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우주 - 인간 삶의 깊은 곳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모든 것
닐 투록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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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현대 물리학 입문서로서 전 세계 어떤 책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이 강력 추천했다고는 하나, 이 책은 확실히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다른 점이 있다. 


브라이언 그린은 너드 혹은 긱의 냄새가 나는 사람이다. 사명감이나 의무가 아냐. 물리학 얘기라면 그냥 즐거운 거라고. 알아 들을 수 없는 표정을 하면 비유에, 그림에, 실험에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낸다. 듣는 사람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지만 그 뜨거운 열정에 웬지 모를 충만함을 느끼는 게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특징이다. 


반면 닐 투록의 책은 '물리학 얘기'라기 보다는 '물리학에 관한 얘기'에 가까울 정도로 에세이 느낌이 나는게 사실이다. 구체적 설명은 존재하지 않아. 고로 쉽게 이해 가능한 부분은 물리학 역사에 대한 이야기거나 유명 과학자들의 일화 정도에 불과하다.


투록은 들어가는 글에서, 


이 책은 학술 서적이 아니다. 나는 물리학의 몇몇 가장 큰 아이디어들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균형 잡힌 역사를 전달하거나 중요성에 따라 적절히 배분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썼다. 닐 투록은 과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이 책을 학술 서적으로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은 누락됐고 '우리 안의 우주'는 어려운 학술서적 보다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되버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과학이 우리 사회로부터 달아나려는 것을 막으려는 닐 투록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뿐입니다', '도덕과 사회요?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우리는 과학자입니다'. 투록은 이런 생각을 가진 과학자들에게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극적 몰락을 예시로 들며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는 과학도 예술이 될 수 있으며 과학자들 모두가 따뜻한 인류애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유년기의 영향이 큰 듯하다. 그의 아버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무려 1948년에 법률로 지정된 악질적 인종 분리 정책)' 정권에 저항하다 투옥된 정치범이었다. 아버지의 석방 후 탄자니아로 명망한 투록은 이후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낯설고 축축하고 음울한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망명자 사회에 합류했다.(p.12)


1980년대에 이르러서도 남아공의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봄은 왔다. 1993년,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는 붕괴됐다.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이는 최악의 세상 속에서, 끝내 희망을 보고야 만 인내의 경험은 그에게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긍정적 사고를 만들어줬을 것이다. 낭만주의는 이렇게 탄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낭만주의조차 이 책을 최고의 물리 교양서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유는 앞서 기술한 바, 더 이상의 채찍질은 험난한 역경을 지나쳐온 저자에게 큰 실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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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 국내 미출간 소설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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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뒤 글을 쓴답시고 망망한 백지 앞에 앉게 되면, 그 하얗디 하얀 종이가 사실은 날 통째로 집어 삼키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지옥의 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모든 소설가는 이 지옥의 입에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사슬을 채워 나간다. 장갑도 보호장구도 없이 하는 고행을, 나는 언제나 경탄에 찬 마음으로 바라본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위대한 일을 몇 십번이나 해 놓고도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글에, 남들의 평가에 컴플렉스를 느꼈다. 몇 번이나 죽을 시도를 했다. 아쿠타카와 상 따위 못 받은들 좀 어때. 이제는 고리타분한 그 대가들의 비아냥 따위 그냥 웃어 넘기자고. 당신의 소설은 당신이 죽은 지 6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절찬리 판매 중. 사람들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내 목숨을 대가로 단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렇게 빌고 싶다. 니체와 고흐와 다자이 오사무를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살려내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 됐는지 알게 해달라고. 포기하지 말자.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전부 우울로 시작해 절망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건 오해가 아니야. 대개가 그렇지. 자기 삶의 편린이 소설의 한 가락이 되고 마는게 소설가라는 인간들의 숙명이다보니,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산 다자이 오사무가 쓰는 소설, 게다가 이 남자는 사소설의 대가, 그 소설들이 다짜고짜 행복을 노래할 순 없잖아. 그건 자기기만이라고. 이래뵈도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의 번역서를 거의 다 읽은 내가 기억하기론 그에게도 밝고 경쾌한 책이 두 권 있다. 피 비린내 나는 전쟁통, 귀여운 딸 아이에게 들려줄 심산으로 각색한 옛날 이야기인 '오토기조시'. 아무리 절망을 친구삼아 사는 남자라 할지라도,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이 담긴 주머니가 바로 삶이라는 걸 아는 남자라 할지라도, 초롱초롱 귀여운 눈망울로 옛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딸 아이에게 진실을 폭로할 아버지는 없는 법이다. 물론 이 괴물같은 아버지는 몇몇 작품에 결코 개운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한 뒷맛을 남겨 두었다. 아이가 자라 세상을 좀 알고나면 비로소 느낄 숨겨진 비애같은 걸 말이야. 


그런데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는 진짜 달라. 정말로 다르다. 때는 일본의 패전 당시. 배경은 폐병 환자들이 모여 요양을 하는 '건강 도장'이라는 곳. 이것만 놓고 보면 아~ 또 죽음을 벗삼아 살아가는 남자, 그것을 찬미하지만 결코 자살할 용기는 없는 나약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책장을 몇 십장쯤 넘기다 보니, 이거이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와 놀라고 말았다. 


창작의 내력을 살펴보면 그럴만도 하다. 우선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아니다. 기무라 쇼스케라는, 다자이 오사무와 친분이 있는 한 남자의 일기가 그 바탕이 됐다. 기무라 쇼스케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기무라에게 일기 쓰기를 권한 것이 다자이 오사무였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기무라가 죽고 난 뒤 일기를 물려 받아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를 쓴 것이다. 







소설은 실로 경쾌하고 가볍다. 주인공 종다리(별명)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새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삐져나온 아침 햇살과 함께 연주되는 기분. 현실과는 뚝 떼어져 격리된 곳, 폐병을 앓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세계는 고요한 심해로 침잠, 일종의 동면 상태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만만치 않아. 사람이 있으면 사건도 있는 법이지. 그것도 젊은 남자와 여자 간호사들이 있는 곳이라고.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은 언제 어디서곤 사랑을 꽃 피울 수 있는 능력일 거야. 사랑은 말이지, 정말로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황폐한 땅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만다니까.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만큼 여자의 마음을 사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니 섬세한 연애 감정을 이렇게도 잘 묘사하는 게 놀랄 일도 아니다. 종다리에게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 간호사가 둘이나 있다. 마아보와 다케. 종다리는 처음부터 다케씨에게 마음이 가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게 쑥쓰러워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씨는 좋으나 거대하고 못난 여자다'라는 말만 늘어놓는다. 


다케씨의 사랑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 연애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숭고한 면이 있다. 반면 마아보의 사랑은 어린 여자 답게 더 적극적이고 발랄하다. 1940년대니 남자로선 그 발랄함이 천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종다리는 마아보를 차갑게 대한다. 그럴때 마다 마아보는 종다리의 같은 방 남자들과 일부러 큰 소리로 깔깔깔 잡담을 한다. 마음에 없다고 내친게 자신이건만 그 경쾌한 웃음 소리에 부글부글 속이 끓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아보는 어린 소녀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 육감이란 게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종다리가 다케씨에게 홀딱 반해버린 사실을 아는 마아보는 말똥같은 눈물을 뚝뚝, 그 귀여운 얼굴 위로 흘린다. 어린 소녀는 원래 도도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저 멀리 만년설 위에 홀로 핀 붉은 백합같지. 그런 소녀가 마음을 완전히 허물어 뜨리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어떨 것 같아?







소녀를 울린 남자에게도 대가는 있다. 다케씨의 결혼. 종다리는 속으로 울다 지쳐 잠에든다. 그러다 꿈을 꾼거야. 마아보의 눈물도, 다케씨의 결혼도 모두 꿈이라는.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잠이 깬 자기에게 다가와 옷을 갈아 입히는 다케씨를 보며 종다리는, 


"다케 씨, 축하해."


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케 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네. 말없이 뒤에서부터 잠옷을 걸쳐 주고 그런 다음 잠옷의 소맷부리로 손을 넣어 어깨 부근을 꼬옥, 아주 세게 꼬집었다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네.(p.220)


역시 청춘의 모든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 소설은 이처럼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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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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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은 상당수 틀린 주장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전문 미학자는 아니니까요.



진중권이 들려줘도 재미없어


책의 뒷표지,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다'는 말은 순 뻥이다. 고전 미학과는 천지차이, 현대 미학은 복잡 난해하다. 깊이 숨겨진 진리를 찾는게 찾기만 한다면야 더 보람 있겠지만은,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온통 미로를 헤매는 기분,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 사실은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이유는 이 참에 나에게도 알쏭달쏭한 현대 미학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픈 욕망 때문이었다. 발터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이름 만큼은 알고 있어 여기저기 잘난척만 수두룩, 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지식이다 보니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탈탈 털리고 말거라는 공포심. 내 공부의 동기는 모두 이 공포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확히 알아냈느냐? 글쎄올시다. 두 번 세 번을 봐도 모르겠는게 이 현대 미학이라는 장르. 게다가 존경하는 진중권 선생, 이 분이 참 쉽고 재밌게 쓰시는 양반인데 도통 이 책에서만큼은 그 능력을 발휘해내지 못하신다. 무시무시한 번역문과 전문 용어가 두서없이 남발될 때는 이 분을 대단히 존경하는 나 조차 '자기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걸까?'라는 외람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변명을 좀 하면, 우선 번역의 문제가 있다. 이 책에 실린 인용문들은 당연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게 마치 재현을 포기한 현대 미술처럼 의미 전달을 포기한 문자 예술처럼 보인다.


둘째, 용어의 문제다. 예컨대 '숭고의 부정적 묘사'. 여기서 부정적 묘사라는 건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뭔가를 나쁘게 표현했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호하다. 설명은 당연 친절하지 않다. 사실 이것들도 크게는 번역의 문제다. 아마 외국 철학자들의 용어를 내포된 의미가 아닌, 표면적 의미만을 따라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미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용문의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고 미학가들이 사용하는 중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입문을 원하는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현대미학의 보이콧, 재현의 포기


지금 난 현대미학의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욕심을 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그림이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 아닌가. 이러쿵 저러쿵 어려운 설명을 늘어 놓으며 자기 존재를 확립한다 해도 현대미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왜냐고?




위에서 부터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 잭슨 폴록의 작품들




첫째, 재현은 저급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떡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렸다 한들 그게 실제 떡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재현은 필연적으로 '실재'와 '그림'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낸다. 그려진 것은 결코 실재보다 뛰어날 수 없다. 이 한계를 깨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요, 몬드리안의 파랑, 노랑, 빨강이며 잭슨 폴록의 혼돈의 페인트다.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둘째, 비판을 위해 예술은 사회에서(실재)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정신병자같은 대통령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정치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듯이,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물러야 한다'(p.95). 예술은 그렇게 다른 상태로 머물러 끝까지 저항해 나간다. 예술의 비재현성은 곧 반면교사의 실천인 셈이다. 


셋째, 재현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떡을 그린 그림은 '떡은 떡이다'라는 동어반복의 멍청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비재현의 놀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의 모습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들을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p.168). 회색 빛깔의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좀비들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느낌표 하나를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의미다.


넷째, 현대미술은 묘사가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려고 한다. 재현으로는 절대로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미술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려놓고 이것이 바로 그 묘사가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우기기라도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예술의 사기성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내면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됐다는 의미 아닐까? 현대예술은 작품 스스로가 말을 걸어온다. 그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작품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ⅲ, 바넷 뉴먼





현대미술의 수용법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뒤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걸 예술이라고 부를까? 하이데거는 "이것이(그림) 말을 했다"라고 말한다. 작품이 직접 자신의 진리를 말해줬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작품에 대한 감상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님을, 이유는 없이 그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문제는 이 하이데거의 독단이 작품의 진리를 하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언부언 횡설수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얘기한다.'


하이데거의 수용법은 어딘지 모르게 거만함이 느껴진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 어디 무서워서 미술관이나 갈 수 있겠는가? 예술에 대한 현대인의 지적 컴플렉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에 하이데거의 한계가 있다. 현대미술은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 사물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진리는 어째서 단 하나의 진리를 지시하는가? '이것이 진리다'라는 말은 '이것'이 맞다는 얘기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맞다'는 말인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순간 현대미술은 다시 딱딱한 고전미술로 회귀하고 만다.


데리다는 바로 이 부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더 놀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의 진리는 결코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의 해석은 다른 해석으로 확장되고 다른 해석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또다린 진리를 열어줄 수 있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일부 문장 수정. p.142). 


나는 앞서 작품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술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사람이다. 상상력이 빈약한 자, 규칙에 얽매인 자, 차이의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작품의 얘기를 들을 수 없다. 








이 모든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장 보드리야르를 만나야 한다.


차이의 놀이, 좋다. 하지만 차이는 정말로 무한히 계속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유의미한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도 예술입네, 저것도 예술입네, 예술은 도처에서 피어나지만 그 중에 진짜 새로운 사건은 없다. 


'"현대예술의 모든 움직임에는 일종의 무기력, 즉 더이상 스스로 초월하지 못하여 점점 더 빠른 순환 속에서 자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있다". 그는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현대예술을 암세포의 증식에 비유한다'(p272).


보드리야르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도 예술, 멸치 국물의 맛도 예술, 자동차도 예술, "예술은 더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그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세상에 너무 예술적인 것이 많다 보니 뒤샹과 워홀은 오히려 예술을 범상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예술로 만든다. 가치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무가치의 역습. 이어지는 현대예술이 저마다 무가치를 주장하며 두 사람을 따라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뒤샹과 워홀은, 어쩌면 이 세계 마지막 현대예술가였는지도 모른다. 




뒤샹, 그리고 워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와 진중권은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무가치와 그 무의미 뒤에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무가치한 예술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편승해 현대예술은 마치 가치 있는 양 포장된다. "바로 거기에 전문가 범죄가 있다."(p.273)


우리 나라의 돈 많은 범죄자들이 현대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현상은 이 말에 더할 나위 없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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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읽지 마세요! 스포일러 한 가득!


워너 브라더스가 야심만만 '맨 오브 스틸'을 내놓으면서 감독도 아닌 제작자의 이름을 전면에 걸고 홍보를 퍼부은 이유는, 그가 인셉션과 다크나이트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이기 때문이다. 놀란은 Warner의 구세주 Jesus Christ!


그래서 이 영화가 잘 됐느냐? 변명을 좀 하자. 3부작으로 기획된 대작 치고 1편이 끝내줬던 적 있나? 반지의 제왕, 배트맨, 호빗! 매트릭스는 예외로 하자. 그 영화는 원래 3부작이 아니었다. 1편이 신화가 될 조짐이 보이자 트릴로지로 재기획된 것이다. 


트릴로지의 1편은 해야할 숙제가 참 많다. 배경 이야기도 구구절절, 캐릭터도 하나하나. 모든 설명을 다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1편은 오! 이게 뭐지? 정도의 반응만 이끌어내면 성공이다. 진짜 신화는 2편 부터니까. 







그런 면에서 '맨 오브 스틸'은 완전히 성공이다. 사실 '슈퍼맨 리터즈(2006)'가 브라이언 싱어에게 고난을 받으사 혹평에 못 박혀 죽을 때만 하더라도 이 시리즈가 다시 나올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죽은 지 7년 만에 망한 영화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니,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기적이요, 모두 일어나 칭송하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빨간 팬티를 입은 외계인의 리얼리티


타이즈에 빨간 팬티만 입고 날아다니는 외계인의 이야기가 기를 쓰고 리얼리티를 붙잡으려 하니, 내겐 그 모습이 참 딱해 보이기도 했다. 슈퍼 히어로가 사는 하늘의 세상을 굳이 땅으로 끌고와 못질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이 남자에겐 자비가 없다. 결코 에둘러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는 안절부절 노파심을 부리며 시시콜콜 설명을 늘어 놓는다. 


첫째, 외계인이 왜 알파벳을 사용하는가? 사실 최초의 원작에선 S가 Superman을 뜻했었다. 그럴만한게, 이 옷을 만든 사람이 슈퍼맨의 양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알파벳을 쓰는건 당연하지! 자기 아들의 옷에 외계어를 쓰는 지구인이 어디있겠는가? 물론 시간이 흘러 원작 만화의 설정도 좀 더 세련되게 변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변화된 설정이 자신의 리얼리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슈퍼맨의 고향별 크립톤에선 S가 희망을 뜻한다. 그것은 크립톤어 또는 '엘' 가문의 엠블렘인 것이다. 




조드와 파오라의 가문을 상징하는 엠블렘




둘째, 외계인은 왜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다니는가? 맨 오브 스틸을 통해 슈퍼맨의 쫄쫄이가 사실은 크립톤 전사들의 전투복임이 밝혀진다. 굳이 따지자면 크립톤 전사들이 갑옷 아래 받쳐 입는 활동성 내의! 계층간 구분이 확실한 크립톤인 답게 그들은 전투복 가슴팍에 가문의 엠블렘을 달고 전투에 임한다. 더러운 부르주아 놈들! 다행인건 이 외계의 부르주아들이 타이즈 위에 팬티를 겹쳐 입는 습관을 버렸다는 것이다. 21세기 패션의 관점에서 볼 때 메이커 Tag도 안달린 팬티를 옷 밖에 꺼내 입는건 분명한 오버 센스. 원작 파괴자 크리스토퍼 놀란을 찬양하라!




다 같이 입어요 순면 100% 에어에어 에어메리?




셋째, 슈퍼맨은 지구에서만 슈퍼맨이다. 그의 힘을 보장하는 건 세 가지로 요약된다. 태양, 지구의 중력, 지구의 대기 성분. 슈퍼맨은 태양빛을 흡수해 강한 신체를 만들었고, 지구의 약한 중력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 다니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구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만 강철의 남자가 된다. 이런 설정은 영화 초반 그토록 인간적인 액션을 보여준 조드 군단이 왜 지구에서 슈퍼맨이 되는지 설명해 준다. 


넷째, 영화의 Look&Feel. 내가 이 영화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로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3편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 잭 스나이더의 때깔은 화면 위에 색색의 셀로판지를 댄 것처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면이 있다. 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면은 매우 사실적이다. 이 점에서 '맨 오브 스틸'은 정확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면을 계승하고 있다. 






이게 바로 잭 스나이더의 때깔이라면, (위로부터 300, 써커 펀치, 왓치맨)





이게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때깔(위로부터 다크나이트, 인셉션, 맨 오브 스틸).


다섯째, 슈퍼맨이 초음속으로 날아간다는 걸 과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종일관 똥꾸멍에 소닉붐을 넣어 준다. 참 대단한 아저씨야!




슈퍼맨이 날아갈 땐 늘 우산 모양의 구름과 '뻥'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물체가 초음속으로 이동할 때 먼저 출발한 소리와 만나면서 압축된 공기가... 젠장!




이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


'맨 오브 스틸'은 확실히 외계신들과 댄스 파티를 벌이는 MARVEL의 영화와 그 지향점이 다르다. 놀란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언제나 선악을 고민한다. 그는 영화의 무게를 위해 주인공들의 발목에 철학적 메시지를 다는데, 이 때문에 난 단 한 번도 그의 영화에서 폭발하는 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빌 딩 숲 사이를, 아이언맨이 하늘을 날때 지르는 환호 같은 것 말이다. 가끔은 놀란이 영화가 아니라 도덕 강좌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놀란은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놀란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미간에 주름을 갖는다




더 큰 문제는 영화가 완전히 리듬을 잃었다는 것이다. 보통의 영웅 서사시의 기승전결이라 함은 주인공이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성장, 중요한 순간에 각성해 악당을 물리치는 것인데 클라크 켄트는 느닷없이 아버지의 우주선을 찾아내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비약적 감정 변화를 보여준다.


이제 영화는 전반부의 지루함을 만회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폭풍우처럼 쏟아내는데, 이게 바로 '맨 오브 스틸' 최고의 비극이다. 고강도 스펙타클이 연신 스크린을 폭파 시키지만 그것들이 너무 촘촘하게 배열된 탓에 관객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만다. 개별 씬으로 놓고 보면 액션 역사에 남을만큼 대단한게 사실이지만, 지속적인 충격으로 이미 역치에 다다른 관객의 감정은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도, 땅 전체를 들었다 놓는 기계 앞에서도 그저 무감각으로 반응할 뿐이다. 만회를 위한 고군분투가 무색해 지는 순간이다.


장담하건데 '맨 오브 스틸'을 본 관객들 중 상당수는 엄청난 액션 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좀 아쉬웠다고 느낄 것이다. 이게 바로 허리가 없는 영화의 전형적 특징이다. 




슈퍼맨, Jesus Christ Superstar!


예수는 동정녀의 잉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칼엘은 10만년 만에 처음으로 자연생식으로 태어난 클립톤 인이다. 예수는 33세에 처음으로 영적 활동을 시작했다. 클라크 켄트는 33세에 처음으로 슈퍼맨 활동을 시작한다. 예수는 보통 사람들의 억압을 받는다. 칼엘의 엄마 라라는 지구인들이 슈퍼맨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본디오 빌라도에게 팔아 넘긴다. 지구인들은 슈퍼맨을 잡아 조드에게 바친다. 예수는 죽은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인류를 구원한다. 칼엘은 조드의 우주선에서 탈출해 지구인들을 구한다. 


강철의 남자는 동정녀에게서 나와 33세에 활동을 시작했고 사람들의 억압을 받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만 사흘만에 부활해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따라한다. 슈퍼맨을 예수와 동일시 하려는 제작진의 노력은 눈물 겨운데, 







굳이 이런 포즈를 강요 하거나







이런 포스터를 만들거나







깨알같이 플라톤을 넣어 주기까지 한다. 마지막 사진에 보충 설명을 좀 하면, 플라톤이 누군가? 이데아를 얘기한 사람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데아가 뭔가? 그것은 궁극적 본질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는 슈퍼맨이 인간 세계를 초월한 궁극적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의 역할이 인간에게 이상을(Idea) 제공하는 것임을 뜻한다. 우리는 그런 존재에 대개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유가 뭘까?


가장 미국적인 캐릭터 슈퍼맨이 전 인류를 구원할 예수와 동급이라는 주장? 기분이 너무 더러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진짜 슈퍼 히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니 슈퍼맨 따위 안녕 하고 예수 믿어 천국 갑시다! 그럴리 없지. 내 보기에 이건 DC 코믹스의 넘치는 자신감이다.


슈퍼맨 시리즈를 돌이켜 보자. 슈퍼맨4는 '역사상 최악의 속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지옥에 잠들어 있었다.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 리턴즈'는 클라크 켄트의 지옥 생활을 7년 더 연장시켰다. 하지만 마침내 '맨 오브 스틸'이 나온다. 자, 믿음이 있는 자들은 들으라!


슈퍼맨이 망한 영화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매 천국에 올라 크리스토퍼 놀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MARVEL의 영화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지금 DC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MARVEL의 히어로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입장 수익 10억 달러를 넘긴 영화는 Avengers(2012)가 유일하다(솔직히 말하면 최근에 아이언맨3가 10억 달러를 넘겼음...). 하지만 DC는 불과 5년 동안 배트맨 시리즈 두 편만으로 20억 달러를 훌쩍 넘겨 버렸다. 길고 길었던 DC의 겨울은 마침내 끝.


들어보라! 예수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듯이, DC 코믹스 최강의 히어로가 이렇게 부활했다. 나는 슈퍼 히어로계의 예수요 영원불멸의 부활자이니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맨 오브 스틸 2'를 주겠노라!


아멘.




남은 이야기들


후속작의 빌런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맨 오브 스틸' 중간 중간에 Lex Corp.의 로고들이 보인다. 렉스 루터는 '슈퍼맨 리턴즈'에도 나온 바 있는 악당으로 배트맨의 부르스 웨인과 전 지구의 부를 양분하고 있는 초거대 기업의 사장이다. 보통 인간이지만 뛰어난 사업가이자 정치가로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까지 해먹는 인물. 어쩌면 렉스 루터가 대통령이 되 언론과 여론의 힘으로 슈퍼맨을 압박하는게 '맨 오브 스틸 2'의 시나리오인지도 모르겠다.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대중의 적이 되듯이. 




렉스 콥 소유의 건물. 렉스 콥 소유의 정유차도 나온다는데 그 이미지는 도저히 못 찾겠다. 




'맨 오브 스틸'은 '매트릭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몇몇 나오는데, 우선 편집장 역의 로렌스 피시번과 스완윅 장군역의 헤리 J. 레닉스다. 




스완윅 장군과 편집장 페리 '화이트'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역할마저 매트릭스와 겹쳐지는 면이 있다. 매트릭스에서 로렌스 피시번이 네오(NEO=ONE=절대자=신), 트리니티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처럼 '맨 오브 스틸'에서는 로리스 레인, 슈퍼맨과 함께 동일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슈퍼맨=예수의 공식이 더욱 공고히 된다. 


반면 헤리 J. 레닉스는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믿지 않는 사령관으로 나오는데 이번에도 슈퍼맨을 억압하는 자의 대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그가 보낸 무인 정찰기를 파괴하는 슈퍼맨을 보라!


이 밖에도 크립톤인의 챔버는 매트릭스의 인간 배양소와 정말 닮았다.







슈퍼맨이 우주로 나갔을 때 나오는 인공위성이 Wayne Enterprise의 소유라는 얘기를 듣고 검색해 보았으나 이미지를 찾지는 못했다. 소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워너가 배트맨의 성공 이후 숨고르기도 하기 전에 '맨 오브 스틸'을 개봉한 이유는 Justice League의 제작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Justice League는 슈퍼맨, 배트맨, 플래시, 원더우먼, 아쿠아맨, 그린 애로우, 그린 랜턴이 등장하는 DC 코믹스 판 Avengers이기 때문에 맨 오브 스틸 곳곳에 이들의 흔적을 남겨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저스티스 리그를 위해선 쫄딱 망해버린 그린 랜턴을 비롯 수 많은 암초(그린 애로우는 드라마로 쫄딱 망함)를 제거해야 하니 1-2년 내에 제작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익숙한 영웅 플래시와 원더우맨. 그린 랜턴, 아쿠아맨은...




이 영화가 나온다고 해도 그닥 기대가 되진 않는다. 나에겐 크리스쳔 베일과 헨리 카일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진 채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코미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머가 부족해. 게다가 캐릭터들이 너무 아방가르드하잖아. 생선 영웅과 녹색 타이즈 성애자(그린 랜턴)라니...


이로써 할 얘기는 거의 다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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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6-1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어요. 이번에도 빵빵 웃으면서 봤습니다.
저는 영화를 중간까지 무척 재밌게 봤는데 후반에 지나치게 많이 부수는 게 막 피곤하더라구요.
게다가 감기로 골골 대느라 자꾸 기침하는데 영화가 안 끝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를...;;;;;

한깨짱 2013-06-19 16:11   좋아요 0 | URL
저도 중반까지 엄청 기대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준비를 마쳤는데 후반부가... 진짜 돈은 엄청 많이 들인 것 같아요. 아이맥스에서 한 번 더 보고 싶긴 한데 모든 아이맥스 극장이 3D로 상영을 해서 정말 짜증입니다.

saint236 2013-06-19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후반에는 감흥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건물이 두개만 덜 부서졌어도...마지막은 매트릭스를 보는 듯한...

한깨짱 2013-06-19 16:12   좋아요 0 | URL
요상하게 매트릭스 필이 많이 섞여 있었죠. 잭 스나이더의 영향 탓인지... 대인 전투씬은 획기적으로 잘 만든 것 같고 건물 폭파 씬도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그런데도 요상하게 감흥이 없단 말이죠.

2018-12-06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8-12-06 13:37   좋아요 0 | URL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네요. 긴 글을 읽는 게 더 힘들지만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만은 그렇다고 너무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기엔 시큼시큼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그런데 생각이 없다는게 도대체 뭐야? 거기엔 두 가지 상태가 존재한다. 

첫째, 무념(無念)


하지만 이런 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상태 아닐까? 무념이란 깊은 명상이나 오랜 시간 도를 구해온 사람이나 얻을 수 있는 극강의 정신적 체험이니까, 오히려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칭찬해 줘야지. 


둘째, 산만(散漫)


생각이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생각이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다. 어떤 생각도 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휙휙 지나가 버리는 상태. 문제는 바로 이거다. 쏟아지는 정보에 흠뻑 젖어 더 이상 사색도, 깊은 사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우리는 그저 화려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속에서 살아가는 거야. 불이 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산만함'하면 떠오르는 철학자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언가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태어난 시절은 신문이 눈을 뜬지 이미 반 세기가 지났을 때였고 한창 젊은 시절이 되자 영화와 라디오가 출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른바 매스미디어의 시대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것들은 벌처럼 날아와 바람처럼 사라졌다. 벤야민은 기술 진보의 거인이 한 발을 내딛고 나면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수 많은 영상과 텍스트에 적응하는 방법은 '산만함'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인의 지각 특성은 산만함이 될 것이다'


벤야민은 예언자가 됐다.


재밌는건 과학의 속도가 철학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인간의 뇌는 고착화 이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머제니치를 비롯해 수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한 결과 뇌는 가소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인의 뇌는 단순히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잘 변한다. 또는 머제니치가 말했듯이 대대적으로 변한다.'(p. 50)


흔히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을 하지 않나. 여기에 하나 덧 붙이자면, 세상은 결국 개별 인생이 맺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생각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이것은 기술의 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째서 그토록 광범위한지, 왜 기술에의해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힌트가 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기술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변화된 사고다. 기술은 사고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고가 또 다시 기술의 진보를 촉진하는 순환 구조. 상전벽해, 환골탈태는 두 변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극대화 된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가 왔다. 하이퍼 텍스트는 현대인의 산만함에서 힌트를 얻은 코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우리의 지각 특성을 그대로 닮아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정보와 정보 사이를 널뛰기 하며 빠르게 이동한다. 중요 기사를 읽는 중에도 우측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눈이 가고 다 읽기도 전에 관련 기사로 넘어가며 수 없이 깜빡대며 유인하는 배너 광고를 클릭하고 만다. 이제 하이퍼 텍스트는 단순히 텍스트만의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 비디오같은 멀티 미디어를 직접 품거나 링크를 제공하고 링크로 이동한 순간 수 없이 많은 관련 미디어들이 물샐틈 없는 포위를 마친다.


인간이 정보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알게 되면 이 산만함이 지식 형성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있다. 뇌의 기억 구조는 크게 작업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뉜다. 작업 기억은 실시간으로 입수되는 정보를 잠시 저장해 두는 역할을 하는데 이 정보는 긴 사색을 통해 점차 장기 기억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에서 우리 뇌는 새 정보를 기존에 갖고 있던 정보들과 통합하면서 이른바 '스키마'라고 부르는 거대한 배경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작업 기억의 용량은 매우 작다. 정보가 한 방울 한 방울 똑똑 떨어질 땐 그것을 음미해 장기 기억으로 옮길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만 콸콸콸 쏟아지는 정보 앞에선 아주 짧은 시간만이 주어질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정보를 보고 살면서도 결코 똑똑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의 예능 프로는 우리의 산만함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된다. 요즘 예능은 수 십대의 카메라가 출연자를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이렇게 생산된 막대한 컷들은 전광석화처럼 뿌려진다. 후다다닥 지나는 컷들 위로 쉴새없이 자막이 흐르고 효과음과 애니메이션이 추가된다. 이 산만한 시청자를 잡아 두기 위해선 그들의 작업 기억에 들어있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갈아줘야 한다. 


벤야민은 우리가 산만함을 배움으로써 정보의 홍수에 적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적응이라는 말은 더 나은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다. 현대인이 산만함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그 적응이 희망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더 천천히 읽고 더 깊이 생각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은 행동을 지배한다.


어쩌면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산만함은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산만함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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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oddony 2014-12-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네요. 모든 연결을 끊고 저만의 동굴에 틀어박힐 시간...

한깨짱 2014-12-30 13:37   좋아요 0 | URL
면벽수련이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