 친절한 자를 조심하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평범한 모습의 선량한 시민이고, 상냥한 아버지였다. 악마는 우리 곁에 천사의 탈을 쓰고 있다.

  프로이트는 대중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대중은 고유한 인격을 상실하고, 사고와 가정도 체면술사의 지시와 방향을 따르는 존재이다.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중사회의 모습에서 히틀러치하의 유대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프로이트는 히틀러 치하의 반유대주 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정신분석학의 방법으로 대중사회를 분석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대중을 정적 대중과 동적대중으로 나눴다. 정적 대중은 개성이 없는 부정적 모습의 대중이며, 동적대중은 주체적이고,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사고할 줄아는 대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동적 대중이 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오직 고독속에서 작업하는 개인만이 위대한 사유작업을 결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고차원적 대중은 개인의 속성을 보유한다고 밝히고 있다.  공자가 “군자는 화합하지만 같아지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지만 화합하지 않는다.(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고 말했다. 현명한 대중은 대중속의 일원이 되지만, 대중에 휩쓸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자가 되지 않는다. 현명한 대중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연대하고 권력에 투쟁한다.

  프로이트는 지도자의 힘을 공동체의 힘으로 대치시키는 것이 참다운 문화의 진보라 지적한다. 어느 절대 권력자를 추종하는 노예로 살기보다는, 촛불혁명에서 우리가 보여준 저력처럼, 우리 모두의 힘으로 지도자의 힘을 대치시키는 것이 깨어있는 시민들이 할 일이다. 그러하기에 독재정권하에서 참다운 문화 발전이 힘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나서야 영화산업이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 것도,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지도자, 아니 독재자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다보니, 시민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담아낼 수 없고, 그것이 문화의 침체로 남게된다. 수많은 영화들이 검열당하고 삭제되어었던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민주화의 열풍이 들어오면서, 자유로운 시민의 상상력이 나래를 펴면서 우리의 문화산업이 '한류'를 일으킬 수 있었다.

 

6. 철학자의 시선으로 프로이트를 바라보다.

  이 책을 쓴 강영계 교수는 철학자이다. 그렇다보니 철학적 관점이 이 책에 많이 투영되어 있다. 심리학을 철학과 과학에 다리를 걸친 학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철학자 강영계 교수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관련 책을 쓴다는 것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렇지만, 철학자 강영계 교수의 이 책은 철학적 색체가 확실히 많이 풍긴다. 심리학을 설명하면서 철학적 개념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고, 이것이 지나쳐서,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다. 에로스를 설명하면서 플라톤의 '향연'을 장황하게 서술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때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문도 눈에 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확립하게 정립하는 저술이다.(305쪽)"라는 글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비문이다. 아마도, "정교하게 정립하는 저술이다."의 오타가 아닐까?

 

 이 책 한권으로 프로이트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 저작들의 핵심내용을 알 수 있다. 만약 프로이트에 관해서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길 바라는 대중들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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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30 1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강나루 2017-12-30 12:42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munsun09 님도 건강하시노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세요

2018-01-30 0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0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파니샤드, 귓속말로 전하는 지혜 청소년 철학창고 2
이재숙 풀어씀 / 풀빛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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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종교의 나라라는 생각이 오버랩된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나무 그늘이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며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성자들의 나라! 이러한 이미지와는 달리 불교를 제외하고, 인도 철학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불교 이전의 인도인들의 사유 관렴을 알고 싶어 '우파니샤드'라는 책을 빼들었다. 인도철학! 그중에서도 우파니샤드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천하기에 너무 어려운 책을 읽기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파니샤드'를 풀어써 놓은 이재숙씨의 책을 보면서 도전할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철학의 신비를 탐험해보자.

 

1. 동양의 소피스트철학 우파니샤드

  소피스트들이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에게로 전환시켰듯이, 우파니샤드는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 존재에 관심을 갖는다.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인드라를 비롯한 신들은 철학을 위한 엑스트라일 뿐,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인간 존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우파니샤드는, 동양의 논어, 서양 플란톤의 대화편 처럼 대화로 이뤄져 있다. 세계의 철학사의 흐름과도 우파니샤드는 일치하고 있다.

  문답법을 통해서 상대방을 깨우치는 교수법을 흔히,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고한다. 산파술은 학습자가 이미 지식을 알고 있고, 그 지식이 발현되도록 교수자는 이를 돕는다는 학습원리이다. 고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교수법을 사용해서 교육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효과는 학습자에 따라서 달리 효과를 거두기도한다. 우파니샤드에 조물주가, '다'를 말하자, 쁘라쟈빠띠는 '자제하라(암미야뜨)로 알아들었으며, 인간은 "베풀라(닷따)"로 알아들었으며, 아수라는 "동정심을 가져라(다야드왐)로 알아들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해답을 그들 각각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질문에 해답이 있었다. 답은 자신의 가슴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2. 해탈하고 싶은가? 나는 원하지 않는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달라이라마를 만났을 때 일화이다. 김용옥 선생이 물었다. "해탈하고 싶은가?"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다"라는 말을 예상할 것이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는 "해탈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아야한다. 그러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이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사는 것이 났지, 해탈하여 더 이상 이승에 있지 못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에는 천상은 하늘이 아니라,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되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는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 천상의 즐거움 보다. 생노병사의 고통속에서 서로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오늘이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해탈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승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이 세상에서 그대가 행한 바대로 육신이 죽은 뒤에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자신이 이룰 일을 스스로 만들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신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알려고 노력하고 행하라는 말이다. 임재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이말을 나는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 맡기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3.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참모습을 보라"라고 말한다. 육신에 대한 집착이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몸뚱이와 연계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완전한 자유 속의 자신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과연 육신은 깨달음에 걸림돌일까? 흔히들 빠져드는 오류가, 육체보다 정신이 더 소중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 이 육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보시를 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이비 종교도 있다. 육신은 정신의 집이다. 집이 없으면, 정신은 머물곳도 쉴곳도 없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어느 것이 덜 소중한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위안이되며, 서로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상생의 관계이다. 자신의 육체를 괴롭힌다고 해서, 깨달음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하는 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없음을 이미 설파하셨다. 공자님도 문질빈빈(文質彬彬) 이라 했다.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미가 서로 잘 어울려야한다는 말이다. 정신과 육체도 서로 잘 어울려야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육체가 괴로운데,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겠는가? 아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3. 이 세상은 환영이니, 멋데로 살아도 될까?

  우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을 접했을 때, 혹시 우파니샤드가 허무주의에 흐른 철학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은 환영(마야)이니 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살아라. 단! 집착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파니샤든는 허무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만 빠져 있는 자는 그 보다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우파니샤드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 서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라라고 외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극단에 서지 않고 중용을 강조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우파니샤드의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야할 것이다.

 

4. 인도의 종교관은 일신관일까? 다신관일까? 범재신관일까?

  인도의 종교하면, 브라만교가 인도의 토착종교와 결합해서 새롭게 탄생한, 힌두교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는 다신교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유일한 실재인 근원 존재(브라흐만)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하면, 일신관이고, 아바타로 나타나는 다른 모습의 존재 모두를 신이라 부르기 때문에 다신관이라 할 수도 있으며, 근원 존재가 만물 하나하나에 존재하므로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범재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우주의 순항법칙이기도한 자연의 여러가지 힘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신은 하나일 수도 있으며, 셋일수도 있으며, 300일수도 있고, 3000일수도 있는 것이다. 신은 숫자에 얽매이지 않기에 이름 붙이는 대로 불릴 수 있다. 신은 사람이 이름 붙여 부를때는 사람에게 대상이 되지만, 본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얇팍한 지식으로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없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해야한다. 인도인의 이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개념화하고 규정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데 익숙해져있는 현대인들의 사고관이 인도철학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귀속말로 전하는 지혜'라는 부재가 붙은 '우파니샤드'라는 책은 우파니샤드를 쉽게 풀어 놓았지만,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쏟아 내고 있다. 이들 질문에 답하기가 만만치 않다.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 철학의 신비를 조금은 보았다는 점에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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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신화
아침나무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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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에 바래면 전설이 되고, 햇볕에 빛나면 역사가 된다.!! 세계의 신화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덜어 내어 마침내 문자로 정착된 이야기이다. 달빛에 바랜 전설이 햇볕을 만나 우리에게 전해져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군신화와 중국의 삼황오제, 그리고 그리스 로마신화를 뺀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너무도 협소하다. 그중에서도 단군신화는 거짓말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고, 그리스 로마신화만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기는 신화 사대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연수를 들으며, 세계의 다른 민족도 많은 아름다운 신화를 갖고 있지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빼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우리의 신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신화를 잘알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는 '단군신화'를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가서, 동명신화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창조신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단군신화'에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창조신화가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부도지'의 주인공인 마고가 등장한다. 그리고 선천시대와 중천시대, 후천시대를 거치면서 만물이 창조된다. 무속신화(천지왕본풀이)에서는 옥황상제와 천지왕이 세상만물을 창조한 것으로 나온다. 이 책에는 소개되지 않지만, 제주도의 신화에는 설문대할망이 제주도를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비루하게 '단군신화'만을 우리의 신화로 알고, 우리신화에는 천지창조 이야기가 없다고 주장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 사랑을 가지고 우리 삶 속의 모든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면, 잊혀졌던, 우리 태고의 이야기가 들린다. 이 책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물론, 이책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다. 환인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이 책에는 과감하게 환인이 우주를 창조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순간 '환단고기'를 참조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환단고기'에는 '치우천황'이라는 인물이 소개되는 이 책에도 치우천황을 우리의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위서로 평가하는 책을 과감하게 채용하여 책을 서술한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러나 저자의 이름이 '아침나무'라는 필명으로만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도 신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일까?

  이 책에는 우리 조상들이 모셨던 신들이 나온다. 황우양이 성주신이 되고, 황우양의 부인이 지신, 터주신이 된다. 우리의 토착 신들도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모르고 살았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동화책을 통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자연스럽게 어린이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서낭신이 소진랑 이라는 이야기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황우양이 길가는 이들의 침이나 받아 먹으라고 세워 놓았는데, 서낭당은 커다란 숭배의 대상으로 숭배되어 왔다. 고려시대 관리는 서낭당에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관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아이러니이다.

  불교 탱화를 감상하다보면, 시왕도가 눈에 띈다.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는 나에게는 시왕도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바리떼기 이야기에는 바리데기의 일곱 아들이 열시왕 즉, 십대왕이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의 시왕도와 바리데기 신화의 연관성이 무엇일까? 지옥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인 시왕(十王)을 그린 시왕도가 오리 무속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화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무당의 조상신이 되는 바리데기와 불교와의 습합은 이질적인 두 종교가 만나서 새로운 교류를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2. 신화의 보편성.

  세계의 신화는 고립적으로 발전하기도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한다. 때로는 고립적으로 발전하고 때로는 교류하면서 발전하기도 했던 세계의 신화들에게서 너무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내용과, 신이 창조한 인간을 신은 홍수를 통해서 심판했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유대교와 크리스트교가 탄생한 서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에도 최초의 인간 '키유마르스'를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 몽골 신화에서도 오치르마니는 챠간 숑고드에게 흙으로 사람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저 멀리 신대륙의 마야문명에도 진흙과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으나 불완전하여 옥수수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관념은 세계의 공통적인 관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리적 차이점에 따라서 자신들의 주식인 옥수수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수정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인간의 관념을 엿 볼 수 있는 신화적 요소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페르시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뿐만 아니라, 인도판 노아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는 '마누'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강물이 범람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벌어지는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러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상상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과 불은 떼어 놓을 수 없다. 불은 신성한 것이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서, 신들의 세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갖다 주었다는 이야기는, 아프리카 신화에서도 전해진다. 즉, 피그미족의 신화를 보면, 우연히 신의 집에서 불을 보고는 용감한 피그미 한사람이 신의 집에서 불을 훔쳤다고 한다.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적인 이야기가 세계 여러 신화 속에 많이 나오는 것은 불이 인간에게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리라....

 

 

3. 신화의 특수성 - 신도 죽을 수 있을까?

  신도 죽을 수 있을까? 신은 불사의 존재일까? 우리는 신은 불멸의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보편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크리스트교의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세계의 신화속에서 흔히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많은 종교에서는 신들은 하나의 특정한 능력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심지어는 죽기도하고 중노동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집트신화에서 '오시리스'라는 존재는 세트의 함정에 빠져 죽었다가 살아난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와 지하수의 신 에아가 바다 신 아프수를 죽인다. 그뿐인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위가 낮은 작은 신들은 홍수방지와 농사를 위해서 침전된 강바닥을 파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술에 취하기도하며, 노동에 불만을 품기도 한다. 켈트 신화에서 브레스 왕의 폭정으로 다난족의 신들까지 중노동을 해야했으며, 풍요의 신 다그다는 브레스의 성주변에 참호를 파기가지 한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인간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신이 마지막 전쟁 나그라뢰크에서 죽는 모습은 북유럽 신화에서도 보인다. 신은 불사의 존재라는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대교와 크리스트교 계통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모습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대교 계열의 신앙이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세계의 신화는 그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었다.

 

4. 신화의 특수성 - 북유럽 신화의 귀환

  '반지의 제왕', '리니지', '라그나뢰크'의 줄거리와 캐릭터의 모델이 되는 신화를 알고 있는가?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는 북유럽 신화가 그 모델이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다른 점이 너무도 많다. 북유럽의 자연환경과 북유럽인들의 투쟁이 신화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유럽 신화의 다양성과 독특함이 21세기에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수도사들에 의해서 정리된 북유럽 신화의 마지막은 나그나뢰크로 끝난다. 마지막 전쟁 나그나뢰크에 오딘을 비롯한 많은 신들이 참여하여 장렬히 싸우다가 죽는다. 그라나 나그나뢰크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북유럽 신화를 보고 있다면, 북유럽 신화는 암울하다는 고정관념이 틀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둡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삶을 개척해 나가야했던 북유럽인들은 자연에 굴복하지 않았다. 한시대의 끝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갔다. 그리고 지금 그 창조적 신화의 에너지는 다시 '반지의 제왕', '리니지'라는 문화 콘텐츠로 되살아나고 있다. 

 

5. 살아있는 켈트신화

  켈트 신화를 그리스 로마 신화만큼 잘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캘트신화는 우리 삶 속에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있다. 요즘 할로윈 데이가 되면 기괴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어 유치원을 비롯한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에서는 그 잔치를 성대하게 한다. 사실 할로윈 데이를 미국에서 시작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켈트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켈트족들은 마법에 걸린 사후의 인간 영혼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인 샴하인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10월 31일은 겨울이 시작되는 심하인 축제날이다. 삼하인 축제날에는 죽은 자들이 긴 겨울밤에 활동하기 위해서 되살아난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집을 볼품 없게 보이기 위해서 벽난로 불을 꺼뜨리기도 했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 11월 1일을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 All Hallows' Eve)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 말이 '할로윈(Halloween)'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이들이 이러한 기원을 알고 있을까?

  '침략의 서'에 신족인 '투아다 데 다난'족이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피르볼그족'과 전투를 한다. 잉글랜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바이킹족의 침략과 로마인들의 침략,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침략을 받은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환경이 신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침략자들을 신족으로 묘사한 것도 이 신화를 만든 이들이 본토의 토박이 켈트족이라기 보다는 유럽대륙에서 이주해온 켈트족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신화는 시대와 소통하면서 형성되고 발전되기 때문일 것이다.

 

6.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생명력은 어디에 있을까?

  신화라는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교양없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추앙받는 이유는 그 신화의 위대성보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가 패권을 장악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했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학성과 우수성을 주장하며, 그리스 로마신화가 우수하지 않았다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선생님의 강력한 반발을 듣기도 했다.

  그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학성과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선 개방성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이집트의 하토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아프로디테가 되고, 아누비스는 헤르메스가 세트는 티폰이 된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신들의 기원은 사실 이집트 문명에 있다. 진정한 창조는 이집트 문명에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이들 원석을 받아들의 자신들만의 보석으로 만들었다. 두번째는 끊임 없는 재창조에 있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와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이 문학화 작업을 했다. 신화가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 없는 재탄생의 과정을 가져야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 작업을 끊임 없이 해가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 로그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사이렌이 살아 있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는 끊임 없이 재탄생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살아있는 이유이다.

 

7. 신화 속에 녹아있는 심리학

  인도의 신화에 하늘의 신 드야우스와 땅의 신 프리비티 사이에 인드라가 태어난다. 많은 신들이 인드라를 주시하자, 인드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드라를 숲속에 숨기고 귀여워하지 않았다. 부모의 방치로 인해서 인드라는 드야우스를 죽이고, 번개라는 강력한 무기를 쟁취한다. 그리고 하늘, 땅, 지하 3계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신화 속의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쟁취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신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는 설정은 신이 불사의 존재라는 고정관점을 깨뜨려야 이해가 가능하다. 더 나아가, 아버지를 이기고 독립하려는 아들의 심리를 형상화한 신화로 해석 가능하다. 큰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 없다. 아버지를 이기지 않고 아들은 세상에 나갈 수 없다. 어려서부터 오이디푸스 컴플랙스를 겪던 아들은 아버지를 이기고 세상에 나간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존재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 진리를 그리스 로마신화와 인도신화는 말하고 있다.

  인도신화에서 프라자티는 욕정이 강한 신이다. 딸을 보면서 욕정을 느낄 정도이다. 딸이 사슴으로 변해서 도망가자, 프라자티는 숫사슴으로 변해 추적한다. 참다 못한 폭풍의 신 루드라가 화살을 쏘아 프라자티를 맞추었다. 엽기적인 이러한 내용의 신화는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도 나온다. 사춘기가 되면 딸은 아버지를 멀리한다. 스킨십을 하는 것을 특히 싫어한다. 이것은 근친상간의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딸들의 보호욕구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재가 신화속에 투영되어 프라자티 신화로 탄생했다. 신화를 알면 인간의 저변에 깔려 있는 심오한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8. 신화를 통해서 알게 된 이야기들과 의문들

가. 일본인들은 천당과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신들이 사는 곳(다카마노하라)과 인간계(아사하나노 나캇쿠니) 그리고 악령이 사는 곳(오미노 쿠니)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들 신들이 사는 다카마노하라와 악령이 사는 오미노 쿠니에 갈 수 없다. '천당 간다.', '지옥간다.'라는 말을 내뱉는 우리들의 사고관념과 일본인들의 사고관념은 너무도 다르다. 아직도 천황이 있고, 천민이 있는 일본사회 속에서는 죽어서도 자신의 신분을 벗어난 세계에 갈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신사에 갈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먼나라 일본은 죽음에 대한 세계관이 우리와 너무도 다르다.

 

나. 피그미족, 다양한 인종을 탄생시키다.

 피그미족 신화에 따르면, 한마법사가 세상을 창조했다. 인간을 만드는데, 코요테의 장난으로 인해서 흑인과 백인, 황인종이 생겨났다. 외부와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피그미족 사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신화가 만들어졌을까? 혹시 백인 선교사가 들어 오고 나서 생겨난 이야기가 아닐까?

 

다. 약속을 지키는 인도와 지키지 않는 켈트인

  인도신화 속에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한다.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에 운명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러나 켈트 신화에서는 프윌은 그와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적을 유인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신화를 재미있게 이끌어가기 위한 장치일 뿐일까?

 

라. 비극적 최후를 맞는 페르시아 영웅들

  많은 영웅들을 공주를 구하고 부와 명예를 얻으며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신화 속에 나오는 잠시드와 마누키르라는 영웅은 자신의 위대한 성공에 취하여 비참한 말로를 겪는다. 다른 지역의 영웅담과는 너무도 다른 결말이다. 이것이 이란의 특징일까? 아니면 자만에 빠지기 쉬운 인간에게 울리는 경종일까?

 

 

9.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

  이 책에서는 몽골과 한국어가 비슷한 단어가 많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몽골과 한국을 같은 계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몽신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몽골에도 있으며, 몽골의 '~치'가 한국에도 그대로 있고, 몽골이 말을 '몰'이라고 발음하고, 제주도에서 '몰'로 말을 발음한다. 이러한 근거가 몽골과 한국이 같은 계통이라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 그럴까? 사건을 바라보는 선후가 다르다. 한국어와 몽골어가 비슷한 이유는 몽골과 한국이 같은 계통으로 같은 뿌리를 갖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고려의 원간섭기에 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다. 연지와 곤지, 쪽두리, 소주 등이 이때 몽골로 부터 들어왔으며, 몽골에 의해서 강제로 제주도에서 말을 사육하기 시작했으며, 몽골인들로 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말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 몽골에 동명신화가 남아있는 이유는 고구려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의 유민이 이곳을 점령하거나 망국에 한을 안고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낮선 신화들을 쉽게 이해하도록 다양한 사진과 지도를 첨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힘든 이미지들을 친절한 그림으로 설명해주니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흥미진진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 책에서 가장 나의 가슴을 울린 한마디를 떠올려보았다.

  "마지막 남은 나무가 베어진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히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 한붕울이 사라진 뒤에야, 그때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황금만능주의에 물들고 환경오염을 문제시하지 않는 주변의 인간을 바라보며, 북미대륙에 살았던 크리족의 이 말은 나의 가슴을 울린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문명의 붕괴'라는 책에 이와 비슷한 말이 전해온다. 이스터섬의 마지막 나무를 베었던 사람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문명이 붕괴할 때,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중에 하나는 자연환경의 파괴이다. 이스터섬의 사례는 자산파괴가 인간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북미대륙에 살았던 크리족의 신화속에서 부터 전해져오고 있다. 우리 인류는 그 경고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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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2017-12-10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언제 읽을까 눈길만 주고 있네요 ㅎㅎ

강나루 2017-12-10 08:51   좋아요 1 | URL
두꺼운 부피 때문에 망설이기도 하지만, 일단 손을 데면 술술 읽혀져요.^^

낭만인생 2017-12-10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 내용 정말 좋네요... 감사합니다.

강나루 2017-12-10 20:09   좋아요 0 | URL
내용이 좋다니, 감사합니다.^^

munsun09 2017-12-11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서 읽으려고 하니 절판으로 뜨네요^^
중고를 살펴봐야겠어요.

강나루 2017-12-11 17:52   좋아요 1 | URL
절판이라니... 안타깝네요

라온 2017-12-11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고로 샀어요

강나루 2017-12-12 04:11   좋아요 0 | URL
네 ^^ 중고도 좋지요 즐거운 책읽는 시간 보내요^^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 100년 전,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재판관이 벌인 재판정 격돌, 현장 생중계! 재판정 참관기 시리즈
김흥식 엮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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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에는 두개의 10.26이 존재한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26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0.26이 바로 그것이다. 한사람은 유신의 지사를 존경했고, 한사람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한사람은 동양평화를 위해서 그를 처단했고, 한사람은 10월 유신을 끝내기 위해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70년의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건의 현장을 거닐어 보자.

 

1. 당당히 자신을 의병이라 밝히다.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구라도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길 바랄 것이다. 안중근의 변호인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안중근이 무죄임을 주장했다. 즉, 1899년 맺은 청한통상조약에 의하여 한국인은 청나라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고, 청나라 사람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죄를 범하면 아무런 명문이 없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일본인 변호사의 이러한 충실한 별론을 안중근은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네제를 받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되묻는다. 그리고는 '나는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서 이 재판장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서 자신을 처리해달라고 강변한다. 남아로서 자신의행동이 떳떳했고, 그에 대한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정당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랬다. 자신의 생명을 먼저 구하기 보다는 대의에 자신의 떳떳함을 주장했던 안중근의 풍모가 빛나는 명장면이었다.

 

2. 이토가 안중근을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한 것은 사실일까?

  '안중근이 온건파 이토를 죽였기에 조선 병합의 시간이 빨라졌다.'라고 주장하는 글이 인터넷에 유포되었던 적이 있다. 사실일까? 온건파였던 이토가 죽음으로써 강경한 군부세력의 발언권이 세어졌고 그결과 조선 병합이 빨라졌다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토가 안중근에게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던 것은, '내가 죽으면 너희 조선은 빨리 병합된단말이다. 이 바보야'라는 뜻이다. 이러한 주장을 어느 대학교 교수와 인터넷 강사가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다.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를 보면 그것이 과연 진실이지 확인해 볼 수 있다. 1910년 2월 10일 이루어진 네번째 공판에서 미조부치 검사는 "한 증인의 말에 따르면, 이토 공이 자신을 쏜 자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토공은 자신을 쏜 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죽었던 것입니다. "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안중근 의사는 3발의 총을 명중시켰고, 십자형 홈을 새긴 총알은 인체의 딱딱한 부분에 닿으면 납과 니켈 표피의 분리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어 큰 총상을 입힌다. 그래서 이토는 폐를 관통한 두개의 총알은 흉강안에서 큰 출혈을 일으켜 십여분 만에 이토는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남기기 힘들 정도로 이토는 저세상으로 빨리 떠났다. 이토가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토가 죽었기에 조선 병합의 시계가 빨라졌을까? 천만의 말씀!! 이덕일과 이태진 전교수는 이러한 주장을 단번에 반박한다. 이토가 죽기 이전에 일본 내각에서 조선 병합건이 통과되었다고 주장한다. 이토가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으며,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더욱이 이토가 죽기전에 조선을 병합하기로 일본내각은 결정했다. 얕은 지식으로 민중을 파멸의 길로 안내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이제는 없어지기를 바란다.

 

  170여 페이지되는 얇은 책이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기에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조선을 병탄하는데 앞장섰던 그들을 처단한 역사적 10.26의 현장을 많은 이들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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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12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강나루님 아이들 가르치시는 일 하는가 봅니다.^^

2017-12-13 0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1-29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중근 의사 존경합니다. 친일매국노들이 안중근과 유관순을 띄워 군사독재에 이용해 먹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강나루 2018-01-29 17:47   좋아요 1 | URL
이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지요^^
 
하버드의 생각수업 -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세계 최고 인재들의 생각법 1
후쿠하라 마사히로 지음, 김정환 옮김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공한다."  어느 3학년 교실에 걸려 있는 급훈이다. 그 급훈을 보는 순간, 숨이 콱 막혔다. 반복에 지치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는 우리 사회와 우리 교육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기에, 이 급훈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너무도 컸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제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삶을 바꾸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교육은 아직도 '반복'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이 무한 경쟁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과연 우리의 교육은 잘 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 고민속에서 '하버드의 생각수업'을 꺼내들었다. 세계의 명문 대학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자를 기르고 있을까? 과연 그들은 우리 한국 교육현실을 바꿀 수 있는 롤모델일까?

 

1. 철학적 사유를 하라!!

  우리 대학에서 폐지되고 있는 학과중에 하나가 철학이다. 어느 철학자는 철학과를 폐지하는 것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철학하는 삶이 없어지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생각하기 보다는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주어진 것을 암기하는 단순한 기계로 우리 인재를 길러내는 상아탑을 바라보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에서는 그들의 기초적인 배움 속에서 철학적 사유가 자리잡고 있었다. 2012년 하버드 대학 로스쿨 입시 · 소논문 문제로 "당신 자신에 관해 쓰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으며, 2011년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문제에서는 "평등은 자유를 위협하는가?"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또한 2011년 옥스퍼드 대학 입시 문제에서는 "주차 위반을 하면 사형에 처하는 법률을 제정했더니 아무도 주차 위반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적절한 법률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단순히 암기해서는 문제를 풀 수 없는 문제들이다. 반면 한국 입시문제들은 자신의 생각을 적기보다는 무사유속에서 철저히 주어진 문제의 틀속에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얼마나 많은 문제를 빠른시간 속에서 풀었는가가 중요하다. "수학에서도 풀이과정을 암기해야되요. 수학도 암기과목이에요"라는 말을 수학선생님이 하신적이 있다. 사유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던 수학도 한국의 입시 현실속에서는 풀이과정을 암기하여 빠른시간내에 풀어내는 암기과목으로 변신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사유 속에서 자라나는 사람은 절대적인 권위자의 지식에 절대복종하는 노예가 된다. 지금의 국정농단 사태는 그러한 무사유가 낳은 비극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2. 지식이 살아있게 하라.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히 지식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관련된 문제들을 제시하고 독자로 하여금 이를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지식이 상아탑속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현실의 문제와 호흡하면서 살아있는 지식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것이 이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한예를 들어보자. 핵무기에 대한 대응을 홉스와 로크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홉스처럼 인간을 악하게보고 타국이 우리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관점에서 외교전략을 짤 것인가? 그렇다면, 일단 핵을 보유하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즉시 반격한다.'라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혹은, 로크 처럼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보고, 국제전략을 짤 것인가? 그렇다면 핵무장을 해서 상대를 위협하기 보다는 필요한 최소의 군비로 안전을 보장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외교전략을 짤 것이다. 홉스와 로크의 정치철학 이론을 죽은 지식의 상아탑에 가두기 보다는 현실을 바라보고 외교전략을 짜는데, 활용하고 있다. 홉스와 로크를 살아있게 만들고 있다.

 

3. 동서양 철학의 하모니

  밥파이크의 '창의적 교수법'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 놀랐던 일이 있다. 밥파이크는 '논어'의 한구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교수법에 대한 논리를 전개했다. 동양의 고전이 서양인의 최신 서적에 인용되고 있다. '하버드의 생각수업'이라는 책에서는 논자의 사상이 미국을 비롯한 유럽 대학에서도 널리 가르쳐진다고 지적한다. 놀라운 일이다. 지식과 사상이 학문의 장벽에 가로막혀 소통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서 외국은 학문의 장벽을 뛰어 넘어 소통하고 융합되고 있다. 참된 창의적인 결과물들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읽는 순간, 논어에 있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하는 것이 참된 앎이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가 서로 참된 앎에 대해서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진정한 앎은 자신이 무엇을 모른느가에서 부터 출발한다.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근대 과학이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발전했다고 지적한다. 중세에는 신이 모든 자연을 창조했다고 설명하면서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으며, 알기 위해서 많은 탐험과 연구를 했다. 그것이 바로 근대 과학발전의 원동력이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그 출발점을 이미 제시했었다.

 

4.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생각

 인간은 자유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명제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간은 자유를 원할까? 인간은 사실을 보고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정의를 듣고 사실을 본다. 즉 인간은 보이는데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가를 질문한다. 결혼도 사랑도 의무도 양심도 애국심도 고독으로부터의 도피수단이다. 소국적 자유, 즉 편안한 정도의 한정된 자유를 인간은 추구한다. 그래서 인간은 권위에 복종하는가 보다. 그럼 독신이 늘어나는 것도 적극적 자유추구자가 늘어나는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유에 대한 나의 환상이 깨진다. 3대가 이혼한 공자, 그리고 강신주라는 철학자도 대중강연에서 자신이 이혼했다고 당당히 말한다. 어쩌면 이혼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자유와 평등은 대립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에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자유보다는 평등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가, 자유가 가져오는 해악이 직접적이라면, 평등이 일으키는 문제는 서서히 다가온다고 지적한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으면 그는 굶어 죽는다. 반면 모두가 평등하게 살자라는 슬로건을 내건 공산주의 사회는 노동의욕을 낯추어 몰락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보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이론화시켜서 제시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토크빌은 평등은 개인주의를 낳는다. 라고 지적한다. 평등과 자유의 시소게임은 진보와 보수의 시소게임으로 치환해 설명할 수 있다. 보수 정권이 극에 달했을때, 진보정권을 국민이 강하게 욕망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진보 정권이 들어섰을 때, 보수가 집권할 것을 미리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5.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노동을 하지 않고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상업을 말업이라하며 업신여긴 조선 유학자와 비슷하다. 새롭게 생산하지 않고 이윤을 가져가는 상인을 업신여긴 조선왕조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몰락했고, 공산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에 패배했다. 잉여가치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던 조선왕조와 공산주의 국가들은 결국 자본주의에 무릎을 꿇어야했다. 놀라운 유사점이다.

  슘펜터는 자본주의를  성공할 수록 종말에 가까워지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성공하면 대기업화되고 대기업화된 기업은 일단 회사에 들어가면 안정된 급여를 받으면서 사회주의적으로 변하게 된다. 회사는 시장에 대해 커다란 힘을 가지게 되고, 점유율을 독점하며,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대기업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기업은 종말로 치닫고 있는가? 그럼 해결책은 무엇인가? 슘펜터는 '창조적 파괴'를 강조한다. 혁신하지 않으면 파국으로 치닫는다. 지금 정부의 적폐청산도 '창조적 파괴'의 한 모습일 것이다.

 

6. 동의하지 못하는 것!!

  책을 읽을 때는 저자를 먼저 확인하라는 말이 있다. 후쿠하라 마사히로는 일본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일본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그런데, 미국인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섹몌 8개의 문명중에 "일본문명"을 집어 넣었다. 일본인도 아닌 그가 '일본문명'을 '중국문명'과 별개의 문명으로 분류한 이유가 무엇을까? 그정도로 일본문명이 독자성을 가진 것일까? 헌팅턴이 친일주의자여서일까? 아니면 정치학자의 한계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내생각의 편협함 때문일까? 많은 의문이 든다.

  이 책을 쓴 후쿠하라 마사히로는 자유주의자 인것 같다. 그는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글을 가져와 '노숙자에게 돈을 줘야 할까?'라는 질문을 한다.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상부상조가 나타나서 그들은 노숙자에게 자신의 돈을 기꺼이 주지만, 평등주의자는 공공기관이 할일이라면서 외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다른다.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번돈을 왜? 저들과 같은 게으른 사람에게 주어야할까?라고 생각하며 외면할 것이고, 반면 평등주의자들은 누구던지 인간은 존엄하고 노숙자도 한 인간으로서 평등하고 존엄하게 살아야한다고 느끼기에 자신의 지갑을 열것이라 생각된다. 진정한 미국과 한국의 현실이 알라 토크빌과 나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나의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는 현실은 평등주의자가 더 자신의 지갑을 잘 열었다

 

  이 책에는 자신이 분석적 스타일과 전체론적 스타일을 자기 점검할 수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전체론적 인식스타일'로 나왔다. 역시 동양인으로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흥미로운 읽을 꺼리가 많다. 스스로 문제를 생각해보면서 생각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얇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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