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읽지 마세요! 스포일러 한 가득!


워너 브라더스가 야심만만 '맨 오브 스틸'을 내놓으면서 감독도 아닌 제작자의 이름을 전면에 걸고 홍보를 퍼부은 이유는, 그가 인셉션과 다크나이트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이기 때문이다. 놀란은 Warner의 구세주 Jesus Christ!


그래서 이 영화가 잘 됐느냐? 변명을 좀 하자. 3부작으로 기획된 대작 치고 1편이 끝내줬던 적 있나? 반지의 제왕, 배트맨, 호빗! 매트릭스는 예외로 하자. 그 영화는 원래 3부작이 아니었다. 1편이 신화가 될 조짐이 보이자 트릴로지로 재기획된 것이다. 


트릴로지의 1편은 해야할 숙제가 참 많다. 배경 이야기도 구구절절, 캐릭터도 하나하나. 모든 설명을 다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1편은 오! 이게 뭐지? 정도의 반응만 이끌어내면 성공이다. 진짜 신화는 2편 부터니까. 







그런 면에서 '맨 오브 스틸'은 완전히 성공이다. 사실 '슈퍼맨 리터즈(2006)'가 브라이언 싱어에게 고난을 받으사 혹평에 못 박혀 죽을 때만 하더라도 이 시리즈가 다시 나올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죽은 지 7년 만에 망한 영화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니,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기적이요, 모두 일어나 칭송하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빨간 팬티를 입은 외계인의 리얼리티


타이즈에 빨간 팬티만 입고 날아다니는 외계인의 이야기가 기를 쓰고 리얼리티를 붙잡으려 하니, 내겐 그 모습이 참 딱해 보이기도 했다. 슈퍼 히어로가 사는 하늘의 세상을 굳이 땅으로 끌고와 못질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이 남자에겐 자비가 없다. 결코 에둘러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는 안절부절 노파심을 부리며 시시콜콜 설명을 늘어 놓는다. 


첫째, 외계인이 왜 알파벳을 사용하는가? 사실 최초의 원작에선 S가 Superman을 뜻했었다. 그럴만한게, 이 옷을 만든 사람이 슈퍼맨의 양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미국인이 알파벳을 쓰는건 당연하지! 자기 아들의 옷에 외계어를 쓰는 지구인이 어디있겠는가? 물론 시간이 흘러 원작 만화의 설정도 좀 더 세련되게 변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변화된 설정이 자신의 리얼리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슈퍼맨의 고향별 크립톤에선 S가 희망을 뜻한다. 그것은 크립톤어 또는 '엘' 가문의 엠블렘인 것이다. 




조드와 파오라의 가문을 상징하는 엠블렘




둘째, 외계인은 왜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다니는가? 맨 오브 스틸을 통해 슈퍼맨의 쫄쫄이가 사실은 크립톤 전사들의 전투복임이 밝혀진다. 굳이 따지자면 크립톤 전사들이 갑옷 아래 받쳐 입는 활동성 내의! 계층간 구분이 확실한 크립톤인 답게 그들은 전투복 가슴팍에 가문의 엠블렘을 달고 전투에 임한다. 더러운 부르주아 놈들! 다행인건 이 외계의 부르주아들이 타이즈 위에 팬티를 겹쳐 입는 습관을 버렸다는 것이다. 21세기 패션의 관점에서 볼 때 메이커 Tag도 안달린 팬티를 옷 밖에 꺼내 입는건 분명한 오버 센스. 원작 파괴자 크리스토퍼 놀란을 찬양하라!




다 같이 입어요 순면 100% 에어에어 에어메리?




셋째, 슈퍼맨은 지구에서만 슈퍼맨이다. 그의 힘을 보장하는 건 세 가지로 요약된다. 태양, 지구의 중력, 지구의 대기 성분. 슈퍼맨은 태양빛을 흡수해 강한 신체를 만들었고, 지구의 약한 중력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 다니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구의 공기를 들이마실 때만 강철의 남자가 된다. 이런 설정은 영화 초반 그토록 인간적인 액션을 보여준 조드 군단이 왜 지구에서 슈퍼맨이 되는지 설명해 준다. 


넷째, 영화의 Look&Feel. 내가 이 영화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로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3편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 잭 스나이더의 때깔은 화면 위에 색색의 셀로판지를 댄 것처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면이 있다. 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면은 매우 사실적이다. 이 점에서 '맨 오브 스틸'은 정확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면을 계승하고 있다. 






이게 바로 잭 스나이더의 때깔이라면, (위로부터 300, 써커 펀치, 왓치맨)





이게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때깔(위로부터 다크나이트, 인셉션, 맨 오브 스틸).


다섯째, 슈퍼맨이 초음속으로 날아간다는 걸 과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종일관 똥꾸멍에 소닉붐을 넣어 준다. 참 대단한 아저씨야!




슈퍼맨이 날아갈 땐 늘 우산 모양의 구름과 '뻥'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물체가 초음속으로 이동할 때 먼저 출발한 소리와 만나면서 압축된 공기가... 젠장!




이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


'맨 오브 스틸'은 확실히 외계신들과 댄스 파티를 벌이는 MARVEL의 영화와 그 지향점이 다르다. 놀란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언제나 선악을 고민한다. 그는 영화의 무게를 위해 주인공들의 발목에 철학적 메시지를 다는데, 이 때문에 난 단 한 번도 그의 영화에서 폭발하는 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빌 딩 숲 사이를, 아이언맨이 하늘을 날때 지르는 환호 같은 것 말이다. 가끔은 놀란이 영화가 아니라 도덕 강좌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놀란은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놀란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미간에 주름을 갖는다




더 큰 문제는 영화가 완전히 리듬을 잃었다는 것이다. 보통의 영웅 서사시의 기승전결이라 함은 주인공이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성장, 중요한 순간에 각성해 악당을 물리치는 것인데 클라크 켄트는 느닷없이 아버지의 우주선을 찾아내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비약적 감정 변화를 보여준다.


이제 영화는 전반부의 지루함을 만회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폭풍우처럼 쏟아내는데, 이게 바로 '맨 오브 스틸' 최고의 비극이다. 고강도 스펙타클이 연신 스크린을 폭파 시키지만 그것들이 너무 촘촘하게 배열된 탓에 관객들은 빠르게 적응하고 만다. 개별 씬으로 놓고 보면 액션 역사에 남을만큼 대단한게 사실이지만, 지속적인 충격으로 이미 역치에 다다른 관객의 감정은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고도, 땅 전체를 들었다 놓는 기계 앞에서도 그저 무감각으로 반응할 뿐이다. 만회를 위한 고군분투가 무색해 지는 순간이다.


장담하건데 '맨 오브 스틸'을 본 관객들 중 상당수는 엄청난 액션 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좀 아쉬웠다고 느낄 것이다. 이게 바로 허리가 없는 영화의 전형적 특징이다. 




슈퍼맨, Jesus Christ Superstar!


예수는 동정녀의 잉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칼엘은 10만년 만에 처음으로 자연생식으로 태어난 클립톤 인이다. 예수는 33세에 처음으로 영적 활동을 시작했다. 클라크 켄트는 33세에 처음으로 슈퍼맨 활동을 시작한다. 예수는 보통 사람들의 억압을 받는다. 칼엘의 엄마 라라는 지구인들이 슈퍼맨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본디오 빌라도에게 팔아 넘긴다. 지구인들은 슈퍼맨을 잡아 조드에게 바친다. 예수는 죽은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인류를 구원한다. 칼엘은 조드의 우주선에서 탈출해 지구인들을 구한다. 


강철의 남자는 동정녀에게서 나와 33세에 활동을 시작했고 사람들의 억압을 받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만 사흘만에 부활해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따라한다. 슈퍼맨을 예수와 동일시 하려는 제작진의 노력은 눈물 겨운데, 







굳이 이런 포즈를 강요 하거나







이런 포스터를 만들거나







깨알같이 플라톤을 넣어 주기까지 한다. 마지막 사진에 보충 설명을 좀 하면, 플라톤이 누군가? 이데아를 얘기한 사람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데아가 뭔가? 그것은 궁극적 본질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는 슈퍼맨이 인간 세계를 초월한 궁극적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의 역할이 인간에게 이상을(Idea) 제공하는 것임을 뜻한다. 우리는 그런 존재에 대개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유가 뭘까?


가장 미국적인 캐릭터 슈퍼맨이 전 인류를 구원할 예수와 동급이라는 주장? 기분이 너무 더러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진짜 슈퍼 히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니 슈퍼맨 따위 안녕 하고 예수 믿어 천국 갑시다! 그럴리 없지. 내 보기에 이건 DC 코믹스의 넘치는 자신감이다.


슈퍼맨 시리즈를 돌이켜 보자. 슈퍼맨4는 '역사상 최악의 속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지옥에 잠들어 있었다.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 리턴즈'는 클라크 켄트의 지옥 생활을 7년 더 연장시켰다. 하지만 마침내 '맨 오브 스틸'이 나온다. 자, 믿음이 있는 자들은 들으라!


슈퍼맨이 망한 영화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매 천국에 올라 크리스토퍼 놀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MARVEL의 영화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지금 DC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MARVEL의 히어로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입장 수익 10억 달러를 넘긴 영화는 Avengers(2012)가 유일하다(솔직히 말하면 최근에 아이언맨3가 10억 달러를 넘겼음...). 하지만 DC는 불과 5년 동안 배트맨 시리즈 두 편만으로 20억 달러를 훌쩍 넘겨 버렸다. 길고 길었던 DC의 겨울은 마침내 끝.


들어보라! 예수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듯이, DC 코믹스 최강의 히어로가 이렇게 부활했다. 나는 슈퍼 히어로계의 예수요 영원불멸의 부활자이니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맨 오브 스틸 2'를 주겠노라!


아멘.




남은 이야기들


후속작의 빌런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맨 오브 스틸' 중간 중간에 Lex Corp.의 로고들이 보인다. 렉스 루터는 '슈퍼맨 리턴즈'에도 나온 바 있는 악당으로 배트맨의 부르스 웨인과 전 지구의 부를 양분하고 있는 초거대 기업의 사장이다. 보통 인간이지만 뛰어난 사업가이자 정치가로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까지 해먹는 인물. 어쩌면 렉스 루터가 대통령이 되 언론과 여론의 힘으로 슈퍼맨을 압박하는게 '맨 오브 스틸 2'의 시나리오인지도 모르겠다.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대중의 적이 되듯이. 




렉스 콥 소유의 건물. 렉스 콥 소유의 정유차도 나온다는데 그 이미지는 도저히 못 찾겠다. 




'맨 오브 스틸'은 '매트릭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몇몇 나오는데, 우선 편집장 역의 로렌스 피시번과 스완윅 장군역의 헤리 J. 레닉스다. 




스완윅 장군과 편집장 페리 '화이트'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역할마저 매트릭스와 겹쳐지는 면이 있다. 매트릭스에서 로렌스 피시번이 네오(NEO=ONE=절대자=신), 트리니티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처럼 '맨 오브 스틸'에서는 로리스 레인, 슈퍼맨과 함께 동일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슈퍼맨=예수의 공식이 더욱 공고히 된다. 


반면 헤리 J. 레닉스는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믿지 않는 사령관으로 나오는데 이번에도 슈퍼맨을 억압하는 자의 대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그가 보낸 무인 정찰기를 파괴하는 슈퍼맨을 보라!


이 밖에도 크립톤인의 챔버는 매트릭스의 인간 배양소와 정말 닮았다.







슈퍼맨이 우주로 나갔을 때 나오는 인공위성이 Wayne Enterprise의 소유라는 얘기를 듣고 검색해 보았으나 이미지를 찾지는 못했다. 소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워너가 배트맨의 성공 이후 숨고르기도 하기 전에 '맨 오브 스틸'을 개봉한 이유는 Justice League의 제작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Justice League는 슈퍼맨, 배트맨, 플래시, 원더우먼, 아쿠아맨, 그린 애로우, 그린 랜턴이 등장하는 DC 코믹스 판 Avengers이기 때문에 맨 오브 스틸 곳곳에 이들의 흔적을 남겨 두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저스티스 리그를 위해선 쫄딱 망해버린 그린 랜턴을 비롯 수 많은 암초(그린 애로우는 드라마로 쫄딱 망함)를 제거해야 하니 1-2년 내에 제작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익숙한 영웅 플래시와 원더우맨. 그린 랜턴, 아쿠아맨은...




이 영화가 나온다고 해도 그닥 기대가 되진 않는다. 나에겐 크리스쳔 베일과 헨리 카일이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진 채 진지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코미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유머가 부족해. 게다가 캐릭터들이 너무 아방가르드하잖아. 생선 영웅과 녹색 타이즈 성애자(그린 랜턴)라니...


이로써 할 얘기는 거의 다 한 것 같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13-06-1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어요. 이번에도 빵빵 웃으면서 봤습니다.
저는 영화를 중간까지 무척 재밌게 봤는데 후반에 지나치게 많이 부수는 게 막 피곤하더라구요.
게다가 감기로 골골 대느라 자꾸 기침하는데 영화가 안 끝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를...;;;;;

한깨짱 2013-06-19 16:11   좋아요 0 | URL
저도 중반까지 엄청 기대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준비를 마쳤는데 후반부가... 진짜 돈은 엄청 많이 들인 것 같아요. 아이맥스에서 한 번 더 보고 싶긴 한데 모든 아이맥스 극장이 3D로 상영을 해서 정말 짜증입니다.

saint236 2013-06-19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후반에는 감흥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건물이 두개만 덜 부서졌어도...마지막은 매트릭스를 보는 듯한...

한깨짱 2013-06-19 16:12   좋아요 0 | URL
요상하게 매트릭스 필이 많이 섞여 있었죠. 잭 스나이더의 영향 탓인지... 대인 전투씬은 획기적으로 잘 만든 것 같고 건물 폭파 씬도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그런데도 요상하게 감흥이 없단 말이죠.

2018-12-06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8-12-06 13:37   좋아요 0 | URL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네요. 긴 글을 읽는 게 더 힘들지만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만은 그렇다고 너무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기엔 시큼시큼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그런데 생각이 없다는게 도대체 뭐야? 거기엔 두 가지 상태가 존재한다. 

첫째, 무념(無念)


하지만 이런 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상태 아닐까? 무념이란 깊은 명상이나 오랜 시간 도를 구해온 사람이나 얻을 수 있는 극강의 정신적 체험이니까, 오히려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칭찬해 줘야지. 


둘째, 산만(散漫)


생각이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생각이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다. 어떤 생각도 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휙휙 지나가 버리는 상태. 문제는 바로 이거다. 쏟아지는 정보에 흠뻑 젖어 더 이상 사색도, 깊은 사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우리는 그저 화려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속에서 살아가는 거야. 불이 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산만함'하면 떠오르는 철학자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언가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태어난 시절은 신문이 눈을 뜬지 이미 반 세기가 지났을 때였고 한창 젊은 시절이 되자 영화와 라디오가 출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른바 매스미디어의 시대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것들은 벌처럼 날아와 바람처럼 사라졌다. 벤야민은 기술 진보의 거인이 한 발을 내딛고 나면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수 많은 영상과 텍스트에 적응하는 방법은 '산만함'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인의 지각 특성은 산만함이 될 것이다'


벤야민은 예언자가 됐다.


재밌는건 과학의 속도가 철학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인간의 뇌는 고착화 이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머제니치를 비롯해 수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한 결과 뇌는 가소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인의 뇌는 단순히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잘 변한다. 또는 머제니치가 말했듯이 대대적으로 변한다.'(p. 50)


흔히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을 하지 않나. 여기에 하나 덧 붙이자면, 세상은 결국 개별 인생이 맺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생각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이것은 기술의 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째서 그토록 광범위한지, 왜 기술에의해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힌트가 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기술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변화된 사고다. 기술은 사고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고가 또 다시 기술의 진보를 촉진하는 순환 구조. 상전벽해, 환골탈태는 두 변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극대화 된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가 왔다. 하이퍼 텍스트는 현대인의 산만함에서 힌트를 얻은 코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우리의 지각 특성을 그대로 닮아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정보와 정보 사이를 널뛰기 하며 빠르게 이동한다. 중요 기사를 읽는 중에도 우측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눈이 가고 다 읽기도 전에 관련 기사로 넘어가며 수 없이 깜빡대며 유인하는 배너 광고를 클릭하고 만다. 이제 하이퍼 텍스트는 단순히 텍스트만의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 비디오같은 멀티 미디어를 직접 품거나 링크를 제공하고 링크로 이동한 순간 수 없이 많은 관련 미디어들이 물샐틈 없는 포위를 마친다.


인간이 정보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알게 되면 이 산만함이 지식 형성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있다. 뇌의 기억 구조는 크게 작업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뉜다. 작업 기억은 실시간으로 입수되는 정보를 잠시 저장해 두는 역할을 하는데 이 정보는 긴 사색을 통해 점차 장기 기억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에서 우리 뇌는 새 정보를 기존에 갖고 있던 정보들과 통합하면서 이른바 '스키마'라고 부르는 거대한 배경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작업 기억의 용량은 매우 작다. 정보가 한 방울 한 방울 똑똑 떨어질 땐 그것을 음미해 장기 기억으로 옮길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만 콸콸콸 쏟아지는 정보 앞에선 아주 짧은 시간만이 주어질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정보를 보고 살면서도 결코 똑똑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의 예능 프로는 우리의 산만함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된다. 요즘 예능은 수 십대의 카메라가 출연자를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이렇게 생산된 막대한 컷들은 전광석화처럼 뿌려진다. 후다다닥 지나는 컷들 위로 쉴새없이 자막이 흐르고 효과음과 애니메이션이 추가된다. 이 산만한 시청자를 잡아 두기 위해선 그들의 작업 기억에 들어있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갈아줘야 한다. 


벤야민은 우리가 산만함을 배움으로써 정보의 홍수에 적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적응이라는 말은 더 나은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다. 현대인이 산만함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그 적응이 희망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더 천천히 읽고 더 깊이 생각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은 행동을 지배한다.


어쩌면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산만함은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산만함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doddony 2014-12-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네요. 모든 연결을 끊고 저만의 동굴에 틀어박힐 시간...

한깨짱 2014-12-30 13:37   좋아요 0 | URL
면벽수련이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됐으면 좋겠어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렇게 대단한 책은 난생 처음 읽어 본다. 김영사는 '지식인 마을' 시리즈 이후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낸 게 분명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선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가 아닌 이상 이름을 얻기 쉽지 않지만 이 남자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소크라테스와 맞먹는 명성을 거머쥐었다. 철학이 빈약한 이 나라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인기를 끌기 시작한건 EBS 방송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는 마이클 센델의 정치 철학 강의는 비가 오면 건물이 통째로 잠기기도 하는 열악한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한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 전파에 노출된 적이 있다. 샌델의 강의는 끊임없는 질의 응답으로 진행되는데,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하버드생 답게 자신의 주장을 똑똑히 전달하지만 이어지는 샌델의 질문에 결국 딜레마 상황에 빠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게다가 그는 언제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예시로 우리를 몰아 세운다. 우리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건 교수의 권위나 지식의 무게에 짓눌려서가 아니다. 'To be, or not to be' 딜레마는 구조의 문제고 마이클 샌델은 그 구조를 완벽하게 설계한다. 







삶은 수 많은 행위가 축적되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인다. 그리고 행위란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근거로 행해진다. 쉽게 말해 개가 똥을 먹는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 기준을 통하지 않는 것은 숨쉬기나 고통 인지같은 반사적 행동이거나 행위자가 심각한 싸이코패스일 때나 존재 가능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이 대목에서 그 필요성이 입증된다. 

모든 행위엔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있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옳고 그르고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저마다 생긴대로 꼴리는대로 살면 될거 아니냐고. 만약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전 세계 인구로 나눠 똑같이 배급하고 주변에 높다란 울타리를 쳐 서로 상호작용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면 이렇게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면, 우리는 반드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려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우리 사회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세 가지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공리주의. 벤담과 밀로 대변되는 이 사상은 철학이 굶어 죽기 직전인 한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갖고 있는 사상이다. 이유는 그 핵심이 너무 명쾌하다는 건데, 오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 하나로 모든것이 설명될 정도다. 


예를들어 우리 동네에 화장터가 들어선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화장터를 건립해야 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간단한 공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if (주변 동네 사람들의 행복 지수 > 우리 동네 주민들의 불행 지수) = 화장터 건립 

else 화장터 건립 취소


너무나 명쾌하고 깔끔하다. 우리는 논쟁이 격렬할 수록 공리주의의 유혹에 빠져드는데, 그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없이, 언성 높일 필요 없이 그저 다수의 행복이 무엇인가만 따지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단순 명쾌함이 바로 공리주의 최대 약점이다. 뭔가가 극도로 단순하다면 작지만 소중한, 혹은 결코 훼손되서는 안되는 까다로운 가치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어봐야 한다. 


공리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당신이 쿨하게 화장터 건립을 찬성했더라도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싶다면 당신은 다음 사례가 지극히 도덕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해야만 한다. 


당신이 살고있는 마을에 어느 날 신이 내려와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한 아이를 고른다.

2. 이 아이를 지하실에 가둔 뒤 평생 동안 고문을 한다. 

3. 신은 이 아이가 고문을 받는 동안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한다. 


한 아이가 평생동안 받을 고통의 합은 결코 마을 주민 전체 행복의 합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공리주의자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재건에 드는 비용보다 이라크 침략을 통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면 

9.11 테러는 결과적으로 정의로운 일이 될 수 있다.



둘째, 자유! 자유! 자유! 이 논리 또한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린 이 핵심을 초등학교 바른생활을 통해 배운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 추구는 언제나 선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 자유는 언제나 선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 자유를 침해해선 안된다. 근대 사회를 거쳐오면서 자유가 인간의 천부적 권리로 인정되온 탓에 이 주장은 별다른 반박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반박이 존재한다. 


합의된 식인 행위는 과연 옳은 일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내가 내 몸을 어떻게 사용하든 남들이 상관할 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몸을 고기로 제공할 용의가 있고 옆집 사내가 그것을 얌얌 맛있게 먹어줬다면, 자유지상주의자인 우리는 과연 옆집 사내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식인 행위는 주변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자유 추구의 제1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식인 행위를 저지른건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알게된 식인 행위는 비도덕적이란 말인가? 이 같은 주장은 이 논쟁의 본질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가라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1785년, 이 의심에 답을 내려주기 위해 임마누엘 칸트가 등장한다.







칸트가 생각한 자유는 확실히 까다롭고 어려운 면이 있지만 대충 '정언명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언'이라는 말은 조건이 없으며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정언명령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다른 어떤 동기도 포함하지 않은 명령"이다. 칸트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려면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언명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명령하는가?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명령한다. 인간은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도구의 근본적 차이이며 인간이 존엄한 이유이기도 하다. 


앞의 예로 돌아가보자. 나와 옆집 사내가 식인 행위에 동의한 것은 맞지만 그건 자유로운 행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존재를 고기로 제공함으로써 나를 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주장에도 반박은 존재한다. 게다가 마이클 샌델은 자유만으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유지상주의는 개개인에게 도덕 지침을 제공하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무력하다. 우리가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왜 소수민족우대정책을 실시해야 하는가? 왜 독거 노인을 돌봐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을 돕든 말든 소수민족을 우대하든 말든 독거 노인을 돕든 말든,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자유의 원칙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중립, 중립, 중립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가르는 마지막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263p)


하지만 누가 마땅히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여기 최신형 스마트폰이 있다고 하자. 이 스마트폰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굴까? 전화나 SMS만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이 스마트폰을 주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 이유는 우리가 스마트폰의 목적을 그것이 가진 다양한 기능을 파악하고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받아 마땅한 사람이란 그 재화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화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목적을 가장 잘 발휘할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합의된 식인 행위는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내가 가진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해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지 않고 공동선에 이바지하기위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사회가 임의적으로 만든 가치를 대의로 포장해 개인을 억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결함이 있어 보인다. 예를들어 앞에서 언급한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나라에선 매일 아침을 국민교육헌장 낭독으로 시작해 국기에 대한 맹세로 일과를 마감해야 할 판이다. 이런 생각은 군부독재 시대의 한국에서나 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매우 명확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의 정의론은 가치 판단이라는 애매한 비난을 피해 점잖은 척 중립의 뒤에 서는 비겁함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 동성혼 논쟁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에 찬성했을 때와 반대했을 때의 이득을 따지기 위해 되지도 않는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고, 자유주의자들은 동성혼은 옳은 일도 그른 일도 아니니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따라 결혼의 목적을 '출산'으로 정의한다면 동성혼에 반대할 강력한 근거를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이 위대한 점은 그것이 어떤 미묘한 사안을 맞이해서도 언제나 명쾌한 시비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라고 만만히 봐선 안된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 책이 위대한 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닮아있다. 샌델은 여타 지식인들이 그렇듯이 정의에 대한 여러 의견을 구구절절 풀어 놓은 뒤 '자 이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알아서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 보세요.'라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중립을 지키는 일이 교양있고 유식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마땅한 의무라는 환상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치가 난립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시대에 고상한 척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정의론을 매우 강한 어조로 두둔하며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펼쳐나가기위한 구체적인 정치 담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공정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p.361)


그는 우리 시대의 어딘가에 분명 커다란 구멍이 나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옛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친구였고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토론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게 분명하다. 이런걸 보면 그는 영락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는 노인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노파심이 나에겐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저층 주공아파트 78동 203호에 살았을때, 78동 사람들은 101호에 살든 510호에 살든 상관없이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나는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지냈다. 그들은 일 주일에 한 번 반상회를 열어 사는 얘기를 공유했고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다함께 고민했다. 1층 엄마들은 주차장에서 뛰어 노는 모든 아이들을 돌봤고 우리는 다함께 한 집에 몰려 들어가 AFKN에서 하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봤다. 그 동네에서 일어나는 가장 험악한 일은 한창 타다 낡아 버린 자전거를 누군가 훔쳐가는 것 정도였다. 


그 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모두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거의 동일한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견은 생길 수 있었지만 그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불과 20년 만에,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 문제를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


2장 인문학(Humanities) 
Q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Q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3장 예술(Arts) 
Q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Q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


4장 과학(Sciences) 
Q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Q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Q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6장 윤리(Ethics) 
Q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


물론 모든 고등학생들이 다 훌륭한 답안을 내는건 아니겠지.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이것 만큼은 확실하다. 대한민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건, 단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면허증을 땄다는 의미야. 하지만 프랑스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건, 그 사람이 이미 철학자가 됐다는 얘기야. 


'행복을 만들어 주는 책'. 이 책을 지은 사람은 아르튀르 드레퓌스. 20대라고 한다.





사실 이런 책을 읽고 그 순간, 바로, 금방, 번쩍하고 행복을 찾는다면 세상에 걱정할 게 뭐 있겠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이 많겠지만은, 행복이 지극히 소소한 경험에서 온다는걸 아는 사람도, 파랑새는 저 멀리 첩첩 산중이 아니라 내 집 앞 마당에 앉아 있다는걸 아는 사람도, 그래, 이 모든걸 아는 사람도 실제론 행복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좀 너그럽게 봐주자는게 내 생각.


이 책은 150페이지 밖에 안된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그림에 여백, 총 글자수를 긁어 모아 빽빽하게 페이지를 채운다면 30페이지나 될까?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하지만 그 대담함에 허를 찔리고 말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그 침묵 속에서 갑작스럽게 '뜩'하고 튀어나오는 것들이 있다. 거칠게 요동치던 파도들이 고요 속으로 침몰해 가는 느낌. 불교의 선종에서는 이걸 돈오점수라고 부르던가?


행복? 미간을 잔뜩 찌뿌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해석에 허색을 덧붙이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침묵은 메시지고 여백은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아봐.

저자의 말대로 굳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어. 하지만 공원에 나가, 어렵지 않은 책 한권을 읽으며, 나른한 봄 햇살에 스믈스믈 세상 속으로 녹아드는 나를 발견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어. 한권 봤다고 생색내기에도 참 좋은 책이야.


아르튀르 드레퓌스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은 이 리뷰처럼 두서없이 진행된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소설처럼, 잡담과 의미없어 보이는 글들이 릴레이를 이루지. 


나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무리야 무리.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남자라고.


p.s - 이렇게 쉽게 써보긴 처음이다. 나 지금 행복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엔 사실과 가치가있다. 사실은 객관적, 과학적 검증을 통해 참, 거짓을 명확히 내릴 수 있는 것이고 가치는 상황, 문화, 주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변할 수 있는 것. 예컨대 '태양은 항성이다'라는 진술은 사실 판단, '태양은 아름답다'라는건 가치 판단인 것이지. 바쁜 시간에 왜 이런 싱거운 정의를 내리고 있느냐고? 나도 동의해. 하지만 어쩌겠어 앞으로 소개할 이 책이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사실, 가치 판단의 주관성이 완전한 헛소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러니까 사실과 가치에 대한 우리의 지난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거지.







가치 판단의 주관성이 헛소리라는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미국인들이 청국장을 먹는 한국인을 시체를 먹는 좀비라고 매도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산업 문명의 시민들이 아마존의 원시 부족을 야만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굳이 초딩 시절의 도덕 교육을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현대인 대다수는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교양인의 덕목이라 믿는다. 저자 샘 해리스는 문화적 상대성을 존중하는 것이 현대인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완전 헛소리. 참과 거짓의 칼날이 사실을 정확히 자를 수 있듯이 가치 또한 '보편적 옳고 그름'으로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 다시말해 청국장을 먹는 한국인의 음식 문화가 비도덕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무시무시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개소리는 집어쳐!라고 말하기 전에 그 근거를 한 번 들어보는 관용을 베풀어 보자. 


저자가 봤을 때 도덕과 비도덕을 가르는 기준은 행복이다. 어떤 현상이 전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하는가? 기여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그러나 백번 양보해 이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과연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난공불락의 질문을 돌파하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방법은 통계적 추론도 -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통 이러이러한 것에 행복을 느끼더라 - 서구 문명 사회를 기준으로 한 독단적 판단도 아니다.


인간은 왜 행복을 느낄까? 우선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적 사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 뇌는 이 외부 사건을 인지적으로 처리한 뒤 그 결과로 행복 또는 불행의 불을 켜는데,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은 결국 뇌의 상태인 것이고, 이 말은 우리가 현재 뇌의 상태를 관찰할 수만 있다면 인간이 어디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현대의 뇌 과학이 이것을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시간의 문제지 논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첫째 도덕은 결국 인간의 행복에 대한 문제다.

둘째 행복은 뇌의 현재 상태에 다름아니며 뇌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뇌의 상태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셋째 이 말은 결국 어떤 가치가 선하고 악한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가치 판단의 선악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면, 매 선거때마다 누구를 찍어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떤 정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인류 전체의 행복 증진을 위해 보수가 옳은가 진보가 옳은가? 이것은 더 이상 토론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으로 참 거짓을 밝힐 수 있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샘 해리스의 멋진 신세계!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 저자의 주장은 우생학, 유대인 학살, 히틀러 같은 이미지를 떠올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한국인은 청국장이라는 식문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인류 전체의 행복을 저해한 비도덕적 국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영리하게도, 샘 해리스는 이런 애매한 사례 대신 '여자에게 베일을 강요하는 중동 문화' 내지 '여자의 음부를 꼬매는 아프리카의 관습' 등을 예로 들어 가치 판단의 선악 구분이 명확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가 네오 나치스트거나 뇌과학 성애자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선악을 확실히 구분함으로써 인류 전체에 불행을 가져다 주는 명백한 비도덕적 행위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자 한다. 모든것이 뜻대로 이뤄졌을때 뇌과학은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악의 치료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악을 치료한다는 개념은 정말 참신하고 멋진 생각이다. 이것저것 다 떠나 샘 해리스가 가진 이 순수한 열정만큼은 존중해 주고 싶다. 하지만 뇌과학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걸 가감없이 완벽하게 드러내 준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왜 그럴까? 만약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비도덕이라는게 증명됐다면 과연 미국이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까? 샘 해리스의 뇌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신형 폭격기를 이끌고 민간 지역을 공습하는 미국을 향해 '당신의 부도덕함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 뿐이다. 


나는 뇌과학의 불합리함이 아닌 바로 이 무능력함을 토대로 샘 해리스를 거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