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5
황석영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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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책은 황석영 선생님의 단편집 '돼지꿈'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125번째 작품이에요. 살아있는 한국 작가로서 민음사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사람은 단 두명 뿐입니다. 바로 이문열과 황석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민음사의 배려였겠죠. 이문열이 대표적인 보수 소설가라면 황석영 선생님은 진짜 진보입니다. 문학에서 벌어지는 이념의 충돌! 


혁명은 실패했고 복지는 물건너갔으며 국민은 패배한 현실에서, 앞으로 길이길이 남아 문명을 떨칠 사람은 황석영이 아니라 이문열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문학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문열이 그 잘나빠진 삼국지 '평역'의 성공에 취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죽은 작가'라면 선생님은 끊임없이 신작을 발표하며 여전히, 자신의 문학을 살고 계신 '살아있는 작가'이니까요. 

소설가에게 이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면 응당 자신의 문학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쓰지않으면 죽은 겁니다. 소설가라는건 그런 직업이에요. 






선생님의 소설은 흔히 리얼리즘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리얼리즘! 소설이 흐리멍텅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거나 비판하는 고발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69'에서 평화로운 일상에 냉혹한 현실이 숨어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걸 자각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나는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처럼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런 삶 또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면, 그래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부와 행복을 분배하는 구조라면, 우리 무력한 개인들은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처럼 살기는 커녕 아무리 애를쓰고 노력해도 그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60-70년대의 노동자들은 어땠을까요? 어둡고 꽉 막힌 공장에서 하루 18시간씩 미싱기를 돌리다 진폐증에 걸려 죽는 사람들, 안전의식이 전무한 노동 현장에서 날품을 팔다 온 몸이 박살나는 사람들, 헌법이 제정된지 몇 십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주와 소작농의, 종과 머슴의 관계로 착취 당하는 농부들. 소설 '돼지꿈'에는 모두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의 무기력한 일상을 볼 것으로 예상했다면, 천만에요! 소설은 작렬하는 태양 밑에 옴짝달싹 못하고 늘러붙은 찌꺼기 같은 인생을 그리지 않습니다. 소설은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황무지위에 날카롭게 솟은 바위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독불장군같은 기개를 드러냅니다. 주인공들은 화를내고 싸움을하고 마음껏 욕을하죠. 살기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겁니다.

소설은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아주 생생하고 선명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의 삶 속에 섞여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나를 발견하게되죠. 작품이 이토록 생생한 현실감을 갖는 이유는 이 모든 상황과 인물들이 선생님의 삶을 빚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을 오롯이 살았다는 건 이런 의미에요. 


혹자는 이 리얼함을 천박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요? 중요한건 욕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욕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세상에 살고있는 주제에 혼자만 깔끔한척 점잖빼고 살면 어디 세상이 자기 스스로 변해 준답니까?


시대가 구리구리하면 소설은 거친 황무지위로 내려와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요?


그것은 우리가 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인식의 한계로 인해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평생 묶여서 자란 개가 사슬을 풀어줘도 사슬의 길이 밖 세상을 밟아볼 엄두를 내지 않는것처럼 억압에 길들여진 민중은 어느새 그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수록된 소설 '종노'는 이같은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주인공 동이 노인은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아온 말 잘듣는 머슴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노예 근성을 참지 못하고 뛰쳐 나가버릴 정도였죠. 지주는 최근들어 소작농들을 더 값싼 일용직 노동자로 대체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예처럼 일만했던 소작농들은 일자리를 지키기위해 큰 소리를 내기 보단 주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묵묵히, 흉흉한 소문을 견뎌냈드랬죠. 사단이 난 그 날도 사람들은 지주 가문의 명절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날이었습니다. 그 날 밤 한 젊은이가 지주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합니다.  


"야, 이 도둑놈들아. 느이들이 무슨 양반이야.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이 망할 놈들아, 느이 맘대루 해 처먹고 쫓아낼라구 그래."(125p, 종노)


소작농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십니까?


"아니, 저 놈이 뉘집 새끼야."

"혼찌검이 나야 해."

(125p, 종노)


그러고는 여럿이 달려나가 그 젊은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동이 노인은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죠. 


"이놈아....."

"죽을 때까지 남의 종살이나 해 처먹어라!"

(126p, 종노)





가장 효과적인 통치 전략은 피지배계급을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를 좀 더 나은 노예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은 노예는 이제 일반 노예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노예들의 꿈은 더 이상 해방이 아니죠. 그들의 꿈은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옳은 말을 하는 젊은이를 흠씬 두들겨 패면 지주에대한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대대적인 소작농 정리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자기만큼은 쫓겨나지 않고 계속해서 소작을 부쳐먹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동이 노인입니까? 아니면 소작농입니까? 우리는 소설을 보며 그들의 노예 근성을 경멸하고 혐오합니다. 그러다 문득 그 소작농들의 모습이, 사실 거울에 비춰진 우리였다는걸 깨닫게 되죠. 리얼리즘 문학이란 이런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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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3-1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좀더 나은 노예가 꿈인 사회라는 제목에 이 글을 읽기전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삶 자체가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야 살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 젊은이들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발전하겠지만, 저 같은 기성세대에게는 그런게 당연한게 되버렸습니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 그게 직장에서 몸부쳐 사는이의 운명아닐까요? 사는 것이 어쩌면 고역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살아 갈수 있는 방법은 니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짜라투스트라처럼 거대한 운명이라는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고 싶은 그리고 땅에 두 다리를 꽉 딛고, 눈도 부릅뜨고, 현실을 고민하는 것만이 나 같은 소시민이 해야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입에 바른말만 하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한깨짱 2013-03-15 13:08   좋아요 0 | URL
관심 가져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삶이라는건 결국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을 평생에 걸쳐 배우는 것 같은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삶에 내던져진 인간이 그 삶을 극복하기 위해 죽을때까지 노력한다는게요. 어쩌면 삶이라는거 자체가 우리 스스로 원한게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사는건 정말 어렵고 힘든일인 것 같습니다.

dowan 2013-10-2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진기행의 김승옥 씨도 생존해 계십니다^^...

한깨짱 2013-10-23 13:42   좋아요 0 | URL
오 말씀하신 김에 김승옥님 소설도 다시 탐독해봐야겠네요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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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폭력


개념이 없다라는 말이 욕이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과연 몇 사람이나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을까?


머리 속에 사과를 떠올려 보자. 아마도 이런걸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는 어떤가? 이것은 사과인가?





그렇다면 이건? 이것도 사과인가?





우리가 사과의 '존재'를 사과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과는 더 이상 실재하는 사과가 아니다. 개념은 빨갛고, 파랗고, 시고, 달고, 반들반들하고, 썩었고, 까끌까끌한 사과를 오로지 사과라는 한 단어로 박제해 버린다. 


단순명쾌한 정리? 히틀러가 가스실을 지어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우리는 개념을 지어 존재의 다양성을 말살한다. 이것은, 


폭력이다. 


개념이 대중문화에 침투했을 때


천편일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절대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드라마를 보고 똑같은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똑같이 웃는다. 우리나라엔 수 많은 중산층 가정이 있겠지만 드라마에선 고급 가죽 쇼파를 가진 5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영화에 나오는 자폐환자는 모두 서번트 증후군이고 지체 장애를 가진 아버지는 모두 아이엠 샘이다. 아침 드라마는 불륜에 불륜에 불륜을 거듭하고 저녁 드라마는 숨겨놨던 재벌의 아들 딸로 흘러 넘친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개념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대량생산된 개념들은 자본의 힘을 뒤에 엎고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사람들은 천편일률에 치를 떨면서도 열심히 그것을 소비한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화 산업의 핵심 전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전략은 똥을 만든 뒤 그것을 맛있는 음식이라고 속여 파는게 아니다. 그들의 전략은, 


우리를 똥개로 만드는 것이다.


개념이 인간관계에 침투했을 때


존재는 결코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얼마나 자주 '한 마디'로 정리하길 강요 받는가? 


당신은 1년에 열 번쯤은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리고 두 번쯤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덤벙이지만 친구의 생일을 매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주는 섬세한 사람이다. 그러나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는 덤벙이일 뿐이다. '덤벙이'라는 개념은 당신의 다양성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다. 


객체의 개념화는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수 과정이다.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념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정리가 되고 뇌에서 그것을 지식으로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대인 관계에서 오는 우울증이 개념화된 나와 내가 알고있는 나 사이의 괴리로 인해 생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도대체 나 다운건 뭐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좀 더 농밀하고 다양하며 모순적인 존재다. 하지만 타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고정되고 예측 가능한 기계다. 타인의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쟤 왜 저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가진 본연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인, 또는 특정 집단이 정의내린 개념으로서 행동하는 때가 생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정신분열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예측 가능한대로 타인이 움직여줄 때, 우리는 그것을 안전한 관계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정반대다. 


'쟤한테 저런 면도 있었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 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해의 핵심은 의외성을 최대한 많이 발견하는 것이다. 의외성이란 결국 개념을 뚫고 나오는 존재의 다양성이다. 그 다양성을 모두 수집하고 채워 넣을 때 타인은 진짜 존재가 된다. 





개념의 폭력을 고발한다


데리다와 들뢰즈는 모두 개념의 폭력을 고발하고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철학을 통해 추구한 목표는 당연 '이성과 합리'로 대변되는 '근대 사회'의 파괴! 이들의 철학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땅에 이성과 합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한건 18세기였고 내가 살고있는 지금은 21세기지만, 이성과 합리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세상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인데, 용을 잡으러 떠나는 중세 기사의 모험담은 사실 진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철학자(오해 마시길.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철학자가 될 수 있다)의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붉은 비늘에 불을 내뿜는 날카로운 발톱의 용은 인간 사회의 상징이었던 거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록 더 철저하게 짓밟아버리는 무시무시한 세상. 그리고 우리 철학자들은 모두 기사. 기사가 용을 죽이고 나서 결혼하는 공주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세상의 진실'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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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2-2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는 외로운 섬에 사는 사람들, 그들을 세상은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멀리합니다. 가끔씩 그 섬에 외로운 사람들은 고독합니다. 이런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정말 특이하기는 하죠? 세상에서 볼때는....

한깨짱 2013-02-25 12:5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외로운 사람들끼리는 연대가 더 견고한가 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너무 고립되 소통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걸 경계하며 살아볼까 해요.
 
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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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단편은 돈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팔리는 작가들은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기도 하죠. 장편을 쓰세요. 단편은 팔리지 않아요.


단편은 후킹이 있어야 합니다. 독자의 시선을 확 끌어 당기는 어떤 것. 그러다보니 소설가가 좀 장사꾼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케터처럼 보이기도 하고. 뭐 이런 생각때문에 순수 문학을 추구하는 사람일 수록 단편을 평가절하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 예전부터 단편이 좋았어요. 러시아 문학하면 대개 도스토옙스키를 꼽지만 전 체홉이 더 좋더라고요. 모파상도 장편 '여자의 일생'보단 단편 '비계덩어리'가 진짜 죽였어요. 보르헤스는 거론할 필요도 없죠!


단편집을 손에 들고 있으면 두근두근 기대와 설렘이 부풀어 오릅니다. 짧은 호흡, 기막힌 아이디어, 알싸한 여운. 과연 다음 장에선 어떤 작가가 또 어떤 문장으로 나를 미치게 해줄까. 뷔페는 막상 먹을게 없고 잡탕은 그냥 잡탕으로 그치고 말지만, 문학은 예외입니다. 섞어놓을수록, 더 찐해져요. 







왜 이상 문학상을 집어 들었나? 그건 현재 소설가라고 불리는, 그러니까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글쟁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글을 쓰나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황석영이나 김훈 같은 선생님들은, 깊고 깊은 심해에 살거나 저 높은 산꼭대기에 머무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분들이시죠. 


손을 쭉 뻗으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 바로 그 앞에 이 이상 문학상 작품집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건방이라는걸 곧 깨달았지만, 어쨌든 이 책을 선택할 당시에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구매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답니다. 


37회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자선 대표작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포함해 총 10편의 소설이 담겨 있어요. 여기서 이 모든 소설을 일일이 거론할수는 없으니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전반적인 감상을 말하려 합니다. 


'침묵의 미래'는 '언어'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언어'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후두암에 걸린 어느 노인의 언어입니다. 이 노인은 소수민족 출신이에요. 중앙 정부는 사라져가는 '말'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소수언어박물관'을 짓고 그 안에 소수민족들을 잡아다 전시물로 박제해 버립니다. 그들은 뜨문뜨문 찾는 방문객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팔며 평생 외롭게 살다 죽습니다. 사멸 직전의 언어를 가진 민족이기에 자기 말을 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거에요. 


어느날 주인공은 박물관을 탈출해 고향을 찾습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곳에 고향은 없었어요. 황폐화된 땅덩어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죠. 주인공은 도망칠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산더미처럼 쌓인 외로움을 헤아리다 죽음을 맞습니다. 


주최측은 '침묵의 미래'를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생성과 그 사멸의 과정을 인간 자신의 운명처럼 그려내고 있는 <침묵의 미래>는 서사를 극단적으로 절제하면서 내면적인 사유의 공간을 이야기의 무대 위로 끌어올려놓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작가는 언어 자체가 스스로 그 존재와 가치를 되묻고 그 운명에 대해 질문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사멸이라는 현상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가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p.337)


전 이 소설을 보면서, 이것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본질적 문제를 드러내는 우화라기 보다는, 이 시대에 죽어가는 '문학'의 운명을 쓸쓸히 그려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문학상은 '침묵의 미래'에 나오는 소수언어박물관과 다름아닙니다. 문학상이라도 없다면 과연 '문학'이 우리 사회의 관심을 받는 날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문학상은 팔리지 않는 단편을 싣고 고독한 소설가들을 응원하면서, 그렇게 사멸해가는 문학의 끝을 간신히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밖에 재미있게 본 소설은 '그리네스'라는 자살 유발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별볼일 없는 남자와 그 별볼일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더 별볼일 없는 여자의 삶을 포르보 배우가 된 노인의 삶과 뒤섞어 놓은 '배우가 된 노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네스의 경우 사회의 부도덕을 드러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뻔한 면도 있지만, 그 적나라한 표현이 오히려 보는 이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배우가 된 노인'은 자극적인 소재와 다르게 굉장히 아름다운 문체가 돋보였던 소설입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궁금증을 자아내는 독특한 이야기 전개 탓에 보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던 작품입니다. 

이 밖에 등에서 소나무가 자라는 염승숙의 '습', 돈에 울고 돈에 웃는 우리의 처참한 자화상을 그려낸 김이설의 '흉몽',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독자를 몽롱한 안개 속으로 끌어들이는 편혜영의 '밤의 마침'도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처음 책을 사들었을 땐, '아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다'하는 패기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모두 읽고, 키보드 앞에 앉아, 아무것도 씌여 있지 않은 망망한 컴퓨터 화면을  봤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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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1
아베 쓰카사 지음, 안병수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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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유명 과자 회사 연구원이 폭로한 과자의 비밀을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본인이 과자 회사의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이한테는 절대로 과자를 먹이지 않는다고 했죠. 사실 과자가 몸에 나쁘다는 인식은 하루 이틀된게 아닙니다. 어릴때 부터 엄마가 주구장창 얘기해왔잖아요. 그런거 사먹지 말라고. 몰라서 안 먹는건 아니죠. 





그런데 우리 몸에 나쁜게 과연 과자 뿐일까요? 아이스크림은? 거대 비지니스의 은혜를 입어 말끔한 인테리어로 재탄생한 떡볶이 집은요? 소시지는? 단무지는? 심지어 김치는? 밥을 밖에서 먹는 사람이든 집에서 먹는 사람이든 오늘날 식품첨가물과 화학조미료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엄마가 만든 김치와 된장찌개는 괜찮다고요? 김치에 들어간 젓갈은 어떻습니까? 찌개에 들어간 된장은요? 당신이 직접 재배해 먹는게 아니라면 식품첨가물을 피해갈 수 없어요. 깨끗하게 진공포장된 야채조차 맹독성 세척제와 방부제로 처리되는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나쁜 것들이 승승장구 슈퍼마켓의 매대를 장식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자연산 재료들만 골라 정성껏 손질해 조미료도 안넣고 요리를해 보지만, 싱겁고 감칠맛이 안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맛이 있죠. 여기에 조미료 한 스푼을 넣으면 확 달라집니다. 세상이 사악해져서 음식에까지 장난을 친다구요? 아니요, 문제는 우리에요. 우리의 입맛이 길들여진 겁니다


냉장고에 한 가득 콜라를 채워 넣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색 소시지를 한통을 책상 위에 놓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어요. 소시지나 햄은 거의 100% 사료용 고기로 만듭니다. 폐기 직전의 고기에다 비계와 물을 넣어 양을 불리고 연육제를 넣어 식감을 부드럽게 만들어줘요. 여기에 고기향과 맛을 내는 '화학 첨가물'이 들어갑니다. 중국 사람들이 머리카락으로 계란을 만들고 젓가락으로 죽순을 만든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니까요. 





사악한 음식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걸 끊임없이 먹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맛있는걸 어떻게 합니까. 따지고 따지다 보면 요즘 세상에 순수한 음식이란게 어딨어요. 그냥 포기하고 사는거지. 먹을 때 마다 그런 얘기 하는 사람보면 참 밥 맛없어.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나 싶기도 하고. 이거 좀 먹는다고 죽는것도 아닌데. 그렇게 따지지만 결국엔 자기도 먹잖아요. 


문제는 이런 경멸과 안이함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침묵 속에 가둬 버린다는 거에요. 아는 사람들이 입을 닫고 있으니 세상은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죠.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니 사회는 더더욱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게 됩니다. 악순환이죠. 노스트라 다무스는 '무지한 자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아무렴!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사라져갑니다. 진짜 맛이 뭔지 아는 사람들. 좋은 먹거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그걸 알아주는 고객. 어쩌면 비용이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진정한 가치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생각해보니 비용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없는 세상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는것 자체가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입니다. 


진짜 비극은 이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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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목마르다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3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지혜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아나톨 프랑스의 팬이라면 번역서가 나오는것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나톨 프랑스,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일생을 책과 함께 살았고, 한때는 탐미주의로, 한 때는 깊은 회의주의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수 놓았던 소설가. 노벨상까지 수상한 작가임에도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요. 


이 남자의 작품에는 인간이 가진 본성적 결함을 조롱하는 깊은 회의주의가 뿌리 박혀 있어요. 아마도 이 회의주의가 건강하고 올바른 삶을 사시는 분들의 눈에 거슬렸던건지도 모릅니다. 





후세 사람들 중에는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가 '공화국'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건 모두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에요. 공화국이란 쉽게 말해 '왕이 없는 나라'를 뜻합니다. 국민이 그 나라의 주인인거죠. 지금이야 이게 당연한 거지만 1700년대 말까지만해도, 참 내! 택도 없는 얘기였죠.

이 택도 없는 얘기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일어난 국가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선구자들은 자유, 인권, 박애를 부르짖었고 바스티유 감옥은 습격당했고 '고기가 없으면 건초(말 사료로 쓰는)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던 풀롱의 머리는 장대 끝에 매달려 거리를 행진했죠. 혁명이 발발한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주변 국가들은 공포에 떨었어요. 자기 나라의 국민들도 자유, 인권, 박애의 가치를 알게 될까봐 겁났던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군대를 모아 프랑스를 침공합니다. 프랑스는 안 팎으로 열세에 몰렸습니다. 전선은 무너졌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기근이 몰아닥쳤어요. 프랑스 국민은 불안에 떨었고 '자유, 인권, 박애'는 개나 줘버릴 것들로 몰락해 버렸죠. 책방을 장식하던 역사, 정치, 철학 서적들은 가요집과 소설책에 밀려 더 이상 팔리지 않았어요. 베스트셀러는 '속옷 바람의 수녀'였습니다. 


혁명의 불길이 꺼진 프랑스는 재만 남은, 스산한 폐허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이 잿더미 속에서 '로베스 피에르'가 태어납니다. 그는 수 많은 연방주의자, 왕정복고를 노리는 음모자들, 기타 정적 등등 공화국의 적이 될 만한 자들을 단두대로 보내 버립니다. 강력한 공포 정치로 수렁에 빠진 공화국을 지키려 한 자. 소설 '신들은 목마르다'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베스 피에르



주인공 에바리스트 가믈랭, 그는 어머니에게 줄 빵 한조각을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빵 가게에 줄을 서야 했던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또한 그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였고 혁명의 가치를 신앙으로 삼은 사람이었죠. 올바르고 굳세지만 가난한, 한마디로 정의로운 시민의 전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은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는 언제나 광신의 함정이 기다리는 법입니다. 에바리스트는 중산층 화상의 딸 엘로디를 만나 사랑에 빠져요. 그녀는 힘있는 자에게 부탁해 에바리스트를 혁명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만들어 줍니다. 광신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거지요.


정의로운 시민 가믈랭과 혁명재판소는 애국이 아니라 분노를 잣대로 심판의 망치를 내렸습니다. 단두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정치인과 옛 귀족들의 모가지를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배를 불렸습니다. 대중들은 누가 죽든 상관없이 광장에서 벌어지는 공개처형에 열광을 했죠. 


에바리스트는, 심지어 한 망명 귀족을 여자 친구의 옛 애인으로 오해해 단두대로 끌고갑니다. 에바리스트가 혁명재판소 배심원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무고한 시민을 죽인겁니다. 파렴치한 질투는 애국이라는 광신에 가려 양심을 찌를 수 없었습니다. 혁명은 빛을 잃었어요. 이제 남은건 독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또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로베스 피에르는 실각하고 에바리스트는 투옥됐습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로베스 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각별히 보살폈습니다. 그들은 아주 건강한 상태로 단두대에 올리기 위해서였죠. 


가믈랭이 처형장으로 향하는 날 그는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대중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믈랭과 그의 동료들이 단두대로 보낸 음모자와 귀족을 모욕했던 바로 그 사람들(p.301)이었죠. 가믈랭은 자신의 나약함을, 적의 피를 아꼈던 혁명재판소의 관대함을 한탄했습니다. 그 때 엘로디의 창문이 열리면서 꽃 한송이가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가믈랭의 갈증을 풀어주곤 했던 엘로디의 붉은 입술의 상징(p.302)이자 곧 다가올 피의 축제를 말해주는 붉은 카네이션이었어요. 두 손이 묶인 가믈랭은 그 꽃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천천히 입을 벌리고 있는 짐승같은 단두대의 칼날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난 뒤, 과연 우리가 다른 대통령을 뽑았다고 한들 과연 희망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두려운건 보수주의나 독재, 1%만을 위한 정치 아니라 무지한 대중이 만드는 오해와 욕심 아닐까요? 


대중은 혁명이 더 많은 빵과 술 볼거리를 제공해 줄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그런게 아니었어요. 열기는 금방 시들었고 남은건 '속옷을 입은 수녀' 뿐이었습니다. 


이기심과 천박함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 결함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수 없이 비극을 되풀이 하면서도 예외없이 그 멍청한 과거를 재연하는 걸까요? 아나톨 프랑스는 이런 회의에 빠져 깊고 깊은 문학의 숲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인간의 맨얼굴을 폭로하고 대중의 천박함을 풍자했죠. 저는 아나톨 프랑스의 회의주의가 인간성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아요. 아나톨 프랑스는 그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그렸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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