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다 1 -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의 신화 여행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다 1
토마스 불핀치 지음, 노태복 옮김, 강대진 해설 / 리베르스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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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알지 못하면 영어로 쓰인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기가 어렵답니다. 이를테면 시인 바이런은 로마를 가리켜 '여러 나라의 니오베'라고 부르거나, 베네치아를 두고 '바다에 갓 올라온 키벨레 같다'고 해요. 신화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표현이 천 마디의 자세한 묘사보다 ?신 더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오지요. 하지만 신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만 갸우뚱할 뿐입니다. - '머리말' 중에서

 

 

불핀치의 신화를 보다

 

신화집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판본은 토머스 불핀치가 59세에 발표한 <신화의 시대>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들을 체계적이고 간결하게 구성함으로써 풍성한 내용임에도 비교적 읽기에 쉬워 청소년이나 고전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이미 많은 번역본이 나왔지만 원문에 있는 영시를 생략하거나 원문에 없던 묘사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은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존 번역본의 아쉬움을 최소화하고 <신화의 시대>

 

그는 1796년 건축가 찰스 불핀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스턴 라틴 스쿨,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를 거쳐 1814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같은 해에는 모교인 라틴 스쿨 교사로 취임했다. 1825년 보스턴으로 돌아와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837년부터 보스턴 머천트 은행의 행원으로 지냈다. 1867년 가족 없이 독신으로 지내다 사망하였다.

 

 

 

 

 

신들의 세계

 

올림포스 산에 살았던 신들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수히 많은 신들은 오늘날의 문학과 예술 속에 굳건히 살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많은 작가와 시인, 그리고 이야기꾼들이 신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그리스인들이 바라보던 우주의 구조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스인들은 지구가 평평한 원圓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한가운데는 신들의 거처居處인 올림포스 산이거나 아니면 신탁神託으로 유명한 델포이 산이라고 여겼다. 원반 모양인 지구의 동서동서로 큰 바다가 흐르며 양분하고 있으며, 이를 지중해라고 불렀다. 그리고 흑해까지 그리스인들이 아는 바다 이게 전부였다.

 

신들의 거처는 올림포스 산 정상에 있었다.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들이 구름의 문을 지키고 있는데, 천상의 신들이 인간계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때 이 문을 열어 주었다. 모든 신들은 거처가 제각각 따로 있었다. 하지만 신중의 신 제우스의 호출이 있으면 모두 제우스의 궁전으로 향했다. 거처가 땅이나 지하인 신들도 예외가 없었다.

 

천상계와 인간계의 일을 의논하면서 신들은 넥타를 들이키고 음악의 신 아폴론은 리라를 연주해 흥을 돋우고 뮤즈들이 노래를 불렀다. 신들도 해가 지고 나면 모두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잠을 잤다. 여신들이 입는 화려한 옷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미의 여신들인 카리테스가 짰다고 한다.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불카누스)는 건축가이자 갑옷과 전차도 만들었다.

 

신들은 하늘이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황금 신발을 신었는데, 이 또한 헤파이스토스의 작품이다. 황금 신발을 신으면 이곳저곳을 바람처럼 빠르게 다닐 수 있었다. 하늘을 달리는 천마天馬의 발굽에 청동 편자를 달았는데, 이 덕분에 신들의 마차는 하늘이나 물 위를 마음껏 질주했다.

 

제우스의 아버지는 크로노스(사투르누스), 어머니는 레아(옵스)이다. 둘은 모두 티탄족에 속했다. 티탄족은 우라노스(하늘)와 가이아(땅)의 자식이며,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카오스(혼돈)에서 태어났다. 물론 티탄족에는 다른 신들도 있었다. 오케아노스, 히페리온, 이아페토스, 오피온 등의 남신들과 테미스, 므네모시네, 에우리노메 같은 여신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구세대 신들인 셈이다.

 

제우스는 형제자매와 힘을 합쳐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족을 공격해 물리치고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제우스는 하늘을, 포세이돈(넵투누스)은 바다를, 하데스(플루톤)는 죽은 자들의 셰계를 차지했다. 그리고 지상과 올림포스는 공동으로 소유했다. 이리하여 제우스는 인간과 신의 왕으로 등극했던 것이다. 제우스의 무기는 번개와 무적 방패 아이기스였으며, 독수리를 애지중지했다.

 

헤라(유노)는 제우스의 아내이자 신들의 여왕이었다.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가 그녀의 시녀이자 전령이었다. 명장 헤파이스토스가 바로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에다 못생긴 얼굴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추방됐다. 전쟁의 신 아레스(마르스)도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다. 음악의 신 아폴론은 제우스와 레토(라토나) 사이에 태어났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 또는 비너스)는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다의 파도 거품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다. 물결에 밀려 키프로스 섬에 도착, 여기서 계절의 여신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혀 신들이 모인 궁전으로 안내했다. 모든 신들은 그녀의 미모에 반해 아내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제우스는 번개를 만들어준 공로로 아들 헤파이스토스의 아내로 정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가장 못 생긴 신의 배우자가 되고 말았다.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드)가 바로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불을 훔치다

 

세상에는 질병, 다툼, 시기, 원한, 불만 등등 온갖 해로운 것들이 많다. 오늘날의 과학과 문화는 이에 대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신들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에는 전혀 다른 답변이 존재했다. 최초엔 신들만 존재하다가 인간이 만들어지면서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가 열렸는데,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가 흙을 반죽해 만들엇던 것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태양 마치의 불을 횃불에 옮겨 붙여 이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했다. 인간은 불 덕분에 추위를 이길 수 있어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었고, 땅을 경작할 농기구를 만들고, 공예품을 만들고 상거래용 돈까지 만드는 등 감히 다른 동물들이 넘볼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던 것이다.

 

한편, 제우스는 이를 벌하려고 여자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 형제에게 보내고 아울러 인간계에도 보냈다. 최초의 여자는 바로 판도라였다. 천상에서 만들어졌을 때의 판도라는 완벽함을 추구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헤르메스는 설득력을, 아폴론은 음악적 재능을 모두 판도라에게 주었다.

 

이런 능력을 가진 판도라는 지상에서 내려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로 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 이에 형인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에게 제우스의 계략일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했다. 에메테우스의 집에는 상자가 하나 잇었는데, 이 속에는 온갖 해로운 것들이 가득했다. 즉 인간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을 담아 두었던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가 이 상자를 열고 만다. 순식간에 온갖 재앙이 빠져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급히 상자를 닫았지만 오직 한 가지만 남았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 온갖 재앙들만 가득한 상자에 어떻게 희망이 공존할 수 있었겠나 말이다. 제우스는 인간을 축복하려고 판도라를 내려보냈는데, 상자엔 결혼 선물이 담겨 있었다. 이는 다른 신들이 저마다 축복을 준 것이었다. 하지만 판도라가 경솔하게 상자를 여는 통에 다른 축복이 모두 빠져나가고 희망만 남았다는 거다. 아무튼 인간계는 행복이 넘치는 '황금시대'였다. 이때는 진실과 정의가 가득한 봄날이었으며 강에는 우유와 포도주가 넘치고 나무에선 꿀이 흘러나왔다.

 

이후 제우스는 봄을 짧게 만들고 여러 계절을 만들엇다. 이에 사람들은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했고 집이 필요해 동굴에서 숲 속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곡식들은 기르지 않으면 자라지 않았으므로 씨앗을 뿌리고 힘들게 쟁기를 끌어야만 했다. 점점 사람들의 성품이 거칠어 지고 싸움이 잦았다. 심지어 범죄가 발생하고 진실과 겸손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대신에 사기와 속임수, 폭력이 난무했다. 가족들도 서로를 믿지 못했고 자식은 유산 욕심에 빨리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다. 땅은 살육의 피로 젖었다. 이에 함께 살던 신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모두 떠나고 말았다.

 

제우스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엄청 화가 났다. 번개를 내리치려다 하늘나라까지 불길이 번질지도 모를 위험성 때문에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기로 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계속 쏟아졌다. 이 물로도 성이 안 차서 제우스는 동생 포세이돈에게 강을 범람시켜 땅이 아예 잠기도록 했다. 이울러 지진으로 땅을 뒤흔들자 바닷물이 뭍으로 밀려왔다. 사람과 가축, 그리고 집들이 한데 휩쓸려 떠내려갔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인간친화적인 행동 때문에 그를 주제로 자주 다루었다. 제우스가 인간에게 크게 화냈을 때도 그는 인간의 편을 들었다. 인간에게 문명과 기술을 전하다 보니 제우스의 뜻을 거역한 셈이 되고 말았다. 제우스는 그를 카우카소스 산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 놓고 독수리를 보내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 하지만 그 간은 또다시 생겨났기에 그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천상에서 불을 훔친 자처럼

그대는 괴로움을 견디려는가?

끝내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독수리와 바위의 고통을 겪으려는가?

 

바이런, <나폴레옹 보나파트르에게 부치는 송시> 중에서

 

 

변신 이야기, 조각품이 예쁜 여인으로 환생하다

 

우리 모두 가끔은 변신을 꿈꾼다. 나비가 되어 연인의 침실로 은밀히 잠입하려는 18금 상상을 하거니 인어가 되어 바닷 속 보물선을 찾아 내기를 바란다. 물론 비현실적인 몽상일 뿐이다. 하지만 고대 신화 속의 세상에선 이런 일이 가능했다. 세상 만물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서로의 형태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바뀔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변신 이야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스토리가 아마도 피그말리온과 처녀 조각상일 것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의 눈에는 여자의 결점만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맘 먹었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솜씨로 세상에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정말 살아있는 여자를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 마치 수줍음을 타는 아리따운 처녀로 비쳐졌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감탄하다가 급기야 그 조각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가끔씩 혹시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 만져보면서 확인까지 했다. 때론 껴안기도 하고, 젊은 아가씨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도 주곤 했다. 반짝이는 조개껍질, 반질반질한 조약돌, 작은 새, 온갖 빛깔의 꽃, 구슬과 호박 등을 말이다.

 

심지어 그 정도가 지나쳐 이젠 조각상에 실제로 여인의 옷을 입히고, 손가락엔 반지를 끼우고, 목엔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귀에는 귀걸이를, 가슴엔 진주 장신구를 걸쳐 주었다. 이런 패션들이 조각상에 너무나도 잘 어울려 옷 맵시가 아름다웠다. 이렇게 치장한 조각상을 소파에 누이고는 아내라고 불렀다.

 

아프로디테 축제가 다가오자 키프로스 섬은 분주했다. 제물을 바치고, 제단에 연기를 피어올려 향내가 공중에서 진동을 했다. 피그말리온은 이 장엄한 의식에 참여해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다음, 제단 앞에서 조심스레 기도를 했다. "저능한 신들이시여, 기도 드리오니 제게 아내를 주세요"

 

차마 상아 조각상 처녀를 달라고 지목하진 못했다. 하지만 축제에 들른 아프로디테는 그의 말을 듣고서 그 속셈을 이미 헤아렸다.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표시로 제단의 불꽃을 세 번 공중으로 솟구치게 했다. 피그말리온은 집으로 돌아오자 그 여인상을 보러 갔다. 예쁜 조각상에 입을 맞추자 놀랍게도 온기가 돌았다. 입술을 포갠 채 팔다리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피부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오마이갓, 기도의 효험이 나타났던 것이다. 처녀는입맞춤을 느끼면서 낯빛이 붉어졌던 것이다.

 

그 옛날, 넘치는 정열과 갈망으로

피그말리온이 돌을 끌어안아

마침내 차가운 빛깔의 대리석에

감정의 빛이 감돌게 한 것처럼

나도 젊은 열정을 다하여

빛나는 자연을 시인의 가슴에 안노라.

숨결과 따스함과 생명의 약동이

조각상에서 솟아 나왔던 것처럼.

 

- 독일 시인 실러, <이상> 중에서

 

 

모험 이야기, 황금 양털과 아르고 원정대

 

 

신화에서 흥미진진한 대목이 바로 모험 이야기이다. 이는 거룩한 과제를 짊어진 젊은 영웅이 머나먼 길을 떠나 갖은 역경과 고난을 다 이겨 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함께 길을 따라 나섰던 독자들에게 무한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아르고 원정대는 영화를 통해 많이 소개되었는데, 황금 양털을 찾아 나선 모험을 다룬다.

 

영웅을 태운 아르고 호는 테살리아를 떠나 트라키아로 갔다. 현인 피네우스의 말에 의하면 흑해 입구는 작은 바위섬 두 개로 막혀 있는데,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다시 벌어지는 순간에 재빨리 노를 저어 통과하라는 것이었다. 이아손과 부하들은 그 말대로 해서 무사히 위험천만한 물길을 통과했다.

 

마침내 흑해 동쪽 끝에 있는 코르키스 왕국에 상륙해 이아손은 자신의 미션인 황금 양털을 구하러 왔다고 알리고 이를 허락받는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청동 발을 지난 불을 뿜는 두 마리 황소를 끌고 쟁기질하여, 카드모스가 죽인 용의 이빨들을 땅에 심어 달라는 조건이었다. 그 전에 이아손은 왕의 딸인 메데이아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고 여신의 제단 앞에서 결혼을 맹세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메데이아는 유능한 마법사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마법의 약을 사용해 용을 잠에 빠뜨린 뒤 황금 양털을 낚아챈 이아손은 메데이아를 데리고 급히 아르고 호로 돌아갔다. 그리곤 곧장 테살리아로 향했다. 이후 축하연이 열렸지만 이아손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가 참석 못해서 기분이 별로 였다. 이에 그는 메데이아에게 아버지의 수명을 늘리는 마법을 요청한다. 그녀는 신비한 마법의 약초들을 이용해 회춘하도록 만들어준다.

 

가마솥 주변을 돌지 빙빙

독 품은 내장을 던지자 첨벙

늪에 사는 뱀을 싹둑싹둑

끓이자 보글보글 볶자 지글지글

도용농 눈알 개구리 발가락

박쥐의 털 개의 혓바닥

살무사의 혀 발없는 도미뱀의 독니

도마뱀의 다리 올빼미 새끼의 날개

게걸스러운 상어의 밥통

밤에 캔 독미나리 뿌리, 몽땅 집어넣자.

 

- <맥베스>, 제4막 1장

 

그러나 배은망덕하게도 이아손은 코린토스의 공주와 결혼하려고 그녀를 버린다. 그래서 그녀는 신들에게 복수를 허락해 달라고 빌고서 독이 묻은 옷을 신부에게 선물로 보낸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궁전에 불을 지른 후 아테나이로 도망을 친다. 그곳에서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과 결혼한다. 이처럼 메데이아는 독부毒婦로 등장한다. 위의 사진은 이아손과 함께 코르키스를 탈출할 때 자신의 동생 압시르토스를 죽여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다. 아버지의 추격선이 바짝 뒤따르자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게 하고 유유히 도망쳤던 것이다.

 

 

신화 여행을 떠나보자

 

'세상은 신들의 놀이터'에서부터 '인간이자 신이었던 천하장사'까지 모두 19편의 신화 스토리텔링이 소개된다. 그림과 함께하는 불핀치의 신화 여행을 통해 인문학 소양과 예술적 소양을 동시에 함양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직도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지 못한 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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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노후 미리 준비하는 은퇴설계 - 영화 같은 노후 드라마 같은 은퇴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최성환 외 지음 / 경향미디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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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책은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하듯 노후에는 노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저희는 이 책에서 영화와 소설, 대중가요와 같은 우리의 삶을 그린 이야기 속에 담겨진 노후의 지혜를 찾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딱딱한 재무 위주의 설계와 강의를 벗어나 건강과 가족, 일거리와 여가 등 즐겁고 행복한 노후를 위해 꼭 갖추어야 할 5F(Fitness, Finance, Field, Fun, Friends)를 쉽게 풀어냈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은퇴는 즐겨야 할 대상이다

 

한화생명 은퇴연구소는 2012년 출범 이후 전 국민이 밝고 긍정적인 노후를 설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왔다. 2014년 보험 및 금융 연구 분야를 통합하여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의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진단하고 바람직한 은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행복한 노후를 위해 필요한 것은 막연한 걱정이 아닌 지금 바로 준비하는 것이다.

 

이 연구소는 '은퇴는 설레임'이라는 슬로건 하에 긍정적인 은퇴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런 탓에 이 책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엮어 노후를 알기 쉽게 풀이하고 있다. 은퇴와 노후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현실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 모두 영화 속 해피엔딩처럼 책을 통해 즐길 수 있는 은퇴와 노후를 배워보자.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우리 모두 불안하게만 느껴지는 은퇴를 행복한 노후로 만들기 위한 102가지 지혜를 다양한 소재로 전해준다. 준비된 노후 새로운 청춘, 도전하는 뉴시니어, 멋지게 나이 드는 법, 가족과 함께 하는 은퇴설계, 은퇴 후 30년 시나리오, 아름다운 마무리 웰다잉 등 순으로 전개된다.

 

"은퇴에 관한 글은 잘 전달되고, 기억에 오래 남아 이를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 은퇴의 주요 사항을 영화와 드라마 등에 비유한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탁월하다" -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소장 김경록 

 

 

 

공양미 삼백석은 얼마일까?

 

책은 고전 소설 <심청전>을 들고 나온다. 태어난지 7일 만에 엄마를 여의고 눈 먼 아비를 모시다가 그 아비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자신의 몸을 내 던진 효심 가득한 심청의 스토리를 우리 모두 안다. 그런데, 청이가 지금의 한국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화두를 우리들에게 던지는 셈이다.

 

청이는 열 살이 넘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다. 아버지가 눈이 멀어 특별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안마 기술을 배워 안마사로 소득 활동을 할 수 있겠지만 농경 사회인 당시엔 앞이 보이지 않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어린 청이가 돈벌이에 나섰지만 아마도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쳤을 것이다.

 

어느 날 심봉사가 딸을 마중나갔다가 개울에 빠져 죽을 고비를 맞는데, 마침 여기를 지나던 스님이 그를 구해준다. 그의 딱한 사정을 들은 스님은 몽운사에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로 올리고 지성으로 기도하면 두 눈을 뜰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에 심봉사는 눈을 뜨고 싶은 욕망에 덜컥 약속을 한다. 딸이 동네 품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처지에 어떻게 공양미 삼백석을 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쌀 300석은 과연 얼마나 될까? 책은 현재 가치로 약 5억 4,800만 원이라고 추정한다. 척관법에 따르면 1석石은 144kg이므로 300석은 43,200kg이 된다. 쌀 한 가마니 80kg의 시세를 20만 원이라고 볼 때 공양미 300석은 540가마니에 상응하므로 1억 800만 원이 된다. 하지만 그 당시엔 쌀이 매우 귀한 것이기에 이렇게 추정하면 곤란하다.

 

따라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세종 시절 관리들의 녹봉은 돈이 아니고 현물인 쌀, 보리, 콩으로 지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1품(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쌀 11석 2두斗와 콩 6석을 지급받았다. 이를 모두 쌀로 환산하면 총 83.2석이 된다. 2014년 기준 국무총리의 연봉이 1억 5,200만 원이므로 이를 대입하면 300석의 현 가치는 약 5억 4,800만 원으로 산출된다.

 

심청이 어릴 적에 심봉사는 젖동냥에 의존했는데, 지역에 살던 젖엄마들은 돌아가며 청에게 젖을 물렸다. 좀 커서 청이 밥을 빌러 갈 때도 덩네 주민들의 인심은 밥에다 김치, 장까지 아끼지 않고 나눠 주었다. 모두 여유롭지 못한 삶의 상태이었지만 남의 딱한 사정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내 일처럼 여기고 도와주었다. 건강하게 작동하던 조선의 사회 시스템을 엿볼 수 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은 어떤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앞집,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잘 모를 뿐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다. 홀로 사는 할머니가 죽은 지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모르고 살다가 여름철 악취 때문에 겨우 관심을 기울인다.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는 2011년 682명, 2012년 719명, 2013년 878명, 2014년 1,008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

 

고을마다 효자, 효녀비를 세워 효행孝行을 장려하던 우리 선조들의 의식이 나날이 희석되어 요즘처럼 변한 현실을 우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청과 심봉사가 살던 조선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고 여러면에서 부족하고 열악한 삶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의 밥그릇을 덜어가며 가난한 이웃을 도울 수 있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바꿔 놓았을까?

 

 

 

행복幸福을 밟지 마라

 

최고 시청률 40%를 웃돌았던 KBS 주말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3남매의 아버지 차순봉은 남은 시간동안 가족들과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한다. 홀로 3남매를 키운 헌신적이며 자상한 아버지 차순봉은 위암 말기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자식들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우쳐주려 한다.

 

우리 모두 행운幸運을 가져다 준다는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무수히 많은 세 잎 클로버를 짓밟으며 나아간다. 나폴레옹이 특이한 네 잎 클로버를 보려고 고개를 숙인 덕에 자신을 향한 총알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는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세 잎 클로버는 무엇일까?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차순봉의 자식들은 명예, 신분 상승, 돈 등의 네 잎 클로버를 찾아 헤매다 정작 '가족'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밟고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차순봉의 버킷 리스트

 

1. 3개월 동안 가족이 아침에 함께 모여 식사하기

2. 하루에 한 번씩 자식들이 자신에게 전화해서 안부 묻기

3. 노처녀인 큰 딸, 3개월간 맞선 10번 보고 시집보내기

4. 직장 없이 떠도는 막내로부터 용돈 100만 원씩 받기

5. 처가에 살고 있는 아들 내외랑 3개월 동안 함께 살기

 

굳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버킷 리스트를 작성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신년 벽두이다. 작심삼일로 끝나기 쉬운 거창한 계획보다 소박한 3개월짜리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 가족들과 함께 한다면 얼마나 보란찬 일이겠는가. 깨달음을 얻은 나도 오늘부터 매일 아침 시골에 홀로 계신 노모에게 안부전화를 하기로 했다.

 

"물러나는 은퇴隱退가 아닌 빛나는 은퇴銀退를 준비하라"

 

 

나도 꽃보다 할배, 할매

 

tvN <꽃보다 할배>에서는 평균연령 76세의 할배들이 유럽여행을 떠났다. 멋진 후드티와 검정색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대표 할배들이 유럽에 떴다. 누구나 꿈꿔봤을 법한 이야기가 방송에서 리얼하게 펼쳐진다. 이게 바로 <꽃보다 할배>다. 북한 주민들이 몰래 시청하고선 자유롭게 유럽으로 여행 다니는 남한 할배들을 부러워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사실 경비도 경비려니와 좀처럼 유럽여행을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평균연령 76세의 꽃할배들은 9박 10일 간의 배낭 여행을 떠났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등 할배 4인방은 시대를 풍미한 명연기자로 50년 이상의 연기 내공을 자랑한다. 맏형인 나이 팔십의 이순재에서 부터 나이 칠십의 막내 백일섭까지 이들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에서 우리들은 대리만족을 넘어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된다.

 

은퇴 준비에 필요한 4가지 FACT

 

Friends~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오래된 벗이다

Adventure & Communication~ 모험을 즐기고, 부족함은 소통으로 채우자

Travel~남은 인생에 여행을 선물하자

 

은퇴하고 나면 남는 게 시간이다. 여유가 생긴다. 따라서 노후 소득이 안정되고 건강만 챙긴다면 우리도 누구나 <꽃보다 할배, 할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모아 놓은 돈이 부족하고 약간 몸이 불편하더라도 지레 포기하지 말자. 여전히 소년, 소녀 같은 설레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충분히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여행, 이는 은퇴의 훌륭한 선물이다.

 

 

100세 시대, 사랑하는 방법도 바뀐다

 

요즈음은 가는 곳마다 <백세 인생>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세월에 따라 유행하는 대중가요는 바귀게 마련이다. 북한산 둘레길을 다니다 보면 배낭을 메고 가벼운 산책이나 산행을 즐기거나 한강 고수부지 도로를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는 신중년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음악을 크게 틀고서 듣는 노래가 바로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2014년 한국 애창곡 1위에 올랐다고 한국 갤럽에서 발표할 정도였다.

 

방송에서 고령의 연기자들이 황혼에 배낭여행을 다니는 꽃할배를 보게 되니 이젠 여행지에서 청바지를 멋지게 차려입고 여행하는 신중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지역복지센터에서 컴퓨터, 외국어 등도 열심히 배우고 심지어 자신의 재능을 나누는 자원봉사를 기꺼이 하는 신중년도 많다. 100세 시대, 이젠 사랑하는 방법도 바뀐다.

 

 

  

   

행복한 은퇴, 인생 5계計

 

생계生計~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신게身計~ 병치레에 대비하자

가계家計~ 지금부터 가족과 함께하라

노계老計~ 경제적으로 당당하게 자립하라

사계死計~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재취업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60세 이상 어르신의 1위 어려움이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밝혀졌다. 예로부터 나이가 들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4고苦가 있다. 병고病苦, 빈곤고貧困苦, 독고獨苦, 무위고無爲苦 등이 바로 그것이다. 빈곤고는 구직을 통해 일자리를 얻게 되면 어느 정도 해소가 가능하다. 재취업은 오히려 생활의 리듬과 활력을 만들어주므로 건강 유지에도 좋다.

 

재취업 성공 핵심 키워드

 

1. 고백하라

2. 도움을 청하라

3. 자존심을 버려라

4. 적극적으로 배워라

5. 끈기 있게 도전하라

6. 과거는 잊어라

7. 소득의 많고 적음을 생각하지 말라

 

 

은퇴 후 창업, 철저히 준비하라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2014년) 창업 후 3년 미만 폐업률이 59.5%이다. 이는 개인 사업체의 생존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2013년에는 자영업의 진입보다 퇴출이 처음으로 더 많게 나타났다. 그만큼 자영업 시장이 타격을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은퇴자의 경우 창업 후 실패하면 회복할 기간이 별로 없어 실로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이 든 은퇴자에겐 재테크의 방법으로 주식투자를 권하지 않는 게 상식이다.

 

실패한다면 그나마 조금 모아 둔 퇴직금을 한 방에 다 날려버리게 되는 셈이다. 만약에 타인으로부터 빚까지 얻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실패 확률을 사전에 줄이고 인생 2막의 성공을 거두려면 은퇴 전부터 미리 장기간 체계적으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세심힌 관찰과 함께 철저히 공부를 해야 한다.

 

 

 

미리 준비하자

 

책은 친근한 사례들, 즉 드라마, 영화, 노래 등에 전문가의 구체적인 자료와 조언이 더해진다.노후 준비가 거창하게 대비해야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우리 생활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일임을 느끼게 된다. 마음의 준비가 바로 첫 번째 노후 설계인 것이다. 30년 일하고 나머지 30년은 은퇴 후 노후 생활로 보내야 한다. 준비만이 즐길 수 있는 노후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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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중국사 2 - 삼국시대에서 당 왕조까지 만화로 읽는 중국사 2
류징 글.그림, 이선주 옮김 / 레디셋고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한漢 왕조가 400년 넘게 통일을 유지했던 중국은 다시 400년 동안의 분열 시대에 접어든다. 이 기간은 잦은 내란과 외적 침입으로 인해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질서를 회복할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었기에 지역의 세력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군사들을 키웠고, 이로 인해 귀족 세력이 강해졌다. - '서문' 중에서

 

 

위, 촉, 오 삼국시대에서 당 왕조까지

 

불안 심리가 극도에 달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의지할 뭔가를 찾는다. 대개는 종교에 기대 구원을 얻고자 한다. 국가이념이었던 유가儒家는 한 왕조의 몰락과 함께 쇠하게 되었다. 유가를 추종하던 관리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 현학玄學 운동을 시작했다. 현학이란 철학 사조를 말한다.

 

중국 북쪽 지방을 정복한 이민족 통치자들은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를 이용했고, 중국 귀족들은 불교에 맞서 도교道敎를 확립했다. 전쟁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사상은 다양해지고 중국 문화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오랜 분열이 계속되다가 6세기에 수隋 왕조가 중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그 뒤를 당唐 왕조가 이었다. 당의 통치자들은 제국을 재건하고 국경을 튼튼히 했다. 건국한 지 40년 만에 당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반면 당시의 유럽은 중세 암흑기에 빠져 있었다.

 

당나라의 황금기도 그리 길지 않았다. 제국의 경제와 인구의 규모가 커지면서 황실이 이를 제대로 통치할 능력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늘어난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리더십의 부재가 가장큰 원인이었다. 즉 중앙정부는 복잡하게 파벌이 얽혀있어 행정 마비 상태였던 것이다.

 

자연재해가 발생하자 이미 쇠약해진 나라는 백성들을 구호할 힘도, 반란군과 싸울 힘도 없었다. 25년간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고, 이 와중에 수백만 명의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 귀족 사회의 붕괴와 함께 천년 전통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통일 제국 당 왕조도 결국 '왕조 순환의 이론'을 피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분열의 시대(220~589년)

 

184년, 중국 북쪽에서 번진 전염병, 황허의 범람, 기근과 무거운 세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반란의 리더 장각은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차용한 요소들로 신흥종교인 '태평도太平道'를 만들었다. 당시의 핍박한 삶을 감안할 때, 세상을 치유하고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태평도는 충분히 먹혀 들었다.

 

한나라 황실은 온 국력을 동원해 6개월 만에 주요 반란 세력을 진압했지만, 이후에도 소규모 봉기는 2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질서 회복이 최대 현안이었던 한나라 영제(156~189년)는 지방 통치자들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즉 세금을 걷어서 반란군에 맞설 군대를 양성해 맡은 지역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영제가 죽자 황후 가족과 환관들이 후계를 놓고 다툼을 벌였다. 국경에 나가 있던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진입해 황실을 장악했다. 그러자 한나라 13개 지역 통치자들은 연합을 형성해 동탁에 맞섰다. 이후 동탁은 수도를 창안長安으로 옮기면서 뤄양洛陽은 완전 전소시키고 말았다. 2년 후, 동탁은 자신의 심복 장수 여포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반동탁 연합도 끝나고 무주공산이 된 국토를 군벌軍閥들이 각각 차지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후 30년 동안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으며 무려 120번이 넘는 전쟁을 치렀다.

 

 

 

삼국 시대에서 남북조시대까지

 

우리들이 익히 삼국지를 통해 알고 있는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의 삼국이 대립하는 국면이 진행된다. 이 중 조조가 이끄는 위나라가 가장 넓은 영토와 인구를 거느리며 제일 강성했다. 유비가 이끄는 촉나라의 국력이 제일 약했다. 촉은 손권의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위나라 공격을 위해 16차례나 원정을 떠났다. 아래를 참고하면 이해가 쉽다.

 

  

 

"화설천하대세話說天下大勢,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

- 소설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

 

이 말은 '세상이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오랫동안  나뉘어 있었다면 반드시 합쳐질 것이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었다면 반드시 나뉠 것이다'라는 뜻이다. 위, 촉, 오 삼국의 대결에선 결국 위나라가 촉나라를 정복한다. 그러나 위나라는 내부 문제로 붕괴되는데 265년 사마염 장군이 황위를 찬탈해 진晉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280년, 진이 오나라까지 멸명시킴으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마염, 즉 진나라 무제(236~290년)는 군인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집집마다 약간의 땅을 지급해 수확량의 반을 나라에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했다. 귀족과 관리들은 평민보다 최소 10배가 넘는 땅을 받았지만 세금은 적게 내거나 아예 내지도 않으면서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다.

 

무제가 죽자 나라는 파벌 싸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새 황제의 아내와 섭정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8명의 진나라 왕자들은 서로 황실을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황제의 자리는 하나인데, 자식이 많으니 시끄러울 수밖에. 덩달아 지방 귀족들도 편이 나뉘어 각자 원하는 왕자를 지지하면서 싸움을 키웠다. 내전이 15년 동안 이어졌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민족 유목민이 311년에 뤄양과 316년에 창안을 점령하면서 진나라의 황제를 포로로 붙잡았다. 이에 진나라 황실은 북을 포기하고 남으로 후퇴함으로써 마침내 서진 시대는 막을 내렸다. 317년, 진나라 황족이 황제에 올라 새로운 동진 시대를 선포했다. 북의 귀족들은 잠시 고향을 떠난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동진은 북쪽 땅을 찾기 위해 100년 넘게 13차례의 군사작전을 펼쳤지만 유목민들은 강했다. 오히려 그들은 남쪽 중국 왕조를 크게 위협했다. 376년, 저족은 새로운 왕조 전진前秦을 세우며 중국 북쪽을 통일했다. 383년, 전진과 동진은 비수에서 만났다. 군사력이 압도적인 우위였던 전진은 동진의 유언비어 살포에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이 유명한 비수대전이다. 이후 전진은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고 만다. 북위, 후량, 서진, 후진, 서연, 후연 등이 그것이다.

 

비수대전 후, 대승리를 거둔 장군은 420년 스스로 황위에 올라 나라를 송宋(유송)이라 칭했다. 439년, 선비족이 위나라(북위)를 세워 중국 북쪽을 통일했다. 남과 북 모두 자기들이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통치자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를 바로 '남북조南北朝'시대(420~589년)라고 말한다.

 

 

 

불교의 전파

 

중국 대륙의 북쪽에 사는 수백만 백성들은 늘 위협에 시달렸다. 전쟁과 군대 징집, 무거운 세금의 부과, 힘든 노동 때문에 괴로음이 만연되어 있었다. 이처럼 삶이 팍팍해지면 상대적으로 종교가 더 번창하게 되는 법이다. 이때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는 기존의 중국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불교는 중국의 신념체계에는 없었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기존의 유교는 아직도 삶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는 입장이었고, 이후 등장한 도교는 연금술과 명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했으나 연금술에 필요한 약물이나 광물 등에 소요되는 비용이 커서 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반면, 불교는 열심히 수련하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중국 남쪽의 양무제(464~549년)는 유교, 도교, 불교를 정치철학의 단계에 따라 다르게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젊을 때는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세우는데 군사력을 이용했고, 치국을 위해선 유교의 원칙으로써 사회질서를 구축했으며, 이후엔 도교의 철학을 통치 철학으로 수용했었다. 쉰 살이 넘어선 불교에 눈을 떠 이를 국가 종교로 채택했다. 그는 여러 차례 사찰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집무와 명상을 병행했다.

 

그런데, 양나라에 투항했던 북쪽 출신의 무장 후경이 변심해 548년 양나라의 수도를 공격함으로써 양무제는 궁궐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그 기간이 6개월 이상 이어지자 수도에 살던 주민 12만 명 중 불과 2천 명만 살아남았다. 후경은 궁궐로 침입해 최후의 공격을 했지만, 양무제의 "전투가 정말 오래 계속됐군. 피곤하지 않나?"라는 말에 퇴각하고 만다. 몇 달 후 양무제는 86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이후 내란이 뒤따랐고 남북간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북쪽 나라들은 남쪽을 침략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양나라는 분열 시대 중 가장 긴 40년 동안 번영한 나라였다. 그런데, 후경이란 인물이 불과 4년이란 짧은 기간에 이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557년, 양나라의 옛 장군이 양나라의 남은 지역을 장악해 새로운 진陳왕조를 건국했다.

 

 

수나라의 탄생(589~618년)

 

     

 

선비족과 다른 유목민족들은 몇 대에 걸쳐 중국 북쪽의 한족들과 결혼함으로써 결국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오늘날의 한족은 중국 인구의 92%, 세계 총 인구의 20%를 차지한다. 이는 지구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족 집단인 셈이다. 581년, 새로운 혈통의 한족인 문제(541~604년)가 중국 북쪽에서 수나라를 세웠다.

 

588년, 수나라는 51만 8천 명의 군대를 소집해 남쪽의 마지막 남은 나라 진陳을 굥격했다. 진은 저항하기에 너무나도 벅찼다. 589년, 마침내 수나라는 약 400년 간 지속되어 온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며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수 왕조는 강력힌 중앙집권을 위해 이전 왕조들의 통치제도를 개선했다. 만리장성의 축조와 인공 수로인 대운하 건설이라는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나라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수나라의 외부환경

 

북~ 트르트족

북서~ 비단길을 지배하는 토욕혼(선비족의 분파)

서~ 티베트족

북동~ 고구려, 거란족

남~ 참파족(현재의 베트남)

 

국경을 확보한 수나라는 이웃 국가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냈지만 유일하게 고구려만 항복하지 않았다. 수나라 황제는 고구려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영토나 군사력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다른 민족들과 동맹을 맺고 수나라의 국경을 급습하자 수나라는 598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악천후와 전염병이 불리하게 작용했고 고구려의 매복 작전에 유린당하며 완패하고 말았다. 사상자는 90%에 달했다.

 

두 번째 황제 양제(569~618년)는 복수를 위해 612년 100만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30만 5천 명의 별동대가 고구려 영토에 진입, 수도 평양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넓고 평평한 계곡에 위치한 살수에 도달했다. 정찰병은 강의 유속도 느리고, 깊이 또한 얕음을 확인햇기에 도강을 감행했다. 이 날이 바로 그들의 제삿날이었다. 미리 강 상류에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고 있었는데 수나라군이 도강을 하자 이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갑자기 빨라지고 높아지는 강물에 허둥댈 때 고구려 기병대가 맹렬히 공격했다. 겨우 2천7백 명만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이후에도 양제는 고구려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황실경비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나라의 재통일

 

수 양제의 사촌인 이연(566~635년)이 어지러운 수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당나라를 세웠다. 반란 세력들과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결국 10년 만에 모두 격퇴하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나라 시절 펼쳣던 군사작전 덕분에 주변의 유목민 세력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기에 당나라는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40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녹록하지 않앗다.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는 컸다. 나라는 농부들에게 경작할 땅을 주었으나 이들은 곡물, 옷감, 노동력 등의 세금을 납부해야만 했다. 그리고 땅을 받은 이상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할 수도 없었다. 반먼 도시에선 상류층이 관직의 95%를 차지하면서 옷감, 도자기, 술, 설탕, 소금 등 수익성 좋은 사업들을 운영했다. 법에 의한 불평등은 점점 커졌다. 그래서 색깔로 계층을 구분했다.

 

 

 

 

무측천(624~705년)의 등장

 

중국 역사에서 무측천, 즉 무조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는데, 태종이 죽자 황위를 이은 고종(628~683년)의 마음을 얻어 나랏일을 돌보게 되었다. 고종은 건강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무측천으로 선택한 셈이다. 이후 고종이 죽자 나라의 모든 실권은 그녀가 장악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의 많은 충신들은 무측천의 도덕적 결함을 이유로 그녀의 통치를 반대했다. 이에 그녀는 비밀경찰을 조직해 반대 세력들을 조직적으로 고문하고 처형하면서 혹독하게 다루었다. 이후 그녀는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불교를 이용했다. 대부분의 황족들은 도교를, 나라의 관리들은 유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602~664년)은 중국으로 귀국한 후 오랫동안 무측천의 후원을 받았다.

 

65세에 그녀는 아들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주周 왕조(690~705년)를 선포했다. 자신은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온 부처의 환생이라고 주장했다. 불교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그녀는 불교 사찰에 의료, 교육, 숙박, 대출, 자선 등 엄청난 특권을 부여했다. 또 불교 경전의 표준화를 위해 대규모 간행 사업도 후원했다.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목판 인쇄 책은 이때에 탄생했다.

 

 

 

705년, 팔십 세의 무측천이 병에 걸리자 관리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녀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복구된 당의 왕조는 계속 성장했다. 현종의 통치하에 경제, 문화, 둔사, 인구 등에서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다. 705년 3,700만 명이던 인구가 754년 5,2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그는 문화를 사랑했는데 악기를 연주하며, 작곡까지 했다. 궁궐에는 약 1만 명의 예능인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가 아끼던 양귀비(719~756년)는 가수, 무용수, 음악가, 작곡가, 시인이었다.

 

군사령관들이 나랏돈으로 사병을 얻어 세력을 키움에 따라 황실과 군사령관들 간에 갈등이 점점 커졌다. 커진 갈등은 폭발할 수밖에 없다. 755년, 투르크족 장군 안녹산(703~757년)이 반란을 일으켜 16만 4천 명의 정예병이 당나라 수도로 진격했다. 후퇴를 하던 현종에게 황실 경비대가 반기를 들었다. 이후 황태자 이형(711~762년)이 스스로 숙종이라 칭하며 황제에 즉위했다. 숙종은 외세인 위구르족의 도움을 받아 창안을 되찾았다. 8년 만에 안녹산의 난은 평정됐다.

 

황실은 반란군 진압에 조력한 40여 명의 군사령관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땅에서 왕처럼 행동했다. 황실이 지방의 정치와 경제에서 손을 떼자 지방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말, 나라는 분열된 채 쇠약해졌다. 859년부터 수십 년간 계속 폭동이 발생했다. 최악의 폭동은 '황소의 난'이었다. 귀족이 무너지면서 당나라도 종말을 맞이했다.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당나라의 멸망 후 중국은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들어섰다. 북으로는 침략해오는 유목민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해야 했고, 남으로는 예전의 당나라 군사령관들과 지방 군벌들이 12개의 왕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당 이후의 분열 시대는 이전의 369년에 비해 비교적 짧은 53년 동안 이어졌다.

 

960년, 중국 북쪽의 장군 조광윤이 중국 대부분을 통일했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이다. 이 왕조는 과학, 기술, 경제, 도시화 등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얼마나 어떻게 진보했을까? 3권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또한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주요 사건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냈기에 중국 역사를 처음 배우는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도와준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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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 - 창의적인 삶으로 나아간 천재들의 비밀
월터 아이작슨 지음, 정영목.신지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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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와 인터넷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명으로 꼽히지만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다락방이나 차고에서 발명가 한 명이 홀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 인물을 잡지 표지에 싣거나 에디슨, 벨, 모르스와 함께 만신전萬神殿에 모시기도 어렵다. 사실 디지털 시대의 혁신은 대부분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 '머리말' 중에서

 

 

인터넷과 컴퓨터의 역사

 

책의 저자 월터 아이작슨2012년 미국 <타임>지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된 바 있고 현재 애스펀 연구소의 CEO로 재직 중이다. 지난 23년간 <타임> 편집장으로 활동했고 CNN의 CEO를 역임했다. 또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와 '라디오 프리 유럽' 등 미국의 국영 국제 방송을 관장하는 미 방송위원회의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특히, 스티브 잡스의 전기傳記 작가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디지털 혁명의 개화기에 동참한 수많은 혁신가, 해커, 천재, 그리고 괴짜 등의 스토리들을 소개하면서 혁명은 한 사람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협업에 힘입었음을 강조한다. 물론 이중엔 창의력이 뛰어나고 천재성이 돋보이는 인물도 분명있다. 그럼에도 그는 팀워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계사는 위인들의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

- 토머스 칼라일

 

흔히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TV 방송의 개그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외치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사실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쓰여지는 역사의 주인공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다.

 

컴퓨터는 누가 발명했을까?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소개한다. 2차 세계대전 때 그는 영국의 암호해독팀을 운영하며 당시엔 해독 불가능했던 독일의 '에니그마' 해독에 몰두하면서 자동 해독기계를 개발한다. 그의 공로는 종전이 최소 3년은 앞당겨졌다고 평가받는다. 이 영화의 홍보 멘트에는 현대식 컴퓨터의 최초 발명가로 앨런 튜링을 소개하고 있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책은 디지털 혁명의 역사를 수십 명의 혁신가들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여기엔 빌 게이츠와 폴 앨런,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등 널리 알려진 인물들도 있지만 생소한 이름들도 많이 나타난다. 저자는 디지털 혁명이 전개된 모든 과정을 컴퓨터, 프로그래밍, 트랜지스터, 마이크로칩, 인터넷,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혁신 기술 중심으로 구분해 해당 기술이 탄생한 순간에 혁신가들이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일했는지를 함께 소개한다.

 

배비지의 차분差分기관에서 트랜지스터, 최초의 컴퓨터 ENIAC, 실리콘 밸리에서 월드와이드웹으로 이어져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혁명은 가히 놀랍기만 하다. 이런 디지털 혁명을 이끈 창의적인 천재들은 과연 누구일까? 전기 작가의 특징이기도 한 세밀한 화법이 돋보이는 이 책을 통해 디지털 혁명을 선도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에이다 러브레이스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1840년대에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녀는 위대한 시인 바이런 경의 딸인데, 1833년 5월 열일곱 살에 영국 왕실에 첫선을 보였다. 아버지의 낭만적인 정신을 진정시키려 어머니는 그녀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이런 결합 덕분에 에이다는 스스로 '시적 과학'이라 부르는 것을 사랑하게 됐다.

 

그녀는 궁정 사교파티에서 마흔한 살의 홀아비 찰스 배비지를 만났다. 그는 이미 런던 사교계에서 과학과 수학으로 유명인사였다. 그의 활기찬 살롱에 모이는 손님들은 귀족과 귀부인들을 비롯해 작가, 시인, 기업가, 배우, 탐험가, 식물학자, 과학자 등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혁신적인 기계를 선보였다. 거대한 기계 계산 장치로 다항多項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차분差分기관이었다.

차분기관은 돌려서 어떤 숫자에도 맞출 수 있는 원반이 달린 수직 축을 사용했다. 이는 개념상 경이로운 장치였다. 배비지는 차분기관으로 1,000만까지의 소수素數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낸 뒤, 이후 '해석기관'을 만들었다. 자카르 방직기와 천공 카드를 사용해 명령을 무제한으로 입력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냈지만 영국 정부는 그 가치를 몰랐다. 이 기계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사람은 에이다가 유일했다.

 

1842년 에이다는 해석기관을 설명해낸 이탈리아 공병 장교 루이지 메나브레아의 프랑스어 논문을 번역했다. '번역자 주석'이라 불린 이 글은 원문의 2배가 넘었고 원문보다 너무 유명해져 그녀를 컴퓨팅 역사의 우상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는 주석에서 100년 뒤 마침내 탄생할 컴퓨터의 네 가지 개념을 분석했다.

 

첫째, 무한하고 변화 가능한 일련의 작업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둘째, 해석기관의 연산이 수학과 수로만 제한할 필요가 없다

셋째, 오늘날의 컴퓨터 알고리즘 작동 방식을 단계별로 파악했다

넷째, 기계는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할 수 없다

 

 

 

 

책은 디지털 혁신을 이끈 천재 수백 명에 대한 '전기'다. 첫머리는 이렇게 에이다 러브레이스로 시작해 구글 이야기로 끝난다. 배비지의 차분기관이 트랜지스터, 최초 컴퓨터 에니악, 월드와이드웹으로 전개되어 마침내 구글과 페이스북을 만들어내기까지 혁신을 선도한 천재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앨런 튜링

 

1638년 그의 가문은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서열상 후손인 사람들은 땅도 재산도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성직자로, 아버지는 인도에서 하급 행정관으로 일했다. 그는 인도에서 잉태되어 부모가 휴가로 고국에 돌아와 있을 때 런던에서 출생했다. 그와 그의 형은 퇴역 육군 대령 부부에게 맡겨졌다. 이후 귀국한 어머니와 몇 년 함께 살다가 열세 살에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장학생이 되어 1931년에 입학해서 수학을 공부했다. 존 폰 노이만<양자 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그의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존 폰 노이만은 헝거리 태생의 수학자로 컴퓨터 설계의 선구자였다. 1936년 9월, 스물네 살인 튜링은 바다를 건너 미국 프린스턴의 수학자 알론초 처치 밑에서 공부했다. 

 

전쟁은 과학을 동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투석기를 제작했듯이 20세기에 들어 테크놀로지의 최고 공적의 대부분은 군부에 의해 탄생했다. 컴퓨터, 원자력, 레이더, 인터넷 등이 그것이다. 영국은 런던에서 87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에 독일의 암호를 풀기위한 테스크포스 팀을 가동하고 있었다.

 

튜링은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쓴 후 프린스턴에서 암호와 암호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암호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존 폰 노이만은 프린스턴에서 튜링의 멘토였다. 1938년 봄 튜링이 박사 논문을 마무리할 무렵 폰 노이만은 튜링에게 조교 자리를 제안했지만, 비애국적인 일로 느껴져서 케임브리지 연구원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독일 군사 암호를 해독하는 영국의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튜링 팀은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후 정보장교들이 노획한 독일 암호기를 기초로 애니그마 암호를 몇 가지 해독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고, '봄브'라는 별명의 더 진화된 해독 기계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1940년 8월, 투링 팀은 작동 가능한 봄브를 두 개 갖추게 되었고, 암호 메세지 178개를 풀 수 있었다. 종전 무렵엔 거의 200개로 늘었다. 당시 이들은 이진법을 사용했다.

 

튜링은 동성애자였다. 그는 기숙학교 시절 이를 스스로 느꼈던 것이다. 암호 해독팀에서 함께 일했던 연구원 여성과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이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결별하기도 했다. 그는 맨체스터의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서 열아홉 살의 부랑자를 만나 사귀었는데, '지독한 음란 행위'라는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생은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1954년 6월 7일,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깨물고 자살했던 것이다. 애플사의 로고가 바로 먹다 남은 사과이다.

 

 

 

 

 

벨 연구소, 그리고 트랜지스터

 

맨해튼 본사에 공간이 부족해지자 벨 연구소의 대부분이 뉴저지 주 머리힐의 80만 제곱미터 규모의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머빈 켈리를 비롯한 운영진은 신사옥을 연구 분야에 따른 개별 건물로 구분하지 않으면서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를 내려고 했다. 이들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창의성이 배가된다고 믿었다.

 

"건물과 건물은 부서 간의 지리적 단절 없이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긴밀한 접촉이 가능하도록 연결되었다" - 당시 어느 중역의 기록에서

 

여러 개의 복도는 축구장 두 개보다도 긴 길이로 설계되어 다양한 재능과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섞여 우연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전략은 그로부터 70년 후 스티브 잡스애플의 새로운 본사를 설계할 때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 연구원들은 연구소의 이곳저곳을 거닐다 맞닥뜨리게 되는 임의의 아이디어를 태양전지처럼 흡수했다.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공 세 개를 저글링하면서 기다란 테라초 복도를 오가는 연구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하는 괴짜 정보이론가 클로드 섀넌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익살스러운 메타포였다.

 

트랜지스터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이다.기다란 복도를 오가며 전문가들과 마주치고 양자 역학을 이해하는 연구원들과의 연구 모임을 갖고 카페에 앉아 전화 신호의 장거리 전송 방법에 정통한 엔지나어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런 환경이 바로 중요한 요인이었다. 벨 연구소는 혁신의 중심지였다. 트랜지스터 외에도 컴퓨터 회로, 레이저 기술, 이동 전화 분야를 개척했다. 하지만 이런 발명품을 활용하는 데 비교적 서툴렀다.

 

 

벨 연구소의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좌로부터) 

 

 

인텔의 방식

 

실리콘 밸리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인텔의 문화는 혁신의 문화이기도 했다. 이는 세 명에서 비롯됐다. 로버트 노이스는 외향적인 사람, 고든 무어는 내향적인 사람, 앤디 그로브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필코 사의 딱딱한 위계질서를 경험한 노이스는 보다 개방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은 직장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보다 빨리 도출되고 전파되고 개량되고 적용될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직원들이 명령 계통을 거칠 필요가 없어여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관리자와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에는 거리낄 것 없이 직접 가서 이야기하면 되었다" - 테드 호프, 인텔의 엔지니어

 

"노이스는 무수히 많은 계층과 등급으로 이루어진 데다 최고 경영자와 부사장들이 마치 기업 내 왕족 또는 귀족이나 되는 양 행동하는 동부의 기업 체계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톰 울프

 

노이스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와 인텔에서 명령 계통 자체를 의식적으로 멀리함으로써 직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모두 다 기업가 정신을 가지도록 강제할 수 있었다. 회의 중 분쟁이 일어나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도 그로브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노이스는 고위급 간부들이 평직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신 직원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게 두는 것을 좋아했다.

 

책임이 지워진 젊은 직원들은 혁신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톰 울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간혹 난관에 부딪힌 직원이 "노이스를 찾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타개책을 의논하려고 하면, 노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눈빛을 반짝이며 경청한 다음, '다음과 같은 지침을 줄 수 있네. A를 고려하고, B를 고려하고, C를 고려하게'라고 말하고는 영화배우 개리 쿠퍼를 닮은 특유의 미소를 띠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하지만 내가 대신 결정을 내려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네.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이처럼 다른 성격을 가진 노이스, 무어, 그리고 그로브엿지만,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바로 인탤을 혁신실험 정신, 기업가 정신이 번영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성공은 안주를 낳고, 안주는 실패를 낳는다. 결국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노이스와 무어가 편집광까진 아니었을지라고 결코 안주한 적은 없었다.

 

 

 

 

현대는 협업의 시대

 

책은 디지털 혁신을 이끈 각각의 이노베이터들을 조망하면서 이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무엇이 이들을 창의적인 인재로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마치 군웅할거 시대의 무수한 영웅들의 무용담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저자가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메세지는 단 하나 '협업의 중요성'이다.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책속의 인물들은 '협업'을 통해 현재의 성공을 거뒀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디지털 혁명은 특정 개개인이 일군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협업 하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강조한다. 이미 우리들은 창조와 혁신은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로 보완한 편집임을 알고있다. 이는 고 스티브 잡스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제로 천재성을 갖춘 개인의 능력은 아이디어를 실현해낸 기술자들과 이를 시장에서 유통시키는 탁월한 사업가를 만날 때 더욱 빛난다.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면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엔지니어가 구체적인 장치로 구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빌 게이츠는 폴 앨런이 있었기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현재의 구글도 세르게이 브린과 레리 페이지의 협업 위에 세워진 거대한 성城일 것이다. IT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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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자영업 트렌드 2016
허건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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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 시장은 생계형 창업 시장이며 부가가치가 낮은 시장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자영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실핏줄이다. 자영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인구만 1,000만 명이 넘는다. 시중 은행의 개인 사업자 대출은 2015년 10월 현재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자영업자의 가계 대출도 상당 부분 아파트 담보대출에 의존하고 있다. 자영업자가 부실화되면 금융기관의 건전성 문제와 아파트 가격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 '프롤로그' 중에서

 

 

자영업, 이젠 남보다 반 발 앞서가는 능력이 요구된다

 

책은 한 자수성가 기업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골 빈농貧農의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뒤늦게 대학에 입학, 서른 살 때 회사에 취직했지만 IMF 외환위기로 몸담은 회사가 부도 나자 자본금 5천만 원으로 1998년 창업을 했다. 현재 그의 회사는 자산 총액 약 7,700억 원이 넘는 부동산 개발회사로 성장했다.

 

책의 저자 허건 컨설턴트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자수성가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독특한 사고 방식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는 1세대 국내 부동산 개발 사업자로, 상가 투자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정평이 난 인물이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남들보다 반 발만 앞서면 된다"

 

유명 건설사가 아파트, 오피스텔, 상가 등의 부동산을 짓기만 해도 팔리던 시대는 끝났다. 부동산도 일종의 상품이므로 이젠 차별성과 독특함을 갖춰야 한다. 문 회장의 말에 의하면, 부동산 개발 사업자는 토지를 매입해 적정 설계를 바탕으로 인허가를 받고 금융을 일으켜 건물을 짓고 판매를 위한 마케팅을 수행하는 모든 과정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 즉 남보다 반 발 앞서가는 혜안이 필수적인 것이다.

 

그는 장기간 팔리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고양시 삼송지구 내의 땅을 LH공사로부터 매입해 총 5,000여 실의 오피스텔과 업무시설을 분양하는 M 프로젝트를 최근에 시작했다. 땅 값만 무려 2,850억 원인 거대한 프로젝트의 인근에선 유명 유통업체 신세계가 초대형 복합쇼핑몰을 건축하고 있는 중이다. 문 회장은 바로 이를 내다보고 과감한 투자를 실행했던 것이다. 최근의 부동산 시장 분위기는 전보다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행보에 무척 관심이 간다.

 

"다른 모든 선수들은 퍽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지만, 나는 그다음에 퍽이 튀어갈 곳으로 미리 달려갔다" - 웨인 그레츠키, 전설적인 북미아이스하키 선수

 

 

 

 

성실성만으로 성공하던 자영업 시대는 끝났다

 

어느 음식점의 사장을 소개하려 한다. 물론 그는 성공한 자영업자이다. 사십대 중반으로 서울 주택가 상권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연간 순이익이 2억 원이 넘지만, 그는 하루 종일 매장에만 매달려 있지 않고 오전 11시쯤 출근해서 저녁 8시 정도면 퇴근하는데 이마저도 본인이 조절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매장 운영을 항상 확인하며 운영 시스템 개선에 몰두한다.

 

한국 자영업자의 월 평균 수입은 약 200만 원 안팎이다. 반면 그는 최소 400, 최대 1,000만 원의 순이익을 내는 4 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남들은 한 개 매장에 집중해도 순이익을 500만 원 넘기기가 힘든데, 어떻게 그는 이런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었을까? 그의 비결을 파악해서 자영업 창업에 활용하면 되겠다.

 

그는 학교 공부에 소질이 없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연한 기회에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게 됐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후 여러 식당을 전전하며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됨에 따라 창업을 하면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10년 정도 주방에서 일하며 주방장까지 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 사촌 누나에게 동업을 제안해 2천만 원으로 작은 분식집을 창업했다. 입지가 좋지 않아 처음엔 고전했지만 점차 그의 음식 실력과 누나의 서비스 능력이 발휘되면서 점점 장사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식당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본격적인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평소 배달을 다녀 잘 알던 지역을 살펴본 끝에, 괜찮은 자리를 발견한 그는 이곳에 전문 음식점을 출점하기로 맘 먹고 고민 끝에 웰빙 음식인 추어탕 전문점을 시작했다. 점점 단골 손님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시련이 찾아왔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무려 3배나 인상 요청해 온 것이다. 확보한 단골을 잃을 수 없어서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매장에 두 가지 변화를 주었다. 하나는 영업시간을 24시간으로 변경했다. 다음으로는 메뉴를 보완했다. 주력 메뉴인 추어탕은 점심 손님이 대부분이었기에 저녁 시간과 겨울철 매출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사 외에 주류 매출이 가능한 감자탕을 개발해 새로 추가했다. 단골손님들도 반응이 무척 좋았다. 이렇게 1년이 지나자 충분히 인상된 월세를 커버할 수 있었다.

 

매출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때 직장에 다니던 둘째 형이 회사를 그만두고 이것저것 하다가 잘 되지 않자 매장을 하나 더 출점해서 동업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는 형과 함께 두 번째 매장을 확보해 이미 검증된 추어탕과 감자탕을 주메뉴로 승부를 걸었다.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하루는 알고 지내던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서 첫 번째 추어탕 매장 앞에 좋은 조건으로 가게가 나왔다고 연락이 와 바로 계약했다. 그는 주변 상권과 고객층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기에 다른 메뉴의 출점을 계획했던 것이다. 많은 조사 끝에 보리밥집을 개업했다. 초기엔 개업 효과로 매출이 잘 올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출이 꺾이더니 30% 이상 감소해 겨우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었다. 이때 한 직원의 아이디어로 생선조림이 보리밥과 잘 어울릴 수 있다고 판단해 이를 신메뉴로 출시했다. 반응이 좋았다. 현재는 신메뉴가 총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날 또 부동산 중개 사무실에서 권리금이 싼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매물로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추어탕, 보리밥 매장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바로 계약해 낡은 시설을 개보수하고, 음식 원재로의 질과 양을 모두 개선했더니 예전보다 매출이 30~40% 향상되었다. 비록 대박은 아니지만 월 400~500만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인근 지역에 자신의 매장이 몰려 있기 때문에 관리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창고와 주방 일부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공간 활용도도 매우 높다. 특히, 인력 활용이 압권이다. 한 매장에서 한두 명의 갑작스런 결원이 생기더라도 다른 매장 직원의 지원 근무로 이를 커버할 수 있었다. 직원은 총 25명으로 좀 많은 편이기에 이게 가능했다. 아울러 각 매장에 점장을 두고 해야 할 일을 매뉴얼로 준비해 두었기에 자영업 사장은 매장에 반드시 상주할 필요가 없었다.

 

성공한 자영업 사장의 연 소득은 직장인 연봉의 4~5배인 2억 원이 넘는다. 15년 전 사촌 누나와 각자 1,000만 원씩 투자해 소박한 분식점으로 시작한 그는 10년간의 주방직원 생활로 단련한 후 10년간의 창업과 안착 과정을 거쳐 5년간의 사업 확장과 성장을 통해 모두가 부러워 할 성공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25년간 식당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이젠 법무사인 큰 형도 은퇴 후 그와 함께 식당 동업을 꿈꾼다고 한다. 어릴 적 공부를 못해 부모의 속을 썩혔던 '미운 오리 새끼'과 화려한 '백조'로 거듭 태어난 셈이다.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확실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독한 창업이 요구된다

 

1년도 되지 못해 폐업이 속출하는 열악한 자영업 환경에서도 지역 상권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매장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영업의 창업과 폐업이 빠르게 돌아가는 악순환 구조 속에서도 상권을 장악한 이런 매장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단기간의 준비로 대박을 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앞서 살펴본 성공한 자영업자의 사례처럼 제대로 된 준비와 창업이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다.

 

3단계 준비 과정

 

적성~ 적성에 맞아야 즐겁게 일한다

교육~ 시계 수리점 사장도 아들이 학원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후 물려준다

수련~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세부 업종', '상권 및 입지', 그리고 '사업의 콘셉트'는 함께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는 법이다. 즉 사장의 신념과 아이템을 살릴 수 있는 업종, 인구통계와 고객 동선이 적절히 고려된 상권, 가시성과 접근성이 조화를 이룬 입지, '고객이 이 매장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사업의 콘셉트 등은 자영업의 전략적 마케팅 핵심 요인이다.

 

 

 

이 책의 저자 허건은 부모님이 평생 시장에서 일해온 자영업자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장의 가게들이 그의 놀이터였다. 전통시장의 작은 옷 가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자영업의 꿈을 키웠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글로벌 경영컨설팅 회사에서 경영컨설턴트로 일하며 삼성그룹 계열사, 외국계 금융기관 등을 대상으로 경영컨설팅을 수행했다. 이후 자기 사업에 대한 꿈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트렌드라는 게 있다. 자영업에는 이것이 더 빨리 진행된다. 이미 형성된 시장의 판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레드오션이라는 자영업 시장에 금이 가는 부분이 생기면 상대적으로 좀 더 수월하게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발생하지 않을까? 따라서 시장의 판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바로 트렌드다.

 

자영업 시장에서는 변화가 빠르게 일어난다. 경쟁자들의 구도가 빡빡하게 꽉 짜인 속에서 미세한 변화로 인해 균열이 발생하는 상황. 그 틈새에 기회가 있는 것이다. 자영업 사장님이 주목해야 할 외부 요인은 바로 그 변화의 모습, 트렌드다. 주야장천晝夜長川 정신력과 성실성만으로 자영업을 하던 시대는 이제 종말을 맞았다.

 

우리 모두 인지하다시피 자영업의 가장 큰 특징은 창업과 폐업의 발생 빈도이다. 즉 1년에 90만 명이 넘는 개인 사업자의 창업과 80만 명 이상의 폐업 발생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루에 2,500명이 시장으로 신규 진입하고 반대로 2,200명 넘게 가게를 부수는 현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상권에선 가게를 부수고 새로 인테리어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자영업자는 트렌드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크게 두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는 시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단계다. 두 번째는 그 일이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인해서 실행에 옮기는 단계다. 첫 번째 단계가 트렌드의 감지와 발견에 해당한다면, 두 번째 단계는 트렌드를 검증하고 실행하는, 즉 실행의 개시(진입)와 종료(출구)를 결정하는 단계다. 

 



일단 트렌드 아이템으로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면, 이미 진입 시점에 언제 빠져나올지에 대한 출구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일단 해보고 상황을 봐가면서 출구 전략을 세워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트렌드 아이템은 늘 금방 사그라질 가능성이 크다. 미리 준비하고 있는 자가 한발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최근의 트렌드 아이템은 '성장기'가 매우 짧아 수백개의 매장이 금방 생겨나므로 상투를 잡을 수도 있다. 진입하려면 '도입기'에 창업을 하는 게 현명하다.

 

출구 전략

 

1. 매도를 통해 신규 임차인에게 사업을 양도한다~ 권리금 회수가 핵심

2. 동일한 자리에서 업종만 갈아탄다~ 시설투자에 대한 회수 검토

 

 

현재의 자영업, 구조조정이 진행될까?

 

이에 대해 자신있게 '예'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영업의 규모는 꾸준히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지금의 규모가 유지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자영업에 해당되는 소매와 유통 부분에서 큰 변화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즉 모바일 채널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인구 감소는 매출에 있어서 분명한 악재이다.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분석해보면 매출 증대를 통한 수익의 증가가 힘든 판에 비용은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임대료, 재료비, 인건비 등 3대 주요 비용 모두 상승 추세이다.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오를 게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대형 할인업체처럼 고객을 유입하기 위한 '덤핑 세일'을 할 수도 없다. 소비자는 이미 싼 가격에 길들여져 있고, 같은 가격이면 어디에서 구매해야 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현명한 스마트폰 때문이다.

 

점심 식사 후 직장 동료들과 어디에서 커피를 마시는가? 지금도 스타벅스나 엔젤리너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사실 이 책에 관심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1,000원 커피에 익숙해 있다. 동료들도 대부분 이 가격대의 커피를 선호한다. 이 마저도 아까운 사람은 사무실에서 인스턴트 '스틱 커피'를 즐긴다. 이것이 트렌드다.

 

결과적으로 자영업자들은 수익성 때문에 스스로 이를 포기해야 되는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향후 5년 동안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성실함만이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역량을 배양하는 것은 기본이고, 외부에 대한 시야를 계속 넓혀가야 한다.

 

시장에 대한 촉을 더욱 가다듬어야 한다. 고객의 니즈 변화나 경쟁 동향을 감지할 수 있는 촉을 통해서 경영을 개선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시류에 맞게 트렌드를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소비자가 줄어드는 시대에는 소비자가 일부러 찾아오도록 만드는 궁극의 경쟁력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소비자를 직접 찾아 나서는 전략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이제는 카페나 샌드위치 매장 사장도 신규 고객 개척을 위해 제안서를 써야 하는 시대가 됐다.

 

 

청년 장사꾼들

 

창업이란 궁극적으로 스스로 고객을 창출하는 활동이다. 고객을 창출하려면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특정 기술을 기반으로 가치를 만들려면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벅찬 일이다. 스티브 잡스, 마크 저그버그, 빌 게이츠 같은 스타트업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집에서 몇 번 요리했더니 먹을 만하다고 음식점 창업에 나설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IT 창업에 비해 생계형 창업이 좀 쉽다고 여기는 게 일반적이라 요즈음은 청년 장사꾼들의 등장이 많은 편이다.

 

청년들의 자영업 형태

 

1. 독립점

2. 프랜차이즈 가맹점

3. 청년 상인 조직

 

청년들이 자영업 창업에 나서면 성공 사례들이 좀 더 늘어날 것이다. 제2의 장진우, 청년장사꾼은 물론이고 조용하게 매장을 확장해나가는 청년 상인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들로 인해 어두컴컴하던 골목이 환해지고 개성과 문화가 살아 있는 지역으로 되살아날 수도 있다. 전통시장의 활력이 살아나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고객층이 넓어질 수도 있다.

 

창업은 청년들에게 취업 이외의 진로를 제시한다.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생계는 물론이고 노후의 삶까지도 책임지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회사 생활에서는 얻기 힘든 자신만의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비록 처음에는 생계형 자영업으로 시작했으나 그 속에서 제2의 창업 아이템을 찾을 수도 있다.

 

 

자영업 사장, 이젠 O2O도 알아야

 

최근 1~2년 사이에 O2O라는 말이 많이 퍼지고 있다. 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다. 이는 쌍방향이다. 즉 스마트폰으로 고객을 모아서 매장으로 보내주는 서비스만이 아니라, 매장에서 스마트폰의 온라인 공간으로 고객을 연결해주는 활동이다.

 

배달앱과 배달 대행앱을 통한 음식점의 온라인화는 고객의 편의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젠 배달하지 않는다면 어느 고객이 당해 음식점에 주문을 하겠는가? 이렇게 트렌드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소위 '배달의 민족'으로 표현되는 한국식 배달 문화는 이미 동남아 시장에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이를 이용하지 않는 음식점이라면 적극적인 배달 대행앱의 사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소매업의 경우는 이제 O2O 물류 서비스를 필두로 본격적인 물류와 배송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어찌 보면 유통업에서 업체 간의 갈등은 업의 본질적 성격일 수도 있다. 유통은 말 그대로 상품이 흘러서流 통하는通 업인데, 소비자가 구매하는 상품의 양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 많이 통하게 되면 다른 한쪽으로는 적게 통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오프라인 매장의 온라인화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한 배달앱이나 배달 대행앱처럼 자영업 매장에 대한 '주문의 중개 및 물류 대행'이다. 오프라인 매장이 자체적으로 수행했거나 수행하지 못했던 부분을 푸드테크 같은 기업들이 수행하는 영역이다. 둘째, 모바일을 통한 '실시간 개인화 커뮤니케이션' 방향이다. 즉, 모바일을 통해 자영업자와 고객 간에 예전보다 훨씬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다. 이는 오프라인 자영업 매장들이 다양한 모바일 마케팅 도구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중식 시장으로 사람이 몰린다

 

이는 일본에서 파생된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집밥과 외식의 중간 형태인데, 슈퍼마켓 등에서 식재료를 구입해 가정에서 조리해 먹는 것을 집밥, 레스토랑이나 식당에서 사먹는 것을 외식으로 나눈다면 슈퍼마켓에서 반찬과 도시락을 구입해 집, 직장, 학교에서 간단한 조리나 가열을 거쳐 먹는 식사 스타일을 가리킨다.

 

편의점 도시락은 매년 몇십 퍼센트씩 성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국의 도시락 전문 매장은 정체 수준이다. 대형마트와 대기업 계열 식품 제조회사가 중식 시장에 들어오면서 중식 시장뿐만 아니라 집밥과 외식 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소상공인들도 직간접적인 영향권 내에 들어오게 됐다. 중식 시장이 커지면서 집밥, 외식, 중식 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식생활을 두고 경쟁하는 업체들은 더 이상 소상공인들에 머물지 않고 기업화, 산업화되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중식 시장 동향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기본기를 재조명하다

 

2014년 기준,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 중 가맹점 수가 50개 이상이면서 창업 비용이 1억 5천만 원 이하인 곳의 매출액을 살펴보면, 김밥 매장 '바르다 김선생'이 1위이고 삼겹살 매장인 '하남돼지집'이 4위이다. 김밥과 삽겹살은 단기 유행성 아이템이 아니다. 그럼에도 높은 매출을 보인다. 이 두 브랜드는 잔기술이 아닌 알찬 기본기로 두각을 나타냈다.

 

'바르다 김선생'은 '죠스떡볶이'의 두 번째 브랜드이다. 종편방송 채널A에서 방영된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은 고발 형식 프로그램이었다. 먹는 것으로 장난치는 가게나 업체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공분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착한 식당'이 대두되었고, '죠스떡볶이'의 나상균 대표는 이를 새로운 프랜차이즈 사업 기회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미 김밥집은 정말 많다. 그는 김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즉 싸구려 식품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프리미엄 김밥이었고, 모든 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착한' 식재료를 표방하는 '바른 재료'라는 홍보 문구를 사용, 김밥집이 아닌 김밥 식당으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지금 창업 시장에서는 3,000개가 넘는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이 있다.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3,000가지의 차별화'를 주장하는 브랜드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히려 기본을 강조한 업체가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창업 시장에서 크게 부각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자영업의 환경과 여건이 나쁠지라도 자신만의 개성과 강점을 살린다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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