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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한국사
김재완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6월
평점 :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는 염치의 실종에 기인합니다. 염치란 무엇일까요? 부주의한 실수에 사과할 줄 알고, 타인의 선행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효율과 이윤만을 강조하다 보면 염치가 사라집니다. 염치가 사라진 나라의 참혹한 결말은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죠. 가문의 영광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기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들이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김재완은 역사 덕후이자 한국사 보부상이다. 그는 경북 상주 출생으로 생전 처음으로 써본 역사 이야기가 <딴지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면서 여전히 덕후 몰이 중이다. <찌라시 한국사>, <찌라시 세계사> 등의 저서로 작가 반열에 합류했다.
총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한국사 곳곳에 숨겨진 수수께끼, 조선사를 관통하는 무덤 이야기,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에 대하여, 1,500년의 시간을 건너는 음모론의 실체, 이런저런 직업을 가진 이들의 기막힌 신세 등의 주제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찾아오기
'추사 선생님의 <세한도>가 일본에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한도>를 다시 모셔 오리라.'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 원본은 일본인 후지츠카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4년, 당시 42세였던 조선 최고의 서예가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기로 결심한다. 손재형은 ‘서예’라는 말을 탄생시켰으며, 당시 겸제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유했을 정도로 우리 문화재에 애정이 높았던 인물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손재형은 후지츠카의 집 인근에서 머물며, 수시로 그의 집을 찾았다.
“돈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드리겠소이다. 〈세한도〉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자신을 찾는 손재형에게서 젊은 날 추사를 향한 자신의 열정과 진심을 보며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손재형의 지극 정성에 감복해 돈마저 거부하고 <세한도>와 추사의 예술을 잘 지켜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재형은 정계 잔출 목적으로 <세한도>를 담보로 잡히고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뒤 이를 갚지 못해 되찾지 못했다.
유랑하던 <세한도>는 개성상인 손세기, 손창근 부자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었다. 손세기(1903년 개성출생)는 인삼 재배와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의 발발을 감지하고 야밤에 인삼밭의 인삼들을 모조리 트럭에 싣고 남하를 감행했다.
이후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장남 손창근이 아버자의 사업에 가세해서 모은 돈으로 한국의 문화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손세기는 칠순을 맞아 정선과 김홍도 등의 그림 200점을 서강대학교에 기증했다. 이 기증으로 서강대는 박물관을 신축해야만 했다. 대를 이어 아들의 기부도 이어졌다. 장남 손창근은 88살 미수연을 맞아 카이스트에 50억 원 상당의 현금과 부동산을, 아흔살엔 300점이 넘는 우리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렇게 기부를 펼치면서도 오직 한 작품 추사의 <세한도>를 손에서 놓지 못하던 그는 2020년 12월 9일, 부인 김연순 여사의 조언에 힘입어 <세한도>마저 기부했다. 데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문화유산 보호유공자 포상 이래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일제의 만행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역사 속 인물 세 명을 꼽으라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과 더불어 광개토대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인 광개토대왕릉비가 2004년에 중국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4세기경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쓰이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 민족 최대의 영토를 구축했던 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도대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려고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을 훼손하고 나아가 중국인들은 쇄도하는 탁본 요청에 석회까지 바르는 등 역사적인 문화재를 오염시키는 것도 부족해 아예 아전인수격 해석을 남발했다. 대왕릉비 4면에 총 1775자가 기록되어 있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돌비석은 현재 중국 지안 지역에 있는데, 중국에선 이를 '진호대왕비'라는 제목을 달고 중국 동진 시대의 진나라왕의 비라고 주장하며, 중국 정부가 유리를 씌워서 학술적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세종대왕릉의 이전
새 왕이 처음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 것 또한 능에 관한 것이었다. 새 왕(예종)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천릉遷陵을 시행했다. 죽은 왕의 염원이자 왕가를 지키기 위한 가장의 본능이며, 신하들에게 자신이 왕임을 알리는 첫 날갯짓이었다. 죽은 자의 무덤을 옮기는 천릉이 산 자의 정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왕은 할아버지의 새 무덤을 찾고자 지관 안효례에게 명해 한양 인근 100리를 두루 살피게 했다. 안효례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무려 여섯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지관으로 일한 조선 최고의 지관 중 한 명이다. 세조의 능 선정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기에 세종의 천릉에도 나선 건 당연한 절차였다.
세종대왕릉은 여주로 옮겨져 영릉으로 조성되었다. 두 명의 왕이 바라던 천릉이 마침내 이뤄진 것이다. 문종부터 이어진 조선 왕가 장자의 사망 고리는 끊어졌지만, 새 왕(단종)은 재위 13개월 만에 승하했다. 어린 왕이 사사된 지 240여 년이 흘러 숙종은 그의 무덤을 왕릉으로 추존했다. 엄홍도가 만든 돌무덤 자리에 장릉이 조성되었다.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
죽은 왕비(명성황후)의 자리에 친일 내각이 들어섰고, 전국에 단발령이 내려졌다. 백성의 저항은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고, 왕은 궁녀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향했다. 을미사적 중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으로 향했고, 그 무리엔 왕실과 민심의 복수가 두렵디만 했던 우범선도 끼어 있었다. 우범선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경복궁의 훈련대 대장이었다.
일본에서 순조로운 망명 생활을 즐기던 범선은 조선에서 온 형님네 집에서 실로 오랜만에 술을 한잔하고 오겠다며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같은 말을 쓰는 선한 사람과의 술자리에 범선은 금세 취기가 돌았다. 술이 취하자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고영근의 생각이 궁금해 물었다. 노윤명(고영근의 노복)은 노기怒氣를 드러냈고, 영근도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에게서 살기 어린 분노를 감지한 범선은 술에서 깨고자 찬물을 거푸 마셨다.
정신을 집중하자 모든 우연이 필연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민을 자책했다. 늘 경계하던 죽음의 순간은 예상보다 짧았다. 뭔가를 하기에는 늦었고, 안도감에 취해 있었다. 고영근의 칼이 목에 닿고, 노윤명의 둔기가 쓰러진 우범선의 머리를 내리쳤다. 두 사람은 시체를 남겨두고 집에 불을 지르고 경찰서로 향했다.
경종은 독살되었을까?
연잉군은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왕위(영조)에 오른 인물이다. 경종의 병세가 보름간 이어지던 8월 20일, 연잉군은 생감과 간장게장을 경종에게 진상했다. 그날 밤 갑자기 복통과 심한 설사에 시달렸던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사용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이에 어의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세제世弟의 불호령 앞에 어의는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인삼과 부자를 먹은 경종의 눈동자가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지며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자 연잉군이 말했다.
“보아라! 내 비록 의술을 잘 알지 못하나, 기력을 잃은 이에게 인삼이 특효인 건 알고 있다.”
다음 날 새벽 3시, 경종은 곶감과 게장을 먹은 지 5일 만에 어의의 반대에도 인삼을 복용한 다음 날 승하한다. 교묘한 독살인가, 무지에 의한 사고사인가, 게장이나 인삼과 상관없이 경종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을까.
영조는 즉위하던 해부터 경종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어 수많은 소문에 시달린다. 영조 3년, 전주를 시작으로 팔도에 걸쳐 벽서가 붙는다. 그 내영은 실록에 전해지지 않지만, 영조는 이례적으로 범인을 잡고저 현상금가지 내걸었다. 당시의 독살설은 현재 우리들이 체감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했던 이슈였다.
조선 궁녀의 사생활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인 궁녀는 후기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궁에서 일하는 환관과 궁녀의 수를 각각 335명, 684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실록>엔 대전, 중궁전, 대비전에서 일하는 궁녀가 각 100명, 세자궁 60명, 세자 빈궁 40명, 세손궁과 세손 빈궁에 각 50명과 30명으로 기록하고 이있다. 이처럼 궁녀의 숫자는 시기마다 달랐겠지만, 조선 시대 궁녀의 수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평생을 왕의 잠재적 여자로 살아야 했으며, 죽거나 혹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궁을 나올 수 있었던 한 많은 전문직 궁녀. 시대의 비운에 울었지만 궁도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었기에 다양한 인생사가 그들에게도 펼쳐졌었다.
궁내에서의 금지된 사랑은 성인의 궁녀에겐 가히 숨이 막힐 노릇이었다. 왕을 제외한 남성과의 교제가 허릭되지 않는 법도는 동성애를 즐기는 궁녀들을 만들고야 말았다. 궁녀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감찰상궁이 있었으나, 수백 명에 달하는 궁녀들을 어찌 일일이 다 참견할 수 있었겠는가. 궁녀들의 쌓인 한을 풀어줄 대책은 바로 '출궁出宮'이었다.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면 궁녀들을 출궁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궁 밖으로 나가서도 궁녀들은 <경국대전>에 명시된 법에 따라 혼인을 불허했다. "궁녀가 밖의 사람과 간통하면 남녀는 즉시 참수한다. 임신한 자는 출산 후 100일을 기다렸다가 즉시 집행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기묘한 한국사에 빠져보자
책은 소설보다 재미있고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스무 편의 미스터리 한국사가 펼쳐진다. 저자가 이같은 이야기들을 채집하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드라마보다 더 깊이 풀어낸 기묘한 한국사에 빠져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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