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읽지 마세요! 스포일러 한 가득!
워너 브라더스가 야심만만 '맨 오브 스틸'을 내놓으면서 감독도 아닌 제작자의 이름을 전면에 걸고 홍보를 퍼부은 이유는, 그가 인셉션과 다크나이트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이기 때문이다. 놀란은 Warner의 구세주 Jesus Christ!
그래서 이 영화가 잘 됐느냐? 변명을 좀 하자. 3부작으로 기획된 대작 치고 1편이 끝내줬던 적 있나? 반지의 제왕, 배트맨, 호빗! 매트릭스는 예외로 하자. 그 영화는 원래 3부작이 아니었다. 1편이 신화가 될 조짐이 보이자 트릴로지로 재기획된 것이다.
트릴로지의 1편은 해야할 숙제가 참 많다. 배경 이야기도 구구절절, 캐릭터도 하나하나. 모든 설명을 다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1편은 오! 이게 뭐지? 정도의 반응만 이끌어내면 성공이다. 진짜 신화는 2편 부터니까.
그런 면에서 '맨 오브 스틸'은 완전히 성공이다. 사실 '슈퍼맨 리터즈(2006)'가 브라이언 싱어에게 고난을 받으사 혹평에 못 박혀 죽을 때만 하더라도 이 시리즈가 다시 나올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죽은 지 7년 만에 망한 영화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니,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기적이요, 모두 일어나 칭송하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빨간 팬티를 입은 외계인의 리얼리티
타이즈에 빨간 팬티만 입고 날아다니는 외계인의 이야기가 기를 쓰고 리얼리티를 붙잡으려 하니, 내겐 그 모습이 참 딱해 보이기도 했다. 슈퍼 히어로가 사는 하늘의 세상을 굳이 땅으로 끌고와 못질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이 남자에겐 자비가 없다. 결코 에둘러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는 안절부절 노파심을 부리며 시시콜콜 설명을 늘어 놓는다.
첫째, 외계인이 왜 알파벳을 사용하는가? 사실 최초의 원작에선 S가 Superman을 뜻했었다. 그럴만한게, 이 옷을 만든 사람이 슈퍼맨의 양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알파벳을 쓰는건 당연하지! 자기 아들의 옷에 외계어를 쓰는 지구인이 어디있겠는가? 물론 시간이 흘러 원작 만화의 설정도 좀 더 세련되게 변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변화된 설정이 자신의 리얼리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슈퍼맨의 고향별 크립톤에선 S가 희망을 뜻한다. 그것은 크립톤어 또는 '엘' 가문의 엠블렘인 것이다.
조드와 파오라의 가문을 상징하는 엠블렘
둘째, 외계인은 왜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다니는가? 맨 오브 스틸을 통해 슈퍼맨의 쫄쫄이가 사실은 크립톤 전사들의 전투복임이 밝혀진다. 굳이 따지자면 크립톤 전사들이 갑옷 아래 받쳐 입는 활동성 내의! 계층간 구분이 확실한 크립톤인 답게 그들은 전투복 가슴팍에 가문의 엠블렘을 달고 전투에 임한다. 더러운 부르주아 놈들! 다행인건 이 외계의 부르주아들이 타이즈 위에 팬티를 겹쳐 입는 습관을 버렸다는 것이다. 21세기 패션의 관점에서 볼 때 메이커 Tag도 안달린 팬티를 옷 밖에 꺼내 입는건 분명한 오버 센스. 원작 파괴자 크리스토퍼 놀란을 찬양하라!
다 같이 입어요 순면 100% 에어에어 에어메리?
셋째, 슈퍼맨은 지구에서만 슈퍼맨이다. 그의 힘을 보장하는 건 세 가지로 요약된다. 태양, 지구의 중력, 지구의 대기 성분. 슈퍼맨은 태양빛을 흡수해 강한 신체를 만들었고, 지구의 약한 중력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 다니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구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만 강철의 남자가 된다. 이런 설정은 영화 초반 그토록 인간적인 액션을 보여준 조드 군단이 왜 지구에서 슈퍼맨이 되는지 설명해 준다.
넷째, 영화의 Look&Feel. 내가 이 영화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로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3편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 잭 스나이더의 때깔은 화면 위에 색색의 셀로판지를 댄 것처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면이 있다. 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면은 매우 사실적이다. 이 점에서 '맨 오브 스틸'은 정확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면을 계승하고 있다.
이게 바로 잭 스나이더의 때깔이라면, (위로부터 300, 써커 펀치, 왓치맨)
이게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때깔(위로부터 다크나이트, 인셉션, 맨 오브 스틸).
다섯째, 슈퍼맨이 초음속으로 날아간다는 걸 과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종일관 똥꾸멍에 소닉붐을 넣어 준다. 참 대단한 아저씨야!
슈퍼맨이 날아갈 땐 늘 우산 모양의 구름과 '뻥'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물체가 초음속으로 이동할 때 먼저 출발한 소리와 만나면서 압축된 공기가... 젠장!
이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
'맨 오브 스틸'은 확실히 외계신들과 댄스 파티를 벌이는 MARVEL의 영화와 그 지향점이 다르다. 놀란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언제나 선악을 고민한다. 그는 영화의 무게를 위해 주인공들의 발목에 철학적 메시지를 다는데, 이 때문에 난 단 한 번도 그의 영화에서 폭발하는 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빌 딩 숲 사이를, 아이언맨이 하늘을 날때 지르는 환호 같은 것 말이다. 가끔은 놀란이 영화가 아니라 도덕 강좌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놀란은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놀란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미간에 주름을 갖는다
더 큰 문제는 영화가 완전히 리듬을 잃었다는 것이다. 보통의 영웅 서사시의 기승전결이라 함은 주인공이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성장, 중요한 순간에 각성해 악당을 물리치는 것인데 클라크 켄트는 느닷없이 아버지의 우주선을 찾아내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비약적 감정 변화를 보여준다.
이제 영화는 전반부의 지루함을 만회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폭풍우처럼 쏟아내는데, 이게 바로 '맨 오브 스틸' 최고의 비극이다. 고강도 스펙타클이 연신 스크린을 폭파 시키지만 그것들이 너무 촘촘하게 배열된 탓에 관객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만다. 개별 씬으로 놓고 보면 액션 역사에 남을만큼 대단한게 사실이지만, 지속적인 충격으로 이미 역치에 다다른 관객의 감정은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도, 땅 전체를 들었다 놓는 기계 앞에서도 그저 무감각으로 반응할 뿐이다. 만회를 위한 고군분투가 무색해 지는 순간이다.
장담하건데 '맨 오브 스틸'을 본 관객들 중 상당수는 엄청난 액션 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좀 아쉬웠다고 느낄 것이다. 이게 바로 허리가 없는 영화의 전형적 특징이다.
슈퍼맨, Jesus Christ Superstar!
예수는 동정녀의 잉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칼엘은 10만년 만에 처음으로 자연생식으로 태어난 클립톤 인이다. 예수는 33세에 처음으로 영적 활동을 시작했다. 클라크 켄트는 33세에 처음으로 슈퍼맨 활동을 시작한다. 예수는 보통 사람들의 억압을 받는다. 칼엘의 엄마 라라는 지구인들이 슈퍼맨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본디오 빌라도에게 팔아 넘긴다. 지구인들은 슈퍼맨을 잡아 조드에게 바친다. 예수는 죽은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인류를 구원한다. 칼엘은 조드의 우주선에서 탈출해 지구인들을 구한다.
강철의 남자는 동정녀에게서 나와 33세에 활동을 시작했고 사람들의 억압을 받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만 사흘만에 부활해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따라한다. 슈퍼맨을 예수와 동일시 하려는 제작진의 노력은 눈물 겨운데,
굳이 이런 포즈를 강요 하거나
이런 포스터를 만들거나
깨알같이 플라톤을 넣어 주기까지 한다. 마지막 사진에 보충 설명을 좀 하면, 플라톤이 누군가? 이데아를 얘기한 사람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데아가 뭔가? 그것은 궁극적 본질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는 슈퍼맨이 인간 세계를 초월한 궁극적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의 역할이 인간에게 이상을(Idea) 제공하는 것임을 뜻한다. 우리는 그런 존재에 대개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유가 뭘까?
가장 미국적인 캐릭터 슈퍼맨이 전 인류를 구원할 예수와 동급이라는 주장? 기분이 너무 더러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진짜 슈퍼 히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니 슈퍼맨 따위 안녕 하고 예수 믿어 천국 갑시다! 그럴리 없지. 내 보기에 이건 DC 코믹스의 넘치는 자신감이다.
슈퍼맨 시리즈를 돌이켜 보자. 슈퍼맨4는 '역사상 최악의 속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지옥에 잠들어 있었다.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 리턴즈'는 클라크 켄트의 지옥 생활을 7년 더 연장시켰다. 하지만 마침내 '맨 오브 스틸'이 나온다. 자, 믿음이 있는 자들은 들으라!
슈퍼맨이 망한 영화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매 천국에 올라 크리스토퍼 놀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MARVEL의 영화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지금 DC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MARVEL의 히어로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입장 수익 10억 달러를 넘긴 영화는 Avengers(2012)가 유일하다(솔직히 말하면 최근에 아이언맨3가 10억 달러를 넘겼음...). 하지만 DC는 불과 5년 동안 배트맨 시리즈 두 편만으로 20억 달러를 훌쩍 넘겨 버렸다. 길고 길었던 DC의 겨울은 마침내 끝.
들어보라! 예수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듯이, DC 코믹스 최강의 히어로가 이렇게 부활했다. 나는 슈퍼 히어로계의 예수요 영원불멸의 부활자이니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맨 오브 스틸 2'를 주겠노라!
아멘.
남은 이야기들
후속작의 빌런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맨 오브 스틸' 중간 중간에 Lex Corp.의 로고들이 보인다. 렉스 루터는 '슈퍼맨 리턴즈'에도 나온 바 있는 악당으로 배트맨의 부르스 웨인과 전 지구의 부를 양분하고 있는 초거대 기업의 사장이다. 보통 인간이지만 뛰어난 사업가이자 정치가로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까지 해먹는 인물. 어쩌면 렉스 루터가 대통령이 되 언론과 여론의 힘으로 슈퍼맨을 압박하는게 '맨 오브 스틸 2'의 시나리오인지도 모르겠다.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대중의 적이 되듯이.
렉스 콥 소유의 건물. 렉스 콥 소유의 정유차도 나온다는데 그 이미지는 도저히 못 찾겠다.
'맨 오브 스틸'은 '매트릭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몇몇 나오는데, 우선 편집장 역의 로렌스 피시번과 스완윅 장군역의 헤리 J. 레닉스다.
스완윅 장군과 편집장 페리 '화이트'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역할마저 매트릭스와 겹쳐지는 면이 있다. 매트릭스에서 로렌스 피시번이 네오(NEO=ONE=절대자=신), 트리니티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처럼 '맨 오브 스틸'에서는 로리스 레인, 슈퍼맨과 함께 동일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슈퍼맨=예수의 공식이 더욱 공고히 된다.
반면 헤리 J. 레닉스는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믿지 않는 사령관으로 나오는데 이번에도 슈퍼맨을 억압하는 자의 대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그가 보낸 무인 정찰기를 파괴하는 슈퍼맨을 보라!
이 밖에도 크립톤인의 챔버는 매트릭스의 인간 배양소와 정말 닮았다.
슈퍼맨이 우주로 나갔을 때 나오는 인공위성이 Wayne Enterprise의 소유라는 얘기를 듣고 검색해 보았으나 이미지를 찾지는 못했다. 소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워너가 배트맨의 성공 이후 숨고르기도 하기 전에 '맨 오브 스틸'을 개봉한 이유는 Justice League의 제작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Justice League는 슈퍼맨, 배트맨, 플래시, 원더우먼, 아쿠아맨, 그린 애로우, 그린 랜턴이 등장하는 DC 코믹스 판 Avengers이기 때문에 맨 오브 스틸 곳곳에 이들의 흔적을 남겨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저스티스 리그를 위해선 쫄딱 망해버린 그린 랜턴을 비롯 수 많은 암초(그린 애로우는 드라마로 쫄딱 망함)를 제거해야 하니 1-2년 내에 제작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익숙한 영웅 플래시와 원더우맨. 그린 랜턴, 아쿠아맨은...
이 영화가 나온다고 해도 그닥 기대가 되진 않는다. 나에겐 크리스쳔 베일과 헨리 카일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진 채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코미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머가 부족해. 게다가 캐릭터들이 너무 아방가르드하잖아. 생선 영웅과 녹색 타이즈 성애자(그린 랜턴)라니...
이로써 할 얘기는 거의 다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