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 가로 읽기 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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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가로읽기/주현성/더좋은책]교과서의 배경지식이 되는 인문학~

 

인문학 공부에 시기가 어디 있으랴마는 청소년기야 말로 그 어느 때보다 인문학 공부가 절실한 시점이 아닐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깊은 질문과 이해, 통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도 지나간 인류 스승들의 지혜와 조우할 필요가 있으리라. 사람에 관한 모든 공부가 인문학이겠지만 특별히 인문학이라면 그리스와 세계 신화에서 시작해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 과학과 문화를 말하는 것이리라.

    

신화는 문학과 예술 등 모든 문화의 이야기 원형이다. 인간의 감정을 가진 신들의 희로애락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들의 이야기지만 인간의 본성을 담았기에 의미 있는 이야기 원조들이다. 자연의 현상을 의인화했기에 다소 과장되고 기이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 만큼이나 이해되지 않는 신들의 이야기, 인간의 무의식 세계까지 들여다 본 신화의 중심에는 제우스가 있다.

    

제우스와 그의 가족들 이야기는 너무나 복잡해서 사실 어지러울 정도다. 신들의 가족관계가 불륜과 치정, 존속 상해, 탐욕과 고발, 저주와 보복 등 온갖 악행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번개를 상징하는 신들의 신이다. 하지만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결혼 이후에는 바람기의 신이 된다. 어린 시절,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숨어서 자랐다. 그런 불안한 환경의 영향일까, 아니면 타고난 본성일까. 왕이 된 제우스는 아내의 눈을 피해 지속적으로 바람을 피우며 사건을 만들어 간다.

   

제우스의 할머니로 올라가면 더욱 기가 막히는 상황이 연출된다. 제우스의 할머니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였다. 가이아는 태초의 혼돈의 신인 카오스와 화합해 하늘 가장 높은 곳을 뜻하는 우라노스를 낳았다. 가이아는 아들 우라노스와 결합해 거인 족 신들을 낳았다. 이들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난 아들이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였다.

가이아는 자신이 낳은 괴물 신들이 소란스럽게 싸우자 땅 속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에 가두었고 대지의 신인 가이아는 이들로 인해 늘 복통을 겪게 된다. 결국 가이아는 크로노스로 하여금 낫으로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게 한다. 어미가 되어 아들을 시켜 그 아비의 제일 중요한 부분을 자르게 한 것이다. 성기가 떨어진 바다에서 아프로디테(비너스)가 탄생한다. 이에 아비인 우라노스가 왕좌에서 쫓겨나며 아들인 크로노스를 저주하게 된다.

 

너 역시 자식에게 쫓겨날 것이다.(17)

 

아들과 결혼한 어머니, 아들을 시켜 아버지의 성기를 자르게 한 어머니, 신화는 신화일 뿐인데도, 신화는 상징일 뿐인데도 엽기적인 내용들이 끔직해서 소름 돋는다.

 

왕의 자리가 불안해서 일까. 크로노스는 부인 레아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그 자식을 한 입에 삼켜버리게 된다. 불안했던 레아는 시어머니인 가이아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고 아이는 가이아의 보호아래 산양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된다. 그렇게 자란 제우스는 청년이 되자 자신의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에게 구토제를 먹여 토하게 함으로써 형제들을 구해낸다. 그리고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가두고 제우스와 그 형제들은 올림포스 산으로 가서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제우스는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거인 족 신들마저 타르타로스에 가두게 된다.

    

제우스의 형제들, 부인,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들의 관계가 복잡다단하다. 저 세상 신들의 이야기이기에 망정이지 이 세상의 이야기라면 삼류막장 드라마다. 자연의 현상을 의인화해 신화를 만들었던 고대인들도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인간의 본능을 악하게 본 것일까. 신화의 이야기가 신들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사 희로애락애오욕의 모자이크 조합인 듯 하다.

 

신들의 이야기에는 불과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 풍요와 대지의 신인 데메테르, 제우스의 정실부인 헤라. 제우스가 지혜의 여신이자 아내인 메티스를 삼키고 더욱 지혜로워졌다는 이야기,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흘러간다.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선물 받은 이야기, 신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불을 주었다며 다시 빼앗아간 제우스. 다시 헤파이토스의 대장간에 있던 불을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되고 매일 간이 재생되지만 매일 독수리에게 쪼이는 형벌을 받다가 헤라클레스에게 구출되는 이야기 등이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란 어떤 금기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 정신을 나타낸다고 한다.

 

판도라의 상자. 다재다능하고 아름다운 판도라는 모든 선물을 다 받았다는 뜻이다. 세상에 여자가 없던 시절,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에게 여자를 만들게 한다.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여자인 판도라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여신들은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주게 된다. 아테네는 옷 만드는 기술을, 아프로디테는 매력과 우아함을, 헤르메스는 어떤 남자든지 깜박 넘어가는 말솜씨를 판도라에게 선물한다. 문제는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절대로 열지 말라는 상자를 주면서 불행은 시작된다. 에피메테우스(나중에 생각하는 자)와 결혼한 판도라는 궁금증이 솟아나 제우스가 준 상자를 열게 된다. 얼른 상자를 닫았지만 상자 속의 나쁜 것들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세상에는 미움, 고통과 질투, 질병, 공포가 퍼지게 된다. 상자 안에 남은 건 희망뿐이었다.

 

살다보면 판도라처럼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행동할 때가 있다. 누구라도 호기심이 폭발하면 상자를 열게 되지 않을까. 이제 상자를 몽땅 열어 희망마저 퍼지게 해야 하지 않을까. 희망을 속으로 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떠돌아다니게 한다면 좀 더 희망적인 세상이 되지 않을까.

   

쳐다보면 돌로 변해버리는 메두사의 목을 자르는 페르세우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헤라의 질투와 복수심에 희생된 헤라클레스(헤라의 영광), 악녀의 상징인 메데이아, 아이게우스의 바다(에게 해)가 된 사연, 신과 인간이 싸운 트로이 전쟁 등의 이야기를 읽으며 지명의 유래를 알게 되고 전설적인 역사와 만나게 된다. 자연의 본성에 참을성과 우수한 기억력이 있다면 신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올해의 태풍이 작년의 태풍을 기억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리스 신화의 원조인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한국의 단군 신화와 마고 신화, 중국의 반고 신화와 여와 신화 등의 이야기에서는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생각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신화에서 유래된 표현들이 재미있다.

타인의 기대와 관심이 실제 현실에 영향을 미쳐 결과가 좋아지게 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 자아의 중요성이 과장되어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이상 심리인 나르시시즘, 욕망이 지나쳐 화를 초래한다는 이카로스의 날개, 대담한 방법을 써야 풀 수 있는 어려운 문제를 뜻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아들이 아버지를 경계하고 어머니에 대한 과도한 성적 애착을 나타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

   

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가로 읽기에는 논술, 면접, 수능 등에 도움이 되는 인문 지식을 담았다. 작은 테마로는 그리스와 세계의 신화, 현대 회화, 서양 유럽사, 철학과 과학, 민주주의와 한국 사회가 있다. 참고로, 청소년을 위한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세로 읽기에는 교과 과정을 넘어 선 폭넓은 인문지식을 담았다고 한다.

 

자연의 현상을 의인화한 신화의 이야기에서 사랑과 배신, 시기와 질투, 탐욕과 이기심, 망각과 부주의 등 허점 덩어리인 신들을 보게 된다. 감정적으로 성숙한 신들이었다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신들이었다면 신화를 읽는 재미가 반감되었을까. 자연의 변화무쌍함이 없다면 심심한 세상이 되었을까. 2장에 펼쳐지는 현대 회화, 3장의 서양 유럽사, 4장의 철학과 과학, 5장의 민주주의와 한국 사회가 더욱 끌리는 내용들인데…….

 

삶에 대한 고민을 담은 인문학은 교과 공부의 배경지식이 되기에 청소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어렵지 않고 쉽게 쓴 인문학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삶에 대한 이해, 인생에 대한 고민을 타파하고 싶다면 인류의 스승들에게 고민상담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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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4-11-0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러운 서평 잘 봤어요.

봄덕 2014-11-07 20: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광수의 인문학 비틀기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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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인문학 비틀기/마광수/책읽는귀족] 인문학 마구 비틀어 봐!

 

처음에 마광수의 인문학 비둘기로 읽혔다. 그럴 리가 있나 싶어서 다시 봤더니, ‘마광수의 인문학 비틀기였다. 책을 읽으며 역시 마광수답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는 파트별 부제(거꾸로 보면 어때?, 너도 빠져 봐!, 나만 잘났어!, 망치를 들자!)처럼 인문학을 마구 비틀고 있으니까. 인류의 스승들의 사상을 뒤집어 보고, 돌려 보고, 비틀어 보고, 깨뜨려 보고, 스스로 그 속에 갇히기도 하니까.

 

 

처음에 나오는 철저한 정치만능주의자였던 공자가 시선을 끈다. 이천년이 넘는 세월도 거뜬히 이겨낸 공자의 사상이니까. 왕도정치를 이론적으로 완성시킨 것은 맹자지만 공자도 맹자와 같은 계열이다.

 

자가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충효사상이다. 이는 수직적 복종만을 강요한 봉건윤리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제강점기의 탁월한 역사가인 신채호는 경전들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시킨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오히려 찬양하고 있다. (10)

 

공자의 가르침은 또한 허황된 공리공론으로만 일관하는 주자학(성리학)의 모태 역할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조선왕조는 오직 주자학 일변도의 편협한 이데올로기만 떠받들었기 때문에 속절없이 망할 수밖에 없었다. (14)

 

공자는 정치에서는 ()’, 경제에서는 ()’, 사회에서는 ()’, 문화에서는 ()’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좋으나 문화의 지상목표를 ()’에다 두는 것은, 모든 문화적 창작물은 반드시 도덕적 교훈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어 개성적 변태를 억압하는 역할을 할 우려가 있다. 문화의 발전은 권태 변태 창조의 순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17)

 

마광수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던 공자의 정치사상을 공상적 유토피아즘이다. 공자의 守分安足은 지배계급의 착취와 명령에 묵묵히 따라가는 노예적 삶, 반민주적 발상, 독재 이데올로기다. 공자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계급주의를 옹호한 정치교수 쯤 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란 말은 지배 엘리트들에게만 적용되는 귀족주의적 발언이다. ‘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조선 후기의 예송논쟁에 치우치던 당파 싸움처럼 민생을 걱정하는 정치가 아니다. 3년간의 시묘살이는 후손들에겐 조상 신에 억눌리게 했고, 자식들에겐 비참한 삶을 살게 했다. 공자의 사상은 철저한 여성차별이며 남자에겐 축첩의 자유를 주고, 여자에겐 정절을 강요했기에 조선의 역사는 여자들의 한 맺힌 눈물의 역사다. 지나친 도덕적 교훈은 개성적 변태를 거부하기에 창조적인 창조를 억압할 우려가 있다. 공자가 주장하는 정치만능주의는 경제나 문화를 소홀히 할 수 있다.

 

이전 세대의 예를 살리려던 공자는 철저한 복고주의, 맞다. 혼란에 빠진 춘추전국 이전의 봉건 시대, 황제 중심의 철저한 통제가 가능한 사회를 꿈 꿨으니까.

 

분수를 지켜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공자의 守分安足은 지배계급의 착취와 명령에 묵묵히 따라가는 노예적 삶, 반민주적 발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분수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해서 행복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취했던 패는 이전 시대로의 왕정복고였으니, 계급주의인 것도 맞다. 하지만 계급 없는 사회가 있을까. 지금도 명목상의 계급은 없지만 실질적인 계급은 엄연히 존재하지 않은가. 권력과 부에 의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계급이 더 강력하고 튼튼한 성벽을 쌓고 있지 않은가. 1%를 위한 그들만의 옹벽은 너무 튼튼해 올라가 볼 수도 없고, 들여다 볼 수조차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이야기에 공감하지만 개성적 변태가 문화 창조로 발전하다니. 마광수의 촉은 늘 으로 향해 있고, 결론은 늘 그렇게 흐르나 보다.

 

20인의 세계의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비틀어 본 내용들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거부감이 드는 부분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이 취사선택의 연속이기에 저자의 이야기도 취사선택하면 되겠지. 그래도 기존의 사상가들을 비틀어 본 책을 읽으며 내가 알던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다. 머리가 깨어나는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사상가들의 이야기이기에 끌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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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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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역사, 종이의 문화, 종이의 탄생과 미친 영향들에 대한 이야기가 종이에 대한 소설처럼 읽힌다. 전자책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종이책의 운명, 종이접기, 종이와 예술까지도 다루는 광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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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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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이언 샌섬/반비]종이의 탄생과 종말에 대한 문화사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가 부제다. 제목이나 부제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위로 때문일까. 장중하고 엄숙한 기분으로 펼친 책이다. 엘레지는 비가(悲歌), 슬픔의 시,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시니까.

   

 

 

 

 

 

참고로, 엘레지는 음악에서는 슬픔을 나타내는 악곡의 표제로 많이 쓰이고 있고 문학에서는 애도와 철학적 논고, 죽은 사람의 위로로 구성된 시다. 흔히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계기로 의미와 죽음에 대한 각오 등 작자의 생사관을 토로하는 시를 말한다. 괴테의 로마 엘레지, 밀턴의 리시더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등이 있다.

 

그래도 제목은 너무했다. 엘레지라면 종이가 죽었기에 애도한다는 말인데. 수천 년을 살고 있는 종이의 입장에서 듣는 기분은 어떨까. 물론 존재감이 예전만 못하겠지만 아직은 종이 없는 지구, 종이 없는 인간을 상상할 수 없는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데, 혹시 종이의 운명도 백악기의 공룡처럼 종말이 올까. 아니면 종이가 변형과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남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만감이 교차되는 책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눈으로 종이책을 만진다. 밤에 종이책을 덮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일상이 종이와 함께 하기에 TV 예능 <인간의 조건>처럼 종이 없이 살기가 오늘의 미션이라면 난 얼마나 답답할까. , 휴지, 신문, 편지, 영수증, 통지서, 세금영수증, 달력, 노트, 다이어리, 서류, 지폐 등이 하루 동안 사라진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휴지일 테고, 허공에다 책표지를 넘기듯 헛짓을 하지 않을까. 허공에다 날짜를 적고 시간을 적고 메모를 하지 않을까. 스마트한 기기들이 있지만 몸의 기억은 종이를 더듬을 텐데.

우리는 종이로, 종이를 통해, 종이를 이용해서 상상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받았다. (중략) 이 책은 우리가 왜, 어떻게 종이에 밀착되고 봉합되어 우리 존재 자체가 종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보이고자 한다. (서문 중에서)

 

2000년 전 중국 후한의 환관이었던 채윤이 종이를 발명한 이래로 활자술, 제지술도 급격하게 발전해왔다. 종이를 통한 기록이 자유로워지면서 지식전파 및 교육이 수월해졌다. 지식전파와 교육은 인류발전에 기여했고 그 밑바탕에는 종이의 존재가 있었다.

 

스마트한 최첨단 기기의 등장으로 전자책을 읽는 시대가 되고, 종이 없이도 돈이 오고가고, 종이 없이도 서류가 오고가며, 종이 없이도 모든 예약과 결제가 가능해졌다. 종이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종이의 존재감은 역시 예전 같지 않다. 미래의 종이 운명은 과연 어떨까.

 

저자인 이언 샌섬은 종이란 작가의 취향에 따라 기획된 상상의 박물관이고 모든 중요한 것은 종이에 기록되었기에 종이의 중요성은 영속적이라고 한다.

 

종이는 실체는 보잘것없어도 그 안에 의미를 가득 담는다. 물질이면서 환영이다. 망가지기 쉽지만 영속적이다. (서문에서)

종이를 만들던 방법이 채윤이 만들었던 방법과 별 차이가 없다니, 놀랍다.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나무의 껍질을 벗겨 펄프를 준비하고, 틀이나 망 위에 종이 형태를 만들고, 체로 걸러 형태를 잡으며 건조하고 마무리 한다.

 

책에서는 제지법의 발달, 1799년 로베르의 제지기 발명, 종이와 나무, 종이와 숲, 종이와 지도, 종이와 책, 종이와 돈, 종이와 광고, 종이와 건축. 종이와 예술, 종이와 장난감, 종이와 종이접기, 종이와 정치, 종이와 영화 등에 대한 이야기가 300여 쪽에 걸쳐 펼쳐진다.

 

종이가 대량생산, 사진, 풀 바른 우표, 종이봉투, 종이 접시, 냅킨 등으로 다양하게 변모해 온 과정은 그대로 인류 문명의 역사다.

 

종이에서 시작해 종이의 고향인 숲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묵직해진다. 예전부터 숲은 많은 동화와 신화, 설화가 탄생한 곳이다. 현인들은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숲으로 갔다.

 

나는 제대로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삶에서 본질적인 것만을 마주 대하고, 삶으로부터 배워야만 하는 것을 못 배우지는 않았는지 알기 위해서, 또 죽음을 앞두고야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지 않으려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본문에서)

 

나무에서 뽑은 종이는 친환경적이지만 종이를 만들기 위해, , 광물, 금속, 화석연료의 사용이 불가피하기에 환경오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다. 더구나 지금은 숲이 사라지는 시대다. 종이의 아버지는 나무, 종이의 고향은 숲이기에, 인류 생존을 위해서, 종이의 생존을 위해서 숲을 잘 가꿔야 할 텐데.

 

책과 종이는 오래된 한 쌍이다. 완벽한 결혼이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는 역동적인 하이퍼텍스트에 잠깐 한눈을 팔며 재미를 보긴 했지만, 요즘 전자책이나 독서용 장비들은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종이 책을 닮아간다. 모양, 크기, 느낌, 기능까지도. 신기술을 선도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한 목소리로 전자책은 놀랍고 충격적이게도 개념과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종이 책과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았다. 종이 냄새가 나는 전자책 리더기만 아직 안 나왔을 뿐이다. (본문 중에서)

 

결국 종이는 종이책과 연결되지 않을까. 종이의 힘은 종이 위에 적힌 글의 힘이니까. 글의 파워에 따라 종이의 존재감도 달라진다. 그렇게 종이는 글의 힘에 기대어 자신을 드러낸다. 글이 없는 백지는 무기력하다.

 

지금까지 종이의 묶음인 책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터널이었다. 종이 책은 지식과 정보의 상징, 지혜의 산물로 여겨졌다. 현재는 무거운 종이 책의 자리에 점점 전자책이 비집고 들어온다. 늘어가는 책의 보관에 대한 문제해결책으로 전자책이 제기될 정도다. 미래엔 결국 전자책일까.

    

종이라는 두 글자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신화, 문학, 동서양의 역사, 환경의 문제, 인쇄, 지도, 도서관, 건축, 지폐의 힘 등으로 광대하게 펼쳐진다. 종이의 문화사니까.

 

지금은 종이의 정점일까. 종이의 미래는 무엇일까. 기적 같은 종이의 발명 이래로 값싸고 흔해진 종이가 되었다. 늘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공기 같던 종이가 세상을 하직할 날이 올까. 만약 종이가 사라진다면……. 그래도 제목은 너무했다. 엘레지라니. 아직 두 눈 멀쩡하게 뜨고 살아 있는 종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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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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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정지우/이경]애니메이션에서 상상하는 법 배우기~

 

만화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만화의 간략함과 유머코드를 좋아한다. 만화는 상상을 뛰어넘는 시공의 이동도 가능하지만 표정이 주는 과장법의 미학이 유쾌함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애니메이션은 상상을 자극하고 순수한 동심의 추억을 선물하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즐겨보는 편이다.

    

 

애니메이션과 인문학의 만남이라니, 새로운 만남이다. 애니메이션을 보며 인생을 상상하는 법을 찾는 여정이다.

아주 오랫동안 만화는 저급문화라고 생각했다. 어린이 전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무지막지하게 무너져 버렸다. 무심코 선택해서 본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입관이 완전히 깨졌다고 할까. 애니메이션 세계가 주는 상상의 힘, 생각의 파괴에 유쾌하게 본 영화였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만화의 상상력을 절감했던 영화였고 이후로 만화영화를 더욱 즐겨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애니메이션이 다른 장르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애니메이션은 생기 있는 영감을 주고 생각을 깨어 부수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전형적인 인물, 전형적인 세계관, 전형적인 풍습 등으로 그 시대를 반영하기에 익숙하게, 쉽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

애니메이션은 유치하고 과장되고 자극적인 면도 있지만, 감각적인 면에서는 어떤 장르보다 뛰어나다.

애니메이션은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고 유쾌하기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만화 <동키호테>에 나오는 기사는 왕이나 영주의 존재가 있어야 존재하는 직위였다. 중세 시대의 기사는 개인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존재,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왕이나 영주들에 대한 호위무사이기에 충성심과 용감함이 필요했던 종속된 존재였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속박된 인간에서 개인으로 독립 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해서 자의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근대국가의 존재는 민족정신까지 강조하게 된다. 민족정신은 집단적인 단결을 위해 국가가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애니메이션 <그렌라간>은 근대와 근대성, 근대적 인간형을 잘 담아냈다고 한다고 한다.

 

<그렌라간>이 가장 앞서서 내세우고 있는 가치는 진보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끊임없이 무한한 인간의 가능성, 진화, 진보, 앞으로 나아감, 해방이 긍정된다. (본문 중에서)

 

중세가 종교로 억압받던 암흑의 시대라면 근대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면서 희망을 품던 시대였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파괴와 폭력, 착취와 학살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렌라간>에서 안티스파이럴은 인류의 진보를 부정하는 종족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미래에 우주를 파괴할 것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를 봉인하는 방법을 택한다. 안티스파이럴의 이런 모습은 집단성과 민족성의 표현이다.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새로운 인간성을 구현하게 된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렌라간>의 인물들과 달리 자신의 꿈을 꾸며 자기 존재의 완성을 꿈꾸게 된다. 각자 자신의 꿈을 추구하기에 다른 이들의 다양한 꿈도 인정하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원피스>가 담아내고 있는 현대적 삶을 가리켜 유동적이고 액체적인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마이 규정한 현대사회로, 그는 현 시대를 가리켜 액체 시대라고 이름 지었다. (본문 중에서)

 

근대는 고체의 시대로, 거대하고 단단한 집단에 개인이 귀속되는 시대였다.

소비와 낭비로 이루어진 현대는 물질시대다.

<원피스>에서도 불안하고 고립된 현대인의 맹목적인 소속감 찾기가 계속된다. 자존감을 상실된 현대인들이 외부 기호를 통해 끊임없는 비교를 하는 모습도 있다. 하지만 이들도 외부에 휘둘리면서 자존감은 자꾸만 떨어지게 된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현대인의 문제점을 잘 표출한 작품이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거창한 대의명분도 없고,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도 없는 인간형이다.

사회와 가정의 기대에 부푼 강력한 꿈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현실에 대한 강박증도 없고 자신의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시 된다. 결국 거창한 꿈의 실현이 아닌 소박한 우정을 간직한 삶으로 해피엔딩이 된다.

   

애니메이션은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꿈을 완성하는 모습을 그려 준다.

애니메이션을 보며 상상이 현실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에 대한 물음은 어디서나 통할 것이다.

그러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길을 묻게 된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그리는 상상의 삶을 배우게 된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배우는 인문학이라니, 새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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