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일련의 사회현상을 심층 분석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5
에리히 프롬 지음, 원창화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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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기사들이 용 사냥을 다니고 영주들이 초야권 따위 얼토당토 않는 권리를 주장하던 중세에는 인간의 머리 속에 '개인'이란 개념이 없었다. 워낙 개념이 없는 세상이다보니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리핀의 원시 부족 '아이타'를 보면 특정 개념없이 산다는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사는 이 부족은 '내일'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뭐? 어쨌냐고? 이들에겐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다는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중세에는 개인이 없었다. 따라서 어떤 직업을 구할지 무엇을 공부할지 어떻게 성공할지 어디로 이사갈지 누구와 경쟁할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흔히 중세를 암흑기로 부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퍽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배는 곯겠지만 그저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삶을 살면 될뿐이다. 복잡한 의사결정을 할 일도 정신을 피폐하게할 경쟁도 없다. 걱정과 고민이 없는 전원 라이프!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대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 아니던가!?


강제된 억압 속에서 노예로 살아가는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해라. 자유는 근대 사회의 최고 가치이며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해라. 하지만 우리가 이 자유의 세상에 오롯이 선 하나의 주체이며,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는건 삼가해주기 바란다. 싫다고? 그렇다면 묻겠다. 


우리는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사회 시스템안에 종속되길 원하는가? 우리는 왜 남들이 바라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고 선망하는 회사에 취직하지 못해 불안해 하는가. 우리가 봉건시대의 노예가 아니라는 안도를 만끽하는 동안 사실은 교수의, 사장님의, 언론의 노예가 됐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겠는가?





사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불안과 동의어다. 사람들은 선택할게 너무 많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위대한 자유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하는 불안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아이러니다. 근대 역사는 사실상 대중이 특정 소수로부터 자유를 쟁취해 온 투쟁의 역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지킨 그 자유가 오히려 고독과 불안을 증대시키고 있다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운걸까? 자유가 독이 든 성배였을 수도 있고, 우리가 그저 돼지에 불과했던 걸지도 모른다. 


다행인건 우리가 이 대답을 얻기 위해 인류 역사에 걸친 자유의 의미 발달 과정을 처음부터 연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뉴턴이 말했던가?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라고. 1941년, 유태계 독일인이었던 심리학자 한명이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기위한 명저 한 권을 내놓는다. 그의 이름은 에리히 프롬, 등장하는 저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무한한 자유가 부여한 압도적 무력감 앞에서 현대인이 취한 반응은 '자유의 반납'이었다. 불안을 선사하는 자유로부터 탈출해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준다고 선전하는 절대 권력에 복종하는 것. 이것이 말로 현대인이 최고로 여기는 '안정된 삶'의 실체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노예와 현대 노예의 섬뜩한 차이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복종이 과거의 노예에겐 강제된 억압인반면 현대의 노예(현대인)에겐 매우 자발적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가 목에 걸고 있는 진주 목걸이를 벗어 자신을 가둘 족쇄와 바꾸려 한다고 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아주 좋은 거래이므로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정신차리라고 따귀를 한대 때려줄 것인가?


1940년대의 독일은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주 목걸이를 족쇄와 바꾼 상태였다. 히틀러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아주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대다수의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됐다. 독일 국민은 군부 독재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나 북한의 주민과는 달리 아주 자율적이었으며 합리적이었다. 그들은 단지 가난한 독일, 무능력한 독일을 한 방에 개혁해줄 강력한 지배자를 원했을 뿐이다. 삶의 확실성만 부여해줄 수 있다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 그것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이 만개한 심리적 배경이었다. 





내가 경탄하는건 이미 1941년 이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이 완벽히 분석됐다는 것이고 내가 슬픈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가 여전히 자유로부터 도피중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그 땐 단지 유럽인들이 약간 맛이 갔었던 것 뿐이라고, 이제는 히틀러 같은 사람은 안나올 거라고, 그리고 우리나라도 아닌 유럽의 현대사를 뭐 그리 진지하게 거론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난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1940년대의 독일인을 닮아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자유를 팔고 싶어하는지 알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군부 독재로부터 자유를 쟁취해온 투쟁의 역사다. 그것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파리 시민만큼,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싸운 미국의 흑인들만큼 치열하고, 또 숭고했다. 그들이 그랬듯 우리도 고귀한 자유를 얻었다. 부상은 급격한 경제 성장이었다. 


초고도 성장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흥청망청 터뜨리는 사이 국가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곳간이 바닥을 드러냈다. 1997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그때 생긴 대량 실업은 10년이 지나서 비정규직과 취업난이라는 고용 불안으로 이어졌고 더딘 임금 임상과 치솟는 부동산 가격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일으켰다. 불안이 커지는 만큼 우리의 소망도 커져갔다. 이 답답한 현실을 한 방에 뒤집어줄 영웅을 기다리는 것. 


독일인들은 히틀러는 선택했고 우리는 '잘 살아 보세'를 노래부르던 시절을 택했다. 우리가 지난 5년과 앞으로의 5년을 책임질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물은 권위주의적 통치와 무력을 앞세운 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지난 5년), 직접적으로 계승한(앞으로 5년) 사람이었다. 


기가찬것도 정도껏 해야 한숨이 나오는 법이다. 





현대인에게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롬의 통찰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무지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그러므로 무지가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온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때때로 회의가 든다. 우리는 정말로 몰라서 이렇게 사는걸까?


깊은 회의와 무력감은 개인을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데, 결국 이 나의 회의와 무력감이 나의 자유를 나의 적에게 파는 날을 오게 만들 것인지, 과연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 인내의 보상은 있는지 없는지, 어쨌거나, 


잘살아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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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4-1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슬픈건 알면서도 그 중력을 벗어 날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 해결책이 있을 까요?

한깨짱 2013-04-16 12:50   좋아요 0 | URL
사는건 원체 이래 고단한 것 같습니다. 아직 젊어서 이걸 몇 십년을 더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케인즈 & 하이에크 :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 지식인마을 27
박종현 지음 / 김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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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평생 그 답을 얻지 못할 의문이 하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자신을 더 가난하게 만들려는 정치인들에게 표를 주는걸까?


그것은 뿌리 깊은 지역주의 때문일까? 아니면 항간에서 말하듯 젊은 세대에 대한 기성 세대의 복수인걸까? 가장 쉬운 대답은 대중의 무지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에겐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싶은 변태적 마음이 본성적으로 내재되어 있어, 가장 큰 고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 5년 동안 안정적으로 고통을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 그 본성이 어김없이 발현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유야 어찌됐든 세계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쓰나미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에게도 분명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 대단한 벌이가 아니더라도 자식을 셋이나 낳아 기를 수 있었고, 열심히만 하면 집이랑 자동차를 가질 수 있던 시절말이다. 무슨 선사시대 얘길 하는게 아니다. 내가 어릴때만 해도 누구나 그런 꿈을 꿨다. 그런데 그런 시절에 자란 내가 이제 성인이되어 가정을 꾸리려 하니, 내 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어버린 걸까?







존 메이너드 케인즈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는 그 날 뉴욕 증시는 폭락을 시작한다. 대공황의 시작. 기업이 파산의 파도를 치자 기업에게 돈을 빌려줬던 금융이 무너지고 이렇게 모든 산업이 무너지자 실업률이 급증한다. 실업률이 급증하니 소비자는 물건을 살 돈이 없고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으니 기업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 이것이 바로 불황의 악순환이다. 그리고 이 악순환은 불황이 가진 근본적 모순으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불황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맨다. 그런데 정부도, 기업도, 개인도 전부 지갑을 닫아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돈은 돌아야 맛이고 돌아야 가치를 갖는 법인데 이렇게 되면 다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다. 불황은 각 경제 주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절약) 사회 전체적으로는 최악(불황) 되버리는 개똥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파산을 눈 앞둔 개인이나 기업에게 지출을 하지 않는다고 그 누가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은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고 그만큼 불안에 취약하다. 그러니 이럴 땐 모든것을 책임질 경제 주체, 국민의 친구, 국민의 울타리, '정부'가 나서야 한다. 


정부가 대규모 국책 사업을(댐, 도로, 항만 등) 벌여 고용을 창출하면 돈이 생긴 국민이 물건을 산다. 내수 경기가 꿈틀꿈틀 살아나면 기업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고용을 재창출하고 재창출된 고용이 내수를 춤추게 한다. 이때쯤 대규모 국책 사업들이 완성되면서 국민 경제에 불을 붙이고 이제 불황은 옛말, 모든 경제 주체가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사회적 자산이 늘어났으니 세수 또한 늘어난다. 정부는 그 동안 졌던 빚을 세금으로 갚고 재정 안정을 이루고 국민과 국가는 영원히 번창한다. 이것이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즈,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가 불황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해낸 방법이다.


그러나 그 승승장구하던 케인즈의 세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많던 싱아가 하나둘 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



경제가 불황이면 인플레이션은 낮게 유지된다.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 물건을 살 수 없고 물건을 사려고 하지 않으니 가격이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아주 괴랄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불황임에도 불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노동 생산성의 향상이 임금 상승율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거치는 동안 노동자들은 강한 교섭력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높은 임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포드 주의의 단순함은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지만 이제 그 단순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포드주의는 너무 단순해서 더 단순해질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기업간 경쟁 격화가 과잉 투자를 불렀다. 투자가 과잉되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많아 임금은 오르고, 수요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서 회사만 많아지니 물건이 남아돈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으면 물건 값이 떨어져야 하지만 기업은 늘어난 비용(인건비, 마케팅 비용 등)을 물건 값에 전가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셋째, 사회 보장 제도에 위기가 닥쳤다. 전후 서방 선진국들은 의료, 연금, 교육, 보건 등의 지출을 크게 늘려 사회 통합에 힘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에 대한 조세 부담이 커져 가뜩이나 떨어진 이윤율이 더 악화되는 실정이었다. 조세 저항을 우려한 정부는 국공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렇게해서 늘어난 재정 적자를 '돈을 찍어' 메꾸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로인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넷째, 1973년 1차 석유 파동이 벌어졌다. 현대 사회는 석유에 의한 석유를 위한 석유의 사회다. 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스태그플레이션은 기존의 케인즈 경제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처음에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를 역시 케인즈식으로 풀기 원했는데, 기업의 수익율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요를 창출한답시고 푼 돈들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격화시켰다. 케인즈가 재앙이 된 것이다. 케인즈가 재앙이 된 시대의 주인공은 당연히 그의 적 '하이에크'였다. 







수 많은 부침의 질곡이 꾸준히 우하향 곡선을 그리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인생의 묘미는 그 막을 수 없던 하락이 거짓말처럼 치솟아오를 때 있다. 수 십년간 서서히 잊혀져 이제는 역사의 퇴물이 된 하이에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 기사회생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시장을 믿었다. 그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시장이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통제될 때 경제 현상을 왜곡하고 결국에는 스태그플레이션같은 '기현상'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세상의 병폐는 그의 이론을 지지했다. 하이에크의 처방전을 가장 철저히 받아들인 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케인즈의 방식으로 경제 대국을 만든 영국과 미국이었다. 특히 영국의 경우 고용 유치 정책, 실업보험 이라는 내환에 석유 파동이라는 외환까지 겹쳐 파운드 투매 바람이 불었고 결국 1976년 IMF 구제 금융을 받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대영제국을 부활시킬 인물을 간절히 바랐고 총파업이 벌어진 1979년 보수당을 선택한다. 그 유명한 '마가릿 대처'의 등장이었다. 







대처는 핸드백에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넣고 다니며 틈날때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시장 경제, 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신봉자였다. 그들이 보기에 시장은 항상 옳았다. 이익이 있으면 자연스레 기업이 생긴다. 기업은 이익을 내기 위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이 과정에서 각 자원의 가격이 합리적으로 결정된다. 모든건 자연스럽게, 자립적으로 일어난다. 누가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하이에크와 대처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철폐하는 것으로 영국 경제를 되살리려 했고 이는 자본 시장의 개방과 노동 시장의 유연성 확보, 공기업 민영화 등의 정책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평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먼 곳을 헤맬 필요가 없다. 1997년 IMF를 경험한 한국은 마가릿 대처의 처방을 철저히 벤치마킹했다. KT, 포스코 같은 우량기업들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갔고 외환은행이 투기 자본에 희생됐다. 실업자가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 정책을 벌인 정부는 쏟아지는 실업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마련하지 못했고 그 대부분은 노숙자가 됐다.

'경제 환란'이라는 공포는 임금 동결, 대규모 해고, 비정규직 채용의 구실로 악용됐고 회사부터 살리고 보자는 임직원들의 숭고한 희생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많은 수출 기업들이 환차익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자본 시장의 개방이었다. 이제 한국 상장사의 주식을 마음대로 사고팔수 있게 된 외국 자본들은 한국 자본 시장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이들은 한국 경제에 조금만 이상한 조짐이 보여도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면 자산은 폭락하고 한국 경제는 또 다시 환란을 맞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15년, 살만해지면 되돌려주겠다던 약속은 전경의 군화발 밑에서 처참하게 으스러졌다. 빈부격차는 우주를 갈랐고 의욕을 잃은 시민은 모든 문제에 무관심으로 화답한채 오로지 로또에만 열광한다. 







신자유주의든, 케인즈식 계획 경제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그 자체가 악한 이론은 없다. 생각해 보라. 하이에크가 정말로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기위해 자유주의 이론을 펼쳤을까? 아니, 모든 이론은 나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가만히 들어보자. 분명 얘도 맞고 쟤도 맞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은 끝나질 않고 선택은 언제나 어렵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 적용된 신자유주의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확실히 이건 하이에크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일이 인간의 의지대로 술술 풀린단 말인가? 문제가 드러났다면 우리는 그것을 냉정히 바라보고 개선해나가야 한다. 


하이에크는 시장을 지나치게 가치중립적으로 생각했다. 시장자체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체가 상황에따라 명암을 극명히 드러내는 우리 인간이라면? 인간은 나약하고 욕심은 끝이없다. 상황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사악해질 준비가 되어있다. 철저한 자기 절제로 욕심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시장을 통제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시장은 결정해야할 일이 너무 많은데다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 그때마다 중론을 모아 방향을 결정한다는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대신 우리는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정치인을 뽑고 대통령을 만든다. 이렇게 구성된 의회와 정부는 큰 방향에따라 시장을 통제하고 '모든 이'에게 유익한 결과를 만들기위해 노력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와 시장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인간의 개선 의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데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날뛰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그 위에 올라 단단히 고삐를 매줘야 한다. 그 위험한 일을 당신은 하기 싫으니까 정부를 시키자는 말이다. 투표가 중요한 이유를 이제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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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5
황석영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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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책은 황석영 선생님의 단편집 '돼지꿈'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125번째 작품이에요. 살아있는 한국 작가로서 민음사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사람은 단 두명 뿐입니다. 바로 이문열과 황석영. 균형을 맞추기 위한 민음사의 배려였겠죠. 이문열이 대표적인 보수 소설가라면 황석영 선생님은 진짜 진보입니다. 문학에서 벌어지는 이념의 충돌! 


혁명은 실패했고 복지는 물건너갔으며 국민은 패배한 현실에서, 앞으로 길이길이 남아 문명을 떨칠 사람은 황석영이 아니라 이문열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문학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문열이 그 잘나빠진 삼국지 '평역'의 성공에 취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죽은 작가'라면 선생님은 끊임없이 신작을 발표하며 여전히, 자신의 문학을 살고 계신 '살아있는 작가'이니까요. 

소설가에게 이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면 응당 자신의 문학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쓰지않으면 죽은 겁니다. 소설가라는건 그런 직업이에요. 






선생님의 소설은 흔히 리얼리즘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리얼리즘! 소설이 흐리멍텅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거나 비판하는 고발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69'에서 평화로운 일상에 냉혹한 현실이 숨어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걸 자각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나는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처럼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런 삶 또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다면, 그래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부와 행복을 분배하는 구조라면, 우리 무력한 개인들은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처럼 살기는 커녕 아무리 애를쓰고 노력해도 그 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60-70년대의 노동자들은 어땠을까요? 어둡고 꽉 막힌 공장에서 하루 18시간씩 미싱기를 돌리다 진폐증에 걸려 죽는 사람들, 안전의식이 전무한 노동 현장에서 날품을 팔다 온 몸이 박살나는 사람들, 헌법이 제정된지 몇 십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주와 소작농의, 종과 머슴의 관계로 착취 당하는 농부들. 소설 '돼지꿈'에는 모두 이런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의 무기력한 일상을 볼 것으로 예상했다면, 천만에요! 소설은 작렬하는 태양 밑에 옴짝달싹 못하고 늘러붙은 찌꺼기 같은 인생을 그리지 않습니다. 소설은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황무지위에 날카롭게 솟은 바위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독불장군같은 기개를 드러냅니다. 주인공들은 화를내고 싸움을하고 마음껏 욕을하죠. 살기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겁니다.

소설은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아주 생생하고 선명합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의 삶 속에 섞여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나를 발견하게되죠. 작품이 이토록 생생한 현실감을 갖는 이유는 이 모든 상황과 인물들이 선생님의 삶을 빚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을 오롯이 살았다는 건 이런 의미에요. 


혹자는 이 리얼함을 천박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요? 중요한건 욕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욕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세상에 살고있는 주제에 혼자만 깔끔한척 점잖빼고 살면 어디 세상이 자기 스스로 변해 준답니까?


시대가 구리구리하면 소설은 거친 황무지위로 내려와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요?


그것은 우리가 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인식의 한계로 인해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평생 묶여서 자란 개가 사슬을 풀어줘도 사슬의 길이 밖 세상을 밟아볼 엄두를 내지 않는것처럼 억압에 길들여진 민중은 어느새 그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수록된 소설 '종노'는 이같은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해줍니다. 주인공 동이 노인은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아온 말 잘듣는 머슴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노예 근성을 참지 못하고 뛰쳐 나가버릴 정도였죠. 지주는 최근들어 소작농들을 더 값싼 일용직 노동자로 대체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예처럼 일만했던 소작농들은 일자리를 지키기위해 큰 소리를 내기 보단 주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묵묵히, 흉흉한 소문을 견뎌냈드랬죠. 사단이 난 그 날도 사람들은 지주 가문의 명절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날이었습니다. 그 날 밤 한 젊은이가 지주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합니다.  


"야, 이 도둑놈들아. 느이들이 무슨 양반이야.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이 망할 놈들아, 느이 맘대루 해 처먹고 쫓아낼라구 그래."(125p, 종노)


소작농들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십니까?


"아니, 저 놈이 뉘집 새끼야."

"혼찌검이 나야 해."

(125p, 종노)


그러고는 여럿이 달려나가 그 젊은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동이 노인은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죠. 


"이놈아....."

"죽을 때까지 남의 종살이나 해 처먹어라!"

(126p, 종노)





가장 효과적인 통치 전략은 피지배계급을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를 좀 더 나은 노예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은 노예는 이제 일반 노예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노예들의 꿈은 더 이상 해방이 아니죠. 그들의 꿈은 좀 더 나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옳은 말을 하는 젊은이를 흠씬 두들겨 패면 지주에대한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대대적인 소작농 정리 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자기만큼은 쫓겨나지 않고 계속해서 소작을 부쳐먹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동이 노인입니까? 아니면 소작농입니까? 우리는 소설을 보며 그들의 노예 근성을 경멸하고 혐오합니다. 그러다 문득 그 소작농들의 모습이, 사실 거울에 비춰진 우리였다는걸 깨닫게 되죠. 리얼리즘 문학이란 이런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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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3-1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좀더 나은 노예가 꿈인 사회라는 제목에 이 글을 읽기전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삶 자체가 무언가의 노예가 되어야 살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옳은 말을 하는 젊은이들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발전하겠지만, 저 같은 기성세대에게는 그런게 당연한게 되버렸습니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 그게 직장에서 몸부쳐 사는이의 운명아닐까요? 사는 것이 어쩌면 고역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살아 갈수 있는 방법은 니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짜라투스트라처럼 거대한 운명이라는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고 싶은 그리고 땅에 두 다리를 꽉 딛고, 눈도 부릅뜨고, 현실을 고민하는 것만이 나 같은 소시민이 해야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입에 바른말만 하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한깨짱 2013-03-15 13:08   좋아요 0 | URL
관심 가져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삶이라는건 결국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을 평생에 걸쳐 배우는 것 같은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삶에 내던져진 인간이 그 삶을 극복하기 위해 죽을때까지 노력한다는게요. 어쩌면 삶이라는거 자체가 우리 스스로 원한게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사는건 정말 어렵고 힘든일인 것 같습니다.

dowan 2013-10-2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진기행의 김승옥 씨도 생존해 계십니다^^...

한깨짱 2013-10-23 13:42   좋아요 0 | URL
오 말씀하신 김에 김승옥님 소설도 다시 탐독해봐야겠네요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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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폭력


개념이 없다라는 말이 욕이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과연 몇 사람이나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을까?


머리 속에 사과를 떠올려 보자. 아마도 이런걸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는 어떤가? 이것은 사과인가?





그렇다면 이건? 이것도 사과인가?





우리가 사과의 '존재'를 사과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과는 더 이상 실재하는 사과가 아니다. 개념은 빨갛고, 파랗고, 시고, 달고, 반들반들하고, 썩었고, 까끌까끌한 사과를 오로지 사과라는 한 단어로 박제해 버린다. 


단순명쾌한 정리? 히틀러가 가스실을 지어 유대인을 학살했듯이 우리는 개념을 지어 존재의 다양성을 말살한다. 이것은, 


폭력이다. 


개념이 대중문화에 침투했을 때


천편일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절대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드라마를 보고 똑같은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똑같이 웃는다. 우리나라엔 수 많은 중산층 가정이 있겠지만 드라마에선 고급 가죽 쇼파를 가진 50평 이상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영화에 나오는 자폐환자는 모두 서번트 증후군이고 지체 장애를 가진 아버지는 모두 아이엠 샘이다. 아침 드라마는 불륜에 불륜에 불륜을 거듭하고 저녁 드라마는 숨겨놨던 재벌의 아들 딸로 흘러 넘친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개념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대량생산된 개념들은 자본의 힘을 뒤에 엎고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사람들은 천편일률에 치를 떨면서도 열심히 그것을 소비한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화 산업의 핵심 전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전략은 똥을 만든 뒤 그것을 맛있는 음식이라고 속여 파는게 아니다. 그들의 전략은, 


우리를 똥개로 만드는 것이다.


개념이 인간관계에 침투했을 때


존재는 결코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얼마나 자주 '한 마디'로 정리하길 강요 받는가? 


당신은 1년에 열 번쯤은 우산을 버스에 놓고 내리고 두 번쯤은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덤벙이지만 친구의 생일을 매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주는 섬세한 사람이다. 그러나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는 덤벙이일 뿐이다. '덤벙이'라는 개념은 당신의 다양성을 모조리 흡수해 버린다. 


객체의 개념화는 인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필수 과정이다.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념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정리가 되고 뇌에서 그것을 지식으로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대인 관계에서 오는 우울증이 개념화된 나와 내가 알고있는 나 사이의 괴리로 인해 생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도대체 나 다운건 뭐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좀 더 농밀하고 다양하며 모순적인 존재다. 하지만 타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고정되고 예측 가능한 기계다. 타인의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쟤 왜 저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가진 본연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타인, 또는 특정 집단이 정의내린 개념으로서 행동하는 때가 생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정신분열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예측 가능한대로 타인이 움직여줄 때, 우리는 그것을 안전한 관계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정반대다. 


'쟤한테 저런 면도 있었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 때 타인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해의 핵심은 의외성을 최대한 많이 발견하는 것이다. 의외성이란 결국 개념을 뚫고 나오는 존재의 다양성이다. 그 다양성을 모두 수집하고 채워 넣을 때 타인은 진짜 존재가 된다. 





개념의 폭력을 고발한다


데리다와 들뢰즈는 모두 개념의 폭력을 고발하고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철학을 통해 추구한 목표는 당연 '이성과 합리'로 대변되는 '근대 사회'의 파괴! 이들의 철학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땅에 이성과 합리가 뿌리 내리기 시작한건 18세기였고 내가 살고있는 지금은 21세기지만, 이성과 합리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세상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는데. 


문득 든 생각인데, 용을 잡으러 떠나는 중세 기사의 모험담은 사실 진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철학자(오해 마시길.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철학자가 될 수 있다)의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붉은 비늘에 불을 내뿜는 날카로운 발톱의 용은 인간 사회의 상징이었던 거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록 더 철저하게 짓밟아버리는 무시무시한 세상. 그리고 우리 철학자들은 모두 기사. 기사가 용을 죽이고 나서 결혼하는 공주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세상의 진실'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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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2-2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는 외로운 섬에 사는 사람들, 그들을 세상은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멀리합니다. 가끔씩 그 섬에 외로운 사람들은 고독합니다. 이런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정말 특이하기는 하죠? 세상에서 볼때는....

한깨짱 2013-02-25 12:5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외로운 사람들끼리는 연대가 더 견고한가 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너무 고립되 소통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걸 경계하며 살아볼까 해요.
 
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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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단편은 돈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팔리는 작가들은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기도 하죠. 장편을 쓰세요. 단편은 팔리지 않아요.


단편은 후킹이 있어야 합니다. 독자의 시선을 확 끌어 당기는 어떤 것. 그러다보니 소설가가 좀 장사꾼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케터처럼 보이기도 하고. 뭐 이런 생각때문에 순수 문학을 추구하는 사람일 수록 단편을 평가절하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 예전부터 단편이 좋았어요. 러시아 문학하면 대개 도스토옙스키를 꼽지만 전 체홉이 더 좋더라고요. 모파상도 장편 '여자의 일생'보단 단편 '비계덩어리'가 진짜 죽였어요. 보르헤스는 거론할 필요도 없죠!


단편집을 손에 들고 있으면 두근두근 기대와 설렘이 부풀어 오릅니다. 짧은 호흡, 기막힌 아이디어, 알싸한 여운. 과연 다음 장에선 어떤 작가가 또 어떤 문장으로 나를 미치게 해줄까. 뷔페는 막상 먹을게 없고 잡탕은 그냥 잡탕으로 그치고 말지만, 문학은 예외입니다. 섞어놓을수록, 더 찐해져요. 







왜 이상 문학상을 집어 들었나? 그건 현재 소설가라고 불리는, 그러니까 나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글쟁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글을 쓰나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황석영이나 김훈 같은 선생님들은, 깊고 깊은 심해에 살거나 저 높은 산꼭대기에 머무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분들이시죠. 


손을 쭉 뻗으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 바로 그 앞에 이 이상 문학상 작품집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건방이라는걸 곧 깨달았지만, 어쨌든 이 책을 선택할 당시에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구매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답니다. 


37회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자선 대표작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포함해 총 10편의 소설이 담겨 있어요. 여기서 이 모든 소설을 일일이 거론할수는 없으니 대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전반적인 감상을 말하려 합니다. 


'침묵의 미래'는 '언어'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언어'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후두암에 걸린 어느 노인의 언어입니다. 이 노인은 소수민족 출신이에요. 중앙 정부는 사라져가는 '말'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소수언어박물관'을 짓고 그 안에 소수민족들을 잡아다 전시물로 박제해 버립니다. 그들은 뜨문뜨문 찾는 방문객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팔며 평생 외롭게 살다 죽습니다. 사멸 직전의 언어를 가진 민족이기에 자기 말을 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던 거에요. 


어느날 주인공은 박물관을 탈출해 고향을 찾습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곳에 고향은 없었어요. 황폐화된 땅덩어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죠. 주인공은 도망칠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산더미처럼 쌓인 외로움을 헤아리다 죽음을 맞습니다. 


주최측은 '침묵의 미래'를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생성과 그 사멸의 과정을 인간 자신의 운명처럼 그려내고 있는 <침묵의 미래>는 서사를 극단적으로 절제하면서 내면적인 사유의 공간을 이야기의 무대 위로 끌어올려놓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작가는 언어 자체가 스스로 그 존재와 가치를 되묻고 그 운명에 대해 질문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사멸이라는 현상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가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p.337)


전 이 소설을 보면서, 이것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본질적 문제를 드러내는 우화라기 보다는, 이 시대에 죽어가는 '문학'의 운명을 쓸쓸히 그려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문학상은 '침묵의 미래'에 나오는 소수언어박물관과 다름아닙니다. 문학상이라도 없다면 과연 '문학'이 우리 사회의 관심을 받는 날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문학상은 팔리지 않는 단편을 싣고 고독한 소설가들을 응원하면서, 그렇게 사멸해가는 문학의 끝을 간신히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밖에 재미있게 본 소설은 '그리네스'라는 자살 유발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별볼일 없는 남자와 그 별볼일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더 별볼일 없는 여자의 삶을 포르보 배우가 된 노인의 삶과 뒤섞어 놓은 '배우가 된 노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네스의 경우 사회의 부도덕을 드러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뻔한 면도 있지만, 그 적나라한 표현이 오히려 보는 이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배우가 된 노인'은 자극적인 소재와 다르게 굉장히 아름다운 문체가 돋보였던 소설입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궁금증을 자아내는 독특한 이야기 전개 탓에 보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던 작품입니다. 

이 밖에 등에서 소나무가 자라는 염승숙의 '습', 돈에 울고 돈에 웃는 우리의 처참한 자화상을 그려낸 김이설의 '흉몽',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독자를 몽롱한 안개 속으로 끌어들이는 편혜영의 '밤의 마침'도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처음 책을 사들었을 땐, '아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다'하는 패기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모두 읽고, 키보드 앞에 앉아, 아무것도 씌여 있지 않은 망망한 컴퓨터 화면을  봤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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