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에서 나온 한국단편문학선 2편엔 김동리의 '황토기', 황순원의 '비바리', 이호철의 '나상', 장용학의 '비인탄생', 박경리의 '불신시대' 등 저마다 시대를 아우르고 가슴을 아리는 작품들이 즐비하지만, 대학 때 읽은 이 책을 다시금 손에 들게 만든 것은 뭐니뭐니해도 정한숙의 '전황당인보기' 때문이었다. 

정한숙과 '전황당인보기'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안에서보다 밖에서 모든 우수함을 찾으려 했던 근대화의 폭격은 문학에도 예외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황당인보기'를 말하려는 이 순간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하인 강명진과 석운 이경수는 오래전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특히 석운이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힘들어 하던 시절 수하인 강명진은 그의 벗이자 지필묵, 문방사우의 우아한 취미를 함께 논하던 품격 높은 스승이었다. 그러던 석운이 정부의 고위 관료로 임명되자 수하인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수하인은 석운에게 기념이 될만한 정표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시장바닥에서 우연히 전황석을 발견한다. 전황석이란 같은 무게면 금 값의 10배가 한다는 귀하디 귀한 돌이다. 그는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르곤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석재를 거저나 다름 없는 가격에 구했다는 것 보다는 친구 석운에게 비로소 어울리는 선물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줄곧 수하인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뛰어난 인장 예술인이었던 수하인은 그 돌로 석운의 도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고 혼신을 다해 작업을 시작한다. 드디어 전황석 인장 한방이 완성되자 수하인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작품중 실로 최고였던 것이다. 인장 한방을 곱게 싸들고 나서는 수하인의 가슴에 새로운 싹이 돋아오는 것 같았다.

석운은 때마침 출타 중이었다. 그런데 석운의 부인은 수하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석운이 벼슬을 한 뒤로 여기저기 부탁을 하러 온 사람들이 잦은 탓도 있었지만 특히 수하인은 궁핍함을 면치 못하는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석운의 처가 보기에 수하인이란 그저 아쉬운 부탁을 하러 온 사람 이상의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돌아서는 수하인이, 가슴 속에서 곱게 싼 선물을 내밀었을때 그녀의 마음속에 적잖이 미안한 마음이 들은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미안한 마음은 이내 싹 가셨다. 선물이라고 펼쳐보니 쓰잘데 없는 돌조각이요 가지런히 찍어 놓은 붉은 도장은 무슨 부적인 듯 불길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석운에게조차 그 선물은 눈에 들지 않았다.  

시장의 도장방 주인이 전황석 인장 한방을 수하인의 눈 앞에 내놓았을 때 수하인의 가슴은 와르르 무너졌다. 이유인즉 전황석의 가치를 알바 없는 석운이 그것의 처분을 친구 오준에게 맡긴 것이오 역시나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오준이 도장방 주인에게 고작 상아 도장 하나를 받고 팔아 넘긴 것이다.  

그날 밤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 뻥 뚫린 수하인의 가슴 위로 사박사박 차가운 눈이 쌓였다.

이튿 날 수하인은 눈길을 뚫고 참지 한 권을 사와 자신의 작업실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참지를 접어 한 권의 책을 맨 뒤 하나 하나 자신이 만들어온 인장을 찍어 나갔다. 물론 전황석 한방도 맨 나중에다 찍어 놓았다. '그와 더불어 살아온 인보(印譜)를 보는 순간, 그는 처음 자기가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 수하인은 황모필 가는 붓으로 '전황당인보기'라 표지를 쓴 뒤 책을 덮었다.

전황당인보기의 문장 하나하나는 사박사박 내려 쌓이는 눈 같은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어떠한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순백의 고결함이요 동시에 이 작품이 뿜어내는 고고한 향취이기도 하다.  

전황석 인장 한방이 저자거리의 도장방 주인의 손에 들려 왔을 때 수하인은 마음은 어땠을까? 이 가슴 아린 비극 앞에서 수하인은 더 이상 칼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의 앞에서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가치들은 언제나 아스라히 사라져 간다. 우정, 믿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 이런것들을 소리 높여 논하는 사람들을 철 없는 낭만주의자라 부르며 비웃은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수하인 강명진은 효율과 속도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 쓸데 없는 멋을 지닌 고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쓸데 없는 멋 때문에 수하인은 품격 높은 예술인이요, 사랑넘치는 친구요 그리고 진정한 '인간'일 수 있었다.  

깊어가는 이 밤 수하인이 도장을 새기듯 '전황당인보기'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곱씹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즐기거나 그것에서 배울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오늘 밤 그저 인간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나가던학생 2011-09-0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학 수행으로 이번에 읽게된 책인데. 도무지 무슨 내용인가 했어요. 이 글 읽고 나니 이해가 되네요.리뷰 잘 읽고갑니다^^

한깨짱 2011-09-06 22:09   좋아요 0 | URL
줄거리를 띄엄띄엄 써놔서 읽기 힘드셨을텐데 이해가 잘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지나가던학생2 2013-02-12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 조사중이었는데 우연히 좋은글보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큰 도움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한깨짱 2013-02-13 17:19   좋아요 0 | URL
학생분들에게 무슨 숙제가 나온 모양이군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더 감사하네요.
 

 
하루키에게 상실의 시대가 있다면 류에게는 Sixty Nine이 있습니다.

'69'는 문학사적으로 몽테뉴, 볼테르, 아나톨 프랑스의 지적 회의주의를, 철학사적으로 니체의 초인사상과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계승하여 사회적 권위와 부조리에 투항하는 카뮈적 고교생의 실존적 성장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건 거짓말이고, 사실은 공부를 싫어하고 이제 갓 성에 눈 뜬 멍청한 고교생의 난동기 입니다.  
 
이런 얘기라면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네시로 카즈키'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레볼루션 넘버3 라던지 Go같은. 하지만 Sixty Nine은 이런 책들과 비교해 업수이 여길 수 있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 책에는 확실한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1952년생, 59세의 남자가 평생을 걸고 지켜온 삶에 대한 '단호한 결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확실히 '류'는 단 한번도 사회에 적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18살 때 심각한 왕따였는데 스스로는 결코 왕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반아이 44명을 전부 따돌리고 있었으니까요. '류'에게서도 이런 것이 느껴 집니다. 전 세계를 따돌리고 유아독존 홀로 우뚝 서 있는 사나이의 모습. 모두가 결승점을 향해 달려갈 때 반대 방향으로 전력질주하는 스프린터.  

사실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더이상 사회로부터 혼나고 싶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류'처럼 살아가기 위해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적당한 각오로는 되지도 않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만 둘러봐도 확실합니다.  
 
의지가 매우 강했던 친구들이었지만 글쎄요, Dream Theater를 즐겨 들었으며 학적부 장래 희망칸에 '세계적인 Rock 밴드를 따라다니는 음향 기술자'라고 당당하게 썼던 친구는 현재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의 초일류 사원이 되어있습니다. 또 공군이 되어 비행기를 탈취하고 콩고의 정글로 들어가 'Welcome to the Jungle'을 외치겠다던 친구는 지금 한국 유일의 전력회사에 다니며 가을이 되면 뒷 동산의 밤을 따러 다닌다는군요. 그것도 근무 시간에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확실히 '단호한 결의'가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즐거운 일을 하면서 히히덕 거리고 있으면 사회의 숙련된 조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꿈같은 얘기만 쫓다간 어떤 사회 생활도 견뎌낼 수 없을 거야. 너희가 어떻게 살아갈지 참 한심스럽고 걱정돼.'

우리는 확실히 이 말에 쫄았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할 까봐. 그들 말대로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할까봐. 좋은 차와 좋은 아파트를 얻지 못할까봐.  
 
그래서 우리는 꿈을 버리고 - 그것을 젊을 때의 치기라고 생각하고 평범한 삶을 택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을 배고픔과 무시와 추위로부터 구원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류'는 말했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그들보다 더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고 평생 동안 '하하하' 나의 웃음소리를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저는 이 코믹한 소설을 눈물이 날 정도로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Sixty Nine은 문제아 고교생의 난동 Episode를 다룬 책이 아닙니다. 꿈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멸망하여 단 한 권의 책만을 남겨야 한다면 결단코 Sixty Nine을 가슴에 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경멸하며 나를 묶어 용암 속으로 빠뜨린다 하더라도 끝까지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있겠습니다. 인류사에 길이길이 남을, 이 미치도록 즐거운 책을 향해서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의 소설가라고 하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취향으로만 본다면 약간 멀게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나쓰메 소세키가 있을 것이고 그 보다 가깝게는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가 있겠습니다. 

더더욱 가깝게는 요시모토 바나나 라던지 기타 등등 그런 저런 소설가가 있겠지만 이 사람들은 너무 트렌디해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하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도록 합시다. 하지만 여기 애매하게 끼인 작가가 한 사람 있습니다. 90년대 내내 트렌디한 소설로 대중을 열광시키다 돌연 작가로 전향.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이후 가장 기대되는 노벨상 후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노르웨이의 숲'의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노르웨이의 숲'이 나왔을 때 하루키의 신드롬은 대단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국'은 몰랐지만 일본 청춘 남녀의 연애 소설 '상실의 시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당시에 라디오를 도배하던 '상실의 시대' 광고 탓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때 출판계는 진정 '상실의 도가니'였습니다. 제 주변의 친구들 중에는 '상실의 시대'를 보고 하루키를 숭배하게 된 자가 적지 않았고 심지어 소설가가 되겠다며 젊음을 투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부 직장인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끼친 '하루키'의 영향력은 막대 했습니다. 마치 Radio head의 Creep이 영국 청년들의 감수성을 폭발시켜 준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Radio head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Radio head는 Creep으로 울트라 빅 히트를 쳤으나 4집 Kid A로 돌연 예술가가 됩니다. 하루키는 어떤가요 '상실의 시대'로 신드롬을 일으켰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상실의 이미지를 멜랑콜리한 상징들로 포장하더니 급기야 '해변의 카프카'로 작가 선언을 해버립니다.  

'해변의 카프카'에 대해 좀 더 말해 볼까요?
이 책의 처음 50페이지는 실로 대작가를 지향하는 이 소설가의 힘찬 의지가 느껴지는 듯 엄청난 흡입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KFC의 샌더스 대령이 등장하고 부터 솔직히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은 항해는 위태위태 끝모를 안개 속을 헤쳐가고 있었는데 그만 모자간의 근친상간이라는 암초에 부딪히고 맙니다.  

류 끝에 가까스로 육지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마법과 환상이 판을 치는 판타지 세계가 펼쳐져 있더군요. 이러다가 주인공이 '절대 반지를 가지고 있으니 사우론의 화산으로 동행하지 않겠나?'라고 물어보는건 아닐까 조마조마 했습니다. 이 책은 확실히 '해변의 카프카' 보다는 '해리포터와 아주까만여죄수'가 더 어울릴 법한 이상 야릇한 소설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해변의 카프카를 만나고나서 하루키를 버렸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더군요. 그는 예술가가 됐고 신화가 됐으며 매우 열성적인 팬들을 거느리게 됐습니다. 저는 그때 근친상간과 판타지로 흥한 작품이 그리스의 냄새나는 이야기 '오이디푸스'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해리포터의 근친상간으로는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아이코,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닙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면 어쩐지 심기가 뒤틀리고 반항심을 갖게 되는 변태적 감성의 소유자인지라  

뭐랄까, 하루키만 쳐주는 세상이 야속하달까?  

어쩐지 이런 생각이 들자 구구절절 하루키를 씹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결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또 한명의 '무라카미'를 완전히 잊은 듯 보입니다만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을 뼈에 새기고 가슴으로 읽었으니까요. 이 사람이 저에게 끼친 영향은 하루키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눈치 채셨습니까? 오늘의 주인공은

무라카미 '류' 입니다. 

계속...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amahun 2010-05-1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나게 동감. ... 카프카 이후론 삐딱하게 바라보는중...

무라카미 류에 대한의견도 전적으로 동감. 겉에 노란표지있던 예전책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책중 하나. 단호안 결의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지만... 아 사족으로 기존의 류에 대한 책으로 봤을때 '69'라는 제목에서 야릇한 상상을..ㅎㅎ 근디 이 분도 반도에서 나가라 이후 삐딱...


한깨짱 2010-05-11 23:56   좋아요 0 | URL
그 69라는 제목에서 오는 야릇함과 그것과 어울리는 류, 그리고 69년을 실제 고등학생으로 보낸 류가 하나가 되는 정말 완벽한 소설이죠. 제목부터 범상치가 않아요.
 

아멜리 노통을 '적의 화장법' 따위의 저자로만 알고 있다면 저에게는 대단히 섭섭한 일입니다. '반전' 이야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독자들의 성향 탓이었을까요? 2000년대 초 대학가에는 도서관에 출입하는 사람치고 아멜리 노통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들이 추천하는 책을 들어보면 '적의 화장법'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물론 '적의 화장법'은 정말 훌륭한 소설입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아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게 만드는 매력이 있고 한 두페이지만 읽어봐도 몰입이 되어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들며 종반부에 반전으로 정점까지 찍어 주니 정말 대중 소설로서는 이만한 책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별미'입니다. 맛이 너무 강해 연달아 3-4번 읽다 보면 쉽게 물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사실 독특한 소재나 반전 같은 장치는 신인 작가가 데뷔 초 이름을 날리기 위한 수단으로나 쓰는 방법입니다. 
만약 반전 이야기로 성공한 사람이 재차 반전 이야기로 승부를 걸려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식스센스로 슈퍼스타가 된 M.나이트 샤말란이나 Open your eyes로 헐리우드에 스카웃된 알렉산드로 아메나바르 같은 사람들이 그 증거입니다.

적의 화장법에 떡실신된 사람들은 분명 '살인자의 건강법'을 보고 '오후 네시'를 봤을 것이며 '로베르 인명사전'에서 갸우뚱 했다가 '앙테 크리스타'나 '머큐리'에선 그럭저럭 재미를 보고 '황산'이나 '제비 일기'에 이르러 '드디어 노통도 맛이 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더이상 읽지 않았을 것입
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 사람들은 진정한 노통의 매력, 살인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1968년 생 싸이코 벨기에 여자의 진가를 아직 못 느껴 봤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통의 '소설'을 '논'픽션과 픽션으로 구분합니다. 소설은 모두 허구이며 픽션인데 이것을 '논'픽션과 픽션으로 구분한다니요?  이상한 말 같지만 노통의 백미가 바로 여기 '논'픽션에서 나오니 반드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픽션을 들어볼까요? 앞서 언급한 살인자의 건강법, 적의 화장법, 오후 네시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럼 '논'픽션은 어떤 책들일까요? 배고픔의 자서전, 사랑의 파괴,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바로 이 자전 소설들이 노통의 '논'픽션 들입니다.  

이 소설들은 전부 자기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옮긴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이 책들이야 말로 노통을 참신한 표현의 대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해석하는 소격의 달인, 그리고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만들어 주는 소설들입니다.  

이를테면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에서 노통은 '엄마 뱃 속에 있는 아기'를 '튜브'로 아직 말을 못하는 어린 자신을 '부모님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말을 참는 조숙한 아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잘 와닿지 않는 다고요? 그럼 이런 표현은 어떤가요?


  지금까지도, 나는 딱 잘라 입장을 정리할 수 없다. 1970년 8월말에, 잉어가 있는 연못에서 길이 끝나는게 나았을까? 어떻게 알겠는가?
  삶이 한 번도 지루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저 건너편에 가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라고 나한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대단히 심각한 건 아니다. 어쨌거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에돌아가는 방법일 뿐이니까. 언젠가, 더 이상 시간을 벌 방법이 없을 떄가
올 것이다. 제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저 건너편에 가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나요? 죽음의 세계를 천국과 지옥으로 편을 갈라 끊임없이 회개하기를 충동질하는 세상과 그것을 '무', Nothing, 바니타스, 세계의 끝, 종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태연하게 묻는 대범함. 게다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에돌아가는 방법'이라고까지 하다니… 이로써 호환마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마지 않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마왕 '죽음'은 노통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어둠에서 빠져나와 삶의 대안이 됩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고 가치를 전복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통의 주특기이며 '논'픽션 이외의 소설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필살기 입니다.

재미를 따지는 것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저는 이 '논'픽션들을 첫 손에 꼽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노통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는 아직은 미숙한 작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머리 속에만 있는 기괴한 상상들. 있는대로 설명했다간 미친놈 취급을 받기 딱 좋은 뒤죽박죽 얽힌 추상적 관념들을 세련된 소설로 풀어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지구상에 딱 한 번만 존재했는데 바로 보르헤스라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로 눈이 멀었음에도 평생동안 2만권의 책을 해치워 버린 괴물 중에 괴물입니다.

노통을 보르헤스의 반열에 올려 놓기에는 아직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두 사람의 '픽션'만 두고 본다면 말이죠. 하지만 노통의 '논'픽션 소설들만 뽑아놓고 묻는다면 어떨까요?  

저는 결코 노통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변덕괭이 2011-07-23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저도 아멜리 노통의 인기에 한몫했던 사람으로서 글을 보면서 와닿는게 많네요.ㅎ
저도 처음엔 적의 화장법에서 시작했으나, 제가 꼽는 그녀의 책은 살인자의 건강법,오후 네시,사랑의 파괴,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정도가 될 것 같아요. 왠지 예전에 읽었던 생각하니 향수에 빠지네요. 흐흐
오랜만에 그녀의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최근에 나온 책들은 못 읽어봤거든요.
지금도 그녀의 서랍속엔 그녀의 이야기가 뭉탱이로 잠들어 있겠죠? 그걸 다 풀어놓을 날이 올까요? ㅎ

한깨짱 2011-07-24 09:47   좋아요 0 | URL
노통의 최근 책들은 역시나 픽션 위주라 재미가 덜한 편입니다. 올해 나온 책이 '생명의 형태'인데 웬지 손이 가질 않습니다. 작년인가에 나온 '겨울 여행'도 그닥 감흥은 없더군요.

그래도 매년 책을 낸다는건 정말 존경할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는건 정신적 노동을 넘어 육체적 고통을 안기는 일 같아요. 저같은 경우 글을 쓸때 죽을만큼 괴롭던데 오히려 노통은 글을 쓰지 않았으면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니,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집념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