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화의 비밀, 그때 그 사람 ㅣ 명화의, 그때 그 사람
성수영 지음 / 한경arte / 2025년 7월
평점 :
지난 3년간 저는 입수 가능한 각국의 자료를 최대한 끌어모은 뒤 이를 재구성해 여러 화가의 삶을 이야기의 형태로 정리해왔습니다. 마치 화석을 토대로 생전 그 생물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것처럼요. 갈수록 그 작업은 어려워졌습니다. 자료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건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예술도 사람의 일. 한 개인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작품과 화풍, 시대, 나아가 인간 전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성수영은 연세대 신방과를 졸업, 한국경제신문 사회부와 경제부를 거쳐 문화부에서 미술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연재중인 <성수영의 그 때 그 사람들>은 구독자수가 7만 5천명을 넘기며 압도적 1위를 기록중인 문화예술 분야 최고의 인기 칼럼으로 손꼽힌다.
총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된 책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 화가들, 여성과 모성 사이에서 꿈을 쟁취한 화가들, 삶과 죽음의 만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들, 그림에서 굴곡진 인생의 답을 찾고자 한 화가들 등을 주제로 다루면서 각 파트별 6명 화가, 총 24명의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앙리 마티스(1869~1954년)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는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리는 거장이다. 그럼에도 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마타스의 고향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1990년, 한 미술사학자가 마티스의 고향을 찾았을 때 고향의 젊은이들은 마티스의 이름조차 잘 몰랐다고 한다.
더구나 마을 노인들은 한술 더 떴다. “마티스, 그 멍청이 말이군요. 우리 마을에서 유명한 바보였습니다. 어르신들은 마티스를 ‘세 번 실패한 패배자’라고 불렀어요. 아버지 가게도 물려받지 못했고, 공부에도 실패했고, 화가가 돼서도 실패했으니까요. 어린 아이들도 마티스보다는 더 그림을 잘 그릴걸요.”
이에 미술사학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 최고 거장이라는 타이틀과 고향 마을에서의 ‘세 번 실패한 패배자’라는 모욕적인 별명. 이런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 마티스는 왜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았고, 고향 마을 사람들은 왜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자.

(사진, 춤)
마티스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좀 허약한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프랑스 북부 시골 마을에서 씨앗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페인트 가게의 점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장남인 마티스가 당연히 가게를 물려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위경련과 복통, 탈장 증상을 보이는 아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저 "저렇게 허약해서야 씨앗 자루를 짊어지고 배달할 수가 없으므로 아무 쓸모짝도 없어 보이니 가게도 못 물려주겠다"고 생각했었다. 한마디로 아버지 눈 밖에 난 아들이었다.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마티스는 화가가 될 거라곤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요구대로 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지만 그의 마음 속엔 스트레스와 울화가 계속 쌓여만 갔다. 1890년, 21살 때 탈장이 악화되어 거의 1년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갑자기 그에게 구원의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미술 도구 상자를 전하며 그림이라도 그리면서 기분 전환을 하라고 말했다. 드디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그림 물감을 손에 쥔 순간, 이게 바로 내 삶이 될 거라고 직감했던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아버지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하자 '굶어 죽을 거'라고 그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20대 내내 마티스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그림 스타일은 평범했고 작품도 잘 팔리지 않았기에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건강도 나빠졌다. 그림을 그만둘까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의 곁엔 돕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1892년에 만나 아내가 된 아멜리에가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마침내 서른여섯 살이 된 1905년 마티스의 색채가 폭발했다. 자신만의 화풍으로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닌 쓰고 싶은 색으로 캔버스에 칠하기 시작했다.
부유한 수집가들이 마티스의 작품을 사들인 덕분에 마타스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점차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대중들의 눈에 그의 그림이 익숙해졌고 나아가 작품 속 색채들의 묘한 조화와 매력, 신선함이 점차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사진)
마티스 사후에 지역 신문들은 "우리 마을에 거장 마티스가 있었다"는 특집 기사를 실었고, 관광 코스인 '마티스 루트'가 만들어졌으며, 마티스 아버지의 씨앗 가게를 사들여 '마티스 하우스'로 새롭게 개장했다. 마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마티스를 자랑스러워했고, 그의 작품에서 감동을 느꼈다.
메리 카사트(1845~1926년)
이 도서의 책표지에 실린 그림을 그린 화가가 바로 메리 카사트다. 그녀는 미국 화가로 판화 제작자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대부분 생활을 했으며, 에드가 드가를 만나 친분을 쌓으며 이후 인상파 화가들과 함게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여성들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일상 생활을 담고 있다.
올케와 시누이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나쁜 이유는 두 사람의 삶과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올케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로 명문가 출신답게 뛰어난 내조로 남편의 성공을 도왔으며 네 명의 아이를 낳아 키우며 훌륭한 가정을 꾸렸다.
반면에 시누이는 비혼을 택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정착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누이의 이름은 메리 카사트, 미국 출생이지만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인상주의 화가였다. 올케의 이름은 로이스 뷰캐넌, 미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의 조카였다.
카사트의 예술적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로이스와 조카들의 그림을 그리면서 '어머니와 아이'라는 소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붓끝은 전보다 더 부드럽고 색채는 더 따뜻해졌다. 이는 훗날 카사트를 대표하는 그림 주제와 화풍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미혼이자 미출산 여성이 어머니와 아이를 그리는 게 이상하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술사가美術史家이자 카사트 연구자인 낸시 매튜스는 "드가는 발레를 하는 무용수와 매춘부를 주로 그렸지만, 드가가 그 일을 직접 해본 건 아니지 않은가. 화가는 자신이 관심 있어 하고 친숙한 주제를 그릴 뿐이다."라고 평하면서 카사트를 감쌌다.

(사진)
카사트는 가정을 꾸리기보다 직업을 선택했다. 로이스는 그 반대였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정반대였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때로는 질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카사트는 그렇게 로이스를 바라보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삶에 완벽한 정답 따윈 없으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완벽한 행복은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년)
스위스 베른에서 가난한 목수인 아버지와 농장 일꾼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호들러는 어릴 적부터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 모두 병으로 잃고 홀로 세상에 남겨졌으니 말이다.
나이 일곱 때 아버지와 두 형제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열네 살 때는 밭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쓰러져 세상을 하직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작은 수레 위에 놓인 어머니의 관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죽음은 항상 우리 가족 곁에 있었다."
호들러가 자주 그렸던 주제는 역시나 죽음. 호들러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사실은 알프스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30대 후반이 되도록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 호들러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보다 스무 살 연하인 발렌틴 고데-다렐이었다. 전 남편과 이혼 후 제네바에서 생계 목적으로 모델 일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녀를 만난 호들러는 발렌틴의 교양과 현명함, 강인한 성격과 아름다움에 반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발렌틴의 몸에서 자궁암이 발견되었다. 20세기 초반의 의학으론 암은 불치의 병이었다. 그녀의 몸에 암은 이미 여러 곳으로 전이되어 있었다. 두 번에 걸친 수술과 당시로선 최신 기술이었던 방사선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급속히 쇠약해졌다.


(사진, 병상의 발렌틴)
호들러는 홀린 듯이 발렌틴이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했다. 곧 사라질 그녀의 존재를 자신의 곁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가 남긴 그림 수는 유화와 스케치를 비롯해 총 200점 이상. 죽어가는 과정을 이토록 끊임없이 여러 번 묘사한 화가는 전무후무였다. 그러면서 호들러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삶은 죽음이 있기에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머스 로런스(1769~1830년)
영국의 초상화 화가이자 왕립 아카데미의 4대 회장이다. 그의 아버지는 여관 주인이었으며 그림 영재였던 그는 열살 때부터 파스텔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했다. 1790년 왕실 의뢰를 받아 샬롯 여왕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유화 화가로서 명성을 다졌다.
“언니, 약속해. 내가 약혼했던 그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언니와 그 남자가 이어지는 걸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가족들과 성직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생이 남기는 마지막 소원. 이런 분위기에서 언니는 “사실 그 뜻이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수녀는 말했다. “손을 내미세요. 절대 그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언니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고 맹세하고 말았다. 그리고 동생은 몇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띤 채로. 이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후 남겨진 언니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 남자는 바로 토머스 로런스였다.

(사진)
꼬마 천재의 뛰어난 실력과 명성 덕분에 한 달 동안 버는 돈이 지금 돈으로 치자면 1천만 원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여관은 망해가고 있었다. 결국 로런스 가족은 여관업을 그만두고 귀족들의 휴양도시인 바스로 떠났다. 이곳을 찾는 영국 상류층 휴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유명 인사들은 어린 로런스를 매우 아꼈다.
로런스가 17살이 되던 1786년, 그의 아버지는 런던으로 이주를 결정했다. 성인이 된 로런스는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교양도 뛰어나고 운동까지 잘해서 어딜 가나 인기 만점이었지만 겸손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런던에서의 그의 명성과 수입은 꾸준히 상승했다.
1789년, 마침내 로런스는 스무 살의 나이로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서 올해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으며 슈퍼스타로 부상했다. 명성보다도 더 영광스러웠던 것은 비로소 왕실 화가가 된 사실이었다. 마침내 그의 성공 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로런스가 벌어들인 많은 돈 대부분은 그의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면서 말아먹는 통에 빚을 갚는 데 이용되었다. 이렇게 그의 아버지는 번번이 로런스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었다. 23세이던 1792년엔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 출품작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 상의 없이 로런스가 최근 전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광고를 냈던 것이다. 그 뒷수습은 로런스 몫이었다.
1797년 로런스 부모는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로런스의 나이는 28세였다. 부모님이 살던 큰 집을 팔고 이사를 갔다. 새로 옮긴 동네에 여배우 세라 시돈스가 살고 있었다. 사실 로런스가 세라를 처음 만났던 장소는 바스였다. 15년 전 13살인 로런스가 27살인 세라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이다. 그런데, 세라에겐 두 딸이 있었다. 큰딸 샐리와 작은딸 마리아였다. 각각 22살, 18살이었다.
처음 로런스와 사랑에 빠진 이는 언니 샐리였다. 같은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다가 사랑에 빠졌다. 이에 로런스는 세라를 찾아가 "따님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고의 사윗감은 분명하지만, 로런스 아버지가 남긴 빚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빚을 다 갚고 오라"고 말했다.
이후 상황은 동생 마리아가 끼어들면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마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언니의 남자친구를 자신이 갖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마리아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1798년 마리아가 죽은 뒤 샐리와 로런스는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1803년 언니도 동생처럼 폐병으로 죽고 말았다. 두 자매가 동시에 사랑한 화가의 슬픈 초상화인 셈이다.
#그림이야기 #명화의비밀그때그사람 #성수영 #한경아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