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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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나에게 리뷰를 쓸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책장에 고이 간직한 일년, 용기를 쥐어짜 두 번째 정독에 도전한다. '쓰기'라는 쓰디 쓴 족쇄의 의무를 탈출하기 위해.


592p의 양장본, 후주만 35p. 타키온, 글루온, 파동 함수, 10차원 공간, 칼라비-야우 도형들, 이름만 들어도 눈 앞에 아득해 지는 전문 용어들이, 전기 나간 지하실같은 캄캄한 머리 속으로 햇빛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회상의 톱니바퀴가 덜컹거리며 동작을 재개하고 기억을 떠나있던 지식들이 제자리를 찾아온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리뷰를 쓸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좀 봐줘요, 나이가 들 수록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해야 할 순간들이 많아 진답니다. 





추락하는 사과의 은혜를 입어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이후로 사람들은 뉴턴을 천재로 칭송해왔다. 뉴턴은 당시의 수학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신이 직접 새로운 수학을 창조할 만큼 천재적이었다. 


뉴턴이 힘의 상호작용과 행성의 운동 법칙을 설명했을 때, 인류는 세상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고 어떠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믿음의 대부분은 현실로 이뤄졌다. 인간은 위성을 쏘아 올렸고 달에 인간을 보냈으며 6,000km 떨어진 이웃 나라에 핵폭탄을 떨어드릴 수 있게 됐다.


뉴턴의 세계는 간결하고, 우아했으며, 명확했다. 오묘하고 비밀스러운 사물의 운동은 그것의 위치와 속도로 간략히 서술될 수 있으며 사물에 가해진 힘과 상호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토대로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예컨대 우리가 빅뱅 당시 존재했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다면 이 우주의 최후 모습을 완벽하게 예측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얘기다. 뉴턴의 역학 안에서 세계는 째깍째깍 귀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시계였고 신은 두꺼운 돋보기를 걸친 기계공이었다.


중력을 발견한 뉴턴이었으나 그 자신도 '그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중력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이 문제에 해답을 준 것은 약 200년 뒤에 나타난 또 하나의 천재,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때 그 질량의 크기에 비례해 공간에 휘어짐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별거 없어 보이는 발견이 '중력'의 원인을 찾는 실마리였다. 중력은 '휘어진 공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공간에 대한 놀라운 발견도 잠시, 아인슈타인은 더 가공할 만한 폭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시간의 비밀 말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시간은 그저 한 사건과 다른 사건 사이의 간격을 기술하기 위한 관념적 단어에 불과했으나 아인슈타인이 등장하자 시간은 구체적인 물리량으로 변화했다. 쉽게 말해, 시간 또한 공간처럼 휘어지거나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발견한 것이다.


이 공간과 시간에 대한 발견이 바로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의 골자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도출되는, 천지가 개벽할 사례를 몇 가지 적자면 다음과 같다. 


'빨리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은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보다 느리게 흐른다'


'한 물체가 빛의 속도에 다다르면 질량은 '0'이 된다. 따라서 그 어떤 물체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없다'


'시공간 차원에서 모든 물체는 광속으로 움직인다'


미안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구구절절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도 무려 143페이지에 걸쳐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니, 이 글에서 모든 걸 밝히기엔 내 능력도 그 긴 글을 읽어낼 여러분의 인내심도 모두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혹시 책을 읽고 나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좌절할 사람이 있을까봐 이야기를 하나 해주고 싶다. 아인슈타인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건 '상대성 이론'이지만,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건 '광자의 발견'이었다. 왜냐고? 당대 최고의 석학들조차 당시에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의 명예에 만족하고 안분지족, 산 속에 들어가 조용한 여생을 보냈더라면, 뉴턴에게 뺏어온 천재의 칭호를 평생 간직하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 배고픈 천재를 말릴 수 있었겠는가? 천재 물리학자의 지칠줄 모르는 연구는 급기야 '광자 가설'을 도입한 빛의 광전 효과 입증에서 빛을 발했다. 아인슈타인은 그 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천재의 칭호를 내려 놓을 위기에 처했다. 바로 그 발견으로 부터 양자 역학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양자 역학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살아 생전에 천지를 두 번이나 개벽시킨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는 양자 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결정론적 운명관을 옹호할 때나 쓰는 말이 됐지만 원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던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이 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이 왜 양자 역학을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밝히면서 한 말이었다.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우선 양자가 뭔지 부터 짚고 넘어가자. 위키 피디아에서는 양자를 '플랑크 상수 단위를 가지고 있고, 나눌 수 없는 물리량을 뜻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앞뒤 다 자르고 복잡한 내용을 뭉게버릴 권한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이해해도 좋다. 양자는 아주 작은 입자다. 빛을 구성하고 있는 광자, 원소를 구성하는 전자 등이 이에 속한다. 문제는 이 조그만 양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시 세계의 사물들과는 아주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양자의 놀라운 행동 패턴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양자(전자)는 동시에 여러곳에 존재할 수 있다'


'양자는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이건 벽을 구성하는 입자들 간의 간격보다 양자가 더 작기 때문이 아니다. 유령처럼 말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양자는 그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양자의 상태가 어떻게 관측될지는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바로 이 '확률'의 문제였다. 신께선 만드신 이 우주는 단 하나의 법칙에 의해 매끄럽고 우아하며 정확하게 동작한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믿음이었고 그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분야였다. 그런데 양자 역학의 우주는 뭐 하나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게 없다. 전자나 광자의 상태가 어떻게 관측될지는 오로지 확률적으로만 예측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당신이 매일밤 당신의 미래에 대한 응답을 달라고 기도를 올려도 신이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고작 '네가 성공할 확률은 57.4%느니라' 밖에는 안된다는 것이다. 


양자 역학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운명은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결정되어 있지 않다. 당신은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도 물리학자가 될 수도 심각한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단지 개개의 결과가 벌어질 확률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양자 얘기는 그만하자. 어차피 양자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는건 불가능하다. 양자 역학은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상식 세계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고 그 현상을 실제로 관측하는건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것이 왜 불가능한지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토머스 영의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을 살펴보라.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B%8F%99-%EC%9E%85%EC%9E%90_%EC%9D%B4%EC%A4%91%EC%84%B1)





너무 멀리 돌아온 감이 있지만, 사실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초끈이론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난 이 시점에서 힘이 다 빠졌다. 뉴턴의 고전 역학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고등학교 시절 화학2로 도피해야 했던 나에게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을 읽고 이해하고 쓰는건 양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아내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초끈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각자 이 책을 사서 읽어보라 라고 하는건 거짓말이고 마지막 힘을 짜내 몇 자 더 적어본다.


초끈이론은 '만물의 이론'의 강력한 후보다. 만물의 이론은 무엇이냐, 바로 아인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매달려 있던 통일장 이론. 즉 이 세계를 설명하는 단 하나의 완전 무결한 법칙이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힘은 크게 '중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과학자들은 완전히 별개로 작동하는 이 힘들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하나의 법칙의 '다른 모습'일거라고 생각한다. 왜냐고? 신이 완벽하다면 이 우주를 작동하게 하는데 4개나 되는 법칙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모든 과학자들이 이런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는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이 우주가 그렇게 비효율적일리 없다'는 믿음으로 만물의 이론을 탐구한다).


그런데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의 자기 소개고 전자기력은 하전 입자들의 댄스 파티다. *강한 핵력? 이분은 양성자들이 벌이는 이혼 소송을 중재하면서 평생을 산다. 중성자를 유혹해 파멸시키는건 *약한 핵력의 역할이다. 결국 힘들은 입자로부터 출발하거나 입자간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 자! 그럼 우리의 다음 질문은 입자란 무엇인가다. 왜 어떤 입자는 전자가 되고 어떤 입자는 쿼크가 되어 전자기력과 핵력을 만들어내는가(중성자와 양성자의 구성 요소)? 입자들은 빅뱅 당시부터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초끈이론의 대답은? 


아니올시다.


결론부터 말하면, 만물의 기본 요소는 '끈'이다. 맙소사! 우리의 우주는 수 많은 치실이 떠다니는 무시무시한 장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치실 따위가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까? 들어보라! 끈들은 서로 다른 모양과 '진동 패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진동 패턴'에 따라 어떤 입자는 쿼크가 되고 어떤 놈은 전자가 된다. 


탭댄스를 출줄 안다고? 자네는 좋은 쿼크가 될 수 있겠군! 


우주의 근본 원리가 우리에게 희망찬 암시를 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당신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놀라운 세상이야!


사실 초끈이론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10차원 시공간과 맞닥뜨리고 그 시공간이 끈으로 꿰매어져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140억년이나 되는 우주의 역사를 이해하는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누군가 물리학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나는 무조건 이 책을 꼽는다.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포드는 "무언가를 전문용어 없이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지난 백년 동안 우주는 무려 두 번이나 천지개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한 번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또 한 번은 양자 역학에 의해) 우리에겐 여전히 머나먼 정글이다. 물리학자들이 무능한걸까? 아니면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우주는 너무나 심오하고 복잡한 걸까? 브라이언 그린은 이 막막한 현실 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빛을 비추는 우주의 등대다. 당신이 이제 막 물리학을 찾아 우주를 나섰다면, 이 보다 밝은 불빛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져 있다. 이중 양성자는 서로를 밀어내는 척력을 갖는데, 이 척력보다 더 큰 힘으로 이들을 묶어 줘 원자핵의 붕괴를 막는게 강한 핵력이다. 


*약력은 방사성 물질이나 중성자의 붕괴를 일으킨다.


*브라이언 그린의 TED 강연도 명품이다. 절대 강추! http://www.ted.com/talks/view/lang/en//id/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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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11-1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느끼는 게 있다면 자연의 물리라는게 인간 언어나 지식의 한계 너머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중력. 양자같은 이야기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내로 끌어 이해하기 위한 시도가 있긴 하지만, 만유의 법칙을 찾는 것 자체가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이라고 포장하지만, 인간은 그저 인간일뿐, 티끌과 비교해 결코 더 나은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는걸 깨닫는 것이 나의 결론입니다. 또 중언 부언....결론도 없이 그저...
다 제끼고 결론은 브라이언 그린의 책은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재밌는 책입니다.

한깨짱 2012-11-21 13:55   좋아요 0 | URL
브라이언 그린의 재미를 알고 있는 독자를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요! 양자 역학은 정말 흥미로운 분야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리를 왜 만들었나요? 하고 질문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존재의 이유에 대한 미지가 인간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 책이 재미있는건 사실입니다!
 
사기 세트 - 전11권 - 시공인문교양만화 시공인문교양만화 사기
요코야마 미츠테루 지음, 서현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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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남자라면 누구나 62권짜리 '만화 삼국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전 중에 고전, 방대한 캐릭터, 사춘기 소년의 로망을 폭발시킬 힘과 힘의 대결. 이 모든걸 10권짜리 무시무시한 소설이 아닌 만화로 본다! 앞집 철수도 옆집 만수도 다 봤다. 심지어 철수 엄마도, 만수 엄마도, 이 만화를 볼 때만큼은 혼내지 않았다. 그 만화의 작가 요코야마 미츠테루. 이번엔 그가 '사기'를 그렸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얘길 좀 더 해보자. 로보트라면 유년기 남자아이에게 딱지나 막대 자석보다 소중한, 그야말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데, 과거 거대한 강철 로보트를 직접 조종하며 세계를 지키는 놀라운 소년의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철인 28호!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이 철인 28호의 원작가다(더 놀라운건 그가 '요술공주 샐리'의 작가라는 것!). 로봇물을 통해 불세출의 작가가 된 그였지만 어쩐지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역사'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전략 삼국지'를 비롯,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전국 명장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소개할 사기까지 동아시아의 굵직굵직한 전쟁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만화로서의 생을 얻었다. 역사처럼 진지한 주제를 만화가 따위가 다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부디 그 경거망동한 생각을 거두시길. 삼십년 뒤에 퀴퀴한 먼지를 마시며 과거를 탐구할 사람은, 바로 오늘 시시한 만화를 보며 똘망똘망 눈을 빛낼 한 소년일 테니까.



단순한 선과 과잉된 검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트레이드 마크!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사기'는 철저한 고증을 보탰다거나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제시하는 만화는 아니다. 그야말로 만화! 흥미진진한 사실의 덩어리들을 만화답게 시원시원하고 굵직굵직하게 뽑아낸다. '속닥속닥'하는 의성어가 나온 직후 '아니 그자가 음모를!?'하고 놀라는 등장인물의 클로즈업이 되면 사건은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급작스런 전개와 감정의 변화에 때때로 '응?'하는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단순하고 명쾌한 진행이야말로 만화의 매력 아니겠는가. 쇼파에 앉아 한 시간 남짓을 읽고 나면 제국의 역사는 수십년이 흘러가 버린다. 페이지를 넘길 때 마차 흘러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사건은 투자한 시간의 대가로 충분할 것이다.


사기를 읽으며 신나는 또 한가지는 익숙히 알고 있던 단어와 고사성어들의 기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 외국의 소설이나 인문서를 보다 보면 단어의 기원을 찾아(주로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곤 한다) 서로 다른 단어들끼리의 긴밀한 관계가 밝혀지곤 하지 않는가. 사기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말에도 이런 흥미진진한 기원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토사구팽, 관포지교 같은 사자성어는 말할 것도 없고 와해, 궤변 같은 일상 단어가 언제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머리 속에 번뜩하는 느낌표가 새겨지며 절로 무릎을 치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말의 기원을 알게 되면 언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심오해지는 법이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그리고 그 아이가 좋은 글을 쓰길 원하는 부모라면, 역사책을 꾸준히 읽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권에 1,000페이지는 족히 넘어가는 '사기'의 성인 버전을 읽을리는 만무하니 이 만화는 분명 좋은 대체제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 보인 빈약함이다. 한나라와 초나라, 장기의 테마가 되기까지 한 이 두나라의 충돌은 '초한지'라는 소설로 각색되어 길이길이 남을 만큼 스펙타클하고 긴장감있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는 한신, 소하, 번쾌, 유방, 항우, 장량, 범증 등 역사에 내놓라 할만한 영웅들을 한꺼번에 쏟아냈으며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역사'였던 난세였다. 항우와 유방은 세기의 라이벌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수진'은 엉겁결에 넘어가 버리고 '사면초가'는 들릴둥 말둥 사라져 버린다. 두 영웅의 대결만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필시 자기의 서재에 '초한지'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읽어야 되는데 읽어야 되는데' 마음만 먹었으나 그 압도적인 분량에 엄두를 못냈던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다. 빽빽한 통근 버스 에서도, 흔들리는 전철 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게 만화! 요코야마 미츠테루와 먼지 날리는 전장으로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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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틱 (개정증보판)
칩 히스.댄 히스 지음, 안진환.박슬라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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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프리젠테이션을 잘해야 성공하는 시대가 왔는지 모르겠다. 벤처 붐? 승진 전쟁? 돈! 돈! 더 많은 돈? 요즘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 긴긴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핵심만 간단히! 현대인들이 얼마나 시간에 쫓기는지 알려주는 일화를 얘기해 줄게. 엘리베이터 피치. 오 마이 갓! 당신의 상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당신은 신규 사업 기획안을 아주 멋들어지게 끝내야 한다구.


세상엔 메시지가 넘쳐 나잖아. 똑같이 해선 기억에 남지 않아. 자극과 충격을 담은 헤드라인을 달아주자구. '장윤정, 노홍철과 결별이유 이상하더니 역시...' 역시 뭐? 하지만 이래야 사람들은 기사를 클릭해. 클릭을 해야 돈이 되지. 고상한척 하지 맙시다. 누군가 그랬지 외눈박이의 마을에선 두눈박이가 왕이라고. 천만에 외눈박이 마을에서, 두눈박이는 그저 장애인일 뿐이야. 진지한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하고 싶다면, 정신병원을 찾아야 해. 그런 시대가 왔다고.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싶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자신의 메시지를 만든 사람들이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절대 다수일 때 우리는 사회는 건전한 토론과 밝은 철학으로 건강해 질 수 있다. 하지만 내보기에 이런 책을 찾는 절대 다수는 아직 자기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해야할 이야기도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잘 하는 법을 알아봤자 그건 그냥 휘리릭~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되겠지. 그러니 이 책을 보려는 사람들은 전부 생각해 봐야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그걸 왜 해야하는지. 진정성이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정수이며, 기억에 영원히 남을 이야기란 거의 예외없이 이 진정성을 통해 빚어지는 법이니까. 전략이니 포장이니 하는 것들은 그 다음 순서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난 이 리뷰의 제목 일부러 이렇게 지었어. '스틱!을 읽고'





사실 이 책은 매우 훌륭하다. 흔히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말하지 않나. 이 책엔 그런 내용이 없다. 스틱!은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6가지 법칙(단순성, 의외성, 구체성, 신뢰성, 감성, 스토리)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름의 상투성으로 볼 때 이 책 또한 애매하고 모호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을거라는 걱정이 앞설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스틱!은 애매함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수 많은 사례를 제시한다. 이 사례들만 따로 정리해 기억에 새겨둬도 얼마든지 훌륭한 카피라이터, 작가, 연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위대한 점은 뭐니뭐니해도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책 한권을 읽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는지 아는가? 이 책은 거의 450페이지에 걸쳐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구석은 없다. 특히 주제를 떠나, 저자가 보여주는 문장력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플라잉 니킥을 먹일 만큼 유려하고 재미있다. 세상 사람들의 30%만이라도 이 책의 저자만큼 자신의 법칙에 충실하다면, 이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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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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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오로지 하나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착각이다. 그건 새누리당 지지자나 기독교도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아. 농담이에요.


집에 가는 길을 일부러 돌아가본 사람은 안다. 내려야할 정류장을 일부러 지나쳐 본 사람은 안다. 기어가는 개미의 눈높이로 그 길을 봐본 사람은 안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상이, 이 익숙한 세계가, 얼마나 낯선지를. 농담이 아니다. 지금 당장 집 밖으로 나가 쭈그려 앉아 문을 올려다 보라. 그리고 느껴보라 당신이 발로 차 닫았던 그 낡고 녹슨 철문이 얼마나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지를.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건을 다양한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하다. 그러나 사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빡빡한 질서 속에서 엄격히 불변을 고수하는 수도승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사물의 다양성을 알아채지 못하는건 우리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에게 집중해 보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물들의 환호성이 들리지 않는가?


왜 낯선 곳에서 철학은 나오는가?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이다(Philosophy는 지혜를 사랑하다 라는 뜻). 지식은 단연코 의문에서 나온다. 의문은 호기심을 연료로 한다. 호기심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샘솟는다. 


우리는 생각없이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뛰어다니는, 마냥 즐거워만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삶을 부러워 한다. 나도 저 아이들처럼 생각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린이야 말로 진정한 사색가다. 


'아빠 나는 왜 태어났나요? 그건 엄마가 너를 임신했기 때문이야. 왜요?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이지. 왜요? 엄마가 예뻤거든. 왜요? 얘야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이제 잘 시간이야'


어린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탐구한다. 왜? 이 모든 세상이 낯설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따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알고 싶은 것으로 가득한 바다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그 바다로 나가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큼 가득가득 지식을 낚아 올린다. 


불행하게도 아이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안다고 느꼈을 때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세계에 대한 질문을 멈춘다. 우리가 철학을 포기한 이유? 그건 우리가 이 세게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게 없기 때문이다. 맑고 푸르던 호기심의 바다는 검고 끈적끈적한 일상이 되어 작은 배를 집어 삼킨다. 배는 심해로 침전하고, 우리에게 남은건 전동차의 빈 자리를 향해 질주하는 탐욕과, 앉자 마자 잠에 드는 한심함과, DMB로 야구나 시청하면 그만인 별볼일 없는 퇴근길이다. 





우리는 세상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여전히 모른다. 우리는 하늘을 타고 내려오는 처마 끝의 봉긋함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볼 때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며 볼 때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이상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혐오스럽고 지리멸렬한 썩은 생선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더 이상 익숙한 하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달을 때, 호기심의 톱니바퀴는 다시 구르기 시작하고, 탐구욕에 불타올라 일상을 따뜻한 애정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상에서 철학하기'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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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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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나 자신을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할 땐, 내 주변에 친구가 없다고 느낄 때다. 창의력이란 별다른게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 반대로 생각하는 것.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매사를 낯설게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옆에 사람을 붙잡고 '당신은 따뜻한 봄날의 아침에서 죽음을 부르는 권태가 느껴진다고, 물을 마시면서 동시에 오줌을 싼다고, 수박은 숭고하기 때문에 하루에 정확히 두 쪽씩만 야금야금 먹어야 한다고' 말해 보자. 정중한 사람이라면 '아 네 그러시군요'하고 다시는 당신과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할것이고, 대개는 '어디 아프냐?'라고 할 것이며, 성스러운 사람들은 당신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를 올릴 것이다. 중요한건 이 세 부류중 어디에도 진짜 당신의 친구는 없다는 사실.






창조의 순간엔 언제나 내적 필연성이라는게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건 그것이 보기 좋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고, 역시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다'. 물론 하나님은 내적 필연성만 가지고도 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은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내적 필연성에 더불어 외적 필연성을 갖다 붙여야만 모두에게 인정받는 창조물을 만들 수 있다. 뭔가를 만들게 하는 동기는 돌발적이고, 직관적이며 불가해한 면이 있다. 크리에이터들은 그 작은 알갱이를 가져다 언어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입혀 세상에 꺼내 놓는다. 그런데 그 언어와 그림과 노래는 '설득력'을 가져야만 한다. 모두가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게 바로 외적 필연성이다. 그런데 이 외적 필연성이란 것은 언제나 근사한 모습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던 내적 필연성, 당신에게 창조를 명한 그 착하고 귀여운 소녀는 미숙한 외적 필연성으로 인해 괴물같은 털복숭이로 성장한다. 으악! 하지만 당신의 눈엔 아직도 콩깍지가 씌여 있다. 사람들은 털복숭이를 보고 괴물이라고, 정직하게 충고하지만 당신에겐 그 모든 사람들이 무지하고 천박한 대중으로 보인다. 

으아니 늬들이 예술을 알아?


그래서 모든 창조자는, 고독하다.





에고의 화신, 치열한 고민, 더러운 성격, 짜증나는 히스테리, 잘린 귀, 더러운 마루 바닥을 구르는 가난, 발 뒤꿈치에 매달린 고뇌, 심장에 새겨진 흉터, 어깨에 앉은 우수, 아티스트를 상징하는 모든 궁상맞고 우울한 찌꺼기들이 이 책엔 없다. 저자의 목표를 들어보자.


'나는 소설가이자 방송인이자 시나리오 작가로서 한창 현업에서 뛰고 있기에 이책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다. (중략) 이 책이 나와 같은 동료 크리에이터들, 또는 그런 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까지는 몰라도 한 끼 별미 정도는 되었으면 한다. 가격도 딱 그 정도이니.'(p. 7)


이재인은 소설가로 등단하여 영화판에서 시나리오를 쓰다 SBS 라디오 '컬투의 두시 탈출'을 연출하고 있는 방송국 PD다. 그는 베테랑 작가이며 대중의 사랑을 쟁취한 성공적인 대중예술가다. 대중예술의 최전선에서 펼쳐지는, 그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프로페셔날리즘은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를 보는 것처럼 스피디하고 톡톡튄다. 


이 책엔 예술에 대한 골치 아픈 고민, 당신을 기어이 우울의 늪에 빠뜨릴 그 개떡같은 감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재익은 약삭빠르고 명민한 대중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재익은 예술 혹은 예술같은 일을 하면서 스포츠카를 몰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21세기를 크리에이터로서 '살고 싶은' 사람, 동시에 한 명의 생활인으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이재익의 명민함은 괜찮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대중예술가가 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여, 이 책을 보라.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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