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 손정의의 '자기가 원하는 인생' 특강
소프트뱅크 신규채용 라이브 편찬위원회 엮음, 정은영 옮김 / 마리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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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 그룹은 매년 신규채용을 위해 유스트림 생중계로 '소프트뱅크 신규채용 라이브'를 실시한다. 이 강연에서 손정의 회장은 젊은이들이 꼭 새겨두었으면 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내 인생을 걸고 무엇을 이루어낼 것인지 화두를 던진다.

 

 

손정의 회장의 강력한 메세지를 듣는다

 

이 책은 손정의 회장이 강의한 내용 중 핵심내용을 뽑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손정의 회장이 생각하는 '최고의 인생''일하는 방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평생을 양복을 입은 전사로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삶과 일생은 자신이 한 말들을 실

 

 

디지털 정보혁명에 발맞추어 급성장 가도를 달리는 소프트뱅크 그룹은 매년 신규채용을 위해 유스트림에서 생중계로 '소프트뱅크 신규채용 라이브'를 실시한다. 여기에서 손정의는 차세대를 이끌고 갈 젊은이들이 꼭 새겨두었으면 하는 일하는 법, 인간관계, 성장, 인생설계, 대국관 등의 이야기를 펼친다.

 

책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그 편찬 작업을 위해 결성된 팀이 소프트뱅크 신규채용 라이브 편찬위원회다. 이 책에 담긴 손정의 회장의 말들은 본인 스스로 실제 삶에서 실천하며 얻은 깨달음들이다. 이는 모든 젊은이들로 하여금 스 

 

 

 

 

오를 산을 정하라

 

손정의는 열다섯 살 때 <료마가 간다>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인생관이 송두리때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 책 때문에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미국행 유학을 결정했던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끝내고 왕 중심의 중앙집권제 근대 국가로 재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인데, 바로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에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정의가 감동한 것은 돈, 지위, 명예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목숨까지 내던진 료마의 고귀한 뜻에 있었다. 어릴 적부터 손정의가 가졌던 국적이나 열등감 등이 실로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가서 세계를 꼭 보리라'고 결심했으며, 열여섯 살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추구할 테마를 찾아라"

 

손정의는 소프트뱅크가 지금까지 올라온 산을 이렇게 되돌아본다. 1부 능선을 'PC 시대의 승부기', 2부 능선을 '인터넷 시대의 승부기', 3부 능선을 '브로드밴드 혁명에 도전하던 시기', 4부 능선을 '모바일 인터넷 1등에 도전하던 시기', 그리고 5부 능선을 '아시아 인터넷 1등'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산이라는 것은 올라가보면 등산로마다 새롭게 보이는 풍경이 있다. 5부 능선이라고 생각하는 곳까지 올라와보니 앞으로 올라야 할 산은 더욱 높고, 지금 있는 곳은 아직 등산로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진정한 등산은 지금부터 시작인 것이다.

 

손정의는 열다섯 살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영어연수를 목적으로 미국을 여행했는데, 그때의 체험은 바로 신천지를 목격한 것이었다. 료마는 '세계로 나가고 싶다, 믹구을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는 뜻을 정하고 해운건설에 종사하며 그런 기회를 노렸지만 결국 가지는 못했다.

 

기회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기회를 살리는 사람은 적다. 손정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승부수를 띄웠다. 그 분기점이 된 것은 도망갈 길을 끊으면서까지 기회에 도전할 용기가 있는가 없는가였다.

 

손정의의 '인생 50년 계획'

 

20대~ 이름을 알린다

30대~ 사업자금을 모은다(1천억~2천억 엔 규모)

40대~ 한판 승부를 한다(1조~2조 엔 규모)

50대~ 비즈니스 모델을 완성한다

60대~ 다음 경영진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손정의는 열아홉 살 때 이 계획을 세운 이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인생의 길을 대략 결정하면 다음에는 그 이념에 따라서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뜻을 가지고 일을 이루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지침이 된다. 10년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행동함으로써 인생의 목표달성률이 크게 달라진다. 앞으로 10년 간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생각해야 한다.

 

 

확신이 있다면 흔들리지 마라

 

자신의 손익만 계산하면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소프트뱅크의 자회사가 수익을 내고, 경쟁 회사도 도움을 받고, 전 국민은 기뻐할 것이다. 설령 후세에 이름이 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명예도, 지위도, 돈도 필요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맞서 겨룰 수 없다. '야후 BB' 프로젝트는 그런 굳은 결심으로 실행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명예욕 때문에 시작한 것이 아니다.

 

 

목표를 정했으면 다른 것은 신경쓰지 마라

 

'이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정했으면 그것을 위한 수단에까지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성장 단계에서는 지금까지의 방식이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시대에 맞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럴 때에도 항상 최선의 방법을 바로 그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목표 달성은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지혜는 짜면 짤수록 나온다

 

참 신기하게도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지혜라는 것은 짜면 짤수록 나왔다. 하루 아침에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말고 꾸준히 하다보면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을 최소 1년간 지속하기만 해도 큰 자신감을 안겨줄 것이다. 무엇보다 끝까지 해내는 일, 그것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꼭 이야기하고 싶다. 

 

"하루 5분씩 1년간만 에너지를 쏟아부어 보라"

 

 

열정이 사람을 부른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힘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열정이다. 내 마음속에 열정이 있으면 상대에게도 반드시 전해진다. 이것이 바로 꿈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힘이다. 설령 꿈을 이루지 못해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 꿈을 계속 추구하고 있는 동안은 꿈의 달성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배워라

 

정상에 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비즈니스맨에게는 항상 겸손이 요구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의 장점이나 생각을 흡수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 상대방과 한데 어울려 '친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방법을 관철시키는 강인함도 필요하다. '겸손함'과 '자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함'을 양립시켜라.

 

 

 

 

 

시대를 쫓아가서는 안 된다

시대를 쫓아가서는 안 된다. 다음 시대에 무엇이 올지 먼저 읽고 준비하며, 시대가 쫓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소프트 뱅크의 이동통신 사업은 휴대전화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는 목적이 아니라 모바일 인터넷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서로 나눈다. 이것이야말로 '정보혁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잘 안 될 때야말로 액셀을 밟아라"

 

어떤 일에도 어려움은 따른다. 용기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히 지키고 싶다는 책임감에서 나온다.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다보면 비로소 길이 열리기도 한다. 높은 뜻, 그것을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흙탕물을 마실지라도.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라

 

한 가지 일에 결사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다. 그렇다고 자기만족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그런 마음을 조금씩 공유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인류가 더욱 평화로워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다.

 

 

 

 

 

 

책에서 답을 찾다

 

 

스펙이나 학벌, 그리고 부모의 재력이 별로라면서 '헬조선'을 외치기엔 우리 젊은이들은 여전히 앞날이 장창하다.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자신을 강력하게 이끌어주는 누군가도 필요하다. 이에 손정의를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내 인생을 걸고 무엇을 이루어낼 것인가?'라는 화두를 붙잡자. 이삼십대 청춘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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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예쁜 손글씨 - 모던 감성 캘리그라피 라이팅북
김경주 글, 캘리그라피 김진경 / 소라주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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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문장들은 그동안 출간한 시집과 산문집, 희곡집 등에서 부분을 골라낸 것이다. 안구건조증이 심해서 희미하게 보이는 부분을 사랑하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이 문장들은 조금씩 희미해지는 문장들, 다가가면 사라지는 문장들, 늘 내가 서성거렸던 문장들이다. 이젠 나보다 독자들과 더불어 살면 더 좋을 것이다. 아름다운 캘리그래피 작업을 해주신 김진경 작가님께 감사를 드린다. 문장가로 살고 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문장과 글씨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

 

이 책은 김경주 시인의 차고 쓸쓸한 마음을 노래하고 그런 마음들을 쓰다듬는 문장들을 왼쪽은 캘리그라피 작품, 오른쪽은 작품의 글씨만을 투명도 처리하여 따라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문장의 감성에 대한 필사와 글씨의 감성에 대한 훈련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서이다. 왼쪽의 캘리그라피 작품을 통해, 글씨의 배열과 배치, 조화 등에 대한 감각, 감성 등을 익히는 데 탁월할 것이다.

 

 

김경주는 시인, 극작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고래와 수증기>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패스포트>, <밀어>, <펄프극장>, <자고 있어, 곁이니까> 등이 있다.
희곡집으로는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블랙박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등이 있고, 어른들을 위한 모노동화 <나무 위의 고래>가 있다. 

 

 

 

 

 

 

 

좋은 캘리그라피는 좋은 문장에서 시작된다

 

좋은 캘리그라피는 좋은 문장에서 시작된다. 하나의 단어나 생활언어로는 글씨 쓰는 연습을 할 수는 있겠지만, 감성 캘리그라피에 다다르기는 어렵다. 캘리그라피에 유독 '감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이유는, 캘리그라피는 획일화된 글씨가 아니라 '나만의', '당신만의' 손글씨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의 문맥과 느낌을 받아들이고 나만의 감각과 감성으로 써내려가는 것이 캘리그라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캘리그라피를 하고 싶거든 좋은 문장을 만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이 책은 문장의 진동을 이어 받아 마음의 울림으로 쓴 캘리그라피 작품집이기도 하다. '좋은 안목에서부터 좋은 캘리그라피가 탄생한다'는 기본에 충실한 책이다. 캘리그라피를 배우려는 독자들이 제일 먼저 손에 들어야 할 책이며, 제일 처음으로 따라 써봐야 할 책인 것이다.

 

문장마다 길이뿐만 아라 그 성격도 다르고 필기구에 따라 글씨의 질감, 두께, 크기 또한 다 다르기 때문에, 오른쪽은 선택된 문장과 선택된 필기구에 맞는 크기를 따랐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한 번, 어떤 작품은 네 번까지도 따라 쓸 수 있다. 오른쪽에 투명도 처리된 글씨를 쓰고도 여유가 된다면 스스로 글씨를 써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예쁜 손글씨를 쓸 수 있는 다양한 필기구들이 소개되고 있다. 식사 후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이쑤시개, 편의점에서 라면 먹을 때 이용하는 나무젓가락 등도 포함되어 있다. 하기사 '명필이 붓을 탓하랴'라는 말처럼, 뭐든 필기구로 이용하지 못 할까 싶다. 붓펜, 색연필, 만년필, 펜촉, 플러스펜, 캘리그라피펜 등 이를 이용해 다양한 글씨들이 선보인다. 책의 특징은 어떤 필기구를 활용했는지 우측 상단부에 표시되어 있다. 아래는 쿠레타케 붓펜(라바그립)응 이용한 손글씨 샘플이다.

 

 

 

 

 

읽지 말고 보라

 

이 책은 글씨에 대한 가이드북이다. 좋은 문장을 읽는 것도 좋지만, 이보다는 좋은 글씨체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책 속의 125개의 작품들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따라하고 싶은 맘에 드는 글씨체가 있다면 바로 연습에 돌입해보자. 첫 시작은 미약하지 모르겠지만 꾸준한 노력은 놀랄 만한 결과를 우리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존재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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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수환 추기경 2 - 인간을 향하여 아, 김수환 추기경 2
이충렬 지음, 조광 감수 / 김영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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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님의 선종 7주기인 올해, 전기작가이자 김수환 추기경님의 동성중고등학교 후배인 이충렬 실베스텔 씨가 김수환 추기경님의 87년의 삶을 복원한 전기를 지난 3년 동안 준비한 노력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저조차 생각하지 못한 사진자료 또한 풍부해서 놀랐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두 눈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나눔을 몸소 실천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참 행복의 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1980년 1월 1일 아침, 새벽잠에서 깨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제의를 입고 3층 소성당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지난 10년 동안 희망으로만 품고 있던 민주화와 정치 발전이 질서 속에서 평온하게 이루어지고, 가난한 사람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집무실로 온 김수환 추기경은 시계를 봤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몇 몇 군인 신자들이 새해인사를 오겠다는 시간이 가까워왔다. 전 소장은 2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1978년 강원도 1사단 사단장으로 부인해 사단의 성당 준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였다. 또 강원도를 관할하건 지학순 주교, 1사단 군종신부인 정인준 신부 등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잠시 후, 전 소장 일행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모두 위풍당당했지만 추기경 앞에선 겸손했다. 새해 덕담이 오고간 후 12.12 사태 이야기로 넘어가며 전 소장은 "추기경님, 그때 정승화 총장이 10.26 박정의 시해 사건과 관련된 혐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연행 조사가 불가피했습니다"라면서 당시 상황을 길게 설명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김수환 추기경은 "전 소장 말을 들으니까 어떤 점은 좀 이해되는데,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전체를 위한 정권이 서부활극 모양으로 돼서는 안 됩니다. 어느 쪽이 총을 먼저 빼들었느냐에 따라 군의 전권이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전 소장 쪽이 총을 뽑았기 때문에 군대의 실권을 잡은 것 아니오"라고 말했고, 전두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우리 국민은 정말 군이 나라를 위해 국방에 전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가 지금처럼 힘의 공백 상태에 있을 때 군인들이 다른 마음을 갖는 일이 생겨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이니, 새로운 정부가 성공적으로 출범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수환

 

 

 

6.10 민주항쟁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민정당은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개최했다. 같은 시간,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는 옥외방송을 통해 오후 6시 국민대회 참여를 호소했다. 점심때가 되자 무교동 식당으로 가던 지장인들도 민추협 회원과 민주당원들과 어울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에 시민들도 동조했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은 오후2시부터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직전을 펼쳤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오후 6시 30분에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가 진행되었다. 이 미사에는 고 박종철의 어머니가 참석해 40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2천여 명의 시위대는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 축하 리셉션이 열리는 남산 힐튼호텔로 향했고, 호텔 부근에서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날 서울에서 시위는 밤 11시경까지 도심 60여 곳에서 계속됐다. 퇴계로와 신세계백화점 앞의 시위대 중 1천여 명이 경찰에 쫓기며 9시경부터 명동성당으로 들어왔다. 학생과 시민들이 섞인 시위대는 문화관에서 철야농성을 했다.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로부터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받고 시위대를 설득해 자진해산시켰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 김수환 추기경

 

 

 

나도 출마합니다. 지역구는 천국입니다

 

2002년 1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은 동아일보 이광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지난 연말부터 몇 번이나 혜화동 주교관 비서수녀를 통해 간곡한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간단하게 근황을 묻고는 "추기경님의 숙소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까지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숨길 것도 없어 침실까지 보여줬다.

 

다시 집무실로 내려온 후 그는 이 기자에게 "부탁을 들어줬으니 나도 부탁할 게 있다"면서, 자신의 얼굴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를 건넸다. "저도 올해 출마합니다. 기호는 1번입니다" 기자가 깜짝 놀라며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지역구는……", '지역구'라는 말에 기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천국입니다" 그 특유의 유머였다. 그러나 기자는 올해 80세 노老 추기경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에 웃을 수가 없었다.

 

 

열린우리당을 향한 쓴소리

 

2004년 4월 28일, 김수환 추기경은 동국대 불교경영자 최고위 과정 초청 특강을 했다. 그는 '21세기 지도상'이란 주제를 놓고 새로운 정치의 지도자들은 독선과 배척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에 기반을 두고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와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들의 소리에 귈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새 시대의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말했다.

 

특강이 끝난 후 한 수상생이 질문을 했다.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가 칼럼에서 김 추기경을 비판한데 이어 후배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도 김 추기경을 시대에 뒤쳐진 분이라고 비판했음을 거론하면서 이에 대한 김 추기경의 심정과 입장을 정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이렇게 답변했다. 이 말은 오랫동안 언론과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다.

 

"그런 비판을 한 분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의 지적은 저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 하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을 때 '너는 그동안 칭찬을 다 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칭찬 들을 말은 없다'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비판과 욕을 먹는 것이 제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강연에서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고 한 것은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은 전날부터 시작된 폐렴 증세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문병 온 정진석 추기경과 염수정 주교, 조규만 주교 등 서울대교구 주교단과 명동성당 주임 박신언 몬시뇰에게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세요"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명동성당 종탑에서는 뎅그렁뎅그렁 열 번의 조종이 울렸다. 그가 늘 바라보던 십자가 아래에서는 추기경 휘장과 검은 리본이 바람을 따라 펄럭였다. 그의 나이 87세였다. 다음 날,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각막이식수술을 받고 눈에서 붕대를 풀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빛이 보였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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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수환 추기경 1 - 신을 향하여 아, 김수환 추기경 1
이충렬 지음, 조광 감수 / 김영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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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시대를 살았던 추기경 김수환의 생애는 개인사에 그치지 않고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전기임과 동시에 당대를 살았던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에 관한 집단 전기이기도 하다. - '감수의 글' 중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를 따라

 

1951년 9월 15일, 한국전쟁을 발발한 북한이 연합군에 밀려 항복 직전까지 이르게 되자 뒤늦게 전쟁에 참여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중국 인민군은 낙동강을 넘지 못하고 후퇴했다. 당시 대구에선 전투가 없었고 평민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대덕산 자락의 빼곡한 초가집 굴뚝에서는 저녁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직 가을이라기엔 이른 시기였다. 대덕산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 물은 계산동으로 흘러들었다. 개천을 따라 시내로 가는 길목에는 붉은 벽돌의 대구대성당(현, 계산성당)이 있다. 조선시대 끝자락에 대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들이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성당이다. 두 개의 뾰족한 첨탑, 그 위에 십자가가 있다. 이곳은 대구 천주교의 중심 성당이라 일요일엔 신자들로 붐볐다.

 

오늘은 토요일임에도 개천을 따라 이곳을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명의 새로운 신부가 탄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대국가 고향인 김수환 부제副祭와 왜관 출신의 정하권 부제였다. 서울에서 대신학교(사제가 되기 위한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를 다니다 대구에 피난와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는 것이다.

 

당시 신학교의 과정은 길었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2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둥학교) 을조에서 소신학교 과정 5년, 대신학교 6년, 총 13년이었다. 이렇게 긴 과정을 마치고 신부가 되는 사람은 입학 때의 5분의 1 정도였다. 그런데, 김수환 부제는 동창들에 비해 4년이 늦은 17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해방 후엔 일본군 전범재판의 증인으로 괌에 다녀오느라 2년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김수환 부제의 친가와 외가는 조선 말 천주교 박해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오래된 교우집안이다. 할아버지는 대원군의 병인박해 때 희생된 순교자이고, 어머니와 두 누나는 대구 성요셉성당(현, 남산성당)의 오랜 신자였다. 셋째형은 사제 서품을 받은 김동한 신부다. 외가도 외할아버지, 큰외삼촌, 이모들 모두 신앙심이 깊다고 소문난 신자들이었다. 이처럼 친가나 외가를 아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 대구대성당으로 김수환의 서품식을 축하하러 왔다.

 

 

    

 

김수환의 부모는 경상북도 칠곡 장자골 옹기촌에서 결혼했다. 당시 아버지는 서른한 살, 어머니는 열입곱 살이었다. 천주교인끼리의 중매결혼이었다. 결혼 후에도 '옹기장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조선 말 천주교 박해 때 순교자의 자손이나 피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옹기 만드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 천주교에서 '옹기장이'라는 단어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옹기를 구우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조선시대의 신자와 가난한 옹기촌에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근대의 신자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래서 훗날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아호雅號를 '옹기'라고 했다. 서품식이 끝나고 가족사진 촬영 후 두 모자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곧 칠순이 될 어머니는 막내아들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이는 천주교 집안의 전통이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내 아들이 아니라 천주님의 아들이니, 신자들을 잘 잘 보살피이소"

 

 

식민지 소년의 분노

 

당시 제6대 대구교구장을 역임했던 최덕홍 신부(1902~1954년)가 김수환에게 사제 서품을 수여했다. 두 사람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1939년 6월 25일, 최 신부가 소신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4학년이던 수환의 가슴속에 있던 불덩이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신 과목이 끝나자 장면 교장은 그를 교장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얼마 후 그가 시무룩한 모습으로 교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짝인 김정진이 물었다. "스테파노, 요왕 선생님(장면의 세례명이 요한이었다)이 왜 부르신 거니?" 수환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대답했다. "며칠 전에 수신시험 답안지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라서 천황의 칙유勅諭(친히 내린 말)에 대해 소감이 없다고 썼다고 따귀를 맞았어.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말씀도 하셨고. 아무래도 학교에서 쫓겨날 것 같아"

 

그때 동성학교 교사들 중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분들이 많았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유홍렬 선생은 역사를 가르쳤는데,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척하면서 한국사를 얘기해주었고 한문강사였던 조윤제 선생은 <적벽부>를 가르치면서 신라의 화랑도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또 장면 선생이 교장 업무 때문에 수업을 많이 못하자 새로 부임한 이훈 영어 교사는 창밖을 힐끗거리면서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밖에 많은 한국인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일제의 만행들을 이야기했기에 수환의 마음속엔 분노의 불덩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유학과 박사학위 포기

 

1962년 10월 11일, 가톨릭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참석한 주교만 2,540명이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준비중이던 수환은 독일인 친구 신부들과 함께 바티칸 방송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놓고 발표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대역사였다.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그 발표를 듣는 순간 김수환 학생신부는 강한 전율을 느끼며 온몸이 굳는 듯했다. 이미 회프너 교수신부와 폴크 교수신부의 강의를 통해 들었던 내용들이라 얼른 이해가 됐다. 바로 이거다! 이제 가톨릭이 세상을 향해 엎드리는구나! 성신(성령)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의 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도교수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차 로마에 와 있던 서정길 대주교에게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독일에서 보낸 7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비록 박사학위는 받지 못햇지만, 새로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신학적 시야와 사고의 폭이 넓어진 시기였다.

 

 

초대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다

 

1966년, 마흔네 살의 중년 사제가 된 김수환은 교황청 서울 공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로부터 전화를 받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주교의 말씀으로는 부산교구에서 마산 지방을 따로 떼어 새로운 교구를 설립하고 초대교구장 주교로 그를 임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산으로 떠나기 전 그동안 다녔던 교도소와 희망원을 방문, 봉사하는 수녀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주교 서품식 일정을 5월 31일로 정한 그는 주교직 사목 표어를 무엇으로 정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사목 표어는 주교로서의 사목 방향을 짧은 성경 구절이나 기도문 등에서 찾은 성구聖句로, 일종의 각오 같은 것이다.

 

그는 사제 서품 당시에는 성경 구절에서 성구를 정했지만 이번에는 제2차 바타칸공의회 실천 정신을 나타낼 수 있는 성구로 하고 싶었다. 그는 진정한 주교의 자세는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아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온갖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에 걸맞은 성구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몸을 나누어주시며 우리들의 '밥'이 되어주셨듯, 자신도 모든 이에게 먹히는 존재, 많은 이의 '밥'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라는 경구를 사목 표어로 정했다. 주교 서품식은 마산 성지여중고 운동장에서 거행됐다.

 

 

노동자의 인권보호에 앞장서다

 

1968년 1월, 김수환 주교는 JOC 총무로부터 '심도직물 JOC 회원 관련 보고서'를 전달받았다. 그는 이 사건의 성격을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탄압이자 명백한 종교 탄압이라고 판단하고,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JOC 전국 회원들이 해고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하루 한 끼 절미節米 운동'도 전개해나갔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성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 가톨릭시보(1968년 2월 15일) 중에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주교단 성명인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는 곧바로 로마교황청을 통해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교황청으로부터 격려서한을 받았다. 이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상에 대한 거의 최초의 발언으로, 이후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생존권보장 요구에 적극 앞장섰다.

 

 

서울대교구장이 되다

 

1968년 5월 29일, 김수환 대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430만 명이었고, 대교구 산하에 48곳의 성당과 63곳의 공소가 있었다. 신자 수는 약 14만 명이었다. 임시교구장 체제로 운영되던 지난 1년 동안 극심한 재정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마디로 과도기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천은 한국뿐 아니라 오랫동안 가톨릭이 뿌리를 내려온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모두 겪는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변화와 쇄신은 시대의 흐름이었고, 물러설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었다.

 

그는 붉은 벽돌의 명동성당을 바라보앗다. 한국 천주교를 상징하는 건물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서울과 비교도 안 되게 작은 마산교구의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인 내가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대교구를 변화시키고 쇄신할 능력이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추기경에 임명되다

 

1969년 3월, 로마 교황청과 미국으로의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한국까지 직행 비행기가 없어 일본에서 하루를 잔 후 다음 날 아침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때 게페르트 신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추기경에 서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무거운 소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는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비서직을 수행중인 장익 신부에게 말했다. "장 신부, 만약 이 소식이 오보가 아니라면 이건 내가 아니라 한국 교회에게 내린 영예야. 선교사 없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 선열들의 믿음을 세계 교회에서 인정한 거야. 이건 절대로 내 개인의 영예가 아닌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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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나처럼 살 수 있다
이요셉.김채송화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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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뀔 것이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그리고 삶이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사랑과 기다림과 격려 속의 따듯함만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선택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따뜻한 방법은 바로 '즐거움'이자 '웃음'이다. - '머리말' 중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털어버릴 힘, 자신감, 자존감, 긍정적 가치관, 공동체를 지향하는 신념, 자아 정체성, 나를 조절할 수 있는 셀프컨트롤, 관계를 좋게 만드는 소통 등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이러한 힘을 필요로 하는가? 책은 우리들에게 짧다면 턱없이 짧은 '2박 3일 행복여행'을 제안한다. 이를 통헤 건강과 행복과 성취가 이루어지길 소망하면서.

 

저자 이요셉김채송화는 대한민국 부부 스타 강사 1호이자 한국웃음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웃음 연구와 웃음치료'라는 한길만 걸어온 지 15년이 넘는다. 국내 최초로 웃음치료를 시행해 수많은 암환자와 불면증, 우울증 환자들에게 건강과 삶의 기쁨을 전파했다. 또한 웃음을 통해 수많은 이들의 자신감, 자존감을 회복시켜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도록 도와왔다.

 

청와대, 검찰청, 시청, 교육청 등 관공소와 삼성전자, 한전, 이마트, KT 등 5천 곳이 넘는 기업을 돌며 특강과 세미나를 통해 신바람 나는 행복한 일터를 만들도록 이끌었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미국, 인도 등 한인사회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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