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은 한국사 - 왜 한국사는 세계사인가?
안형환 지음 / 김영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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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란 무엇인가? 한국이라는 국가의 경계, 다시 말해 한반도와 만주 일대라는 지리적 배경을 가진 역사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삼국통일 후 중국에 남겨진 고구려인의 후예 라후족과 백제 유민들의 고장인 백제향, 파미르 고원을 넘은 고선지와 제제왕국의 강력한 통치자 이정기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이젠 열린 한국사를 바라보자

 

중국 산둥반도에 산재해있던 신라방은 국제적인 디아스포라의 한 형태였으며, 고려의 도시 개성에선 고려 여인들이 아라비아인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다. 또 조선시대의 궁중 연회에선 무슬림의 코란을 읊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한국사를 복원하고 한국사 속에 숨쉬는 세계를 되살려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싶어서다.

 

저자 안형환서울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을 졸업했다. KBS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이다. 균형감 있는 시선으로 역사와 미래를 분석하고 상식을 뒤엎는 역사적 순간을 발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국사는 한반도와 만주 일부를 배경으로 하는 사건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세계사 전반을 들여다보면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서 한국의 존재가 발견된다.

 

이슬람 역사가들은 신라로 이주한 아랍인들을 소개했고 몽골에는 고려양이라는 한류의 원조가 있었다. 이 책에서는 바이칼호수 지역에서 뻗어 나온 고구려 시조 주몽에서 여진족

 

 

     

 

8세기 최고의 문화 선진국 통일신라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신라는 당나라와의 7년 전쟁(670~676년) 끝에 승리함으로써 당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삼한일통을 이룩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 국가를 붕괴시키고, 만주 벌판을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당시 백제, 고구려는 신라를 같은 민족으로 보았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서로 그렇게 많은 전투를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단지 경쟁하는 이웃 국가로 바라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31대 신문왕 시절(재위 681~692년), 당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무열왕 김춘추의 묘호가 '태종'으로 당 태종과 동일하므로 이를 고치라고 하자, 그는 '삼한일통'의 큰 위업을 거두었으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는 문무왕 김법민의 아들로 무열왕 김춘추의 손자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역사를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하고 있는데, 중대(29대 태종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년)가 바로 신라의 최전성기였다.

 

35대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가 최고조였다. 당시 경주는 인구가 20만(일설엔 70만이라는 주장도 있음)에 달하는 세계적인 대도시였다. 높이 80미터의 황룡사 9층 목조탑을 중심으로 대로변엔 2층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서역인들이 거리를 활발하게 다시는 그런 국제도시였다.

 

이 무렵 신라인들은 세계로 나가 중국 연안에 신라방을 만들어 동중국해, 황해, 남해의 국제 교역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 많은 학생들과 승려들이 유학 또는 불법을 얻고자 당나라로 떠났다. 특히, 신라의 승려들은 중국과 인도를 넘나들면서 당나라의 불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불교 철학을 완성했다.

 

 

 

무슬림과 쌍벽을 이룬 디아스포라, 신라방

 

조국을 떠나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말한다. 21세기 한국인들은 약 700만 명 넘게 해외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아시아권으로는 중국, 인도 다음으로 한국이다. 지금의 디아스포라의 원형은 통일신라시대의 신라방에서 찾을 수 있다. 이주의 원인을 떠나 이런 디아스포라의 모습이 바로 개방화의 상징일 듯 싶다.

 

산둥반도를 비롯, 중국의 바닷가에는 신리인들이 사는 신라방, 신라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당시 당나라도 국제화되고 개방적인 나라였기에 이런 모습이 가능했다. 이 시절 이민족의 집단 거주지로 번방藩方이 있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무슬림들이 광동, 천주, 양주 등지에 설립햇던 번방이었다. 무슬림은 번방 내에서 고유의 종교를 믿고, 의상을 입고, 음식을 먹는 등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다.

 

이와 쌍벽을 이룬 것이 바로 신라방이었다. 신라방의 중심지는 산둥반도와 강소성 일대였다. 일본 승려 엔닌<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산둥반도 적산촌에 위치한 적산법화원장보고가 세운 것으로 이곳에서 열리는 법화경 강의엔 매일 40여 명이 참석했고 많을 땐 250명일 때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석한 이들은 모두 신라인이었다.

 

2세기경에 쓰인 중국의 지리서 <절강통지>에는 절강성 연안에 신라오산, 신라산, 신라서, 신라부산 등의 지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기림왕 10년(307년)에 처음으로 신라를 국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지증왕 4년(503년)에 정식으로 신라를 국호로 채택했으니 한반도에서 신라라는 이름을 쓰기 전 이미 중국 남부에서 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한민족의 시원始原을 간직한 바이칼 호수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 알흔섬이 있다. 이 섬은 코리족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황소가 하늘에서 내려 온 백조를 부인으로 맞아 11형제를 낳았는데 이들로부터 코리족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 코리족의 한 분파가 바이칼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해 코리→고리→고려(고구려를 본래 고려라고 부른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나 <양서梁書>에서는 주몽을 "북이北夷(동이東夷가 아님을 주목하자) 고리국槁離國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청淸대 한자 대사전이랄 수 있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고려의 '려麗'를 '리'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또 이 지역에서는 명사수를 투멘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주몽(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과 발음이 비슷하다.

 

현재 바이칼호수 동쪽에는 몽골족의 한 분파인 부르야트족이 살고 있다. 혹자는 이 부르야트가 부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부르야트인들은 샤먼을 지칭하는 말로 아르바이Arbai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r 발음이 약화돼 아바이Abai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코리족이었던 주몽이 지금의 셀렝게강변에 있던 부르야트족의 나라인 북부여에서 탈출해 남쪽으로 내려와 고리국(고려)를 세우지 않았을까?

 

 

 

라후족,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추정 

 

 

 

 

 

 

당시 거란과 맞서고 있던 송나라는 공교역에서 고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송이 고려로 보내는 이른바 사여품賜與品이 고려가 보내는 조공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무역 역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고려 말의 세계화

 

13~14세기에 몽골제국은 '팍스 몽골리카(몽골 지배하의 세계 평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유럽에서 고려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류 역사상 전에 없는 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시켰다. 또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을 강요하지 않는 몽골의 지배방식 덕분에 몽골제국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관직과 녹봉을 받는 여진족 추장들


 

명나라의 쇄국정책으로 대외 관계가 막히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외국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래서 귀화하는 이들도 많았다. 우리 역사에서 외국인의 귀화는 고려 현종에서 예종 대에 걸쳐 약 100년 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고려가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초기에는 주로 여진족과 왜인들이 귀화했다.

 

태조 이성게는 여진족을 귀화시키고자 만호萬戶와 천호千戶 등의 관직을 주고, 조선인과의 혼인을 허용했으며, 게다가 그들의 풍속을 인정하며 조선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또 위구르인과 왜인들에게도 후한 대접을 했다. 고려 말에 귀화한 위구르인 설장수薛長壽에게 계림(현, 경주)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해주었고, 대마도에서 온 왜인 9명을 주현州縣에 나누어 거처하게 했다.

 

명나라는 조선 초기 여진족 귀화 정책을 불편한 심정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가 요동 정벌에 관심이 많다고 의심하면서 조선과 여진의 교류를 막고 여진족 회유책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진족 귀화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세종은 이를 그 어느 왕보다 크게 장려하고 지원했다. 세종 15년(1433년) 김종서가 왕명을 받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동북방 방면에 6진을 설치한 직후 귀화인은 급증했다.

 

 

 

 

귀화한 외래 성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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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 - 논어 속 네 글자의 힘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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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 시대의 "아직 아니다"는 공자 시대의 "아직 아니다"와 다르다. 하지만 "아직 아니다"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논어>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모든 '사상자원'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옛날만큼 <논어>의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논어>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 '프롤로그' 중에서

 

 

<논어>, 여전히 유효하다

 

논어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쓰인 셈이다. 지금 시대는 우주를 여행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다니며, 겨울에 여름 과일을 먹고 반대로 여름에 겨울 과일을 먹는다. 아마도 공자가 살아있는 동안엔 이런 생활상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말씀을 글로 전하는 <논어>가 마치 고루하고 케케묵은 서류 뭉치로 보일 수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 신정근 교수는 지금도 <논어>는 여전히 유효하므로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추천한다. 그것도 강력하게 말이다. 특히, 불혹의 나이인 사십대에 들어섰다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가르침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 추천 사유를 설명한다. 시인 김춘수도 올라갈 때 보이지 않았던 꽃이 내려갈 때 비로소 보였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도 살면서 경험이 쌓이게 되면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록 25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사람은 사람이다. 시대와 문화가 아무리 많이 변했을지라도 인간의 근본은 변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사람은 돌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고 여전히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자연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의 위력에 관해 덜 위협을 느끼지만 인간적 약점을 극복하고 신적인 존재로는 될 수 없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공자는 개인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이 초월할 수 있는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그래서 후세인들은 그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렸다. 인간의 한계 범위 안에서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치에 올라섰다는 점에서 그 위대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책은 모두 6강으로 구성되어 있다. 1강(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법)에선 우리가 인생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얘기한다. 즉 자신이 삶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신의 지성에 의지해서 자신의 욕망을 존중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랴야만 인생의 어떠한 겲ㄹ을 맞이하더라도 후회가 없게 된다.

 

2강(나에게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사건)에선 삶에서 차지하는 배움의 의미를 살펴본다. 사실 우리는 과잉 학습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뭘 더 배우라는 거야?"라고 짜증스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런데, 배움은 똑같은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을 포함해 배워본 적이 없는 것을 찾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족한 자신을 채워나가는 창조의 과정을 밟는 것이다.

 

3강(미래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에선 인생에서 도전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며, 4강(삶을 변화시키는 말의 힘)에선 삶에서 말이 차지하는 영향력을 삺보고, 5강(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용기)에선 자신을 울게 또는 웃게 만드는 사람 관계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6강(마흔,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서)에선 삶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지혜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삶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고 밝은 빛을 찾도록 해준다.

 

 

종오소호從吾所好

 

우리들의 인생사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을 거치기에 마치 인생도 춘하추동 순으로 계절이 순환되는 것처럼 반복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되풀이되는 게 아니다. 착각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다.    

 

2500년 전 공자는 끊임없이 실패를 맛보며 곤경에 처했다. 이렇게 거듭 시대와의 불화에 휩싸이면 문학 작품에 나오듯 악마와 손을 잡고 역전을 꿈꾸거나 현실의 요구에 굴복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는 떠밀린 삶을 살며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렸음에도, 그때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공자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약 경제적 성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시장에서 채찍을 잡는 문지기라도 나는 꼭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추구할 수 없다면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좇아가리라.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좋을 '호好'이다. 이는 왼쪽의 女는 어머니를 상징하고, 오른쪽의 子는 아들을 상징한다. 나 어릴 적, 한문 선생은 '여자가 아들을 얻으니 얼마나 좋은가'로 해석하며 음과 훈을 가르쳤다. 저자는 여는 여성을, 자는 남성을 상징하므로 두 글자 사이의 간격을 특별히 주목한다. 좋을 好자를 써보라고 하면 두 글자가 많이 떨어지거나 조금 포개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글자가 나란히 븥어 있을 경우에만 좋을 好자가 되므로 무릇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시라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발분망식發憤忘食

 

"밥 먹고 합시다", 이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영양을 섭취해야 하므로 식사 시간이 되면 당연히 밥 생각이 난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라 자발적으로 단식斷食을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얼마전에 작고한 고 김영삼 대통령은 신군부정권 시절인 1983년 5월 정치활동 자유를 주장하며 23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공자도 단식을 할 수 있다고 이렇게 말했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특성을 물었다.

자로가 어찌할 줄 몰라 미처 대꾸를 못했다.

공자가 일러주었다.

"자네는 왜 이렇게 이야기히지 않았소.

그 사람의 됨됨이 말입니다.

화가 나서 한 가지 주제에 깊이 열중하다 보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아가는 길에 즐거워하며 삶의 시름마저 잊어버려서

앞으로 황혼이 찾아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합니다"

 

춘추시대, 공자는 조국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했다. 요샛말로 하자면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해 정치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워낙 풍부한 학식을 갖추어 국제적으로 명망있는 인물이기에 그를 찾아 뭔가 해법을 얻으려고 찾아오는 인사들이 있었다. 섭공도 그런 사람 중의 힌 명이다. 섭공은 공자를 만나기 전 사전 정보를 얻고자 제자인 자로에게 인물평을 요청했던 셈이다. 스승이란 감히 그 그림자도 밟지 못하던 그런 시절이라 어찌 제자 주제에 함부로 평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 공자는 한 마디로 자기소개서를 썼다. 이렇게 말이다.

 

"발분망식發憤忘食, 락이망우樂以忘憂, 부지노지장지운이不知老之將至云爾"

 

저자는 이를 공자의 행동을 마치 동영상 한 편 보는 것으로 비유했다. 맞다. 공부를 하다가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공자는 "밥 먹고 합시다"하면서 자리에서 결코 일어서지 않는다. 풀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화에만 그치지 않고 그는 이 문제의 끝을 붙잡고 늘어진다. 답을 찾을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허기보다는 즐거움에 취해 자신이 어던 집안 일로 근심 걱정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각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즐거움의 크기가 근심의 크기를 뛰어넘엇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바로 몰입의 즐거움에 빠져있는 상태인 것이다.

 

 

공자와 노자의 만남

 

사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가치와 방향이 워낙 달랐기 때문이리라. 사마천의 <사기>'노자한비자열전'에 노자는 주나라 왕실 도서관을 관리하던 사관으로 재직했는데, 공자가 주나라 뤄양洛陽으로 가서 노자를 만나 예禮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질문에 노자가 답한 내용은 이러하다.

 

그대가 말하는 성현이란 이미 몸과 뼈가 썩어버렸고 단지 말만 전해질 뿐이다. .... 그대는 교만과 탐욕, 허세와 팀욕을 버리도록 하시오. 이러한 욕망은 모두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줄 말은 다만 이것뿐이오.

 

성현은 이미 죽고 말만 남았는데 애지중지 여길 가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또 공자가 자신의 가치를 믿고 세상을 구하겟다고 덤벼드는 행동도 어리석기 그지 없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공자는 노자의 이 말에 기가 꺾이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서로가 다름을 확인했다는 결과를 담담하게 전한다.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르니 나는 용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늘 내가 노자를 만나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구나!

 

공자는 젊어서부터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람을 찾아가 물었다. 또 그는 "세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그 속에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말하듯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 사람이 모두 공자의 스승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이 공자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언행일치言行一致의 미덕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사람 간의 믿음은 깨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내일 5시 명동에서 만나자"라고 하면 그날 그 자리에 나오리라고 당연히 믿게 된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놓고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다음 번에 그 사람이 약속을 할지라도 이를 지킬 것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먼저 의심하고 재차 약속을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요즘 아침 출근 시 지하철역 입구에서 열심히 인사하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나는 이를 두고 '메뚜기 한 철'이라고 표현한다.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평소엔 무관심하던 사람이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린다. 우리에겐 이미 학습 효과가 생겼다. 음식 찌거기 없어지면 똥파리도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정치인의 언행불일치는 이젠 진리아닌 진리가 되고 말았다.

 

공자는 언행일치를 위해 말과 행동의 속도를 점검하라고 제안한다. 말은 원래 빠른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속도를 늦추고, 행동은 원래 느린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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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담아낸 인문학 - 상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맛있는 이야기
남기현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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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식도락의 기원을 가족의 탄생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수렵시절, 가족이 한데 모여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나눠 먹었던 것이 식도락의 시작이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음식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을 넘어 한 사람, 한 가족의 역사와 문화, 개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 '머리말' 중에서

 

 

음식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

 

책의 저자 남기현은 매일경제신문 기자이다. 그는 삼성 그룹의 사업 구조 개편 등 다수의 특종 기사를 쓰면서 주요 산업 현장을 누볐으며, 증권부 시절엔 일부 대기업의 부당 기업어음의 발행 사실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유통부에서 1년간 식품팀장을 맡아 관련 산업과 시장, 다양한 음식 문화를 취재했다. 이 책이 당시의 취재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이다.

 

청나라의 서태후는 저녁 식탁에 메인 요리가 50개가 넘었고 하루 500근의 고기와 100여 종에 달하는 산해진미가 총동원될 정도로 호사스런 음식을 줄겼다고 한다. 먹는 음식만 봐도 그녀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사치스럽고 과시욕이 강하며, 식탐이 강해서 자기 절제력이 떨어지는 그런 여자였다.

 

그렇다. 음식을 이해하면 한 개인과 가족은 물론 그들이 속한 사회나 나라를 이해할 수도 있다. 이에 저자는 음식을 인문학적으로 취급해 볼 가치가 충분한 소재라고 판단해 책의 집필에 나섰다. 사실 먹는 음식의 기원이나 그 속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서 먹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햄버거 하나를 먹더라도 그 음식을 알고 먹는다면 훨씬 재미있는 식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치아가 부실해 순두부를 즐겨 먹는 편이다. 단지 식감이 부드러워 잘 씹지 않아도 먹기에 불편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자주 먹는 음식일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강릉 초당순두부가 바닷물을 간수로 이용한다길래 뭔가 친자연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이 식품에 그동안 후한 점수를 주었었는데, 허난설헌과 허균의 부친 허엽 옹이 당시 삼척부사로 재직시 기근에 시달리던 강원도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역사적 기원을 알게 되었기에 앞으론 먹을 때마다 나눔과 베품을 떠올릴 것 같다.

 

 

 

잡 나간 며느리가 다시 찾아온다

 

가을 한 철은 제철 음식인 전어가 대접을 받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사실 대학 시절 즐겨 찾던 포장마차에선 전어구이를 서비스로 주었던 생선이다. 그 정도로 푸대접받던 생선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놈은 몸에 가시가 많아 먹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던 요즘은 매스컴의 효과로 이 생선이 대접받으면서 지방에선 전어 축제까지 열린다.

 

그런데, 책에 실린 일본의 옛 일화를 읽노라면 앞으론 먹기에 좀 찝질할 것 같다. 그 연유를 말해 보겠다. 일본의 한 영주영주가 동네의 한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 여자를 취하기로 맘 먹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처자가 딸린 유부남이었다. 하긴 과거엔 가난이 죄라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 첩이 되는 게 가족들에게 약간의 지참금을 베풀 수 있기에 효도의 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 딸의 아버지는 꽃같은 딸을 첩으로 줄 수 없다고 생각해 잔꾀를 내었다. 관 속에 딸 대신 '고노시로'라는 생선을 잔뜩 집어넣고 화장을 했던 것이다. 비명 횡사해서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거짓 눈물과 곡까지 하면서 영주가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영주와 딸의 혼사 문제는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 때문에 일본인들은 고노시로를 '자식을 대신한다'는 의미로 여겼다. 그래서 여간해선 이를 구워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대신에 이들은 초밥용 생선으로 즐겨 먹는 모양이다. 고노시로는 바로 우리말로 '전어'다. 물론 우리도 초장에 찍어 회로 먹거나 잘게 썰어 회무침으로도 먹는다. 가시가 많긴 하지만 비교적 연하기 때문에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구운 전어의 맛은 고소해서 정말 일품이다. 오죽하면 '집 나간 며느리가 이 냄새를 맡고 돌아온다'는 속담이 생겼을까 말이다. 

 

 

크루아상, 이슬람에서 싫어하는 빵

 

아침에 밥 대신 빵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다. 빵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루아상은 어느 나라 빵일까? 지금껏 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빵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빵의 공향은 오스트리아라는 게 정설이란다. 평범한 듯 보여도 이 빵엔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어 '크루아상croissant'은 '초승달'을 의미한다. 그런데, 초승달은 이슬람 국가의 상징이다. 십자가 문양이 기독교임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이슬람 국가인 터키, 말레이지아, 알제리, 파키스탄, 튀니지, 싱가폴 등의 국기엔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 초승달을 씹어 먹을 수 있겠는가?

 

1636년, 오스만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제빵 기술자였던 페터 벤더가 밀가루를 가지러 창고에 갔다가 오스만튀르크 군인들이 성벽 아래 터널을 뚫고 폭발물을 설치해 성벽을 무너뜨린다는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그는 이 사실을 곧바로 오스트리아 군대에 알렸고, 오스트리아는 선수를 쳐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페터 벤더의 공로를 인정해 그가 만드는 빵과 가게에 당시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페데스부르크 가문 심벌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이에 대한 고마움과 군대의 사기를 높일 목적으로 오스만튀르크 국기에 새겨져 있던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나눠 줬는데 이것이 크루아상의 시작이다. 전쟁에서 진 것도 분한 일인데, 초승달 모양의 빵을 신나게 뜯어 먹는 모습에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말이다.

 

 

꿩 대신 딹

 

이 말의 유래는 떡국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떡국의 국물은 주로 꿩고기를 우려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생동물인 꿩을 잡기가 힘들므로 꿩 대산 닭으로 국물을 내는 경우도 많다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꼭 맞는 게 없을 경우 이와 비슷한 것으로 대신할 때 우리는 이를 '꿩 대신 닭'이란 말로 비유한다.

 

떡국은 가래떡을 썰어서 끓여 만든다. 예로부터 가래떡은 양陽의 기운을 상징했다. 흰쌀로 만든 가래떡은 높은 열량 때문에 양의 음식으로 분류된 것 같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은 새해 첫날 떡국을 먹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가늘고 길게 생긴 가래떡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길 기원한다'는 무병장수의 의미가 담겨 있고,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썰었다는 것은 떡국에 재물 복, 즉 풍요를 바라는 마음을 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흰 떡을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 둥글고 문어발 같이 늘리는데 이를 권모拳模라 한다. 제석除夕에 권모를 엽전 모양으로 잘게 썰어 넣은 뒤 한 그릇씩 먹으니 이것을 떡국이라 한다" - 조선 시대 한양의 풍속을 담은 <열양세시기> 중에서 

 

섣달그믐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음력설은 양력 기준으로 보통 1월 말 또는 2월 초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음陰의 기운이 가득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양의 기운, 즉 따뜻한 봄을 준비하는 때이다. 그러하니 양을 상징하는 가래떡으로 떡국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자연스레 생긴 듯하다. 이처럼 음식에는 음양의 조화도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광엔 굴비가 없다(?)

 

명절이나 제사상에 꼭 올리는 음식 중의 하나가 굴비다. 생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건어물이 굴비인데, 조기를 짚으로 엮어 매달면 등이 굽어지는 모양새가 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등이 굽은 조기라 해서 '구비仇非 조기'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구비란 구부러진 모양을 일컫는 순우리말 '굽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구비가 시간이 흐르면서 굴비로 변했다는 게 정설이다.

 

호남 향토음식점에 가면 가끔 보리굴비를 만날 수 있다. 이는 굴비를 보리 뒤주나 보릿자루에 보관해서 숙성시킨 것이다. 뒤주 안 온도는 서늘하고 보리의 겉겨가 굴비의 기름기를 흡수함으로써 비린내가 적고 장기간 보관도 용이한 음식으로 재탄생되는 셈이다.

 

굴비의 본고장은 전남 영광으로 알려져 있다. 나 어릴 적엔 시험 문제로도 출제되곤 했다. 아무튼 영광 앞 바다(칠산 바다)에서 과거부터 조기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바닷물의 흐름이 바뀐 것 같다. 지금은 영광 법성포로 몰려 들었던 조기들이 제주도 인근 추자도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잡힌 조기를 법성포로 들여와 작업해서 영광 법성포 굴비로 만든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봄과 여름 사이 어선들이 칠산 바다에 모여 그물을 치고 조기를 잡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얼마나 조기가 많이 잡혓는지 강아지조차 조기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법성포 굴비만 그렇게 유명할까? 영광 주민들은 "굴비의 맛은 조기가 어디서 잡혔는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조기를 말리는 지역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른 지역의 굴비는 조기를 소금물에 담갔다 말리는데 비래 법성포는 영광에서 나는 천일염으로 일일이 조기를 절이고(크기에 따라 절이는 시간까지 조절한다고 함), 법성포의 습도와 일조량, 바람의 강도로 말려서 맛 좋은 굴비를 만든다는 주장이다. 즉 정성이 맛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음식에는 역사가 숨쉬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흔히 먹는 평범한 음식에 담긴 흥미로운 사연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 음식이 달라 보인다. 우리가 먹는 것들 자체가 인류 문명사의 중요한 증거 자료인 셈이다. 음식에 담긴 일화나 사연을 통해 지금의 우리들은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의 우리 모습까지 통찰하게 한다.

지금은 '음식의 시대'라 불릴 만하다.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현대인들에게 음식은 더 이상 허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이젠 음식을 입으로, 눈으로, 냄새로 즐기게 됨으로써 즐거움과 문화를 배운다. 어떻게 초당 순두부가 탄생되었는지, 왜 무슬림은 크루아상 빵을 싫어하는지, 일본인은 왜 전어구이를 잘 먹지 않는지, 영광굴비의 고향이 사실은 영광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음식에 우리의 삶과 문화, 애환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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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인의 빅픽처 - 저성장 시대의 생존 경제학
선대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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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은 저성장 시대이지만 경제의 큰 그림을 읽을 수만 있다면 기회는 분명히 있다. 다만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책에서 나는 경제적으로 험난한 이 시대에 일반인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노력으로 얼마든지 이를 실행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여러 경제적 상황에서 좀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가정 경제를 건전하게 꾸리면서 노후를 준비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 '프롤로그' 증에서

 

 

선대인, 생존경제학을 말하다

 

저자 선대인재벌, 정부, 정치권 등의 이해관계에 오염되지 않은 정직한 정보, 일반가계의 경제적 선택에 도움이 되는 정보, 경제의 리스크 요인을 앞서 분석하고 경고하는 정확한 정보 제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선대인경제연구소의 소장이다. 그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공공정책석사(MPP) 학위를 마치고 2007년 귀국해 서울시 정책전문관으로 일했다. 현재 그는 인기 경제 팟캐스트 '나는 꼽사리다'의 패널로 활동 중이며 <위험한 경제학1,2>, <문제는 경제다>, <

 

 

 

 

 

 

 

"저는 재테크 요령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재테크 투자종목 내지는 비법을 알려달라는 사람에게 저자가 하는 말이다. 어찌보면 매우 퉁명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첫째, 지금의 경제 상황하에서 섣불리 투자에 나섰다가 손해보기 십상이고 둘째, 모든 이에게 통하는 투자의 만병통치약은 없으며 셋째, 자신의 전공은 공공정책이지 재테크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독자 중 누구라도 기존의 재테크 서적처럼 유망 투자 종목이나 대상, 나아가 '대박 정보'나 '족집게 정보'를 기대하고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지금 바로 이 책을 덮으라고 저자는 종용한다. 이 책은 그런 유형이 아니라 대신에 세상이 움직이는 큰 그림을 읽어내는 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초저금리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희망이 없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다. 저자의 논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와 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경제의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다고 말한다. 특히, 저금리와 저성장 시대일수록 경제의 큰 그림을 읽어내는 게 필수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지금 우리들은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즉 저금리, 저성장, 그리고 노령화 및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이런 시대적 상황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저금리 시대가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금리란 이자를 말한다. 이 효과를 이해하려면 '72법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자신의 돈이 2배로 늘어나는 데 소요되는 시간 또는 필요한 이자율을 알려준다. 예컨대 이자율이 15%일 때 원금이 두 배가 되는 기간은 '72/15=4.8년'이다. 그런데, 현재 금리인 3%를 적용한다면 그 기간은 '72/3=24년'이 된다. 즉 과거의 금리 수준으론 5천만 원을 1억 원으로 불리는 데 약 5년 걸렸다면 지금은 24년이 걸린다는 걸 의미한다. 

 

     

돈을 빌리는 사람 입장에선 저금리가 좋은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좁은 시야로 바라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국가의 경제 전체를 조망해볼 때 이는 결코 그렇게 좋은 현상만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재산의 형성이 더뎌지기 때문에 국가, 기업, 가계라는 각 경제주체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말 그대로 불경기이자 경제 침체기인 것이다.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므로 불경기엔 누구나 투자를 꺼려하고 개인들의 지갑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 법이다.

 

과거의 고금리 시대엔 누구나 주식이든 땅이든 집이든 사 두기만 하면 대체로 큰 위험 부담 없이 충분히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무조건 오른다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경제의 환경이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아파트를 한번 생각해보자. 과거엔 아파트의 분양가를 정부에서 규제함에 따라 거의 원가에 준하는 개념이었으므로 분양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돈을 버는 수단이었을 정도이다. 즉 분양가가 시세보다 훨씬 낮았다.

 

그런 반면 지금은 분양가의 자율화 조치로 거의 시세에 근접한 가격으로 분양가를 정하고 있다. 또한 가격의 형성은 일반적으로 수요와 공급에 의해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그동안 누적된 낮은 출산율로 인해 아파트의 수요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불리한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과거의 주수요층이었던 베이비부머들은 은퇴와 맞물려 노후 준비를 위해 소유하는 중대형 아파트를 팔아 소형으로 갈아타거나 아예 임대 또는 월세로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분위기이다. 이런 현상이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어떤 트렌드가 만들어지겠는가?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그 해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낮은 경제성장율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제가 '부동산 버블'의 거품이 꺼지자 소위 '잃어버린 20년'을 겪을 정도로 저성장과 장기침체에 빠져들었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한국 경제도 그동안 일본의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누누히 경계령을 발동했지만 원치 않는 일본의 어두운 그림자를 따라 밟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라면서 외국에서 찬사를 보냇던 한국 경제의 동력은 이미 꺼져가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다.

 

          

 


저금리 저성장 시대가 된 후에야 투자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다니, 언뜻 보면 굉장히 역설적인 상황 같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임을 이해하고 보면, 사실 당연한 결과다. 문제는 지금까지 별다른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갑자기 투자에 나서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니 겁이 나서 머뭇거리거나 아니면 조급하게 굴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태반이다.

 

저자는 '자전거 타기'를 인용해 설면한다. 고성장 시대에 손쉬운 재테크를 했던 사람들은 평평하고 반듯한 아스팔트 위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지만, 지금처럼 '지구촌의 세계화' 이후로 국내외 경기가 요동치는 저금리 저성장 시대는 울퉁불퉁하거나 험난한 산길를 자전거로 달리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은 길을 가야 하므로 헬멧이나 무릎보호대 등 장비를 갖추고 험로에서도 잘 탈 수 있는 숙련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가장 합당한 투자의 기본은 바로 '리스크 관리'이다.

 

투자의 제1원칙. 돈을 절대 잃지 말라.

투자의 제2원칙. 제1원칙을 절대 잊지 말라.

 

- 워렌 버핏

 

주식 호황기에 특급 대우를 받았던 증권계의 애널리스트들이 수난시대라는 신문 기사를 최근 접했다. 증권사의 영업환경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또한, 파리 날리는 은행 점포는 통폐합 조치로 줄이겟다는 은행업계의 소식도 잇달아 들려왔다. 이처럼 금융업계에서도 저성장 저금리 시대를 맞는 대책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애널리스트에 관한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사실 과거부터 애널리스트 또는 증권사 리포트 무용론이 있어 왔다. 다들 인식하다시피 증권사의 리포트에서 매도 의견을 발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다. 반대로 매수 의견 일색이다. 2015년 9월에 발표한 금융감독원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국내 증권사의 매도 의견은 총 49,580건 중 불과 23건이었다. 굳이 비율로 표현하자면 0.04%이다. 이 리포트라는 게 애널리스트의 분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증권업계에는 삼권분립이 없다. 증권회사는 수수료 수입을 극대화하려고 주식매수를 부추기는 영업전략을 취하게 되고 이는 애널리스트에게 떨어지는 불호령 같은 것이다.

 

        

 

주식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이 추천하면서 유명해진 책이 있다. 프레드 쉐드 주니어<고객의 요트는 어디에 있는가>는 바로 금융업계를 풍자하고 있다. 각종 증권사, 보험사, 은행, 부동산업체 등은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우기에 급하지 고객들의 호주머니는 뒷 전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고객은 봉이다'를 이렇게 시니컬하게 표현하고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오래전 어느 날, 다른 도시에서 온 한 방문객이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경이로운 뉴욕 금융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들이 맨해튼 남쪽 배터리공원에 도착했을 때, 가이드가 정박 중인 멋진 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버세요. 저 배들이 바로 은행가와 주식중개인들의 요트랍니다" 그러자 순진한 방문객이 물었다.

 

"그러면 고객들의 요트는 어디에 있나요?"

 

 

빅픽처로 한국 경제 다시보기

 

이에 저자는 한국 경제의 큰 그림에 주목할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한다. 현재 읽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빅픽처BIG PICTURE'는 10가지를 상징하는 용어의 이니셜에서 따 왔다. 얼마 전 이미 예되고 있었던 미국의 금리 인상은 시작됐다. 향후에도 계속 금리를 인상할 것인지를 지켜봐야 한다.

 

한국 상품의 최대수입국이었던 중국도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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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발견 - 인문학, '시민 교과서' 헌법을 발견하다!
박홍순 지음 / 비아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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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소수 전문가의 독점물일 수 없고, 그렇게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모든 법규범의 기준인 헌법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헌법이 사회계약 원리를 담고 잇는 이상, 주권을 가진 계약 당사자로서 각 개인이 누구보다도 계약내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현실의 법률과 정책의 계약 위반 여부는 물론이고, 과거의 계약이 갖는 한계와 새로운 계약의 필요 여부에 대해서도 주권자로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하겠다. - '저자의 말' 중에서

 

 

"니들이 헌법을 알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헌법의 중요성쯤은 이미 안다. 헌법이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담고 있으며, 법률을 비롯해 모든 법적 규범의 기준이 되는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점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법을 전공하거나 법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이상, 이처럼 중요한 헌법 전문을 꼼꼼하게 읽어본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가장 중요한 법이 헌법인데, 왜 이렇게 이를 등한시할까? 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대상이라는 강박감이 작용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들은 대개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뭔가 따분한 느낌이 드는 법에 대해 이해보다는 시험보기용 외우기에 주력해왔다. 이런 교육의 일환으로 우리들의 머리에는 '꼭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관념만이 가득 들어차있는 것이다.

 

법을 단지 구속이라는 굴레로 받아들인다면 사실 자유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이는 필요하지 않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들의 이런 심각한 무관심과 이해 부족은 결국 우리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된다. 즉 특정 정부나 권력이 헌법 해석을 독점하면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나라의 정체성과 국민의 권리를 훼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법치주의자 몽테스키외의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백성이 계몽되었는가, 되지 못했는가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위정자가 갖는 편견은 국민이 갖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무지몽매한 시대에는 가장 큰 악을 행할 때도 사람들이 아무런 의혹을 품지 않았다" -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중에서

 

책의 저자 박홍순청년 시절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헌법의 현실을 목격하고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6년여 수형 생활 중에 만난 [장자]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동서양 고전을 공부하여 세상의 통념을 뒤집는 생각의 힘, 지식을 넘어서는

 

 

저자 박홍순

 

 

헌법 조항 속에 담겨 있는 인문학적 뿌리를 탐색하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됐는데,  1장(대한민국의 기본 정신을 밝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헌법 제1조 1항과 2항

 

민주주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에서 시작됐다. 로마시대에 이르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구분되기 시작하고, 사적 영역인 종교와 공적 영역인 국가 통치가 하나로 들러붙어 있던 중세를 지나 정교분리를 선언한 근대에는 이 두 영역의 공존이 통치의 화두가 된다. 대한민국은 다수에 의한 공적 결정에 의존하는 나라(공화국), 그 결정 방식이 국민이 선출한 의원에 의해 이뤄지는 정치체제(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많은 관중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로 열연한 배우 송강호는 "국가란 국민입니다!" 라고 외친다. 이는 한 변호사의 거창한 주장이 아니라 엄연히 헌법에 실려있는 객관적인 팩트이다.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담고 있다. 헌법 1조에 따르면 당연히 '국가=국민'이 된다.

 

이 영화는 80년대 초 부산에서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그리고 회사원 등 22명을 불법 감금하고 기소했던 부산의 학림사건(부림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당시 이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알려지면서 관중몰이를 했다. 영화이기에 실화에다 허구를 포함하고 있다.

 

공화국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먼저 '공共'을 살펴봐야 한다. 이는 개인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한 활동과 국가의 활동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플라톤도 "공적인 것은 국가를 함께 묶지만, 사적인 것은 국가를 분열"시킨다고 말했다. 공화제의 핵심 원리인 공公과 사私의 영역 구분은 주권자의 권리 차원 문제이다. 근대 헌법은 국가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국가 권력에 의한 횡포나 기본권 침해를 어떻게 제한하느냐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졌다. 즉 국가 운영에 사적 영역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주권자의 권한 행사를 왜곡하거나 무력화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집회, 결사의 자유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경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 헌법 제21조 1항과 2항

 

먼저 집회와 시위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조문에 따르면 집회는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로 해석 가능하다. 많은 국가의 헌법에서도 허가제를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신고'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허가제'다. 허가 여부의 결정권을 정부가 쥐고 있다. 이에 권한을 위임받은 행정 내지 경찰공무원은 자신들의 편의 때문에 가급적 거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의 경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통해 옥외 집회 때는 사전에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사전에 신고 내용을 검토해 법적으로 금지되는 요건에 해당하면 사전에 금지하거나 해산을 명령하는 시스템을 견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위헌 시비가 있었는데, 1991년 대법원은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그럼에도 신고법 조항이 위헌이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신고제가 금지 통고제를 통하여 허가제처럼 운영되는 경우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집회를 하는 데 필요한 도로, 공원 등 공물의 사용 허가는 사실상 집회를 허가제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 김철수, <한국헌법> 중에서

 

이에 저자도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허가제가 민주화를 거치며 헌법 개정과 함께 신고제로 변화했지만, 한국은 시위의 규모나 종류와 관계없이 모든 옥외 집회를 같이 취급하며 소수가 모이는 집회나 간단한 성명 발표 정도의 작은 시위조차 경찰의 구미에 따라 언제든 금지될 여지가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

 

또한 한국의 '집시법'에 따르면 법에 의한 신고를 하지 않거나 금지 통고된 집회의 자진 해산에 불응할 때는 강제집행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신고 의무는 구체적 위험의 회피를 위한 것이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므로 신고 의무 위반이 곧바로 해산 사유가 되지 않는다. 즉 신고 없는 집회라도 공중의 안전 혹은 질서에 대해 직접적인 위험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해산이 정당화된다. 지난 1차 민중총궐기대회는 폭력으로 얼룩졌고, 대회를 주관했던 한상균은 조계사로 숨어들었다. 과연 이런 궐기대회는 '공公인가, 사私인가?'

 

3차 민중궐기대회(12월 19일, 광화문) 

 

 

영국의 권리장전(1689년)에 의하면 의회에서의 토의와 함께 언론의 자유는 "어떤 법정이나 장소에서도 탄핵하거나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프랑스의 인권선언에서도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양심의 자유와 긴밀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에선 언론, 출판의 자유가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 헌법에서도 제한 기준을 두고 있다.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피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은 작년 8월 3일 산케이신문 인터넷판에 게재한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누구와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인 4월 16일 7시간가량 박 대통령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면서, 박 대통령이 정윤회(60)씨와 함께 있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기사에서 두 사람이 긴밀한 남녀 관계인 것처럼 표현했다. 이에 그는 명예훼손으로 고발되었고 재판이 진행되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는 12월 17일 1심에서 "해당 기사가 허위 사실을 적시하고 있고, 사인私人으로서의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가 훼손됐다"면서도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비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일본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사를 쓴 것으로 보인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소수 의견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현대사회에 들어서 언론의 자유를 둘러싼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현대는 미디어 홍수 시대다. 미디어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처럼 문자에 기초한 매체는 전문화된 성격이 강하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의견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에선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경쟁하긴 어렵다.

 

한국에서는 명예훼손과 관련된 처벌이 매우 많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다니엘 튜더는 자신의 책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는 수년 동안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으로 활동했었다. 

 

 

 

헌법대로 살자

 

헌법에는 역사와 철학을 비롯해 인류의 정신과 삶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인문학 종합선물상자와도 같다. 이에 대한 이해가 먼저 수반되어야만 제대로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헌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요한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다. 플라톤의 <법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구스타브 라드브루흐의 <법철학>, 존 롤스의 <만민법>, 미셸린 이샤이의 <세계인권사상사>, 김철수의 <한국헌법> 등이 그것이다. 

 

오로지 공공복리에만 봉사하려 하고, 개인 이익에 대해서는 일체의 권리를 부인하려는 질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법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 -라드브루흐의 <법 지혜에의 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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