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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
정명섭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2월
평점 :
웹소가 딱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단순하고 매끄럽다. 복잡하지 않고, 어쩌면 이야기가 예측되는 면이 재미의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독자의 눈높이에서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문장이 잇따른다. 읽는 게 부담인 세상에선 무게를 덜어야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김언수 식으로 말하면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 하나를 들고 오듯 어깨에 힘을 빼고 잽, 잽, 경쾌하게 내질러야 한다.
<암행>은 판타지다. 주인공 송현우는 반정의 일등공신인 병조판서의 외아들인 데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수재다. 꽉 찬 스탯이라 먼치킨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암행>은 고전 소설의 전례를 따라 그를 나락으로 꽂아버린다. 그것도 심각한 밑바닥. 송현우는 결혼 첫날밤에 아내와 부모, 집안의 종들까지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살인마의 누명을 쓴다.
당연히 송현우가 진범은 아니다. 절친은 불신했고, 종놈은 배신했고, 이웃은 매수되어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부모와 아내까지 죽은 마당에 뭘 더 희망할 수 있었겠는가? 송현우는 감옥 바닥에 묻혀있던 사기 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바로 그때, 신묘한 힘이 흘러들어와 그를 어둠을 걷는 자(암행)로 만든다.
힘을 얻은 송현우는 감옥을 탈출해 어느 무당의 집으로 도망친다. 무당은 송현우가 가야 할 곳을 가리키고, 무기를 쥐여주고, 동료까지 붙여준다. 목적지는 무원, 무기는 낙죽장도, 동료는 천하제일 검객과 그를 따르는 검은 개다.
낙죽장도를 뽑아 들면 온갖 정령과 요괴가 뛰쳐나와 적들을 무찌른다. 힘의 원천은 분노인데, 결코 그 분노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검객은 필시 미남일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와 싸워 이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의 고수다. 검은 개의 생김새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귀신을 물어뜯을 정도이니 삽살개를 떠올릴 만 하지만 풍기는 느낌은 늑대 쪽이 가깝다. 삽살개는 너무 귀엽잖아. 시종일관 진지한 이 여행에는 잘 붙지 않는다.
송현우를 쫓는 관아의 암행어사는 조금 아쉽다. 무력도 지력도 상대가 되질 않으니 추격이 밋밋하다. 악당들의 매력도 그렇다. 애꾸, 외팔, 절름발이. 사람은 아니고, 신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이다. 그들은 송현우의 낙죽장도에 너무 쉽게 쓰러진다. 아이템도 더 나오고, 기술도 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레벨업과 파밍의 재미가 없는 RPG 같다.
정리해 보자. <암행>은 어떤 소설인가? 콕 집어해 줄 얘기를 찾다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자은의 다크 판타지 버전.
정세랑이 가진 양의 무게만큼 비워낸, 음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