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의 역사 - 역사 속 억압된 책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
베르너 풀트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이해해요 당신들 마음


문명의 진보는 문자에서 나왔다. 사상이, 지식이 한 개인의 생리적 한계를 넘어 영원불멸의 책으로 태어났을 때 문명은 비로소 그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세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성경은 로마를 무너뜨렸고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계급 사회를 끝장내 버렸다. 그 위험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기를 쓰고 책을 뺏으려 했다. 권력이 집중화 될 수록, 잃을 게 많을 수록 그들은 금지를 강화했다. 심지어 교회는 수 천년간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막았다. 그들이 성경으로 로마를 무너뜨린 것처럼 역시 성경으로 교회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1517년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그 뚱뚱한 목사가 처음으로 한 일은 독일어판 성경을 인쇄해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뿡야!



진지한 얼굴로 당연한 얘기하기


이 책은 요한 아담 베르크의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한다. 


책을 금지하는 일은 금지다. 그 일도 정당하다면 세상에 결실을 거둘 만한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요한 아담 베르크, <책 읽기의 기술>, 1799)


여기까지만 했다면, 대범하다, 훌륭해, 뭔가를 선언하려면 이정도 확신은 있어야지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뒷 얘기를 붙여버리는 바람에 하나마나한 말이 돼버렸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 중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전달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발언권에 대한 침해는 그것이 무엇이든 금지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모든 분쟁은 그 표현이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했는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러니 입장을 확실히 하라고. 모든 걸 금지하자는 건지 아니면 모든 걸 허용하자는 건지.


물론 나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다. 심정적으로야 모든 억압은 악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일관된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자유는 정말 절대적인가?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 진보적인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상식적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어떠한 경우라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장하준 교수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금지한 국방부를 무식한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아마 말씀으로 꾀어 여신도를 성추행한 정명석 교주의 책을 금지하는 데는 찬성할 것이다. 장하준 교수의 자유가 권리로 인정되는 데 반해 왜 정명석 교주의 자유는 그렇지 않을까? 


자유라는 면제부를 얻기 위해선 최소한의 '질'이 뒷받침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검열 기관을 둬 수준에 미달하는 책과 언론, 잡지를 금지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 되야한다.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신도의 자유를 침해했다면 금지되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독교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 것일까? 기독교적 믿음이란 자유를 권리로 가진 사람들이 그 자유를 신께 반납해 오직 신의 말씀대로만 살겠다는 다짐 아니던가?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경우를 인정한다면 우리에겐 정명석 교주의 합의된 강간(?)을 비난할 근거가 없다.


절대적인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용되기 십상인 자유는, 어쩌면 지나친 대접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근대 사회의 근본 가치라는 믿음하에 맹목적으로 추구되어온 신성불가침의 영역. 자유를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사상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건드릴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자유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중세로 날아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원하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뭔지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배불리 먹고 따뜻히 자는 것 뿐입니다. 자유가 그것을 보장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자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30년째 '잘살아 보자'는 '독재자'의 망령에 홀려있는 한국인처럼 말이다.



베르너 풀트의 금서의 역사


는 '책을 금지하는 것은 금지다'라는 요한 아담 베르크의 한 문장만을 가슴에 안고 우직하게 달리는 책이다. 그의 조소 속에서, 또 비아냥 속에서 우리는 금서에 목숨을 거는 무지한 권력의 코미디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뒷문장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뤘다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는 자유는 무엇이고 해치지 않는 자유는 무엇인지 얘기해줬다라면, 좀 더 괜찮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때 그 시절


'외딴방'은 신경숙의 자전소설이다. 17세의 소녀로 1979년을 살아야 했던 여공의 이야기. 박정희라는 호환마마가 죽자마자 전두환이라는 악귀가 나타나 무고한 시민들을 아무 이유없이 찢어 죽였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 불의에 침묵하며 호위호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격동의 세월이라고 얼버무리며 과거의 헤프닝 쯤으로 붙들어두고자 하는 시간을, 신경숙은 '외딴방'이라는 소설로 써냈다. 


그러나 외딴방은 흔한 노동소설이나 민중문학은 아니다. 신경숙은 그것만이 세상을 구할 유일한 길이라는 듯 모든 걸 내팽개치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남자와는 달리, 파괴된 잿더미에서 살아남은 세계를 찾아 가슴에 품는, 그런 모성의 눈으로 그 시절을 훑어본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갖는 힘


작가 자신이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라고 했듯이 외딴방은 보통의 소설같지 않다. 그 시절 신경숙의 일상을 따라 천천히 흐를 뿐 '기'가 '승'을 만나 '전'하다 마침내 '결'해지는 사건의 전개가 없다. 


외딴방을 읽고 있으면 작은 배 한대가 바다에 떠 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수평선 위를 새카맣게 물들이는 태풍을 바라보며 손을 꽉 쥐게 되거나 산더미 같은 파도를 눈 앞에 두고 마음을 졸이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이 작은 배는 그저 하늘하늘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흔들릴 뿐이다. 그러나 그 미동에 방심하여 넋을 놓다 보면 어느새 외로운 배 하나 어두운 바다 가운데 망망히 떠 있다. 너무 크거나 화려해서가 아니라 오직 홀로 대양을 지탱하기에 그 배는 눈에 새겨진다. 표류하는 듯 보였던 배는 이윽고 뱃머리를 고정시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방향을 정한 배가 천천히 노를 저어 가야할 뱃길을 더듬을 때 이 소설같지 않은 소설은 손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소설이 되고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옛날 옛적 이발사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완전히 탈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일생동안 필사의 힘으로 틀어막은 마음의 문을 열어 모든 걸 와르르 쏟아 냈으니, 그 순간 비로소 삶이 해소된 거겠지. 


신경숙이 유명한 소설가가 된 후에도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쓰지 않은 이유는 친구들이 다그치며 묻듯 '그 시간이 창피했기' 때문은 아니다. 작가에게 외딴방은 봉인된 기억이었다. 신경숙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뚝 떼어 상자에 담아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놓는다. 그러나 기억은 생각처럼 깨끗하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다시금 살려낸다. 작가에게 그 부스러기는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수치도 아니고 산업체 특별한 야간 학교를 다녀야 했던 창피도 아니다. 그것은 희재 언니, 어둡고 좁은 방에 웅크리고 살면서도 소박한 꿈을 잃지 않았던,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그 모든 꿈을 잃고 사라져야 했던 가련한 영혼에 대한 기억이다. 


199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때의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 먹은 이유는 그녀의 문학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삶에 부딪혀 자꾸만 자꾸만 그 시절로 되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문학은 삶을 앞지르기는 커녕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조차 없다'. 희재 언니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혀 작가의 삶을 붙잡고 있다. 삶이 나아갈 수 없기에 그 족적을 따라야 하는 문학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쓰기다. 써야한다.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쓰기는 이발사의 고백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봉인된 기억을 다시 내 삶에 끼워 넣는 일이며 잘려진 길을 메워 다시 삶을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일이다. 오래만에 제자리를 찾은 기억은 삐걱대며 아픔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 이발사가 탈진해 죽었다면 신경숙은 오히려 힘을 얻는다.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비로소 온전한 나를 회복한다.



2013년의 구로공단


신경숙 작가의 아픈 기억이 웅크리던 구로공단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공단이 아니다. 공단은 디지털단지로 바뀌고 가리봉은 가산으로 환골탈태했다. 여공이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생산 계장으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70, 80년대에 새카맣게 몰려가던 공원들의 물결은 2000년대에 이르러 IT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로 대체됐다. 나는 그 사람들 중 하나로 3년간 구로디지털단지로 출퇴근을 한 적이 있다. 지하철 2호선의 높다란 창을 통해 바라보면 신경숙 작가가 겪었던 일들이 정말로 헤프닝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곳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외관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그곳의 회사원들 중 시골에 있는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고등학교에 보내는 게 꿈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70, 80년대의 공원들에게 그것은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들은 2만원이 채 안되는 월급으로 방세를 내고 찬거리를 사고 고향집에 돈을 부쳤다. 대한민국은 그런 사람들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왔다.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산업 역군'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70, 80년대의 주력 산업을 지탱했듯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주력 산업을 지탱한다. 어쩌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그 시절 외딴방에 모여 살았던 산업 역군들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구로디지털단지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오면 그들은 시커먼 잠바를 뒤집어 쓰고 입을 꾹 다문채 제 갈길만을 갔다.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기에 그 시커먼 잠바 속에 어떤 고민이 있는지,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소설을 읽고 나니 그 무리 속에 모습만 조금 달리한 희재 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아니 어쩌면 당신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가끔 시란 어떻게 쓰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시나 소설이나 결국 자기가 삼킨 경험에서 나오는 것일 텐데 왜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긴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까나에겐 그 둘이 너무나 달라 보여 애초에 만드는 사람이 달리 구분돼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라는 제목을 본 순간 이것이 나에게 속한 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그 낯설음에마치 홀리듯이 끌려 나는 이 시집을 집어 들었다아무도 울지 않는 밤이 없는 세계는 과연 어떤 소리를 낼까나는 귀를 열고 처음으로나에게 속하지 않은 글을 유심히 들어본다.

 

 

시로 생활하지 않는 시인

 

1951년 대전에서 태어난 이면우 시인은 시인이기 전에 농군이었고보일러 수리공이었다그는 1,800원짜리 점심을 사먹는 노동자이자 연봉 1,380만원 짜리 가장이었다그는 시로 생활하지 않았다아니 생활하지 못했다그래서인가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내는 시인그가 잉태한 시는 읽는 이의 고달픈 삶에 고스란히 스며든다애초에 동일한 곳에서 나왔다는 듯 자연스럽게비로소 온전한 땅을 찾은 씨앗처럼 안도하며 내려앉아 꼼지락 꼼지락 뿌리를 내린다.

 

씨앗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면 나도 시인처럼 풍성하고 고요한 시를 노래할 수 있게 되는 걸까무리일 것이다내 안에 돋은 싹은 결국 세상의 먼지로 새카만 더께가 쌓여 누렇게 말라 죽을 것이다고요를 수확하기엔 내 속에 담긴 분노가 너무 뜨겁다용암이 들끓는 화산처럼 나는 쉽게 분노하고비처럼 떨어진 까만 먼지가 고요한 시인의 유산을 흔적도 없이 덮어버릴 것이다.

 

연봉 1,380만원 짜리 가장이 아무런 독도 품지 않고 이렇듯 고요한 시를 써낼 수 있는 건 기적이다시인은 어떻게 분노를 참는 방법을 배웠을까사는 데에는 분노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을지 모른다아니면 이미 상처가 두툼한 딱쟁이로 내려 앉아 어지간한 일들을 무심히 넘길 수 있을 만큼 단련이 된 것일지도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육십이 넘은 가장의 삶에 왜 슬픔이 없으랴또 슬픔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으랴진땀 나는 하루를 헤쳐나가야 하는 가장의 책임 앞에서시인의 땀 식은 등은 아프도록 시린 법(p. 10)이다.

 

그가 나지막이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세월에 거르고 거른 분노가 맑은 슬픔의 정수그 한 방울이 되어 가슴 깊숙한 곳에 내려 앉았기 때문이다아무리 거센 태풍도 아무리 높은 파도도 이토록 깊이 담긴 슬픔을 흔들 수는 없다시로 생활하지 못하는 시인의 슬픈 노래는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또 깊어서그래서 고요하다.

 

 

슬픈 세월을 지새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면우의 시는 치료제다꾸역꾸역 삼킨 슬픔이 독이 될 때는그런 슬픔을 삼킨 사람이 이 세상에 나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다사람은 결코 괴로워서 울지 않는다외로워서 우는 것이다살다 보면 맞부딪혀오는 삶에 튕겨져 나가 다리 하나를 절게 될지도 모른다마음 한 켠에 뻥 구멍이 뚫려 바람이 흐를 때마다 쉭쉭 외로운 소리가 날지도 모른다그럴 때마다 생각해야 할 건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는 것이다.

 

삶은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었다서로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면나와바로 당신의 울음 속에서 우리는 위로 받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샤바샤바알샤바 1968년에는요


그러니까 샤바샤바알샤바 1968년에 올챙이에서 갓 사람으로 변태한 박민규는 36년 간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다가 갑자기 노트북 한대를 들고 삼천포로 간다. 그야말로 인생의 삼천포. 


삼천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가 손에 쥔 건 역시 소설이었다. 그 소설이 비실비실 기 빠진 모기처럼 한 두번 앵앵대다 싸아~ 창틈을 뚫는 겨울 바람에 뎅강 날개가 끊어져 버렸냐고?


천만에!


이야기는 삼천포에 빠지면 그대로 끝인거다. 줄기를 놓쳤다는거야.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거지. 박민규도 8년 동안 그럭저럭 회사 생활을 해왔어.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가장이 되는 자격을 갖출 수도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스스로 삼천포로 걸어 들어간다. 자기 인생을 갓길로 내몬 뒤 오히려 내면의 핵심을 건설해 돌아오다니, 보통 아이러니가 아냐. 이런 게 적장의 목을 베러 가는 각오라는 건가? 심각해지지 말자. 그저 될 놈은 된다는 거지.



싫다 싫어 천재의 탄생이라니

 

이외수 아저씨는 박민규의 출현이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했어. 소설가 김영하는 '박민규에게 뭔가를 빼앗아올 수 있다면 지금껏 우리 문학계에 존재한 적 없었던 그 놀랍도록 새로운 문장을 가져져오고 싶다'고 말했어. 나는 박민규가 거짓나부랭이, 쓰레기 같은 잡문들을 한껏 배설한 뒤 모여드는 똥파리들에 의해 숭배되는 사악한 소설가라고, 말하지 않아. 그는 천재야 천재. 정말,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고작 삼천포에 갔다온 것만으로 어떻게 이런 글을 써냈냐고 묻지마라. 나와 당신의 무력이 초라하게 드러날 뿐이니까. 

 

농담. 사실 그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나왔어. 

 

그러면 자, 신에게, 똑같이 문예창작과를 나오고 삼천포에 갔다온 당신이 왜 그와 버금가는 소설을 써낼 수 없는지 따지지마라. 신께서 가라사대,

 

그는 애초에 그렇게 되도록 태어났느니라.

 

이렇다니까.

 

 

내 길을 가로 막은 거대한 산

 

쑥쓰럽지만 고백할게. 나는 말이야, 소설가가 되려고 했어. 현실의 고단한 삶을 판타지 형식으로 날카롭게 풍자, 이 한국 문단에 끈적끈적 지워지지않는 흔적을 남기려 했거든. 그런덴 웬걸 박민규가 있네. 그가 1968년생이 아니라 1986년생이었다면 난 깔끔히 자살을 감행했을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청춘이 내 앞길에 고산처럼 버티고 있는 인생을, 도무지 헤쳐갈 용기가 없으니까.

 

박민규의 소설은 후기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 미국의 패권주의, 취업지옥, 아니 때려치고 이 거지같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가득해. 그런데 같은 비판을 해도 장하준, 케인즈, 마이클 샌델, 김규항 이런 사람들 책은 잘 안 보잖아. 어려우니까. 박민규는 안그래. 뻥안치고, 졸라 재밌어. 그런데 보는 사람들이은 신나겠지만 쓰는 사람은 숨이 턱턱 막혀. 어떻게 이런 걸 쓰지? 박민규 책을 몇 권 더 읽고 싶은데 엄두가 안나는 것도 당연. 그러고나면 앞길에 산이 아니라 산맥이 펼쳐질테니까. 아... 그래도 한번,

 

해보자.

 

가만히 있는다고 산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뉴턴은 자신의 업적에 대해, 그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봤을 뿐이라고 했으니, 그럼 어디 한번 나도 올라가 볼까. 

 

 

빨간 꼬치는 500원 파란 꼬치는 300원이요

 

카스테라는 박민규의 단편집이다. 총 10편의 소설이 들어있다. 그 소설은 너구리봉봉과 카스테라와 신자유주의와 미국과 마이클 잭슨과 링고 스타, 교황 바오로 2세와 개복치, 우주여행, 세계오리배시민연합, 야쿠르트 아줌마, 외계인, UFO, 대왕오징어, 헐크 호건, 기린, 고시원, 인간, 지구, 별, 하늘, 푸시맨, 고뇌, 웃음, 개탄, 환희, 냉소, 변비를 분쇄기에 넣고 한꺼번에 갈아 정확히 10등분, 뚝뚝 잘라내 반죽한 어육 같아. 박민규는 이걸 꼬챙이에 꽂아 기발한 형식 실험, 아랫배를 쌔하게 찔러오는 설사 신호 같은 날카로운 묘사, 기가막힌 문장으로 우려낸 육수에 담그지. 바야흐로, 빨간 꼬치는 500원 파란 꼬치는 300원입니다.

 

잠깐 500원짜리 얘길 해볼까?

 

카스테라라는 소설은 말이야, 전생에 훌리건이었던 소음 심한 냉장고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대학생 얘기야. 사람들은 20세기가 치열한 이념 대립의 전장이었다고 생각하지. 아니야. 20세기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시대'(p. 21)지. 냉장고가 발명됐으니까. 주인공은 자기가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깨달아. 그리고 세상이란 각자가 '냉장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일(p.22) 뿐이라는 것도.

 

솔깃하지? 끝이 아니야.

 

그래서 주인공은 냉장고에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넣기 시작해. 이를테면 '걸리버 여행기'같은 명작 소설 말이야. 곧이어 그는 이 세상에 해악이 될만한 것들도 냉장고 안에 보관하기로 결심하지. 이를테면 '아버지'라든가 '미국' 같은 것. 거리에선 맥도날드가 사라지고(당연하지, 냉장고 속에 미국이 들어갔으니), 아버지는 자기가 위치한 칸의 온도를 육류에 합당한 영하로 맞춰줄 것을 요구하는데 갑자기, 

 

아니야 관두자 관둬.

 

아마 이렇게 끝내면 더 궁금해 미치겠지.

 

아무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다시 읽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책을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벼르고 벼르다 십년만에, '칼의 노래'를 다시 집어 들었다. 





베어지지 않는 적들


임진년, 왜란을 맞은 후에도 조선의 당쟁은 멈추지 않았다. 육군은 파죽지세로 깨져나갔고 경상도의 수군은 유명무실했다.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향했다. 조선의 모든 땅이 으깨지고 백성이 부서질 때 단 한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으며 나라를 홀로 지킨 장수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었다. 왜군은 감히 이순신의 앞바다를 경유해 서해로 나아가지 못했고 나아가지 못한 적은 고립되어 썩어갔다. 조선이 패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순신이었다. 왜란 6년째인 정유년 2월, 조정은 그런 이순신을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해 서울로 압송한다. 죄목은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을 거부했다는 것. 왕좌에만 연연했던 무능력한 임금과 무능력한 임금을 좌우로 흔들던 당쟁의 합작품이었다.


이순신이 나간 자리를 원균이 대신했다. 그해 7월, 아둔한 도원수 권율은 원균의 함대를 앞세워 가토의 머리를 자르러 갔다. 이순신이 없는 바다에서 원균은 참패했다. 삼도수군은 궤멸했다. 백의종군하여 남해를 정찰중이던 8월,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삼도의 수군을 통제해야할 이순신에게 더 이상 수군은 없었다. 남아있는 병사를 수습하여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라는 조정의 명령에 이순신은 이러한 장계를 올린다.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은 이순신의 벨 수 없는 적이었다. 또한 12척의 배로는 바다를 빼곡히 뒤덮은 왜군을 벨 수 없었다. 이순신은 벨 수 없는 적들을 망토처럼 두른채 12척의 배를 끌고 나가 330척의 적선을 마주한다. 역사는 이 전투를 명량 해전이라 기록했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것이다


1596년, 선조는 의병장 김덕령을 잡아 죽였다. 그는 오천의 병사를 일으켜 영남의 여러 고을을 온전히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 때 홍의장군 곽재우도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곽재우는 군사를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선조는 사직을 잃을까 두려워했고 사직을 지켜준 신하 또한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사직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 사직이 영웅된 신하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또한 두려워했다. 그는 두려움이 일때마다 닥치는대로 죽였다. 


임금은 차가운 북쪽의 땅으로 피난을 간 뒤에 자주 하얀 소복을 입고 대청에 주저 앉아 능욕당한 사직을 향해 울었다. 울음은 곧 장려한 문장의 교지가 되어 이순신의 앞에 내려졌다. 이순신은 교지의 울음 속에 자신의 죽음이 잉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살기위해 이겨야했는데 승리로 얻은 삶은 곧 그의 목에 내려지는 칼이었다. 그는 패해도 죽었고 이겨도 죽었다. 그는 죽어도 죽었고 살아도 죽었다. 이순신은 이 모든 싸움이 끝나는 날 자신이 죽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그에게 합당한, 온전한 사지를 찾아 바다를 헤맸다. 



인간 이순신


우리는 영웅의 후광에 취해 인간의 그림자를 놓칠 때가 많다. 거듭되는 말 속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신화만이 남는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유난히 몸이 허약한 장수였다. 그는 설사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구토하는 남자였다.


4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나는 적들의 적의를 뚜렷히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친구를, 형제를, 부하를, 상사를 잃은 적의 적의를 말이다. 왜군에게 이순신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또한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왜군은 결코 이순신을 그냥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살의가 해일처럼 몰려드는 바다에서 고작 12척의 배를 끌고 330척의 적을 맞아야 하는 이순신은 어땠을까? 그 적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유유히 노를 저어 나갈 수 있었을까? 모든 걸 훤히 꿰뚫 수 있는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욱 무참한 법이다. 김훈은 무참함을, 자기편의 적의와 적의 적의 사이에서 충만해가는 그 무참함을, 그 역시 무참한 마음으로 눌러담아 사라져버린 인간의 그림자를 쌓아올렸다. 그리스의 대가 니코스카잔차키스가 '최후의 유혹'에서 신이 아닌 인간 예수를 그렸듯, 김훈은 인간 이순신을 그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3-10-1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리뷰가 김훈의 문장으로 울립니다. 공감 버튼을 한번만 누를 수 있어서 아쉽네요.
한참 소설책은 중고로 내다 팔던 시절이 있었는데 도저히 이 책은 팔 수가 없었어요. 몇 해 더 지나 또 보고, 또 보고 또 볼, 그럴 좋은 책이라는 걸 아니까요. 오늘 다시, 그때 안 팔기를 잘했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한깨짱 2013-10-15 11:50   좋아요 0 | URL
김훈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면 여지없이 김훈 선생님의 문장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 아류죠. 그 분 문장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과찬을 해주셔서 창피하네요. 칼의 노래가 문학 동네에서 새로 출판되어 한 권 구입했습니다. 이 책은 절대 팔지 않을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