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1
아베 쓰카사 지음, 안병수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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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유명 과자 회사 연구원이 폭로한 과자의 비밀을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본인이 과자 회사의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이한테는 절대로 과자를 먹이지 않는다고 했죠. 사실 과자가 몸에 나쁘다는 인식은 하루 이틀된게 아닙니다. 어릴때 부터 엄마가 주구장창 얘기해왔잖아요. 그런거 사먹지 말라고. 몰라서 안 먹는건 아니죠. 





그런데 우리 몸에 나쁜게 과연 과자 뿐일까요? 아이스크림은? 거대 비지니스의 은혜를 입어 말끔한 인테리어로 재탄생한 떡볶이 집은요? 소시지는? 단무지는? 심지어 김치는? 밥을 밖에서 먹는 사람이든 집에서 먹는 사람이든 오늘날 식품첨가물과 화학조미료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엄마가 만든 김치와 된장찌개는 괜찮다고요? 김치에 들어간 젓갈은 어떻습니까? 찌개에 들어간 된장은요? 당신이 직접 재배해 먹는게 아니라면 식품첨가물을 피해갈 수 없어요. 깨끗하게 진공포장된 야채조차 맹독성 세척제와 방부제로 처리되는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나쁜 것들이 승승장구 슈퍼마켓의 매대를 장식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자연산 재료들만 골라 정성껏 손질해 조미료도 안넣고 요리를해 보지만, 싱겁고 감칠맛이 안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맛이 있죠. 여기에 조미료 한 스푼을 넣으면 확 달라집니다. 세상이 사악해져서 음식에까지 장난을 친다구요? 아니요, 문제는 우리에요. 우리의 입맛이 길들여진 겁니다


냉장고에 한 가득 콜라를 채워 넣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색 소시지를 한통을 책상 위에 놓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어요. 소시지나 햄은 거의 100% 사료용 고기로 만듭니다. 폐기 직전의 고기에다 비계와 물을 넣어 양을 불리고 연육제를 넣어 식감을 부드럽게 만들어줘요. 여기에 고기향과 맛을 내는 '화학 첨가물'이 들어갑니다. 중국 사람들이 머리카락으로 계란을 만들고 젓가락으로 죽순을 만든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니까요. 





사악한 음식들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걸 끊임없이 먹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맛있는걸 어떻게 합니까. 따지고 따지다 보면 요즘 세상에 순수한 음식이란게 어딨어요. 그냥 포기하고 사는거지. 먹을 때 마다 그런 얘기 하는 사람보면 참 밥 맛없어.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나 싶기도 하고. 이거 좀 먹는다고 죽는것도 아닌데. 그렇게 따지지만 결국엔 자기도 먹잖아요. 


문제는 이런 경멸과 안이함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침묵 속에 가둬 버린다는 거에요. 아는 사람들이 입을 닫고 있으니 세상은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죠.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니 사회는 더더욱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게 됩니다. 악순환이죠. 노스트라 다무스는 '무지한 자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아무렴!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사라져갑니다. 진짜 맛이 뭔지 아는 사람들. 좋은 먹거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그걸 알아주는 고객. 어쩌면 비용이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진정한 가치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생각해보니 비용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없는 세상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는것 자체가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입니다. 


진짜 비극은 이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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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목마르다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3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지혜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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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 프랑스의 팬이라면 번역서가 나오는것 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나톨 프랑스,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일생을 책과 함께 살았고, 한때는 탐미주의로, 한 때는 깊은 회의주의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수 놓았던 소설가. 노벨상까지 수상한 작가임에도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요. 


이 남자의 작품에는 인간이 가진 본성적 결함을 조롱하는 깊은 회의주의가 뿌리 박혀 있어요. 아마도 이 회의주의가 건강하고 올바른 삶을 사시는 분들의 눈에 거슬렸던건지도 모릅니다. 





후세 사람들 중에는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가 '공화국'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건 모두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에요. 공화국이란 쉽게 말해 '왕이 없는 나라'를 뜻합니다. 국민이 그 나라의 주인인거죠. 지금이야 이게 당연한 거지만 1700년대 말까지만해도, 참 내! 택도 없는 얘기였죠.

이 택도 없는 얘기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일어난 국가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선구자들은 자유, 인권, 박애를 부르짖었고 바스티유 감옥은 습격당했고 '고기가 없으면 건초(말 사료로 쓰는)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던 풀롱의 머리는 장대 끝에 매달려 거리를 행진했죠. 혁명이 발발한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주변 국가들은 공포에 떨었어요. 자기 나라의 국민들도 자유, 인권, 박애의 가치를 알게 될까봐 겁났던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군대를 모아 프랑스를 침공합니다. 프랑스는 안 팎으로 열세에 몰렸습니다. 전선은 무너졌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기근이 몰아닥쳤어요. 프랑스 국민은 불안에 떨었고 '자유, 인권, 박애'는 개나 줘버릴 것들로 몰락해 버렸죠. 책방을 장식하던 역사, 정치, 철학 서적들은 가요집과 소설책에 밀려 더 이상 팔리지 않았어요. 베스트셀러는 '속옷 바람의 수녀'였습니다. 


혁명의 불길이 꺼진 프랑스는 재만 남은, 스산한 폐허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이 잿더미 속에서 '로베스 피에르'가 태어납니다. 그는 수 많은 연방주의자, 왕정복고를 노리는 음모자들, 기타 정적 등등 공화국의 적이 될 만한 자들을 단두대로 보내 버립니다. 강력한 공포 정치로 수렁에 빠진 공화국을 지키려 한 자. 소설 '신들은 목마르다'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베스 피에르



주인공 에바리스트 가믈랭, 그는 어머니에게 줄 빵 한조각을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빵 가게에 줄을 서야 했던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또한 그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였고 혁명의 가치를 신앙으로 삼은 사람이었죠. 올바르고 굳세지만 가난한, 한마디로 정의로운 시민의 전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은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는 언제나 광신의 함정이 기다리는 법입니다. 에바리스트는 중산층 화상의 딸 엘로디를 만나 사랑에 빠져요. 그녀는 힘있는 자에게 부탁해 에바리스트를 혁명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만들어 줍니다. 광신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거지요.


정의로운 시민 가믈랭과 혁명재판소는 애국이 아니라 분노를 잣대로 심판의 망치를 내렸습니다. 단두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정치인과 옛 귀족들의 모가지를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배를 불렸습니다. 대중들은 누가 죽든 상관없이 광장에서 벌어지는 공개처형에 열광을 했죠. 


에바리스트는, 심지어 한 망명 귀족을 여자 친구의 옛 애인으로 오해해 단두대로 끌고갑니다. 에바리스트가 혁명재판소 배심원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무고한 시민을 죽인겁니다. 파렴치한 질투는 애국이라는 광신에 가려 양심을 찌를 수 없었습니다. 혁명은 빛을 잃었어요. 이제 남은건 독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또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로베스 피에르는 실각하고 에바리스트는 투옥됐습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로베스 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각별히 보살폈습니다. 그들은 아주 건강한 상태로 단두대에 올리기 위해서였죠. 


가믈랭이 처형장으로 향하는 날 그는 자신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대중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믈랭과 그의 동료들이 단두대로 보낸 음모자와 귀족을 모욕했던 바로 그 사람들(p.301)이었죠. 가믈랭은 자신의 나약함을, 적의 피를 아꼈던 혁명재판소의 관대함을 한탄했습니다. 그 때 엘로디의 창문이 열리면서 꽃 한송이가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가믈랭의 갈증을 풀어주곤 했던 엘로디의 붉은 입술의 상징(p.302)이자 곧 다가올 피의 축제를 말해주는 붉은 카네이션이었어요. 두 손이 묶인 가믈랭은 그 꽃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천천히 입을 벌리고 있는 짐승같은 단두대의 칼날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난 뒤, 과연 우리가 다른 대통령을 뽑았다고 한들 과연 희망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두려운건 보수주의나 독재, 1%만을 위한 정치 아니라 무지한 대중이 만드는 오해와 욕심 아닐까요? 


대중은 혁명이 더 많은 빵과 술 볼거리를 제공해 줄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그런게 아니었어요. 열기는 금방 시들었고 남은건 '속옷을 입은 수녀' 뿐이었습니다. 


이기심과 천박함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 결함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수 없이 비극을 되풀이 하면서도 예외없이 그 멍청한 과거를 재연하는 걸까요? 아나톨 프랑스는 이런 회의에 빠져 깊고 깊은 문학의 숲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인간의 맨얼굴을 폭로하고 대중의 천박함을 풍자했죠. 저는 아나톨 프랑스의 회의주의가 인간성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아요. 아나톨 프랑스는 그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그렸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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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까오량 가족 대산세계문학총서 65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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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보다는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 제목이 더 유명한 모옌의 장편 소설 '홍까오량 가족'입니다. 사실 '붉은 수수밭'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이 영화의 원작이 '홍까오량 가족'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장이모의 탓도 있죠. 지금이야 관(官)에 딱 붙어 올림픽 개막식 같이 돈을 쏟아 부은 대규모 퍼포먼스나 '영웅', '황후화'같이 알맹이는 없고 겉만 화려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이 사람 87년 데뷔작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 상을 수상한 세계적 감독입니다. 모옌이 노벨상을 탓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붉은 수수밭'은 영원히 장예모의 작품으로 기억됐겠죠.


장예모가 '붉은 수수밭'을 공개했을 때 세계인들은 '중국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80년대 중국은 억압, 감시, 학살의 상징이자 인류의 적, 공포의 대마왕이었죠. 그런데 장예모의 영화가 나타납니다. 스크린에는 붉은 수수가 홍수처럼 넘실댔고 그 밑에 단단히 뿌리내린 민중의 삶이 있었죠. 흙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건 바로 인간의 냄새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인이 중국이라는 땅을, 새롭게 발견한 겁니다.


뭔가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선 그 안에 고유한 색채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농촌을 배경으로, 땅을 주인공으로, 그 위에서 생장하는 식물과, 그것을 먹고 자라는 민중을 그려왔던 모옌의 소설에는 토속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었죠. '붉은 수수밭'이 중국을 새롭게 발견해냈다는 말은 결국 원작의 오리지널리티를 잘 살렸다는 말 이상이 아닌 것입니다.





산동성 까오미현 둥베이향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작고 귀여운 발까지 가진 꽃처녀 따오펑리옌은, 고작 검은 노새 한 마리를 받고 단씨 가문에 팔려갑니다. 문제는 단씨가 문둥병 환자였다는 거에요. 거래를 성사시킨건 돈 밖에 모르는 아버지였죠. 단씨와의 첫날밤, 닭발처럼 갈라진 괴물손이 어두컴컴한 베일 뒤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따오펑리옌은 소리를 지르며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었죠. 그날 밤 따오펑리옌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따오펑리옌이 시집을 가는 날 그 가마를 들었던 사람 중에 위잔아오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위잔아오는 건장하고 패기넘치는 젊은이였고, 악당이 될 기질이 충분했죠. 그는 따오펑리옌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닭발처럼 갈라진 괴물손의 아내가 된다는걸 납득할 수 없었어요. 이날 둘 사이에는 찌릿한 전기가 흘렀습니다. 모종의 계약이 성립했죠. 둥베이향에는 시집갔던 처녀가 친정으로 돌아가 사흘동안 지내고 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따오펑리옌이 친정으로 돌아가는 날 위잔아오는 그녀를 납치합니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붉은 수수의 바다에 누워,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눴어요. 따오펑리옌이 시댁으로 돌아오는날 마을의 연못은 단씨 부자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습니다. 


따오펑리옌은 단씨 가문의 양조장을 물려 받았고 후에 위잔아오가 찾아와 일꾼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안방을 차지하게 되죠.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아이가 또우꽌, 그의 아들이 바로 '나', 이 '나'가 화자가 되어 삼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를 쳘치는것이 바로 소설 '홍까오량 가족'입니다.



붉은 수수밭에서 따오펑리옌 역을 맡은 공리. 이 작품의 그녀의 데뷔작



수수밭 위에서 펼쳐지는 끈적끈적한 남녀상열지사, 이것이 '홍까오량 가족'의 전부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의 주 무대는 1930년대. 바야흐로 일제의 침략이 거세던 시기였죠. 칠점매화총 - 탁자 위에 매화 모양으로 일곱개의 동전을 쌓아둔 뒤 탁자에는 흠집하나 없이 동전만을 쏴 맞추는 기술 -, 총쏘기의 달인이자 까오미현의 악당인 위잔아오는 항일 민병대의 사령관이 됩니다.


대악당 위잔아오는 벙어리, 머저리, 멍청이, 겁쟁이 등을 데리고 일본군 트럭부대를 습격, 장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하지만 민병대는 위잔아오와 아들 또우꽌을 남기고 전멸해요. 부대를 먹이기 위해 밥을 싸들고 오던 따오펑리옌조차 일본군의 기관총에 가슴이 뚫려 숨을 거둡니다. 두 부자가 거머쥔 승리에는 상실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고향,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운 나의 집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불타 버리죠.


민병대의 전멸은 연합 전투를 벌이기로 했으나 배신한 국민당 부대(우익) 때문이었어요. 그들은 뒤늦게 나타나 전리품들을 가로챕니다. 위잔아오는 국민당 부대 사령관을 죽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어요. 잔아오에게 남은 부하는 아들 또우꽌이 전부였으니까요. 코흘리개에 넝마를 걸친 거지 부대 팔로군(좌익)은 숲 뒤에 숨어 전투를 지켜보다 얼마 남지 않은 전리품이나마 구걸하고자 뻔뻔한 얼굴을 들이밉니다. 


나라를 지키는 방식에도 두 개가 있는 셈이죠. 이념을 내세운 자들은 결코 협력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씨 부자를 죽이고 여자를 가로챈, 파렴치하고 잔인한 위잔아오지만, 진짜 악당은 이념의 혓바닥으로 민중을 괴롭히는 이런 자들이 아닐까요? 위잔아오는 읽을줄도 쓸줄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나라를 구하는데 자기 몸을 바치는걸 아까워 하지 않았습니다. 허기진 역사는 이렇듯 뒤를 돌아보지 않는 민중의 시체를 먹고 전진하는 법이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겹겹이 쌓인 상실을 즈려 밟고 꾸역꾸역 살아 나갑니다. 무엇을 위해서? 거창한 이유는 절대 아니죠. 그들은 땅에서 태어났고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간다는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받아 들입니다. 그 누런 땅 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채, 소리를 지르고 욕을 내뱉고 웃고 떠들고 개고기를 씹어 먹으면서.





1987년 '붉은 수수밭'을 보고 느꼈을 서양인들의 충격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이 상상했던 중국인은 누런 옷을 똑같이 맞춰 입고 회색빛 얼굴을 한 채 맥없이 걸어가는 좀비었을 거에요. 그런데 붉은 스크린 위로 또렷한 개성을 지닌 인간들이 뛰쳐나올 듯 꿈틀대고 있었던 거에요. 그들은 중국을 다시 봤죠. 그 안에서 인간을 발견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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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1-08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수수밭을 보고싶어 집니다. 책까지도... 소설류의 책을 손놓은지가 꽤 되는데 과연 읽을 수 있을지..내 자신을 지켜봐야할 듯...

한깨짱 2013-01-08 23:03   좋아요 0 | URL
소설 읽어보세요! 문학은 정말 위대한 것 같아요. 특히 모옌의 소설은 표현의 다채로움에 감탄하게 되네요.
 
광해, 왕이 된 남자
이주호.황조윤 지음 / 걷는나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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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써야 팔리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펴든 책 '광해 왕이 된 남자'. 천만 관객이 든 영화라면, 과정이야 어떻든 그 이야기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수준 낮은 드라마에는 잘도 열광 하면서 왜 영화에만큼은 그토록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내기 때문인가요?


광해는 대체로 좋은 평을 받기는 했지만 일부에선 '억지로 울리려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억지로라도 독자를 울릴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광해가 재미있는 이유요? 우선 술술 읽힙니다. 260페이지 짜리 장르 소설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근엄한척 해봐야 남는거 하나 없습니다. 날카로운 정치적 견해나 치밀한 역사 연구에 감탄하기 위해 광해를 산 사람이 있겠습니까? 장르 소설은 우선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쭉쭉쭉 진도가 나가야 되요. 쭉쭉 진도가 나간다는건 뒷 이야기가 궁금해 죽겠다는 얘깁니다. 


광해는 그런 소설이에요. 구중궁궐 은밀한 왕궁 안에서 질퍽한 음모가 벌어집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고 그걸 막으려는 자가 있어요. 첨예한 갈등이 불꽃을 튀면서 가슴을 졸이게 만듭니다. 책장이 훨훨 날아 다녀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하선은(주인공) 결국 죽을까? 그럼 광해는?


소재가 광해였다는 것도 좋았어요. 솔직히 광해가 누군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 나라 관객들 잘 모르잖아요. 바꿀 수 없는 사실. 정해진 결말. 역사를 영화화할 때 가장 큰 걱정거리 하나가 없어진 거에요. 사람들이 모르니까, 이야기의 긴장감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둘째로 도승지 허균. 저는 허균이야 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이 조선의 역사를 잘 모르는건 다행인데, 그렇다고 너무 모르는것도 문제에요. 그걸 허균이 해결해 줍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허균이에요. 홍길동의 아버지. 


같은 아비의 자식이라도 어느 뱃속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신분이 구별되던 조선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서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 활극을 그린 남자. 그렇게 진보적이었던 남자가 한 나라의 도승지(현대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합니다)입니다. 그리고 정사에 있어서까지 파격을 일삼았죠. 통쾌합니다. 한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대국을 앞에 두고도 당당할 수 있는 패기와 기개가 있어야죠. 우리가 바라던 정치인이 바로 이런거 아니겠습니까?


셋째로, 이 소설 웃깁니다. 그게 영화화된 이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나라 관객들이 가장 많이 남기는 감상평이 '남는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관객들에게 적당히 진지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커다란 웃음을 안겨주면 대체로 이런 얘기는 사라집니다. 진지한 주제 속에서 활짝 핀 웃음. 이게 바로 팔리는 글의 조건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전 이 소설이 별로였어요. 역사가 너무 파괴됐습니다. 멸종했어요. 우리에게 역사는 그저 이야기거리에 불과한가? 그래서 우리가 이토록 비참한 현대사를 쓰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건 역시, 지금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지도자. 국민을 하늘처럼 여기고 권력을 돈 벌이 수단으로 삼지 않는 지도자. 국가를 위해선 그 높은 자리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지도자를 기대하면서. 우리 모두 19일날 투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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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베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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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은 1955년 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문화 대혁명을 경험했어요. 중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끔찍했던 십년. 고귀한 공산 중국에 스믈스믈 파고드는 더러운 부르주아 정신을 깨끗히 정화해버리겠다는 의도. 지주 출신의 자손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막무가내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습니다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했어요.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동생이 형제를. 1966년에서 1976년까지 중국에서 사람을 죽이는 법은 매우 쉬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골라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부르주아로 둔갑시킵니다. 부르주아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전부 죽거나 더 이상 회생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됐죠.


사실 문화 대혁명은 국가 경제 부흥에 실패한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친위 쿠데타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의도라도 오로지 그것만이 정의라고 선언할 때 의도는 비참한 폭력으로 변하고 맙니다. 하물며 불순한 의도야 오죽하겠습니까.


아이러니한건 이 비참한 10년이 그 어느때보다 훌륭한 소설가와 화가, 철학자와 정치인을 낳았다는 거에요. 지금 중국을 이끄는건 이 10년을 말로, 그림으로, 정치로 비판하며 반성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그 주인공중 하나, 모옌의 '달빛을 베다'입니다.





달빛을 베다에 수록된 12편의 단편에는 가슴 저미는 애통과 목구멍 가득 차오르는 억울함, 체제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매가 짙게 베어 나옵니다. 문화 대혁명을 경험한 작가라면 애통과 억울함, 비판 의식이 없을 수 없겠죠. 동시대의 작가로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어 본게 전부지만 그 시대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점을 갖고 있을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의 소설가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와 주제로 문화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찌꺼기를 뜯어 먹고 살아가는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당대에 우뚝선 소설가라면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갖기 마련이죠. 제가 모옌에게 발견한 건 두 가지입니다. 바로 향토적 색채와 세상에 대한 깊은 공포에요.





모옌의 소설에선 한 쪽 한 쪽 짙은 흙냄새가 풍겨옵니다. 때로 그 흙냄새는 누렇게 물든 밀밭을 사르르 흔들고 지나는 바람 냄새로, 끈적 끈적 노송을 타고 내리는 송진 냄새로, 코 끝을 훅 스치고 지나가는 비릿한 강물의 냄새로 바뀌곤 합니다. 사방 가득한 자연의 냄새. 아마도 현대의 중국인들은 모옌의 소설을 읽으며 잊혀진 대지의 숨결을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물과 밀밭, 소나무 숲을 대신하는 건 삐뚤빼뚤 요란하게 늘어선 빌딩과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공장들일테니까요. 


그런데 이 향수는 곧 추억하고 싶은 않은 시간과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여 놓여 있는데, 사람들은 왜 변해 서로를 찌르고 공격 할까요? 아름다운 대지 위에서 날뛰는 살쾡이 같은 인간들. 이 부조화는 모옌의 소설을 더 강한 슬픔으로 옭아맵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픈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짙은 흙냄새가 소설의 겉 모습을 구축한다면 그 내면을 휘감고 있는 것은 등골이 쭈삣한 공포입니다. 모옌은 실제로 공포 소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단편 두 작품을 이 책에 싣고 있습니다. 하나는 악마같이 검은 개가 주인을 물어 죽이려하는 '목수와 개', 또 하나는 이유없이 소나무에 묶여 죽음을 맞는 소년의 이야기 '엄지 수갑'입니다. 


모옌의 공포는 단어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때에야 드러나는 은유적인 것이 아닙니다. 새파란 새벽녘에 뜩하고 나타나 온 정신을 마비시키는, 귀신같은 섬뜩함이 번뜩번뜩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편의 공포를 읽으면서 절절히 깨닫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보다 무서운게 사람이다'는 말입니다. 모옌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귀신의 존재를 두려워할만큼 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은 이 순진한 소년에게 진정 무서운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줬습니다. '엄지 수갑'의 소년이 느끼는 공포는 그 거대한 검은개가 뿜어대는 불길함을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천하가 태평했다면 모옌은 드라마나 영화의 각본을 쓰며 편안한 이야기꾼으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모옌의 소설에는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그리워하는,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의 모습이 오롯이 베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소년이 문화 대혁명을 맞아 또렷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고, 어른이 되고, 노벨상을 받는 소설가가 됩니다. 개인에겐 참 잔인한 일이지만,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역시 사실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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