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느리다. 요즘 같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시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책을 골랐다면, 당신은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다. 책이 느린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선 쓰기가 어렵다. 주제를 정하기가 어렵고 구성의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뿐만 아니라 출판 후 수정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모로 확인해야 할 사항이 많다. 책이 무거운 이유는 쪽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이 모든 책임과 의무가 한 쪽 한 쪽 켜켜이 쌓여 단단한 무게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럼 왜 책을 봐야 하는가? 책에는 시류를 초월하는 깊이가 있다. 신문은 하루살이 인생이고 잡지는 한달 짜리 시한부 인생을 살지만 책은 백년을 간다. 부모에서 자식으로 자식에서 또 그 자식으로 누누히 읽혀 내려지는 건 책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이 시류를 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발빠른 신간이라면 중요한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책이 많이 나올수록 사회는 더 똑똑해진다. 속도와 깊이를 겸비한 책 만큼 인간의 지성을 살찌우는 건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아프리카가 없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이 책이 2011년의 가다피 축출(리비아의 독재자)을 다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릿적 얘기가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2011년이라면 엄연히 과거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좀 봐주시게 그래도 아직 4월이지 않은가.


이 책은 불행한 노예 무역이 시작됐던 15세기 부터 현재까지 아프리카 역사의 요점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좀 더 무게가 실리는 쪽은 현재이며, 역사를 정치와 문화로 나눌 수 있다면 방점이 찍히는 쪽은 정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아프리카의 기아, 폭력, 독재가 모두 현재의 일이며 그 모든 것들이 저급한 정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정치는 실로 암울하다. 아니 암울하다는 말조차 과분하다. 국제 원조는 매년 수십조가 투입되지만 부패한 국가 지도자들은 그 돈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데만 열중한다. 그들이 탐하는건 원조금 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초거대 다국적 기업과 신흥 경제 대국들은 아프리카의 석유, 다이아몬드, 철광석 등 양질의 천연 자원을 노리고 부패한 지도자에게 검은 돈을 뿌린다. 아주 싼 값에 자원 채굴권을 넘긴 지도자들은 그 돈으로 무기를 산다. 그리고 그 무기는 독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살해하는 군대를 무장시킨다.


우리가 이 책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끔찍한 아프리카의 현실이 대한민국 근대 역사와 쌍둥이처럼 닮아있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와 내전, 수십 년간의 독재, 군대를 동원한 국민의 학살.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아프리카의 현실을 곰곰히 살펴 볼 때 마다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한 듯 보이는 대한민국이 실제로는 과거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현정권의 인천공항, KTX 매각 건이나 최근의 지하철 9호선 사건만 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공권력을 이용한 폭력은 물대포 진압과 쌍용 자동차 파업 해산을 보면 확실해 진다. 정치 검찰을 동원한 야권 탄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국민은 여당을 숭배하고 있으며 그 마음을 선거를 통해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렇게 현재는 또 다시 과거를 향해 질주한다. 저자는 '아프리카 비극의 출발점은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는 정치 문화에 있다'(176p)고 했는데 과연 여기서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대한민국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정말로 자신이 없다. 


물론 이 책이 한국의 정치를 비판하기 위해 씌인 책은 아니다. 실제로 저자는 아프리카의 불우한 현실과 그 원인을 냉정하게 짚어볼 뿐 그것을 한국의 현대사와 무리하게 연결해 독자를 정치적 가치 판단의 혼란 속으로 몰아 넣지 않는다. 그리고 이점이 바로 이 책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아마도 그 자신이 아프리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쭉 보고 있으면 그런 애정이 곳곳에서 드러나 책을 읽는 내내 진지한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통 우리가 아프리카를 주목하는 이유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경제적 미개척지로서의 잠재력을 봤기 때문이거나 그 대륙을 남의 도움 없이는 도무지 회생 불가한 낙오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프리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가진 오래된 역사를 떠올리지 않는다. 고대 문명의 어머니 아프리카는 그렇게 기아와 내전과 부패와 가난에 압사해 버렸다. 


이 책의 부제인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는 결코 과장된 언어가 아니다. 저자는 상기되어 있되 결코 흥분하는 법 없이,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애정어린 손길로 해체한다. 아마도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그 해체된 잔해 속에서, 우리는 아주 밝게 빛나고 있는 아프리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자처럼 사고하기 -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 37인이 생각하는 마음, 생명 그리고 우주
에두아르도 푼셋 & 린 마굴리스 엮음, 김선희 옮김, 최재천 감수 / 이루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당신이 뭔가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가장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인터뷰일 것이다. 말과 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글은 어렵고 수사적이다. 말은 쉽고 직접적이다. 물론 글은 아주 탄탄하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는 작가가 아닌 이상 글은 매우 구조적이고 안정적이다. 반면 헛소리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은 체계적으로 뱉기가 어렵다. 말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둥근 공 같다. 하다보면 어느새 삼천포, 도대체 무슨 얘길 하다 여기까지 온거지? 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게 바로 말이다. 그리고 인터뷰는 '말' 이다.


자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말은 헛소리가 될 수 있다. 인터뷰는 말이다. 고로 인터뷰는 헛소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인터뷰를 책으로 엮을 때 말한 것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법은 없다. 거기엔 편집의 마술이 숨어 있다. 두서 없는 말은 자르고 잘못된 문법은 바로 잡는다. 그러니까 인터뷰는 말이 찾아 놓은 반석 위에 구조를 더하는 것, 즉 말과 글의 하모니인 것이다.



과학자처럼 사고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학이나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물리학 기타 등등 여러 과학들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보기에 모든 과학은 근본적으로 같다. 무언가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증명하고 검증하고 반증하고 기타 등등! 이 모든 일들이 과학적 탐구라는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모든 과학은 근본적으로 같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느냐, 다른건 현상일 뿐이다.


자 그럼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라는 책이 나온 이유는 뭘까? 이 책은 과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과학자가 될 수 있는지 도움을 주는 책일까?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은 교양서로 포지셔닝 할 것이다. 교양이다. 이른바 Liberal Arts! 그렇다면 이 책은 과학적 사고의 보편성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살펴보자. 우리의 주변엔 얼마나 많은 의문이 잠자고 있는가. 살아간다는 건 이 질문들에 하나 하나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으며 나아가는 과정이다. 마치 실험실 속의 과학자처럼 말이다. 원리는 이렇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철학서인건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37명의 과학자들은 자신의 일과 일터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37명의 과학자 중에는 제인 구달(침팬지 아줌마),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대니얼 길버트('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저자)처럼 유명한 사람도 있지만 이 책의 저자 린 마굴리스, 에두아르도 푼셋을 비롯해 유진 처드노프스키, 니콜라스 가르시아처럼 생소한 이름이 더 많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가 네임 밸류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생소한 과학자의 연구 결과는 그 이름만큼 생소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신기하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신경학자 새폴스키가 언급한 기생충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과연 전략적 사고와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만의 능력인지,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우월함을 인정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이 기생충은 번식을 위해 고양이의 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운명인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선 쥐를 중간 통로로 활용한다. 이 놈은 우선 쥐의 몸 속에 들어간 뒤 그 뉴런이 작용하는 과정을 방해해 '쥐가 고양이에 대한 시각적 공포를 잃어 버리게' 만든다. 이 다음 과정은 정신나간 쥐가 섹시한 고양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다 그녀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양이의 내부에 침입한 기생충은 그 안에서 행복하게 번식을 한다. 



과학자들은 인간 이외의 생물 연구를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개의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과정에서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볼품없고 열등한 존재인지 깨닫는 것 같다. 이 책에는 저 혼자만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한 미소를 띄는 과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란 정교하게 돌아가는 생명의 시계 속에 자그마한 톱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 들인다.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같이.


37명의 과학자들을 쭉 보면서 느낀 또 하나의 감탄은 그들의 다학제적 배경과 연구다. 앞에서 말한 새폴스키는 스탠퍼드 의과대학의 신경학 교수지만 그는 하버드에서 인류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책에선 사회학의 향기가 난다. 역시 독창적인 연구 결과는 서로 다른 학문간의 연계를 통해서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 서로 전혀 관계가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을 찾아내는 순간 더 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연구 성과. 이 책의 감수자가 '통섭'의 과학자 최재천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팜북 2012-04-1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시절 그러니깐 대학때까지 솔직히 10권(소설 포함)도 채 읽지 않았던,, 오로지 교과서만 봤던 제가 늦게나마 이제 독서에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 힘든 직장생활속에서 새벽 2-3시까지 수험생마냥 책을 읽은지 이제 5개월째인데요. 이제 5개월가지고 생색내는거 같지만 독서 방법이 잘 못되서 그런지 생각의 폭이 전혀 넓혀지지 않은거 같습니다. 주로 인문학 책 위주로 역사, 철학, 고전 등을 보는데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저도 막연하게나마 40대초반에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어서 그럽니다. 여튼 오늘도 어김없이 알라딘와서 눈팅 하다가 님 서재에 왔는데...잠깐 리뷰들 몇개를 봤는데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어쩜 이리 생각의 폭이 깊고 글을 맛깔스럽게 쓰시는지요!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간단하게 나마 독서법이나 생각 넓히기, 글 잘쓰는 비법? 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여기다 써도 되죠?^^)

한깨짱 2012-04-20 13:05   좋아요 0 | URL
진지한 댓글에 누가 되지 않는 말을 하기 위해 답글이 늦었습니다. 새벽 2-3시까지 독서 수행을 하시다니! 그 행동 자체만으로도 존경 받을 만 합니다. 진심이에요.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건 3년 쯤 된 것 같습니다. 매일 한 시간 일찍 출근해 글쓰기 연습을 했습니다. 왕복 두 시간 거리의 통근길에서는 책을 읽었고요. 이렇게 매일 했지만 일주일에 1,000~1,500자 되는 글을 딱 한편 쓰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 그런데 1년이 되고 2년이 되고 3년이 되자 분명히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글을 잘 쓰게 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제 글은 형편 없어요. 단지 글과 조금 더 친해졌달까요?

전 개미처럼 한 알 한 알 흙을 옮겨 집을 짓기를 좋아합니다. 노력의 크기만큼 초조와 불안도 커지기 마련이지만 개미들은 결국 왕국을 만들어 냅니다. 팜북님의 의지도 분명 오늘을 극복해내 실 수 있을 겁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네요.

팜북 2012-04-2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큰 도움과 위안이 됐습니다. 님도 3년이 걸리셨는데 이제 5개월 째인 제가 너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성격이 워낙 급해서 뭔가 눈에 빨리 보여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그럼 블로그에 글쓰기 연습하신거가요? 아님 따로 노트에 필기로 하신건지요? 전 이제껏 쓰지는 않고 독서만 했는데 이제서야 독후감 비스므리 하게 필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갤럭시 노트로 시작해서인지 가속력이 붙질 않더군요. 그래서 따로 노트로 필기를 해야하는지 고민중입니다. 아 그리고 여기 리뷰보고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주문하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대됩니다. 저도 이 책을 기준으로 당장 조금씩이라도 글쓰기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뭐든지 뚝심이 있어야 되는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실전적 문장비법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주변의 누군가가 글을 팔아 밥을 벌고 싶다는 미래를 말한다면,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할 것이다. 

책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읽히지도 않는다. 선진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들이 평생에 걸쳐 교과서 이외의 책을 읽게 될 때는 시험을 보거나 주식을 사거나 처세를 생각할 때다. 간혹 마음이 상처를 입었을 때도 본다. 선물로 받은 책을 들고 30페이지 가량 읽고 난 뒤 베개 맡에 놔두고 10년을 삭힌다. 이게 바로 오늘날 책의 일생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이란 책에서 평생 동안 고난을 당하는 한 여자의 비참한 일생을 그렸다. 한국의 블로거인 나는 '책의 일생'이란 책을 써서 평생 동안 고난을 당하는 책 한 권의 비참한 일생을 그려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쓰기에 대한 열망은 뜨겁다. 글쓰기 능력을 성공과 연관 시키는 짜릿한 처세 광고의 힘일 것이다. 처세의 글 쓰기는 내가 바라는 영혼의 글쓰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대륙 위에 서 있다. 두 대륙 사이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여 눈을 크게 뜨고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보라. 이 땅은 대륙이 아니다. 우리의 글은 바다를 건너 저어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전달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외딴 섬에 갇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쓰는가? 아직도 반짝 반짝 빛나고 있는 영혼의 글 쓰기, 그 묵직한 열망의 사슬이 우리를 이 고독한 섬 위에 잡아 두기 때문이다.





이외수는 소설가다. 그는 IT에 밝고 트렌디하다. 트위터를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 보지 못했다. 그는 소설가지만 에세이로 돈을 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이외수는 현존하는 소설가 중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소설가가 되었다. 


이외수의 글은 확실히 놀랍다. 방황했던 젊은 시절의 상처와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수십 년의 경험이 색다른 해석과 치유의 문장을 만들어 낸다. 특히 사물과 현상을 재해석해 써내는 촌철의 문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촌철의 힘은 오늘날 이 땅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능력이다. 촌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외수의 수 많은 베스트셀러 에세이가 증명해 내고 있다. 

이런 그가 '실전적 문방비법'을 표방한 글쓰기 강의 책을 썼다. 나는 처음에 이 문장 뒤로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라는 문장을 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의 글에선 언제나 돈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고선 이 책이 나온 시점이 그가 에세이 작가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앞의 두 문장은 취소다. 이 책은 소설가이자 촌철의 에세이 작가인 이외수가 이 땅에서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충고라고 봐야 한다.





나는 이 책의 위대함이 첫번째 장 '단어의 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장에서 이외수는 그야말로 '실전적 문방비법'이 무엇인지 명확하고 구체적인 강의를 해준다. 이 장은 주로 단어의 본성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실전 예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단어를 '생어'와 '사어'로 나눠 그 차이를 설명한 부분에선, 감탄했다. 원래 혼자 독학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렇다. 꽤 오랫동안 글 쓰기를 해왔지만 단어에 이런 차이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내가 사어를 많이 쓴다는 것도 알았고 때문에 글이 필요 이상으로 질리는 이유도 알았다. 다음 문장을 한 번 보자.

그놈은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사어로 된 문장이고 내가 쓰는 글이다.

그놈은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생어로 된 문장이다.

이어서 이외수는 생어 채집을 권한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모아 놓은 생어 채집 노트가 좋은 글의 자양분이 될 것은 확실하다.

다음은 단어의 속성을 탐구해 보는 시간이다. 이 부분을 곱씹다 보면 이외수 글 쓰기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어의 속성을 파헤쳐 그 본성에 근거한 쓰임이 어떻게 사물과 현상의 이면을 드러내는지... 오래된 단어들 속에서 이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의미들이 방울방울 피어 오르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글 쓰기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글쓰기의 공중부양'이 좋은 점은 책 속의 강의가 일종의 연습 문제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어 10개를 제시 하시오', '새벽녘이라는 단어의 속성을 오감에 근거해 서술 하시오'라는 연습 문제를 매일같이 푼다고 생각해 보자. 생각만 해도 글 쓰기 실력이 쑥쑥 자랄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위대한 소설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재능'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믿는다. 이 책은 이 믿음을 증거한다.

1장 '단어의 장' 말고도 다른 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의 위대함은 이 첫 장으로도 충분하다. 해서 정말로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책의 87페이지 까지만 읽어도 좋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수는 언제 치나요?
다니엘 호프 외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에세이라는건 그렇다. 언제 봐도 부담이 없고 또 재밌다. 마치 남의 일상을 몰래 엿보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도 준다. 그런데 에세이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것이 인문 교양서의 탈을 쓸 때다. 무미건조하고 전혀 흥미롭지 않은 전문 지식을 생생하고 활기 넘치는 문체로 전달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 그 무거운 문을 쉽게 열 수 있다.






'박수는 언제 치나요?'는 클래식 입문서를 표방한 에세이다. 저자 다니엘 호프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신이 겪었던 음악 활동을 책 전체에 걸쳐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 중에는 뉴욕의 택시 기사를 만나 클래식 콘서트의 편견을 깨주게 된 일화 부터 유명 음악가들의 뒷 이야기, 시기별 음악 사조의 특징과 그 연주법까지 다양한 무게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음악가들의 뒷담화였는데, 사실 뒷담화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또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일화라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클래식 음악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 위대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그 자신도 작곡가였는데, 하루는 그 위대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곡은 짧고 가볍고 대중적으로 써라. 아무리 둔감한 사람의 귀도 간지럽게 할 수 있어야 한다.'(p.55)

너무너무 재미있는 얘기 아닌가? 오늘날 우리가 그 이름만 듣고도  머리를 쥐고 세차게 흔들 만큼 고루하고 지겨운 클래식 음악을 창조한 모차르트는 '곡은 짧고 대중적으로 쓰라'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음악 활동에 매진했다. 아마도 모차르트 부자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 아버지는 모차르트에게 아이돌 가수가 되라고 당부했을 것이다. 이런걸 보면 클래식하고 고귀한 예술들도 한 때는 모두 저급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시대의 대중은 현대의 대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속 음악가를 고용해 파티와 음악회를 수시로 열던 부자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음악을 깊이 이해할 만큼 교양도 있었고. 하지만 이 일화로 미루어 보아 그 시대의 모든 대중들이 음악을 이해하고 있었던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확실한 건 하나다. 음악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오락 거리'였다는 것. 모차르트와 후원 귀족의 관계는 정확히 소속 가수와 소속사의 관계로 대치될 수 있다. 아마도 그 당시의 클래식 음악가들이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권위과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모차르트를 폄하한 것 같은데, 사실 모차르트는 엄청난 반항아였으며 단순히 고용된 음악가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강한 에고를 지닌 진정한 아티스트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유명 작곡가들의 에고가 어느 정도 였는지, 이번엔 베토벤의 일화를 소개해 보겠다.






베토벤은 그 초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엄청나게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로지 청중과 자기 자신에게만 책임을 지는 예술가의 길을 가려 했다. CD도 YouTube도 없던 그 시대에 음악은 오로지 귀족들이 여는 음악회를 통해서만 유통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귀족의 후원 없이는 어떠한 음악 활동도 불가능했다는 것. 베토벤은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예술적 자존심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를 후원하는 영주 리히노프스키가 자신을 업수이 여긴다고 느꼈는지 베토벤이 이렇게 말했다.

'영주님, 당신이 영주인 것은 우연과 출생의 덕이지만 나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 자리에 왔소. 세상에 영주는 수천이 넘지만 베토벤은 단 하나뿐이오!'(p.60)

음악가나 화가가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아티스트'가 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 절대왕정이 붕괴하고 부르주아 사회가 도래하면서 귀족의 후원을 잃게 된 '직업인'들이 저마다 살 길을 찾게 되면서 누구는 '진짜 대중'에게 팔리는 예술을 하고 누구는 고고하고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되면서 저급 문화와 고급 문화(예술)의 영역이 분리된 것인데, 사실 이 얘기는 이전에 발터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책을 통해 말했거나 앞으로 다른 책을 통해 말할 기회가 많으므로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다.

자, 이제 다시 에세이라는 장르로 돌아가자. 에세이는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가득하다.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군고구마를 까먹으며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를 듣듯, 에세이에는 소소하고 유쾌한 진리가 반짝 반짝 빛나고 있다. 

에세이라는 장르는 어쩌면 요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문학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길게 읽을 시간도, 펑키한 뭔가를 찾을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보다 손쉽게 자극과 교양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소설가들이 에세이 작가로 전향하는지도 모르고.

'박수는 언제 치나요?' 한 권을 읽고 클래식에 통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입문서란 원래 강물까지 말을 끌고 가는 것이 전부다. 이 후에 그 거대한 강물을 다 들이키든 그 속에서 헤엄일 치든 그건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을 지칭하는 호모 어쩌구 하는 단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호모 사피엔스'일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사람. 사실 이렇게 인간을 정의하려는 노력은 인간이 자연계의 다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일반 생물과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인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건가? 직립보행을 한다는 건가? 아니면 예술을 할 줄 안다는 건가? 수 많은 궁리 끝에 도달한 답은 결국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이 이성에 대한 강력한 믿음 덕분에 우리 인간은 비로소 육체적 동물성의 한계를 벗어나 이 세상의 특이종으로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38년,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름하여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란 것이다.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당연하게도 역사적 방법을 취한다. 인간이 언어를 발견하고, 문명을 일으키고, 집단을 형성하고, 법과 체계를 세워 국가를 만들고, 심지어 전쟁을 일삼고 기타 등등 오늘날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행동들이본질적으로 놀이에 다름 아니었으며 바로 놀이로서 발전해 왔다는 것, 하위징아는 이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 구체적 예시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독특한 주장해 펼쳐 나간다. 


그렇다면 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문화를 놀이로 설명하기 위해 우선 놀이를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놀이의 보편적 특징을 언급한다.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놀이에 의무나 강제적 명령이 부여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무언가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하며'(42p) 이것은 놀이가 그 자체로서 목적이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놀이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다. 놀이는 일상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놀이가 만들어낸 고유의 세계로 들어가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왜 어느 순간 현실 세계를 잊고 그 안에 완전히 몰입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잘 설명해주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어느 순간 종료되야 한다. 하지만 이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놀이는 후손에게 물려져 전통이 되며 따라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을 갖는다. 한편 놀이는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립된 공간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스포츠 경기장, 무대, 도박장 등의 장소가 생활 세계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어 온 것은 아마도 일상 세계와 놀이터를 엄격하게 구분지음으로써 더 강력한 몰입 효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넷째,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규칙은 놀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규칙이 없는 놀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놀이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라도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놀이는 중단된다. 예를 들어 얼음땡의 술래가 된 사람이 '얼음'을 외친 플레이어를 잡고 끝까지 술래가 되길 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참가자 모두가 합의한 규칙을 누군가가 어기는 순간 몰입은 중단되며 참가자들은 놀이의 세계로부터 강제로 꺼내져 현실 세계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렇게 정의된 놀이를 어떻게 스포츠, 문학, 심지어 법과 정치에까지 연관지을 수 있는 의아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 사례를 모두 언급할 수는 없으니 가장 관계가 없어 보이는 법률의 경우를 따져 보자.

소송은 확실히 놀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소송 당사자들은 법원이라는 독립된 공간에서 할당된 시간 내에 논박을 주고 받는다. 원래는 평범한 회사원이거나 가게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이 곳에선 피고나 원고라는 배역을 맡아 변호사 또는 검사와 한 팀을 이룬다. 소송 과정에서 드러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규칙은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송이 과연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광장에 모여 논쟁을 주고 받고 그것을 일종의 놀이로 유희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소송이 놀이라는 주장이 일면 타당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고와 피고들은 분쟁을 해결하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구체적인 이득을 얻고자 한다. 현대의 소송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그 자체로서의 목적되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위징아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에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던 행위들이 현대로 오면서 점차 놀이적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정도의 설명은 충분치 않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위징아는 문화가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려 할 뿐 왜 현대에 이르러 그것이 놀이의 특성을 잃게 됐는지에 대한 고찰은 진행하지 않고 있다.

내 보기에 그 이유는 아마 이성에 의한 이성을 위한 이성의 세계였던 근대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성이란 강력한 합목적성을 추구하며 언제나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무런 목적없이 행위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는 놀이와 각종 문화 현상을 연관 짓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법률이나 정치같은 진지하고 엄숙한 사회 현상이 바로 근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전하며 그 전문성과 체계성을 갖췄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사항이다. 

이 책 '호모 루덴스'가 무목적성을 기반으로 하는 '놀이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인간' 을 공격하며 근대 사회의 맹점을 비판했다면 난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공백은 나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어쩌면 그 공백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2-21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