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에서 나온 한국단편문학선 2편엔 김동리의 '황토기', 황순원의 '비바리', 이호철의 '나상', 장용학의 '비인탄생', 박경리의 '불신시대' 등 저마다 시대를 아우르고 가슴을 아리는 작품들이 즐비하지만, 대학 때 읽은 이 책을 다시금 손에 들게 만든 것은 뭐니뭐니해도 정한숙의 '전황당인보기' 때문이었다.
정한숙과 '전황당인보기'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안에서보다 밖에서 모든 우수함을 찾으려 했던 근대화의 폭격은 문학에도 예외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황당인보기'를 말하려는 이 순간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하인 강명진과 석운 이경수는 오래전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특히 석운이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힘들어 하던 시절 수하인 강명진은 그의 벗이자 지필묵, 문방사우의 우아한 취미를 함께 논하던 품격 높은 스승이었다. 그러던 석운이 정부의 고위 관료로 임명되자 수하인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수하인은 석운에게 기념이 될만한 정표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시장바닥에서 우연히 전황석을 발견한다. 전황석이란 같은 무게면 금 값의 10배가 한다는 귀하디 귀한 돌이다. 그는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르곤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석재를 거저나 다름 없는 가격에 구했다는 것 보다는 친구 석운에게 비로소 어울리는 선물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줄곧 수하인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뛰어난 인장 예술인이었던 수하인은 그 돌로 석운의 도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고 혼신을 다해 작업을 시작한다. 드디어 전황석 인장 한방이 완성되자 수하인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작품중 실로 최고였던 것이다. 인장 한방을 곱게 싸들고 나서는 수하인의 가슴에 새로운 싹이 돋아오는 것 같았다.
석운은 때마침 출타 중이었다. 그런데 석운의 부인은 수하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석운이 벼슬을 한 뒤로 여기저기 부탁을 하러 온 사람들이 잦은 탓도 있었지만 특히 수하인은 궁핍함을 면치 못하는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석운의 처가 보기에 수하인이란 그저 아쉬운 부탁을 하러 온 사람 이상의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돌아서는 수하인이, 가슴 속에서 곱게 싼 선물을 내밀었을때 그녀의 마음속에 적잖이 미안한 마음이 들은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미안한 마음은 이내 싹 가셨다. 선물이라고 펼쳐보니 쓰잘데 없는 돌조각이요 가지런히 찍어 놓은 붉은 도장은 무슨 부적인 듯 불길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석운에게조차 그 선물은 눈에 들지 않았다.
시장의 도장방 주인이 전황석 인장 한방을 수하인의 눈 앞에 내놓았을 때 수하인의 가슴은 와르르 무너졌다. 이유인즉 전황석의 가치를 알바 없는 석운이 그것의 처분을 친구 오준에게 맡긴 것이오 역시나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오준이 도장방 주인에게 고작 상아 도장 하나를 받고 팔아 넘긴 것이다.
그날 밤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 뻥 뚫린 수하인의 가슴 위로 사박사박 차가운 눈이 쌓였다.
이튿 날 수하인은 눈길을 뚫고 참지 한 권을 사와 자신의 작업실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참지를 접어 한 권의 책을 맨 뒤 하나 하나 자신이 만들어온 인장을 찍어 나갔다. 물론 전황석 한방도 맨 나중에다 찍어 놓았다. '그와 더불어 살아온 인보(印譜)를 보는 순간, 그는 처음 자기가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 수하인은 황모필 가는 붓으로 '전황당인보기'라 표지를 쓴 뒤 책을 덮었다.
전황당인보기의 문장 하나하나는 사박사박 내려 쌓이는 눈 같은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어떠한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순백의 고결함이요 동시에 이 작품이 뿜어내는 고고한 향취이기도 하다.
전황석 인장 한방이 저자거리의 도장방 주인의 손에 들려 왔을 때 수하인은 마음은 어땠을까? 이 가슴 아린 비극 앞에서 수하인은 더 이상 칼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의 앞에서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가치들은 언제나 아스라히 사라져 간다. 우정, 믿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 이런것들을 소리 높여 논하는 사람들을 철 없는 낭만주의자라 부르며 비웃은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수하인 강명진은 효율과 속도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 쓸데 없는 멋을 지닌 고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쓸데 없는 멋 때문에 수하인은 품격 높은 예술인이요, 사랑넘치는 친구요 그리고 진정한 '인간'일 수 있었다.
깊어가는 이 밤 수하인이 도장을 새기듯 '전황당인보기'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곱씹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즐기거나 그것에서 배울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오늘 밤 그저 인간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